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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샤나메(1)]

글쎄, 뭐가 문제였던 걸까? 사실은 어디서부터가 시작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 아니, 아니다. 음, 그래. 역시‘그게‘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던 것 같아.
-위대한 샤 티르의 수줍은 고백 中-

후두둑…….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 비였나? 아아, 그렇지. 사방이 확 뚫린 넓은 초원과 휭휭 거리며 낮게 불어오는 누런 모래바람을 뒤로 하고 후두둑 후두둑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는 이것은 분명 비일 테지. 아마도.
펄럭이는 하얀 천 사이로 그는 그 비가 내리는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점점 더 멀어지는 말울음 소리와 누군가의 찢어지는 고성이 까마득해질 때까지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던 비가 마침내 그치려는 듯 간헐적으로 뚝뚝 끊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흠뻑 젖은 얼굴을 대강 훔치고 축축한 머리를 만지작거리다 하얀 천위로 난 자국을 따라 조심스럽게 시선을 옮겼다. 온통 붉게 물든 자국을 따라 서서히 고개를 들자 흉물스럽게 벌어진 시커먼 구멍 하나가 그를 향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건 뭐지? 뭐였더라? 기억이 날듯 말듯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멍하니 서서 바라보는 그를 향해 벌컥벌컥 붉은 물을 토해내던 구멍이 말했다.
-도망가! 도망가아……!
“헉!”
티르는 발작적으로 눈을 부릅떴다. 눈앞이 순식간에 확 밝아지면서 날마다 보는 익숙한 벽이 눈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꿈? 아아, 꿈이다. 또 그 꿈이었다. 개도 안 물어갈 개꿈!
“휴우, 놀래라.”
티르는 식은땀이 가득한 이마를 훔치며 가만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책상위로 엎드렸던 몸을 길게 펴고 요란하게 기지개를 켰다. 역시 앉아서 자는 게 아니었나?
“아, 근데 왜 또 지랄이야. 젠장!”
한동안 잠잠해서 옳다구나 하고 잊고 살았는데 다시 또 그 꿈을 꾸기 시작하다니. 찝찝하고 기분도 좀 거시기 한데다 어쩐지 소름까지 돋는 꿈의 반복. 대체 뭐지, 그 꿈은?
“일이 생기려나?”
찔끔 새어나온 눈물을 닦아내고 규칙적인 격자무늬가 가득한 천장을 바라보며 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요새 부쩍 집안이 분주하던데 이젠 꿈까지 그 모양이라 벌써부터 신경이 바짝 곤두서기 시작했다. 하기는, 이제 곧 사냥꾼들이 돌아올 때가 되긴 했지.
“나리만네 사냥꾼들은 벌써 돌아왔다던데…….”
괜히 찾아와 올핸 수확이 꽤 좋다고 자랑삼아 떠벌리던 나리만의 얼굴을 떠올리자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추접스런 놈. 피둥피둥 살찐 돼지 같은 몸에 보석을 둘둘 두르고 찾아와 느끼한 시선으로 내 몸을 샅샅이 훑고 갔더랬지. 우욱!
“내 언젠가는 그 개기름이 번들거리는 낯짝에다가 칼자국을 내주고 말테다!”
생각할수록 기분이 더러워 티르는 괜히 바락 소리를 쳐보았다. 어린 소년들을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한 나리만이 그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만 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침을 질질 흘리며 잡아먹을 듯 온몸을 훑고 가는데 모르면 그게 진정 바보고 옹이눈깔이겠지.
“젠장, 젠장! 그 자식, 어디 또 한 번 오기만 해봐라.”
사방으로 뻗친 짧은 은발머리를 마구 잡아 뜯으며 티르는 이를 갈았다. 그리곤 나리만이 다녀가자마자 보란 듯이 장만한 부지(bhuj)를 집어 들고 미친놈처럼 히죽 웃었다. 세로로 긴 전투도끼는 여러모로 유용해 보였다. 몸 전체에 아름다운 세공이 들어간 거며 손잡이에 단검이 숨겨져 있는 것도 마음에 들고 무엇보다 새파랗게 잘 벼린 날이 좋았다.
이 정도면 슬쩍 스치기만 해도 그 피둥피둥한 살점이 쩍 벌어지겠지? 아아,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상상만으로도 짜릿해져 저도 모르게 실실 입이 벌어졌다.
“흐흐흐…….”
“어이, 나 돌아왔…… 헉! 티, 티르?”
“앙?”
요란하게 소리치며 막 서재로 들어서던 막시무스가 날이 시퍼렇게 선 도끼를 끌어안은 채 히죽히죽 웃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 흠칫 몸을 굳혔다. 그러나 그도 잠시. 곧 어이없는 얼굴로 뚜벅뚜벅 걸어와서는 그의 이마에 큰 손을 척하니 얹으며 말했다.
“열은 없는데……. 설마 못 본 사이에 미쳐버린 거냐, 티르?”
“이 자식이!”
“아아, 진정해. 오해하지 말라고, 친구. 난 그냥…… 왠지 넌 미쳐도 곱게 미칠 것 같지 않아서 조금 걱정이 되었던 것뿐이니까. 불행하게도 네가 미쳐 날뛰면 수습할 사람이 나밖에 없잖아.”
“흥! 미친놈, 누가 너한테 수습을 맡겨? 나보다 더 지랄인 주제에. 그나저나 무사히 돌아왔군, 막시. 그래, 여행은 할만 했어?”
막시무스는 사냥꾼들을 데리고 한 달 전 노예 수확과 매매지로 유명한 시나무스 내륙 일대를 향해 떠났었다. 즉, 집안의 사냥꾼들이 수확물을 가지고 마침내 돌아온 것이다.
“여행? 여행엥? 칼부림까지 해가면서 뼈 빠지게 일하고 온 사람에게 여행이라고라? 흥! 모르는 소리 말아. 딱 죽을 맛이었다고. 돌아오는 동안만 해도 얼마나 이가 갈렸는지 알아?”
“그래? 호오, 어째 전과는 조금 다른 반응이네? 예상보다 수확이 좋지 않은 거야?”
“크흠, 그게 말이다…….”
사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떠들어대던 막시무스가 갑자기 어물어물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내 생각엔, 아무래도 어르신께서 실수를 하신 것 같아.”
“무슨 뜻이야?”
물음과 함께 티르는 재빨리 막시무스의 꼬라지를 눈으로 훑어 내렸다. 이달 내내 계속해왔을 노숙으로 인해 초췌하고 꾀죄죄한 몰골. 산만한 덩치를 감싼 먼지 쌓인 옷자락과 강렬한 햇볕에 색이 바랜 퀴레스(갑옷). 그리고 심하게 흔들리는 초록색 눈동자. 그는 꽤 지쳐보였다. 그리고 무언가에 화가 나 있었다. 티르의 태도도 자연스럽게 진지해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젠장, 너도 알다시피 이번 사냥엔 나칼과 그 똘마니들이 동행했잖아. 어르신의 명령이었지. 근데 상황이 아주 형편없게 되어버렸어. 맹세하는데 난 분명히 상품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고 미리 경고를 해줬다. 그 증거로 내가 데리고 있는 놈들은 제대로 할 일만 했다고.”
“……?”
“제기랄, 그 자식들 미쳐 날뛰는데 아주 질려버렸어. 사냥이 아니라 학살을 했단다. 여자노예들도 죄다 망가뜨리고. 덕분에 멀쩡한 ‘상품‘도 드물 지경이야. 나도 돌겠단 말이다.”
“헐!”
티르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막시무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칼은 사고를 쳐도 아주 제대로 쳐가지고 돌아온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건 손해 보는 일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바라의 의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였다. 대체 어쩌자고 그렇게 날뛴 거지?
“그렇게까지 대책 없이 굴었단 말이야?”
“흥! 나칼도 문제지만 그 똘마니들이 더 심각해. 생각보다 더 잔인한 놈들이었다고.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정말이지 그런 놈들과 어울려 다니는 나칼의 모가지를 힘껏 비틀어버리고 싶었단 말이다.”
“호오, 천하의 막시무스가 참았다는 거야?”
“물론. 아주 이가 갈리게 참았지. 이봐, 작은 도련님. 어떻게 좀 해봐. 나칼이 네 사촌형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르신께선 놈보다 너를 더 아끼시잖아. 어르신께 말 좀 제대로 전해달란 말이야.”
“쳇. 아끼긴 개뿔? 그 영감탱이 속을 누가 알아? ……뭔가를 찾는답시고 열흘이나 쏘다니더니 어젯밤에서야 슬그머니 돌아왔더구먼. 내 근신은 풀어줄 생각도 않고 말이야. 미치겠어, 진짜!”
티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안을 오락가락 하며 있는 대로 성질을 부려대기 시작했다. 그가 할아버지인 바라로부터 근신명령을 받은 것은 정확히 보름전의 일이었다. 자그마치 보름 전!
“아아, 얘기는 들었다. 일을 저질렀다며?”
“흥! 사실 별 일도 아니었어. 조막만한 애새끼가 빽빽 우는 게 듣기 싫어서 밖에 잠깐 내놓았던 것뿐이야. 그냥 실수를 좀 한 것뿐이라고. 남들도 다 하는 실수 나라고 하지 말란 법 있어?”
“흐응, 내가 듣기엔 실수가 아니라는 것 같던데? 시장에서 사들인 어린 노예 하나를 그냥 놓아줬다지 아마?”
“쳇,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작 어린 노예 하나 풀어준 일이 뭐 그리 죽을죄라고 사람을 보름씩이나 가두어 두냔 말이야.”
충분히 반성할 때까지 집밖으로 한발작도 나가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만 해도 설마 했다. 그저 시늉만 하다 전처럼 한 이틀 정도만 지나면 꿀밤 한 대 맞는 것을 끝으로 고이 풀려나겠거니 했던 것이다.
그런데 갇힌 지 닷새가 될 때까지도 아무 말이 없는 것으로도 모자라 곧 뭔가를 찾는답시고 훌쩍 집을 떠나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바람에 꼼짝없이 보름씩이나 갇혀있게 된 티르는 말 그대로 미치고 환장하기 일보직전이었다. 사방팔방으로 쏘다니기 좋아하는 그에게 이런 종류의 벌은 그야말로 매를 맞는 것보다 더 지독한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스스로가 잘못했다는 생각도 아예 없었던 터라 반성은커녕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억울하다는 생각만 크게 자리 잡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한마디로, 잘못된 체벌로 인해 인간 티르가 드디어 삐뚤어지기 시작했다는 말이지.
“아아, 어쨌거나 어르신께서 돌아오셨다니 조만간 근신을 풀어주시겠지. 그러니 혹 어르신 뵙게 되거든 잊지 말고 나칼에 대해서 얘기 좀 해달란 말이야.”
“글쎄, 내가 말한다고 해서 그 영감이 생각을 바꿔먹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어. 뭐든 공짜로 들어주는 일이 없는 영감이잖아. 벼룩의 간도 잘만 빼내먹는 노친네니까.”
“엄살떨지 마. 어르신께서 너 이뻐한다는 건 세 살 먹은 어린애도 다 아는 사실이야. 괜히 성질만 부려대지 말고 살살 이쁜짓 해가면서 설득 좀 해보란 말이다. 오죽하면 내가 돌아오자마자 너부터 찾아왔겠냐?”
“아, 알았어. 알았다고. 젠장, 날 위로할 생각은 전혀 없고 순전히 이용만 해먹자는 거지?”
“큭, 넌 워낙 싸가지가 없어서 위로 같은 건 필요 없잖냐. 그저 아덴부르크에서 제일가는 부자의 손자로 태어난 죄려니 생각해라. 자, 그럼 난 이만 간다, 작은 도련님.”
상처받은 어린 맹수처럼 씩씩대는 티르에게 팔랑팔랑 손을 흔들어주고 막시무스는 휑하니 나가버렸다. 볼일을 다 봤으니 이제 그간 쌓인 피로를 풀러 가야겠다는 뜻이었다.
보나마나 여자노예들이 득실거리는 루비나의 대중목욕탕으로 달려가겠지.
“색골 같으니라고.”
성급하게 사라지는 막시무스의 등짝에 대고 티르는 가볍게 인상을 써보았다. 열여섯과 스물여섯의 차이가 이런 것이려나? 놀러 다닌다고 해봐야 고작 또래들과 어울려 말이나 타고 돌아다니는 것이 전부인 자신에 비해 성인인 막시무스의 유희는 제법 야한 구석이 있었다.
술 좋아하고 돈 잘 쓰고 나아가 싸움질까지도 능숙한데다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멀끔한 얼굴을 가진 그는 여자들에게 그럭저럭 인기가 좋았다.
더구나 막시무스는 아덴부르크 제일의 지주가문이자 부자로 명성 높은 카비아니 가의 일급 무사가 아닌가. 당연한 일처럼 그의 주변엔 여자가 끊이질 않았다.
“그런 주제에 혼인은 왜 안하는 거야?”
몇 해 전 병으로 죽은 정혼녀를 잊지 못해서…… 라는 변명을 들은 기억이 희미하게 나긴 했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여기진 않았다. 그걸 믿을 만큼 순진한 티르가 아닌 것이다. 그나저나 나칼 그놈을 어찌 한다지?
“작은 도련님!”
한손으로 부지를 툭툭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있는데 방밖에서 시녀 하나가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어르신께서 찾으십니다. 별채의 탑에 계세요. 지금 당장 오라고 하셨답니다.”
“흥, 보름 만에야 찾는다? 무슨 일인지 말씀이 없으시든?”
“어르신께서 언제는 그런 말씀을 해주시던가요? 다만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이셨어요. 아무래도 근신을 풀어주실 모양이에요. 어서 가보세요. 저 분명히 말씀 전했어요.”
“알았어. 간다, 가!”
혹시라도 딴 길로 샐까봐 의심 가득한 눈길을 보내는 시녀를 향해 빽 소리쳐주고 티르는 냉큼 서재를 나섰다. 얄미운 영감탱이지만 어쨌거나 보긴 봐야 했다. 근신을 푸는 문제보다 역시 막시무스가 가져온 나칼의 일을 빠뜨릴 수 없었다.
이대로 그냥 놔두다가는 그 멍청한 놈이 앞으로 어떤 사고를 더 쳐 바라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지 알 수 없으니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쓸모없는 날건달 따위들과 어울려 다니느냔 말이야…….”
가볍게 투덜거리며 티르는 빠른 걸음으로 회랑을 벗어났다. 그때였다.
“여어~ 사촌!”
문득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싶더니 곧 두툼한 손 하나가 나타나 티르의 어깨를 확 잡아챘다. 나칼이었다. 문제의 나칼. 빌어먹을 사촌형.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돌아보지 않고도 단박에 정체를 알아챈 티르는 표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고는 슬그머니 돌아섰다. 안타깝지만 그의 외모와 심오하게 잘 어울리는, 아방하기 그지없는 미소와 함께.
“오랜만이야, 나칼.”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나칼이 만날 붙어 다니는 수하 두엇을 거느리고 등 바로 뒤에 삐딱하게 서 있었다.
더럽게도 반갑다, 인간아. 왜 사고를 치고 돌아와서 날 찾냐?
하도 싸돌아다닌 탓인지 부옇게 빛이 바랜 금발머리를 대강 틀어 묶고 짧은 튜닉위에 리넨 퀴레스(갑옷)를 입은 나칼은 티르의 인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여자의 그것처럼 가느다란 눈썹을 산처럼 삐죽 치켜 올리고 있었다.
쭉 찢어져 가뜩이나 사납게 보이는 눈을 착 내리깐 채로.
그래, 뭐가 불만이냐, 청년?
“형님한테 인사하는 법 정도는 진즉에 가르쳐 준 걸로 기억하는데? 그새 잊은 거냐, 우리 이쁜이?”
“물론 잊지 않았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 주둥이 쫙 찢어놓기 전에 이 손 치우시지?”
“하! 건방진 자식. 한 번 더 따끔한 맛을 보고 싶은 거냐? 바라가 있다고 해서 못 건드릴 거라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다, 티르. 누가 뭐래도 카비아니 가의 후계자는 내가 될 테니까.”
단단한 가슴을 내밀며 당당하게 소리치는 나칼이 어쩐지 우스워보였다. 이 동부 투란 제국이 장자상속법을 따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똑같은 바라의 손자지만 티르보다 나칼이 다섯 살이나 더 많다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티르는 바라의 장남 소생이고 나칼은 둘째 아들의 자식이었다. 어리다고는 해도 따지자면 티르가 더 우선순위에 있는 것이다. 바로 제 1순위. 바라의 두 아들이 이미 오래전에 죽은 덕분이다.
그런 사실을 모르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것은 아마도 바라가 직접 명령한 이번 사냥길에 자신감이 고무된 탓인 듯 했다. 어린데다 예쁘장하기만 한 티르보다 듬직한 자신을 더 믿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거다. 안타깝게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티르. 내가 당주가 되었을 때 빈손으로 쫓겨나고 싶지 않다면 얌전하게 굴어. 바라에게 괜한 소리는 말란 말이다. 알았냐?”
“충분히. 이제 그만 가도 될까, 형님?”
그래, 더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항복한다는 듯 두 손을 살짝 들어보이자 놈의 표정이 의기양양해졌다. 겁을 먹었다고 여겼는지 픽 웃으며 너그러운 척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기까지 했다.
‘저 바보. 열 살 때 쓰던 방법이 지금도 통한다고 생각한 거야? 내가 아직도 네놈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고 질질 울기나 하는 어린애로 보인다 이거지?’
돌아서면서 티르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바라의 두 아들이 노예사냥을 나섰다가 나란히 비명횡사하면서 덜렁 남겨진 나칼과 티르는 자연스럽게 할아버지인 바라의 곁에서 함께 크게 되었다.
그건 티르가 4살 되던 해의 일이었는데 그때부터 티르는 나칼에게 무던히도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바라가 자신보다 티르를 더 아낀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기 때문이다.
“멍청한 자식. 내 탓이 아니잖아, 그건?”
욕을 하고 이를 박박 갈면서도 티르는 바라에게 조금 더 사랑받았다는 이유로 나칼에게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외롭게 자랄 수밖에 없었던 서로의 처지를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래, 그때는 그랬다. 하나뿐인 할아버지의 시선을 좀 더 오래 붙잡기 위해 그들은 나름대로 온갖 노력을 다 했었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사람의, 친인의 따스한 체온이 너무나 그리웠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