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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링카 1권 (25화)
6. 실마리를 찾아서… (4)/
시녀들의 대답에 황제는 눈에 띄게 어두운 얼굴을 하더니 한숨을 한번 내쉬고 화사한 봄의 정원이 그려진 복도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조금은 빨라진 걸음으로 걸어와 넓은 창을 맞은편에 두고 서있는 하얀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때까지 그는 꼭 잡은 내 손을 계속 놓지 않고 있었는데 문 앞에 멈춰 서면서 마치 다짐을 하듯 움켜쥔 손에 꾹 힘을 주었다. 그러다 영문을 모르고 따라온 나를 돌아보며 히죽 웃더니 한손으로 또 머리를 쓰다듬어 준 다음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창이 넓고 온통 촛불이 가득한 방은 새하얀 휘장과 겨울에 보기 힘든 화사한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래서 방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느낀 것도 향긋한 꽃향기와 그 사이로 희미하게 흐르는 초가 타는 냄새였던 것이다.
나는 밝고 화사한 방안의 풍경을 돌아보면서 잠시 이곳의 주인에 대해 상상해 보았다.
‘어쩌면 아름다운 공주님의 방일지도 몰라.’
병들어 누운 아름다운 공주님을 상상하며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현실은 몹시도 냉정하여 내 기대를 보기 좋게 배신했다.
“나다. 아비가 왔다.”
하얀 휘장이 길게 늘어진 침대위엔 공주님 대신 창백한 얼굴을 한 검은 머리의 중년 사내 하나가 죽은 듯이 혼자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깡마른 몸에 종이처럼 하얀 얼굴을 가진 그 사내를 내려다보며 황제는 더할 수 없이 측은한 표정을 해보였다. 그리고 가식이 아닌 정말로 아픈 듯 눈물까지 글썽이더니 조심스럽게 그 마른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놈이 바로 내 첫째 아들이란다.”
“…!”
“무슨 병에 걸린 건지 늘 이렇게 시름시름 앓는 구나. 이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으려는지…”
그제야 사내의 정체를 깨달은 나는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희끗희끗해진 검은 머리에 가지런하고 반듯한 이목구비를 가지긴 했지만 너무 말라서 쉽게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얼굴… 어찌 보면 세상을 사는 사람답지 않게 너무 깨끗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그가 내 눈엔 마치 인간 세상에 적응하지 못해 서서히 말라죽어가고 있는 천사처럼 보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도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짠해 지기도 하고 또 가엾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왜 하필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인지가 궁금해서 슬며시 황제를 바라보았는데 타이밍이 안 좋았는지 그만 그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왜 이곳으로 데려온 것인지가 궁금하겠지?”
헉, 그걸 어떻게? 이것이야 말로 귀신을 능가하는 눈치가 아니던가.
“네. 안 그래도 찾아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허허, 그랬구나. 그래, 막상 보니 느낌이 어떠하냐?”
“…많이 아파보이긴 하지만 왠지 다정한 분인 것 같은데요?”
“잘 봤구나.”
느낀 대로 솔직하게 말하자 그는 환하게 웃더니 침대 가에 놓여있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조금은 아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말이다… 자식들을 낳아놓기만 했지 곁에 있어 준적은 한번도 없었단다. 오래전 황후가 어린 녀석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자 고만고만한 녀석들을 바로 그 녀석이 떠맡았다. 내가 전쟁터를 누비고 있는 사이 녀석은 혼자서 어린 동생들을 업어 키우고 다 클 때까지 보살펴 하나하나 짝을 찾아 독립시키느라 정작 본인은 혼인마저도 제일 늦게 했지.”
“……”
“다른 자식들에게는 미안할 것도 죄스러울 것도 없는 나다만, 유독 그 녀석에게만은 미안한 것이 많구나. 박복한 놈. 동생들 키우느라 늦은 나이에 어렵사리 혼인해서 간신히 자식을 하나 보았을 때는 잘 됐구나 싶었는데…”
“자식이 있나요?”
“그래. 있었지. 헌데 다섯 해를 못 넘기고 속절없이 제 어미 뒤를 따라가더라. 그 뒤로 종종 정신을 놓더니 결국 이렇게 앓아누웠구나.”
얼굴 가득 측은한 표정을 담은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잠시 후 은근한 말투로 내게 물었다.
“저기 말이다… 아가,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주면 안되겠느냐?”
“네? 하지만 저는…”
“안다, 알아. 그 성질 개떡 같은 오딜란 놈이 가만있지 않을 거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단다. 그러나 아무 걱정하지 말거라. 놈은 내가 직접 설득을 해볼 테니… 다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네 생각이란다.”
그게 아니라 실마리를 찾아 여행을 가야 한다고요. 가출할 생각이었단 말이에요.
이렇게 허망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아까워서 죽을 지경인 나인데 황제는 아예 나를 가두어 두려고 했다. 이미 생각을 굳히고 있는 눈치이면서 겉으론 내 생각이 궁금한 척을 하는 것이다. 대체 진짜 속셈이 뭐지? 킬의 걱정처럼 혹시 나를 인질로 잡아두려는 것 아닐까?
귀족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황제가 그 자식을 인질로 삼아 궁전에 붙잡아 두는 경우를 종종 보아온 나이기 때문에 혹시 이번 경우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해 보았다. 그러나 그런 의문에 대해 황제는 이렇다 할 설명 한마디 없이 그저 이곳에 머물러 달라고만 하는 것이었다.
“부탁이란다. 궁전 안을 마음껏 돌아다녀도 되고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해도 좋단다. 그러니 그 녀석의 곁에 있어다오.”
“하지만 저는 꼭 가봐야 할 곳이 있어요. 이링카도 찾아야 하고…”
“휴우, 내 이런 말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만… 할아비 소원이다. 평생소원이니 그냥 눈 딱 감고 들어다오. 응? 이래도 안 되겠냐?”
펴, 평생소원씩이나 된다굽셔? 아하하, 이 일을 어쩌나.
거절했다간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 나는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덥석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먼저 아버지를 설득하시면 이곳에 있을 게요.”
…라고 말했던 것이다. 왜냐면 킬은 절대 허락할 리가 없을 테니까. 꺄하하하!
내 말에 황제는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해보였다. 그러다 심각한 얼굴로 방안을 왔다 갔다 하더니 결국 어쩔 도리가 없었는지 한숨을 푹 내쉬며 킬을 설득하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혼자 처소를 나가는 것이었다. 난 어떻게 하라고… 그가 나간 후 나는 잠시 눈을 꼭 감고 누운 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래도 탈출(?)을 해야겠다 싶어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몰래 창문을 넘었던 것이다. 음, 이거 왠지 미안해지네?
창문을 넘자 정원으로 연결되어 있는 듯한 아치형의 기둥 사이로 무언가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호기심에 다가가 보았더니 유리로 만든 어마어마한 크기의 온실이 나타났다. 방안의 꽃은 아마도 그곳에서 나온 모양이었다. 유리 온실… 그곳은 내게 그다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장소가 아니다. 그리하여 나는 그곳을 외면한 다음 가능한 멀리 돌아서 태자의 처소를 벗어나려 했다. 그런데…
“찾았다, 파브?”
“헉!”
까, 깜짝이야.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정원을 지나 막 처소를 벗어나려는 나를 순간 누군가가 강하게 잡아챘다. 유리 온실 근처를 빙 돌아 간신히 정원의 끝에 다다른 바로 그 때, 그 끝에 서있는 길쭉한 나무 뒤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슥 나타나더니 꽤 강한 힘으로 내 어깨를 ‘탁’ 잡으며 아는 척을 한 것이다. 나는 뒤쫓아 온 황제인줄 알고 바짝 긴장해서 삐걱거리는 목을 돌려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랬더니 하루 사이 퀭해진 눈을 하고 서있는 시바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별궁 연무장에서부터 뒤따라 왔다. 휴우, 되도록 빨리 결론을 내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아침부터 근처에 숨어 기다리고 있었거든.”
약간 놀라서 반사적으로 물은 말에 시바는 꽤 진지한 투로 대답했다. 그러더니 내가 뭐라고 더 물을 새도 없이 내 손을 잡고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 어디로 가는 거야?”
“일단은 궁전을 벗어나야겠어. 오왕야가 반쯤 정신이 나가서 난동을 부리고 있거든. 조금 있으면 당장 들이닥칠 거야. 한번 정신이 나가면 황제고 뭐고 물불을 안 가리는 사람이니까. 너도 그 사람 성격을 잘 알겠지?”
“으응. 근데 넌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아는 거지?”
“워낙 유명한 일화가 있으니까. 그건… 다음에 얘기해 줄게. 어쨌든 지금은 이곳을 벗어나서 조용한 곳으로 가야해.”
하긴 나도 킬이 화를 내는 건 조금 무섭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러나 솔직히 그보다는 스칼라가 화내는 것이 더 무서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세상이 멸망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행동할 것이 틀림없으니까.
‘휴, 골치 아파. 어쩌다 이렇게 됐지?’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처음부터 킬을 따라나서지 않는 것인데…
나는 약간 후회를 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기 때문에 지금은 이렇게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다.
“잠깐, 같이 데려가야 할 사람이 있어.”
“응? 누구?”
“이링카를 만든 사람과 그것의 주인이 되기로 한 사람.”
어차피 나선 길, 나는 그대로 가출을 단행하기로 결심했다. 킬과 황제는 서로 싸우느라 당분간 날 찾을 생각을 하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아무튼 내 말을 들은 시바는 당장 별궁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근데 어찌된 영문인지 별궁 쪽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우리는 의외로 쉽게 별궁 문 앞에 나란히 서서 서성이고 있는 나기와 카시를 끌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궁전을 벗어나는 일은 더 쉬웠다. 어떻게 벗어났느냐고?
부스럭… 부스럭…
“푸하! 궁전에도 이런 개구멍이 있을 줄은 몰랐어.”
“훗, 이게 다 이 시바님의 업적이시지. 크크크…”
“후아, 재미있다. 아비랑 살던 집에도 이런 구멍이 있었는데…”
“쿨룩쿨룩, 이 망할 꼬마 녀석아! 빨리 엉덩이 치우지 못해?”
바로 그런 것이었다. 필살의 개구멍!
시바가 뚫어놓은 개구멍을 통해 성공리에 궁전의 후문 쪽으로 나온 우리는 제각각 한마디씩 중얼거리며 빠른 속도로 사람들 속으로 섞이기 시작했다. 근데 시바의 직업은 대체 뭐지? 궁전에까지 개구멍을 뚫어 놓을만한 사람이라면 정말로 도둑밖에 없을 것 같은데… 나는 다시 한번 그의 전직에 대해서 진지하게 의심을 해보았다. 그러자 사심 없는 얼굴로 히죽 웃는 그의 얼굴이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도둑놈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책갈피> ― <오해할만한 상황이었다.>
우당탕탕… 쾅!!!
“젠장할!”
“다, 다섯째야, 진정해라. 그런 게 아니라잖아.”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쁘다는 소리를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감히 내 아들내미를 인질로 잡아두려고 들다니… 이거야 말로 그 늙은이가 나 오딜란을 경계하고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아니고 뭐냔 말이야?”
오딜란은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난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시뻘게진 얼굴로 왔다 갔다 하며 아무데나 막 들이박는 모양이 꼭 그랬다. 게다가 그 기운은 어찌나 살벌한지 형제들 중 가장 성질이 불같은 웨인도 차마 나서서 말리지 못하고 있었다.
“망할! 노망난 늙은이 같으니라고!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내 아들내미 당장 내놓지 못해?”
쾅! 우르르릉…
‘큰일이군. 이렇게 화가 났을 땐 아무도 말리지 못하는데…’
그의 주먹질 한방에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회랑의 기둥을 바라보며 웨인은 무겁게 혀를 찼다. 이대로 있다간 회랑은 물론이고 황제의 처소까지 완전히 박살을 내놓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몇 해 전에도 눈이 뒤집어져서 건물 하나를 완전히 날려버리지 않았던가.
“둘째 형님, 형님이 좀 말려보지 그래요?”
“미쳤냐? 이런 때에 잘못 건드리면 뼈도 못 추릴 텐데…”
“그럼 세 째형…”
“나도 아직 죽고 싶지 않다. 이왕이면 좀 더 즐기다 가고 싶다고.”
“휴우, 이럴 땐 큰 형님이 계셔야 하는 건데…”
웨인은 나란히 고개를 젓는 무능한 형제들과 저만치 멀찍이 떨어져서 눈치만 살피고 있는 궁정 기사단을 한번씩 돌아본 다음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병약하고 여린 구석이 많은 큰형님이지만 그는 성난 오딜란을 말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황제가 칼까지 뽑아들고서도 말리지 못했던 것을 그는 부드러운 말 한마디로 진정시켰으니 더 이상 말해 무엇하랴.
그런 의미에서 웨인은 진심으로 큰형님의 존재가 아쉬웠다. 이 자리에 그가 있었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제기랄!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크허험! 나 여기 있다.”
“아?! 폐하!”
그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아이를 납치(?)해 가지고 사라졌었던 황제가 정원 쪽에서 태연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나타나 뻔뻔해 보일만큼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미쳐 날뛰던 오딜란은 물론이고 주위에 늘어서있던 모두가 움직임을 멈추고 일제히 그를 돌아보았다. 근데 아이는 어디로 사라진 거지? 상황이 미묘하고 또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웨인은 더 이상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덥석 묻고 말았던 것이다.
“애는 어쩌고 혼자 오시는 겁니까? 설마 어디 한적한 곳에다 암매장이라도…”
“아, 암매장?!”
“썩을 놈, 말버릇 하고는… 얼라리? 왜 눈을 까뒤집고 그러냐, 오딜란? 나 절대 그런 짓 안 했다?”
“아이는… 제 아들내미는 어디 있습니까?”
“그게 말이다… 휴우, 사실을 알려주기 전에 나랑 잠깐 얘기를 좀 하자꾸나, 오딜란.”
“필요 없습니다. 아들의 안전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어떤 말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진지한 제안임에도 불구하고 오딜란은 가차 없이 말을 끊었다. 그리고 당장 사단이라도 낼 듯한 폼으로 손에 든 칼을 한번 휘두르더니 곧이어 더할 수 없이 싸늘한 투로 물었다.
“제 아들은 어디 있습니까?”
“아이를 내게 맡기지 않겠느냐?”
“어디 있냐고 물었습니다!”
“조건부터 들어 보거라. 결코 네게 손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야.”
“어디 있냐니까!”
쾅! 우르르르…
머리끝까지 화가 난 오딜란이 맨 손으로 세 째 형의 허리둘레보다 몇 배나 더 두툼한 기둥을 박살내며 소리치자 황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잠시 녀석과 눈싸움을 하더니 그 마저도 안 되겠는지 곧 사실을 털어놓았다.
“큰 애의 처소에 있다.”
큰 형님의? 어째서 그곳에 아이를 숨겨둔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황제다운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웨인은 생각했다. 왜냐면 오딜란은 온 궁전을 다 박살내도 그곳만은 절대 건드리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오딜란은 벌써 그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늦을세라 황제와 형제들이 그 뒤를 따랐다. 웨인은 바삐 사라지는 그들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뒤늦게 꽁무니를 따라갔는데 그가 막 큰형님의 처소에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때 아닌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악!”
“헉! 무슨 일이야?”
우당탕탕 소리를 내면서 날아와 발치께를 구르는 시종을 바라보며 묻자 안쪽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숨 막힌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가… 사라졌다.”
“에? 어디로?”
어이없는 투로 되물어 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활짝 열려있는 창문 밖으로 울려 퍼지는 오딜란의 살기 어린 외침이 있었을 뿐이었다.
“당장 기사들을 풀어 찾아내!”
그렇게 해서 그날 궁전에서는 대규모의 수색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루 온종일을 들여 궁전 구석구석을 찾아봐도 아이는 보이지 않았고 흔적이랍시고 발견한 것이 고작 유리 온실을 빙 돌아 나있는 희미한 발자국 하나였다. 그리고 그 즈음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큼직한 발자국이 발견되기도 했다. 즉, 누군가가 아이를 납치 또는 유괴를 했을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목숨을 걸고 잡아오너라. 어떤 놈인지 내 그놈의 낯짝을 좀 보아야겠다.”
오딜란은 둘째 치고 분노한 황제가 드디어 기사단을 풀었다. 그리하여 수천의 기사들이 흔적을 쫓아 빠른 속도로 궁전을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오딜란은 직접 움직일 듯 자신의 기사단을 불러들였다. 그 일련의 소란을 본 웨인은 또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보다 강한 녀석을 흔적도 없이 유괴할 수 있는 놈이라… 대체 누구지?’
하릴없이 궁금증만 더해가는 밤이었다.
6. 실마리를 찾아서… (4)/
시녀들의 대답에 황제는 눈에 띄게 어두운 얼굴을 하더니 한숨을 한번 내쉬고 화사한 봄의 정원이 그려진 복도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조금은 빨라진 걸음으로 걸어와 넓은 창을 맞은편에 두고 서있는 하얀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때까지 그는 꼭 잡은 내 손을 계속 놓지 않고 있었는데 문 앞에 멈춰 서면서 마치 다짐을 하듯 움켜쥔 손에 꾹 힘을 주었다. 그러다 영문을 모르고 따라온 나를 돌아보며 히죽 웃더니 한손으로 또 머리를 쓰다듬어 준 다음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창이 넓고 온통 촛불이 가득한 방은 새하얀 휘장과 겨울에 보기 힘든 화사한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래서 방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느낀 것도 향긋한 꽃향기와 그 사이로 희미하게 흐르는 초가 타는 냄새였던 것이다.
나는 밝고 화사한 방안의 풍경을 돌아보면서 잠시 이곳의 주인에 대해 상상해 보았다.
‘어쩌면 아름다운 공주님의 방일지도 몰라.’
병들어 누운 아름다운 공주님을 상상하며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현실은 몹시도 냉정하여 내 기대를 보기 좋게 배신했다.
“나다. 아비가 왔다.”
하얀 휘장이 길게 늘어진 침대위엔 공주님 대신 창백한 얼굴을 한 검은 머리의 중년 사내 하나가 죽은 듯이 혼자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깡마른 몸에 종이처럼 하얀 얼굴을 가진 그 사내를 내려다보며 황제는 더할 수 없이 측은한 표정을 해보였다. 그리고 가식이 아닌 정말로 아픈 듯 눈물까지 글썽이더니 조심스럽게 그 마른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놈이 바로 내 첫째 아들이란다.”
“…!”
“무슨 병에 걸린 건지 늘 이렇게 시름시름 앓는 구나. 이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으려는지…”
그제야 사내의 정체를 깨달은 나는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희끗희끗해진 검은 머리에 가지런하고 반듯한 이목구비를 가지긴 했지만 너무 말라서 쉽게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얼굴… 어찌 보면 세상을 사는 사람답지 않게 너무 깨끗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그가 내 눈엔 마치 인간 세상에 적응하지 못해 서서히 말라죽어가고 있는 천사처럼 보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도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짠해 지기도 하고 또 가엾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왜 하필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인지가 궁금해서 슬며시 황제를 바라보았는데 타이밍이 안 좋았는지 그만 그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왜 이곳으로 데려온 것인지가 궁금하겠지?”
헉, 그걸 어떻게? 이것이야 말로 귀신을 능가하는 눈치가 아니던가.
“네. 안 그래도 찾아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허허, 그랬구나. 그래, 막상 보니 느낌이 어떠하냐?”
“…많이 아파보이긴 하지만 왠지 다정한 분인 것 같은데요?”
“잘 봤구나.”
느낀 대로 솔직하게 말하자 그는 환하게 웃더니 침대 가에 놓여있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조금은 아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말이다… 자식들을 낳아놓기만 했지 곁에 있어 준적은 한번도 없었단다. 오래전 황후가 어린 녀석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자 고만고만한 녀석들을 바로 그 녀석이 떠맡았다. 내가 전쟁터를 누비고 있는 사이 녀석은 혼자서 어린 동생들을 업어 키우고 다 클 때까지 보살펴 하나하나 짝을 찾아 독립시키느라 정작 본인은 혼인마저도 제일 늦게 했지.”
“……”
“다른 자식들에게는 미안할 것도 죄스러울 것도 없는 나다만, 유독 그 녀석에게만은 미안한 것이 많구나. 박복한 놈. 동생들 키우느라 늦은 나이에 어렵사리 혼인해서 간신히 자식을 하나 보았을 때는 잘 됐구나 싶었는데…”
“자식이 있나요?”
“그래. 있었지. 헌데 다섯 해를 못 넘기고 속절없이 제 어미 뒤를 따라가더라. 그 뒤로 종종 정신을 놓더니 결국 이렇게 앓아누웠구나.”
얼굴 가득 측은한 표정을 담은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잠시 후 은근한 말투로 내게 물었다.
“저기 말이다… 아가,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주면 안되겠느냐?”
“네? 하지만 저는…”
“안다, 알아. 그 성질 개떡 같은 오딜란 놈이 가만있지 않을 거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단다. 그러나 아무 걱정하지 말거라. 놈은 내가 직접 설득을 해볼 테니… 다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네 생각이란다.”
그게 아니라 실마리를 찾아 여행을 가야 한다고요. 가출할 생각이었단 말이에요.
이렇게 허망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아까워서 죽을 지경인 나인데 황제는 아예 나를 가두어 두려고 했다. 이미 생각을 굳히고 있는 눈치이면서 겉으론 내 생각이 궁금한 척을 하는 것이다. 대체 진짜 속셈이 뭐지? 킬의 걱정처럼 혹시 나를 인질로 잡아두려는 것 아닐까?
귀족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황제가 그 자식을 인질로 삼아 궁전에 붙잡아 두는 경우를 종종 보아온 나이기 때문에 혹시 이번 경우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해 보았다. 그러나 그런 의문에 대해 황제는 이렇다 할 설명 한마디 없이 그저 이곳에 머물러 달라고만 하는 것이었다.
“부탁이란다. 궁전 안을 마음껏 돌아다녀도 되고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해도 좋단다. 그러니 그 녀석의 곁에 있어다오.”
“하지만 저는 꼭 가봐야 할 곳이 있어요. 이링카도 찾아야 하고…”
“휴우, 내 이런 말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만… 할아비 소원이다. 평생소원이니 그냥 눈 딱 감고 들어다오. 응? 이래도 안 되겠냐?”
펴, 평생소원씩이나 된다굽셔? 아하하, 이 일을 어쩌나.
거절했다간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 나는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덥석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먼저 아버지를 설득하시면 이곳에 있을 게요.”
…라고 말했던 것이다. 왜냐면 킬은 절대 허락할 리가 없을 테니까. 꺄하하하!
내 말에 황제는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해보였다. 그러다 심각한 얼굴로 방안을 왔다 갔다 하더니 결국 어쩔 도리가 없었는지 한숨을 푹 내쉬며 킬을 설득하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혼자 처소를 나가는 것이었다. 난 어떻게 하라고… 그가 나간 후 나는 잠시 눈을 꼭 감고 누운 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래도 탈출(?)을 해야겠다 싶어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몰래 창문을 넘었던 것이다. 음, 이거 왠지 미안해지네?
창문을 넘자 정원으로 연결되어 있는 듯한 아치형의 기둥 사이로 무언가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호기심에 다가가 보았더니 유리로 만든 어마어마한 크기의 온실이 나타났다. 방안의 꽃은 아마도 그곳에서 나온 모양이었다. 유리 온실… 그곳은 내게 그다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장소가 아니다. 그리하여 나는 그곳을 외면한 다음 가능한 멀리 돌아서 태자의 처소를 벗어나려 했다. 그런데…
“찾았다, 파브?”
“헉!”
까, 깜짝이야.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정원을 지나 막 처소를 벗어나려는 나를 순간 누군가가 강하게 잡아챘다. 유리 온실 근처를 빙 돌아 간신히 정원의 끝에 다다른 바로 그 때, 그 끝에 서있는 길쭉한 나무 뒤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슥 나타나더니 꽤 강한 힘으로 내 어깨를 ‘탁’ 잡으며 아는 척을 한 것이다. 나는 뒤쫓아 온 황제인줄 알고 바짝 긴장해서 삐걱거리는 목을 돌려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랬더니 하루 사이 퀭해진 눈을 하고 서있는 시바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별궁 연무장에서부터 뒤따라 왔다. 휴우, 되도록 빨리 결론을 내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아침부터 근처에 숨어 기다리고 있었거든.”
약간 놀라서 반사적으로 물은 말에 시바는 꽤 진지한 투로 대답했다. 그러더니 내가 뭐라고 더 물을 새도 없이 내 손을 잡고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 어디로 가는 거야?”
“일단은 궁전을 벗어나야겠어. 오왕야가 반쯤 정신이 나가서 난동을 부리고 있거든. 조금 있으면 당장 들이닥칠 거야. 한번 정신이 나가면 황제고 뭐고 물불을 안 가리는 사람이니까. 너도 그 사람 성격을 잘 알겠지?”
“으응. 근데 넌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아는 거지?”
“워낙 유명한 일화가 있으니까. 그건… 다음에 얘기해 줄게. 어쨌든 지금은 이곳을 벗어나서 조용한 곳으로 가야해.”
하긴 나도 킬이 화를 내는 건 조금 무섭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러나 솔직히 그보다는 스칼라가 화내는 것이 더 무서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세상이 멸망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행동할 것이 틀림없으니까.
‘휴, 골치 아파. 어쩌다 이렇게 됐지?’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처음부터 킬을 따라나서지 않는 것인데…
나는 약간 후회를 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기 때문에 지금은 이렇게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다.
“잠깐, 같이 데려가야 할 사람이 있어.”
“응? 누구?”
“이링카를 만든 사람과 그것의 주인이 되기로 한 사람.”
어차피 나선 길, 나는 그대로 가출을 단행하기로 결심했다. 킬과 황제는 서로 싸우느라 당분간 날 찾을 생각을 하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아무튼 내 말을 들은 시바는 당장 별궁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근데 어찌된 영문인지 별궁 쪽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우리는 의외로 쉽게 별궁 문 앞에 나란히 서서 서성이고 있는 나기와 카시를 끌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궁전을 벗어나는 일은 더 쉬웠다. 어떻게 벗어났느냐고?
부스럭… 부스럭…
“푸하! 궁전에도 이런 개구멍이 있을 줄은 몰랐어.”
“훗, 이게 다 이 시바님의 업적이시지. 크크크…”
“후아, 재미있다. 아비랑 살던 집에도 이런 구멍이 있었는데…”
“쿨룩쿨룩, 이 망할 꼬마 녀석아! 빨리 엉덩이 치우지 못해?”
바로 그런 것이었다. 필살의 개구멍!
시바가 뚫어놓은 개구멍을 통해 성공리에 궁전의 후문 쪽으로 나온 우리는 제각각 한마디씩 중얼거리며 빠른 속도로 사람들 속으로 섞이기 시작했다. 근데 시바의 직업은 대체 뭐지? 궁전에까지 개구멍을 뚫어 놓을만한 사람이라면 정말로 도둑밖에 없을 것 같은데… 나는 다시 한번 그의 전직에 대해서 진지하게 의심을 해보았다. 그러자 사심 없는 얼굴로 히죽 웃는 그의 얼굴이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도둑놈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책갈피> ― <오해할만한 상황이었다.>
우당탕탕… 쾅!!!
“젠장할!”
“다, 다섯째야, 진정해라. 그런 게 아니라잖아.”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쁘다는 소리를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감히 내 아들내미를 인질로 잡아두려고 들다니… 이거야 말로 그 늙은이가 나 오딜란을 경계하고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아니고 뭐냔 말이야?”
오딜란은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난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시뻘게진 얼굴로 왔다 갔다 하며 아무데나 막 들이박는 모양이 꼭 그랬다. 게다가 그 기운은 어찌나 살벌한지 형제들 중 가장 성질이 불같은 웨인도 차마 나서서 말리지 못하고 있었다.
“망할! 노망난 늙은이 같으니라고!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내 아들내미 당장 내놓지 못해?”
쾅! 우르르릉…
‘큰일이군. 이렇게 화가 났을 땐 아무도 말리지 못하는데…’
그의 주먹질 한방에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회랑의 기둥을 바라보며 웨인은 무겁게 혀를 찼다. 이대로 있다간 회랑은 물론이고 황제의 처소까지 완전히 박살을 내놓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몇 해 전에도 눈이 뒤집어져서 건물 하나를 완전히 날려버리지 않았던가.
“둘째 형님, 형님이 좀 말려보지 그래요?”
“미쳤냐? 이런 때에 잘못 건드리면 뼈도 못 추릴 텐데…”
“그럼 세 째형…”
“나도 아직 죽고 싶지 않다. 이왕이면 좀 더 즐기다 가고 싶다고.”
“휴우, 이럴 땐 큰 형님이 계셔야 하는 건데…”
웨인은 나란히 고개를 젓는 무능한 형제들과 저만치 멀찍이 떨어져서 눈치만 살피고 있는 궁정 기사단을 한번씩 돌아본 다음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병약하고 여린 구석이 많은 큰형님이지만 그는 성난 오딜란을 말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황제가 칼까지 뽑아들고서도 말리지 못했던 것을 그는 부드러운 말 한마디로 진정시켰으니 더 이상 말해 무엇하랴.
그런 의미에서 웨인은 진심으로 큰형님의 존재가 아쉬웠다. 이 자리에 그가 있었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제기랄!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크허험! 나 여기 있다.”
“아?! 폐하!”
그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아이를 납치(?)해 가지고 사라졌었던 황제가 정원 쪽에서 태연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나타나 뻔뻔해 보일만큼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미쳐 날뛰던 오딜란은 물론이고 주위에 늘어서있던 모두가 움직임을 멈추고 일제히 그를 돌아보았다. 근데 아이는 어디로 사라진 거지? 상황이 미묘하고 또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웨인은 더 이상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덥석 묻고 말았던 것이다.
“애는 어쩌고 혼자 오시는 겁니까? 설마 어디 한적한 곳에다 암매장이라도…”
“아, 암매장?!”
“썩을 놈, 말버릇 하고는… 얼라리? 왜 눈을 까뒤집고 그러냐, 오딜란? 나 절대 그런 짓 안 했다?”
“아이는… 제 아들내미는 어디 있습니까?”
“그게 말이다… 휴우, 사실을 알려주기 전에 나랑 잠깐 얘기를 좀 하자꾸나, 오딜란.”
“필요 없습니다. 아들의 안전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어떤 말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진지한 제안임에도 불구하고 오딜란은 가차 없이 말을 끊었다. 그리고 당장 사단이라도 낼 듯한 폼으로 손에 든 칼을 한번 휘두르더니 곧이어 더할 수 없이 싸늘한 투로 물었다.
“제 아들은 어디 있습니까?”
“아이를 내게 맡기지 않겠느냐?”
“어디 있냐고 물었습니다!”
“조건부터 들어 보거라. 결코 네게 손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야.”
“어디 있냐니까!”
쾅! 우르르르…
머리끝까지 화가 난 오딜란이 맨 손으로 세 째 형의 허리둘레보다 몇 배나 더 두툼한 기둥을 박살내며 소리치자 황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잠시 녀석과 눈싸움을 하더니 그 마저도 안 되겠는지 곧 사실을 털어놓았다.
“큰 애의 처소에 있다.”
큰 형님의? 어째서 그곳에 아이를 숨겨둔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황제다운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웨인은 생각했다. 왜냐면 오딜란은 온 궁전을 다 박살내도 그곳만은 절대 건드리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오딜란은 벌써 그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늦을세라 황제와 형제들이 그 뒤를 따랐다. 웨인은 바삐 사라지는 그들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뒤늦게 꽁무니를 따라갔는데 그가 막 큰형님의 처소에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때 아닌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악!”
“헉! 무슨 일이야?”
우당탕탕 소리를 내면서 날아와 발치께를 구르는 시종을 바라보며 묻자 안쪽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숨 막힌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가… 사라졌다.”
“에? 어디로?”
어이없는 투로 되물어 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활짝 열려있는 창문 밖으로 울려 퍼지는 오딜란의 살기 어린 외침이 있었을 뿐이었다.
“당장 기사들을 풀어 찾아내!”
그렇게 해서 그날 궁전에서는 대규모의 수색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루 온종일을 들여 궁전 구석구석을 찾아봐도 아이는 보이지 않았고 흔적이랍시고 발견한 것이 고작 유리 온실을 빙 돌아 나있는 희미한 발자국 하나였다. 그리고 그 즈음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큼직한 발자국이 발견되기도 했다. 즉, 누군가가 아이를 납치 또는 유괴를 했을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목숨을 걸고 잡아오너라. 어떤 놈인지 내 그놈의 낯짝을 좀 보아야겠다.”
오딜란은 둘째 치고 분노한 황제가 드디어 기사단을 풀었다. 그리하여 수천의 기사들이 흔적을 쫓아 빠른 속도로 궁전을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오딜란은 직접 움직일 듯 자신의 기사단을 불러들였다. 그 일련의 소란을 본 웨인은 또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보다 강한 녀석을 흔적도 없이 유괴할 수 있는 놈이라… 대체 누구지?’
하릴없이 궁금증만 더해가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