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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링카 1권 (18화)
5. 거래 (1)/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사람이 있어.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기억 속에서 지워낼 수 없는 사람이 있어. 내겐 그런 사람이 있어.>

“…독에 중독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폐하.”
“흐음, 독이라… 어떤 독이던가?”
“아직 정확히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몸이 검푸르게 변하고 계속 수면 상태에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인면초의 뿌리에서 채취한 천일독이 아닌가 싶습니다. 중독 된지 대략 천 일만에 죽는다 해서 천일독이라 불리고 있지요.”
백작의 둘째 아들을 진찰하고 돌아온 점잖은 중년 어의 시크는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다소곳이 서서 또박또박 말을 잇고 있었다. 나는 황제의 무릎위에 앉아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가만히 눈을 돌려 백작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어지간히 속이 타는지 온통 근심이 가득한 얼굴. 그에 비해 곁에 앉은 큰아들 루이베르는 별다른 동요없이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그다지 걱정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속마음이야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아무리 봐도 나기의 아비가 한 짓은 아닌 것 같아. 죽일 작정이었다면 일부러 천일씩이나(?) 살 수 있는 독을 쓸 리가 없잖아? 그냥 칼로 푹 찌르면 금방 끝낼 수 있었을테니까. 가만, 그럼 누구지? 누가 그에게 독을 먹인 걸까?’
나는 의심의 눈을 번뜩이며 백작과 그의 큰아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찌됐든 그들은 나기의 아비를 죽인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설령 그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울 때 만큼이나 은밀하고 용의주도하게 움직인다고 할지라도.
“나을 수는 있겠는가?”
“그게… 독기를 눌러놓을 수는 있으나 완전한 해독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직 해독약이 발견되지 않아…”
“저런 딱한 일이 있나.”
황제는 혀를 쯧쯧 차며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금방이라도 울듯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고 루이베르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기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아무 죄없는 녀석을 마치 잡아먹을 듯 사납게 노려보다니… 그렇게 바라보면 누가 겁먹을 줄 알고? 흠칫 놀라 슬며시 나를 바라보는 나기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다음 나는 아예 작정을 하고 입을 열었다.
“어쨌든 나기의 아비가 한 짓은 아닌 것 같군요. 검을 가진 기사가 쓸데없이 독을 쓸 이유는 없을테니까요. 안 그런가요, 백작님?”
“으음…”
“그것은 장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워낙 교활한 놈이라 의심받을 일을 걱정해 일부러 검을 피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루이베르가 눈빛을 번뜩이며 크게 소리쳤다. 나기의 아비가 범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눈치였는데 그런 것 치고는 지나치게 맹목적인 면이 있었다. 마치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은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대체 뭘 믿고 그러는 거지?
“이상하구나. 어째서 그렇게 장담을 하는 게지?”
가만히 듣고 있던 황제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내 편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가 궁금해서 물은 눈치였다.
“듣자니, 그 죽은 자는 도망도 치지 않고 자고 있었다던데… 게다가 굳이 둘째 녀석을 죽일 까닭도 없고…”
“그, 그건… 목격한 자가…”
“아, 맞아. 목격자가 있다고 했어. 그럼 그놈을 데려와 보려므나. 그래야 자세한 사정을 들을 수 있지. 아, 과자도 좀 가져오고.”
윽, 잘 나가다가 왜 거기서 과자를 찾는 거지? 불길한 예감에 나는 자리에서 후딱 일어나 저만치 달아나고만 싶었다. 그러나 킬이 보내는 눈빛 때문에 그대로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힘 닿는데까지 참아봐’ 라고 외치는 듯한 그 처절한 눈빛. 아아, 박복한 내 팔자. 나는 울상이 되어서 삐죽 입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걸 본 황제가 화들짝 놀라더니 눈을 크게 뜨고 하는 말.
“과자는 싫으냐? 그럼 사탕으로 줄까?”
도리도리도리.
누가 이 양반 좀 말려줘어. 배시시 웃는 얼굴로 ‘이쁘다’ 하고 중얼거리는 황제에게서 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이 원수는 킬에게서 톡톡히 받아내고야 말리라고 굳게 다짐을 하는 나였다.
“근데 목걸이는 언제 돌려주실 거지요?”
“으음, 그건…”
목걸이 얘기를 꺼내자 나기가 눈빛을 빛내며 내게 바짝 다가왔다. 그러나 백작은 불안스럽게 말끝을 흐리더니 대답을 구하듯 루이베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설마 루이베르가 목걸이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백작의 시선을 따라 그를 바라보자 그도 고개를 돌려 나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리고 씹어뱉는 듯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방에다 두었으니 하인을 시켜 가져오라 이르겠습니다. 헌데…”
“헌데?”
“꽤 귀한 물건으로 보이던데 저들이 어찌 그것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나 훔친 물건은 아닐지…”
“뭐라?”
도발적인 말에 나는 발끈해서 벌떡 일어섰다.
“그말에 책임을 지실 수 있습니까?”
“책임이라니요? 저는 단지 제 추측을 말한 것 뿐입니다. 게다가 혹시 일이 잘못돼 괜한 오해를 받으실지도 모르기에…”
“예를 들면, 어떤 오해 말입니까?”
“글쎄요. 무엇보다 암살을 시도한 죄인을 두둔하는 이유에 대해 모두들 궁금해 하지 않을까요? 출신도 모르는 천한 녀석을 위해 귀족가의 자제들을 욕보이신 일만 해도 이미 암암리에 비난을 사고 있는…”
“닥쳐라!”
보다 못한 킬이 얼굴을 굳히고 버럭 소리쳤다. 루이베르는 우리가 지난번 나기에게 몰매를 때린 놈들을 잡아들여 자신의 이름을 알아낸 일을 가지고 남몰래 앙심을 품고 있었던 것인가? 그가 한 말은 지독한 혐오를 품고 있었다. 킬이 앞 뒤 안 가리고 버럭 화를 낼만큼.
“이제보니 네놈이 내게 모욕을 주려는 것이 아니냐?”
“오해십니다, 왕야. 그런 것이 아니라…”
“그치지 못할까? 네놈이 간이 부어도 단단히 부은 게로구나. 감히 누구를 상대로 그딴 말을 지껄이는 것이냐? 내 손님을 상하게 한 것으로도 모자라 입을 함부로 놀려 이런 모욕을 주다니…”
“그만! 그만 하거라, 오딜란.”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듯 살기를 내뿜는 킬을 황제가 한손을 들어 말리고 나섰다. 그리곤 서있는 나를 끌어당겨 도로 무릎위에 앉히더니 빙글거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어린 녀석을 상대로 무슨 쓸데없는 짓이냐? 하여튼 그놈의 성질머리는 여전히 더럽다니까. 어찌된 놈이 인정도 없고 귀염성은 더더욱 없는고? 에구, 녀석아. 너는 절대로 네 아비를 닮아서는 안 되느니라. 알겠지?”
“네. 그치만 저도 화났어요.”
“응?!”
“저는 모욕을 받고도 참을 만큼 착하지 않아요. 사실이 밝혀지면… 이 대가는 톡톡히 받아내고 말겁니다.”
루이베르를 똑바로 노려보며 하는 말에 황제는 재미있다는 듯 빙긋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는 모를 것이다. 내가 지금 어떤 복수를 생각하고 있는지를.
“웃지 마세요. 제 자식입니다. 독한 맘을 먹었을 땐 저보다 더 한 녀석이라구요.”
“호오, 그러냐? 그렇다면 과연 이놈은 나를 닮은 게 틀림없구먼. 으허허, 에구 요 이쁜 것 같으니라고. 아가, 과자 하나 먹으련?”
마침 하인이 내온 과자에 손을 가져가며 그가 신나게 떠들었다. 아아,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그 방정맞음에 잔뜩 올랐던 화가 그만 순식간에 사그라 들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히 그가 과자를 집어들기 전에 목격자라는 하인이 들어왔고 덕분에 나는 또다시 어린애처럼 과자를 받아먹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후우, 진정 다행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저는 그때 막 복도를 지나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중이었습니다.”
덥수룩한 갈색 수염을 기르고 있는 중년의 사내는 무릎을 꿇고 앉아 꾀죄죄한 누런 천을 만지작거리며 그렇게 입을 열었다. 마른 몸과 빛바랜 푸른 눈동자가 동시에 바들바들 떨고 있었는데 한곳에 시선을 고정하지 못하는 것이 아무래도 정말 이상하게 보였다.
“크, 큰 도련님께서… 차, 차를 가져오라고 시키셔서… 그때 놈이 황급히 작은 도련님의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네, 분명히 보았습니다요.”
“거짓말! 아비는… 안 갔어.”
“아아, 조용히 하거라. 그래, 그때가 언제라고?”
“그, 그게 그러니까…”
“저녁식사 직후였습니다. 제가 그때 차를 가져오라고 시켰습니다.”
더듬거리는 사내 대신 루이베르가 재빨리 대답했다. 그러자 안 그래도 씩씩 거리고 있던 나기가 말릴새도 없이 발딱 일어나 큰소리로 외쳤다.
“거짓말이야. 아비는 나랑 있었다. 작은 도령 방에 간 적 없다!”
“흥, 누구 앞이라고 큰소리로 떠드는 것이냐? 아직 어린 것이라 살려두었더니 갈수록 거짓말이 느는구나.”
“아니야! 아비는…”
“그만 닥치지 못하겠느냐?”
당장이라도 후려칠 듯 난폭하게 다가서는 루이베르를 보고 나는 얼굴을 붉힌채 바락바락 소리치는 나기를 홱 잡아당겼다. 그랬더니 녀석은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내 팔에 매달려 그 어눌한 말솜씨로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드는 것이었다.
“아니야. 진짜 아니야. 아비는… 흑… 아비는 나랑 잤어. 내가 있었는데…”
“그래. 그랬을 거야. 난 너를 믿는다, 나기야. 그러니까 울지 마. 지금은 한가하게 울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나는 수건을 꺼내 녀석에게 주고 은밀히 킬과 눈빛을 교환했다.
‘난 진실을 알고 싶어, 킬. 아니 반드시 알아야겠어. 그래야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테니까. 마법이든 뭐든 써서 놈에게서 진실이 나오도록 만들어줘.’
‘오냐, 저 새파란 놈이 괘씸해서라도 해주마. 해주고 말고.’
은근히 이를 갈고 있던 그가 루이베르를 향해 보란 듯이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다음 느릿하게 일어나 떨고있는 사내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머리칼을 잡고 고개를 홱 들어올린후 똑바로 눈을 맞추는 것이었다. 사내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묻겠다. 누굴 보았다고?”
“그,그,그… 아무도…”
“잘 안들리는구나. 뭐라고?”
“아,아,아무도… 못 보았습니다.”
“왕야, 어째서 협박을 하시는 겁니까?”
사내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오자 루이베르가 자리에 앉으려다 말고 도로 벌떡 일어나 고함을 내질렀다. 그 모양을 본 트리키 백작은 놀란 듯 숨을 크게 들이키고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이름 높은 기사답게 금새 평정을 되찾아 나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는데 그런 그가 이제까지의 침묵을 깨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앉아라, 루이베르. 폐하께서 계신 자리이다. 함부로 소리를 높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야. 크흠, 왕야께서도 그만 자리에 앉으시지요. 모든 것은 폐하께서 공정히 살피실 것입니다.”
“흐응, 내게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후회하지 않겠나? 자고로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인데 말야.”
“설령 그렇다 해도…”
“그래, 믿을 수밖에 없겠지. 알겠네, 알겠어. 어디 내 뜻대로 한번 해보지.”
백작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황제는 빙글 웃는 표정으로 모두를 한번씩 죽 돌아보았다. 그러다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고있는 하인에게 시선을 주더니 측은하다는 듯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킬에게 눈빛을 보냈다.
‘킬?’
‘걱정마라. 저놈은 거짓말을 못한다. 용안으로 최면을 걸어놨지. 흐흐, 평생 바른 말만 하고 살아야 할걸?’
놈이 사악하게 미소지었다. 황제가 있어 마법을 쓰지는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얼마든지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하인놈 말고 루이베르 한테도 최면을 걸어놓으면 좋았을텐데…
“얘야, 아우가 그리되어 마음이 몹시 아프겠구나?”
황제가 시선을 돌리면서 루이베르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흠칫 놀라더니 이내 서글픈 표정을 하고 비통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착하기만 한 아우가 어쩌다 그리되었는지… 모두가 저놈의 아비 때문입니다. 세상에, 이런 배은망덕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흐음, 그래. 그렇구나. 그런데 말이다, 증거가 없질 않느냐? 그저 하인놈 하나가 방에서 나오는 걸 봤다는 것만으로는 완벽한 증거가 되지 못해. 게다가 이제는 아무것도 못봤다고 말을 바꾸고 있고.”
“그, 그것은… 왕야께서 협박을 하시어…”
“그래? 하지만 상관없다. 저놈은 그가 네 아우를 해치는 모습을 본 것이 아니니까 말이야.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어떤 것도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왜 그리 성급히 그를 죽였느냐 하는 것이다.”
미소 지은 얼굴과 달리 몹시도 날카로운 질문이 흘러나오자 당황한 루이베르는 잠시 말문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떠듬거리며 하는 말.
“그, 그것은… 너무도 슬프고 화가 나 앞 뒤 사정을 재어볼 정신이…”
“자네도 그랬는가?”
“그렇습니다, 폐하. 눈앞에서 자식이 죽었다 생각하니 차마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이다.”
“그랬구먼. 이해가 가네. 이보거라, 너는 정말로 그가 네 둘째 도령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더냐?”
떨고 있는 하인에게 시선을 돌린 황제는 조금 시큰둥한 투로 물었다. 그러자 킬의 최면에 걸린 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네, 보았습니다.”
“호오, 그때가 언제였더냐?”
“저, 점심 식사 전이었습니다. 마침 도련님도 방에서 나오셔서 식사 시간을 알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줄곧 정원을 청소하다가 저녁에야 안으로 들어와 식사를 했습니다. …아아… 저, 정말로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요.”
하인은 자신도 모르게 술술 나오는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납작 엎드려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리고 그 모양을 본 루이베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목격자라는 것도 엉터리가 아닌가. 나는 그것 보라는 듯 은근한 미소를 머금고 루이베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백작을 향해 물었다.
“제가 한 말…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백작님?”
“으음…”
“무슨?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죽음의 숲으로 보내진 녀석은 이미 한번 죽은 것과 같다. 게다가 녀석의 아비는 억울하게 죽었다. 이로써 너희는 나기에게 목숨 두 개를 빚진 것이야. 어떻게 갚을 테냐?”
킬이 통쾌한 표정으로 묻자 루이베르는 얼굴을 창백하게 굳히더니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어진 것은 황제의 서슬 퍼런 물음이었다.
“어째서 거짓말을 하였느냐?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네놈을 이 자리에서 죽여줄 테다.”
“그, 그것은… 큰 도련님께서 시키셔서… 정말입니다요. 저는 시킨 대로 했을 뿐… 살려주십시오. 제발…”
“어, 어째서… 루이야?”
갑작스런 말에 놀란 백작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루이베르를 바라보았다. 목소리마저 떨리는 것이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줄곧 루이베르를 바라보고 있었던 나는 시시각각 변하는 백작의 표정을 슬쩍 돌아본 후 다시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고개를 번쩍 드는 루이베르와 똑바로 눈을 맞추었다.
“너무 좋아하지 마라. 이것이 끝은 아니니… 차앗!”
“헛! 폐하!”
서늘하게 얼굴을 굳혔다고 느낀 순간, 그는 품에서 단검을 꺼내 잡고 내가 있는 쪽으로 달려들었다. 워낙 가까운 거리에 앉아 있었던 데다가 갑작스러운 행동이었던 터라 누구도 앞을 막아설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황제를 지키려는 듯 손을 뻗기만 했을 뿐. 그러나 그가 노리는 것은 황제가 아니었다. 그의 눈동자에 맺혀있는 것은 바로 내 곁에 있는 나기였으니까. 똑바로 눈을 마주보고 있었던 나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튕겨지듯 자리에서 일어나 나기 앞을 막아섰다.
“어림없다!”
“죽어랏! 핫!”
시퍼런 빛을 흘리는 단검이 나를 향해 크게 휘둘러졌다. 그리고 동시에 맹렬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살기가 훅 하고 다가와 잠잠하던 본능을 순식간에 일깨우고 희미한 흥분마저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 나 사실은 네놈을 패주고 싶었어.
나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뛰어들어 단검을 잡고 있는 놈의 손목을 모질게 발로 걷어차 버렸다. 그러자 ‘뚜둑’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이 검을 놓치고 비틀거리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마도 손목이 부러진 것이리라. 하지만 이제 시작인 걸? 나는 더 바짝 다가가 비틀거리는 놈의 머리를 세게 걷어찬 다음 쓰러지기 전에 한손으로 모가지를 움켜쥐고 그대로 저만치 떨어져 있는 벽에 집어 던졌다.
“크헉!”
“루이야!”
벽에 등을 부딪친 놈이 울컥 피를 토해내자 백작은 당장이라도 달려갈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본체만체 하며 용케 정신을 잃지 않고 비틀거리는 놈에게 다가가 뺨을 몇 번 후려친 다음 한손으로 놈의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고 황제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였다. 일어선 백작이 앞 뒤 가리지 않고 맹렬하게 달려온 것은.
“이노옴!”
“헉!”
달려온 백작은 나를 밀어내고 루이베르를 잡아채더니 순식간에 창쪽으로 집어던졌다. 와장창창! 요란하게 유리창이 깨져나가고 무섭게 던져진 루이베르는 밖으로 튕겨져 나가 아래쪽 화단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금새 비틀거리며 일어나 정원 쪽으로 달아나는 것이었다.
“무슨 짓입니까, 백작?”
고개를 홱 돌리며 노려보았지만 백작은 이미 탈진한 듯 서서히 옆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헛, 이보게!”
“백작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