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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샤나메(3)]
탁! 휘이잉…….
그는 막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한 도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번화한 거리, 높이가 제각각인 건물들, 뾰족하거나 둥글거나 혹은 평평한 지붕과 탑 그리고 아직도 북적대는 대로.
언덕은 제법 높아서 그는 도시의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아덴부르크, 동부 투란 제국의 꽤 큰 상업 도시. 저곳 어딘가에 그가 찾는 물건이 있다.
“샤나메…….”
그것을 따라 이곳까지 왔다. 원치 않아도 느껴지는 존재감. 샤나메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곧 손에 넣게 되리라. 반드시!
“판크라티온?”
“그래, 로무네스 일당과 나리만의 노예 사냥꾼들이 서쪽 원형 경기장 부근에서 붙었다는 소문이야. 벌써들 몰려갔다고. 우리도 구경 가자!”
“흐음, 그럴까?”
돼지 같은 나리만 놈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지만 판크라티온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티르는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취향 하나만은 누구보다도 사내다웠다.
그래서 원형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전차경주나 요즘 유행하고 있다는 복싱은 물론이고 격투기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판크라티온에도 한창 열을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다른 녀석들처럼 그저 보기만 하는 것으로는 만족을 못해서 이미 집안의 무사들에게 매일 훈련을 받고 있는데다 지난해부터는 막시무스에게 무기를 다루는 법에 대해서도 꾸준히 배우고 있었다. 덕분에 그의 서재엔 책은 물론이고 매달 새로 사용법을 익힌 무기들이 하나씩 착실하게 자리를 잡고 있기도 했다.
“작은 도련님, 외출하시게요?”
“아아, 서쪽 원형경기장 부근에서 누군가가 판을 벌렸대. 보러 갈 거야.”
“제가 따를까요?”
외출 준비를 하고 방을 나서자 가노(家奴)인 자낙이 재빨리 따라붙었다. 이제야 말이지만 티르는 아직 혼자서 외출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덴부르크의 자유 시민 대부분이 그렇듯 어린 시절부터 노예를 거느리거나 무사들의 호위를 받아 움직여왔고 별 이변이 없는 한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었다.
“차라리 무사 둘을 데리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티르. 넌 나리만을 싫어하잖아. 자기네 사냥꾼들이 벌린 판이니 그 인간이라면 틀림없이 돈을 걸러 올 거라고.”
“쳇, 돼지 같은 놈. 어디 눈깔이라도 돌리기만 해봐. 이번에야말로 본때를 보여주고 말테니. 자낙, 내 서재에 가서 부지를 가져와라. 그리고 막시무스에게 판크라티온을 보러 가자고 전해.”
“예, 도련님.”
아예 전투도끼까지 지참하고 나서겠다는 말에 친구인 다니무스가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늘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 사는 다니무스는 시의 서기관인 데메네스의 아들이다. 부전자전이라는 말처럼 서기관이 되는 것이 장래소망인 그런 녀석.
언제나 유하고 차분한 다니무스와 다혈질에 급한 성격인 티르는 그 극과 극을 달리는 성격차이에도 불구하고 제법 잘 어울려 다니고 있었다.
취향이라든가 생각 같은 것이 의외로 비슷한 구석이 많아 그렇게 오랫동안 붙어 다니고서도 아직 말싸움도 한번 해본 적이 없다.
이런 일련의 사정을 모르는 몇몇 사람들은 착한 다니무스가 티르의 지랄 맞은 성격을 일방적으로 받아주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티르에게 잘못 보였다가는 서기관인 아버지에게 해가 갈 테니 어쩔 수 없이 꾹 참고 있는 거라나?
“아무래도 내가 손해를 보고 있는 것 같아.”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정문 쪽으로 향하면서 티르가 새삼스럽게 투덜거렸다.
“무슨 소리야?”
“사람들은 내가 널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하거든.”
“에엥?”
“파티에 나가면 내 지랄 맞은 성격을 다 받아주느라 애쓴다고 위로를 받을지도 몰라, 다니무스.”
“에, 그건 불쌍하다는 뜻인 것 같은데? 맙소사! 그런 시선으로 보고 있었단 말이야? 쇼크다. 그럼 이제부터 나도 성질을 부리면서 다녀볼까, 티르?”
“흥! 그런다고 알아나 주면. 젠장, 이게 다 바라 탓이야. 바라 때문에 내 성격까지 이렇게 되어버린 거라고.”
애꿎은 바라에게 돌을 던지며 티르는 슬쩍 미간을 모았다. 어제 그에게 대강 언질을 받은 직후 바라는 나칼의 일에 대해서 집사에게 따로 보고를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성질 급한 노인네가 아직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어쩌려는 거지? 아무 말 없이 넘어갈 영감이 아닌데…….’
이번 노예사냥에서 나칼 일당들 덕분에 입은 피해는 자그마치 2 탈란톤을 윗돌 지경이었다. 그 정도면 그냥 빈손으로 돌아온 것보다도 더 나빴다.
상황이 그 모양이니 바라는 나칼에게 무언가 대가를 요구할지도 몰랐다. 아니면 티르의 경우처럼 꼼짝 못하게 감금을 시키든가.
“여어~ 티르, 판크라티온을 보러 간다고?”
상념을 깨고 들려오는 우렁찬 목소리에 티르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다 죽어가던 어제와 달리 아주 쌩쌩해진 막시무스가 그들을 발견하고 무사 하나를 대동한 채 회랑을 가로질러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긴 원정을 다녀온 덕분에 며칠간 휴가를 얻을 수 있게 되어 그런지 오늘은 그럭저럭 기분이 좋아보였다. 하긴 망친 사냥보다는 휴식이 백배는 더 좋겠지.
“서쪽 원형경기장 부근이랬지?”
“응. 혹시 쉬러 가는 걸 방해한 거야?”
“천만에. 휴가는 내일부터라고, 친구. 그럼 가볼까나?”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어 보이더니 막시무스는 활기찬 동작으로 그들을 잡아끌었다. 그 역시도 판크라티온을 전차경주 다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 어느 쪽에든 돈을 걸 가능성이 컸다. 티르는 당연히 로무네스 일당 쪽에다 걸 생각이었다. 나리만 놈에게 이득이 되는 일 따위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서쪽 원형경기장은 카비아니 가의 저택에서 약 반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걷기에는 꽤 멀지만 그렇다고 마차를 꺼내기엔 귀찮을만한 거리다. 따라서 그들은 마차를 꺼내는 대신 말을 타고 저택을 나섰다.
아덴부르크의 거리는 거의 매일 분주해 보일 때가 많다.
상설시장이나 이런저런 가게들이 양쪽 대로 주변을 다 차지하고 주욱 늘어서 있는데다가 이웃한 세키네 항구 쪽에서 들어오는 상인들과 거래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사실 늘 분주하기도 했다.
거기에 용병들과 노예사냥꾼들이 활개를 치고 시의 수비를 담당하는 병사들과 유지들이 거느린 사병들이 한데 뒤엉켜 다니고 있으니 그 복잡함을 어찌 말로 다 설명을 할 수 있을까. 한 마디로, 달리 거대 상업도시가 아닌 것이다.
“휴우, 오늘따라 어째 더 붐비는 것 같았어.”
복작대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느라 한바탕 진땀을 뺀 일을 생각하며 티르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이런, 이쪽도 만만치 않게 득실대는 것 같은데? 어이, 작은 도련님 앞으로 내려갈 거지?”
“응. 다니무스, 앞으로 가자.”
“좋아. 앞장 서.”
야외에 마련된 간이 경기장은 꽉꽉 들어찬 시커먼 사내들로 인해 떠나갈듯 온통 들썩이고 있었다. 빨리 온다고 왔는데도 빈자리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반구형의 경기장 맞은편에 마련된, 차일이 쳐진 높은 특석도 이미 만원.
하는 수 없이 그들은 계단을 지나 앞쪽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티르가 높은 뒷자리보다는 선수들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앞자리를 선호하기 때문이었다.
“어? 이쪽은 한산하네. 여기로 하자.”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찬 다른 자리에 비해서 유난히 썰렁하게 비어있는 맨 앞자리가 티르의 눈에 띄었다. 다른 자리는 모두 미어터지는데 그 자리는 덩치 큰 사내 셋이 죄다 차지하고 있었다. 욕심도 많은 것들 같으니라고.
‘내가 양보의 미덕을 가르쳐주마.’
먼저 앉아있던 사내들의 시선이 그를 향해 일제히 내리꽂히는 것을 모른 척 하고 티르는 냉큼 그들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셋 중 하나가 당장 그의 움직임을 막고 나섰다.
“이 자리는 이미 우리가 다 샀다. 다른 자리로 가라.”
“눈 삐었어? 당신 눈에는 빈자리가 있어 보이는 거야? 쩨쩨하게 굴지 말고 이 자리 우리한테 팔아. 후하게 쳐줄게.”
“장난하나? 필요 없으니 썩 물러가라. 그런…….”
“아아, 그냥 내버려둬라, 자일로스.”
“하, 하지만 전…….”
“그만!”
가운데 앉아있던 젊은 청년이 팔짱을 낀 채 툭 내뱉자 사내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아무 말 못하고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상황으로 보아 청년의 신분이 더 높은 듯 했다. 그렇다면 양 옆의 두 사내들은 청년의 집안에서 거느리고 있는 무사 나부랭이나 뭐 그 비슷한 위치에 있는 놈들인가? 아아, 아무렴 어때. 자리를 얻었으면 됐지.
“아, 고마워. 자, 여기 돈!”
남이야 기분이 나쁘거나 말거나 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이 그저 흐뭇해 티르는 실실 웃으면서 의기양양하게 돈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팔짱을 낀 채 앞만 보고 있던 청년이 그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어라?’
사내다움이 물씬 풍기는 얼굴에 단단한 턱과 꾹 다문 입 그리고 화려한 흑발 아래에서 진지하게 빛나는 푸른색 눈동자.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도 숨 막히게 하는 무언가를 사내는 가지고 있었다. 위엄이라든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 같은.
그 기세에 눌려 티르는 저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떨었다. 순간 ‘씨익‘ 청년의 입가에 그려지는 보기 좋은 미소. 저절로 반발심이 생기게 만드는 그 자신만만함 아니 오만함이라니.
자극을 받은 티르는 애써 어깨를 펴고 고개를 빳빳이 치켜든 자세로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맞받았다.
그러자 청년의 미소가 점점 더 짙어지는가 싶더니 그것은 이내 유쾌한 소리가 되어 밖으로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
“쳇, 괜히 웃고 지랄이야.”
어쩐지 져버린 기분을 감출 수 없어 티르는 짧게 투덜거리다 홱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역시 저 당돌한 것이 뉘 집 자식인지가 궁금해지고 말았다. 그래서 모르는 척 옆자리에 앉은 막시무스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저 청년이 누구인지 알아, 막시?
-전혀. 처음 보는 자다. 아무래도 우리 도시 사람이 아닌 것 같아.
-그걸 어떻게 알아?
-이 도시에서 노예가 아닌 무사들을 거느리고 다닐만한 신분을 가진 사람 중에 내가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저만한 검을 아무렇지 않게 패용하고 다닐만한 사람도.
검? 막시무스 자신이 검을 쓰는 사람이라 그런지 다른 것보다 허리춤에 매달린 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모양이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검이기에? 티르는 안 보는 척 연기하며 곁눈질로 슬금슬금 청년의 허리춤을 살폈다.
눈깔만한 푸른 사파이어가 박힌 검의 황금빛 손잡이가 나 보란 듯이 눈에 들어왔다. 가짜라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맑고 시푸르게 빛나는 보석과 황금으로 세공한 검. 다른 것은 더 볼 필요도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설명 받은 느낌이었으니까.
-보통 신분은 아니야. 틀림없이.
섣부른 행동으로 다시 청년의 비위를 건드려 일을 크게 만들까봐 두려웠는지 막시무스가 짧게 덧붙였다.
“쳇, 누굴 바보로 알아?”
“바보 아닌 거 아니까 말리는 거다. 어어, 시작한다!”
커다란 징소리와 함께 마침내 옷을 홀딱 벗은 선수들이 경기장 한복판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티르는 침을 꼴깍 삼키며 목을 길게 뺐다.
용병들이 거의 대부분인 로무네스 일당은 붉은 천을 팔뚝에 묶었고 저 보기 싫은 나리만의 노예사냥꾼들은 흰 천을 둘렀다. 눅눅한 모래가 채워진 경기장 한복판에서 그들은 곧 일대일로 격렬한 싸움을 벌일 것이었다.
“휘익. 쟈칼, 놈들을 죽여 버려라!”
“웃기지 마라. 로무네스 쪽도 만만치 않아.”
“흥, 어림없다. 나리만 나리의 사냥꾼들은 이번 사냥에서 큰 활약을 했다고.”
“지랄하고 자빠졌네. 사냥이랑 판크라티온이랑 같아? 로무네스, 네게 걸겠다. 무조건 이겨버려!”
누군가가 나리만의 사냥꾼들을 응원하자 순간 울컥한 티르는 방금 전까지 옆자리의 청년 일행을 신경 쓰던 것도 잊고 어느새 벌떡 일어나 고래고래 소리를 치고 있었다. 망할 나리만 놈이 돈을 왕창 잃고 인상을 구기는 꼴을 꼭 봐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쿡쿡. 볼수록 재미있는 아이다.’
슈라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서서 팔딱팔딱 뛰어대는 티르를 꽤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독특한 외모 때문이 아닌 순간순간 넘쳐 오르는 생동감만으로 다른 이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는 녀석이 제법 신기했다.
확실히 보통이 아니다. 거칠 것이 없어 자유롭다 못해 오만하게까지 느껴지는 성격하며 아직 누구도 함부로 받아내지 못하던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맞받기까지 한 걸 보면 보통이 넘어도 훌쩍 넘는 수준이다. 저도 모르게 욕심이 날만큼.
‘아덴부르크에서 보석이 자라고 있었던가?’
당돌하게도 밀고 들어와 자리 양보를 강요할 때까지만 해도 별 관심이 없었는데 이제는 아예 흥미가 생겨버리고 말았다. 어쩐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는 안색을 굳히고 있는 자일로스에게 가만히 속삭였다.
-어느 가문의 아이인지 알아보아라.
-전하?
-그냥 조금 흥미가 생겼다. 꽤 재미있는 아이 같아서. 쿡쿡.
-그뿐이십니까?
-음…… 아니. 아직 어리긴 하다만 이왕이면 내 사람이 되었으면 싶구나. 필요하다면 그의 가문까지도 내 그늘로 들어오길 바란다. 알아 보거라.
-존명!
슈라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느새 확신하고 있었다. 저 어린 녀석이 무사히 자라기만 한다면 훗날 그의 한쪽 날개가 되어 줄 수 있으리라는 확신. 위대한 영웅 루스탐에게 그의 친우이자 충신인 라크시가 있었듯 저 녀석이 자라 그의 라크시가 되어줄 수 있다면…….
-나는 마침내 대륙을 지배하는 위대한 황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거야! 로무네스, 꺾어버려! 그놈의 팔을 꺾어버려!”
완전히 경기에 취한 꼬마가 숨 가쁜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아까 전부터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탁! 휘이잉…….
그는 막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한 도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번화한 거리, 높이가 제각각인 건물들, 뾰족하거나 둥글거나 혹은 평평한 지붕과 탑 그리고 아직도 북적대는 대로.
언덕은 제법 높아서 그는 도시의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아덴부르크, 동부 투란 제국의 꽤 큰 상업 도시. 저곳 어딘가에 그가 찾는 물건이 있다.
“샤나메…….”
그것을 따라 이곳까지 왔다. 원치 않아도 느껴지는 존재감. 샤나메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곧 손에 넣게 되리라. 반드시!
“판크라티온?”
“그래, 로무네스 일당과 나리만의 노예 사냥꾼들이 서쪽 원형 경기장 부근에서 붙었다는 소문이야. 벌써들 몰려갔다고. 우리도 구경 가자!”
“흐음, 그럴까?”
돼지 같은 나리만 놈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지만 판크라티온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티르는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취향 하나만은 누구보다도 사내다웠다.
그래서 원형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전차경주나 요즘 유행하고 있다는 복싱은 물론이고 격투기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판크라티온에도 한창 열을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다른 녀석들처럼 그저 보기만 하는 것으로는 만족을 못해서 이미 집안의 무사들에게 매일 훈련을 받고 있는데다 지난해부터는 막시무스에게 무기를 다루는 법에 대해서도 꾸준히 배우고 있었다. 덕분에 그의 서재엔 책은 물론이고 매달 새로 사용법을 익힌 무기들이 하나씩 착실하게 자리를 잡고 있기도 했다.
“작은 도련님, 외출하시게요?”
“아아, 서쪽 원형경기장 부근에서 누군가가 판을 벌렸대. 보러 갈 거야.”
“제가 따를까요?”
외출 준비를 하고 방을 나서자 가노(家奴)인 자낙이 재빨리 따라붙었다. 이제야 말이지만 티르는 아직 혼자서 외출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덴부르크의 자유 시민 대부분이 그렇듯 어린 시절부터 노예를 거느리거나 무사들의 호위를 받아 움직여왔고 별 이변이 없는 한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었다.
“차라리 무사 둘을 데리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티르. 넌 나리만을 싫어하잖아. 자기네 사냥꾼들이 벌린 판이니 그 인간이라면 틀림없이 돈을 걸러 올 거라고.”
“쳇, 돼지 같은 놈. 어디 눈깔이라도 돌리기만 해봐. 이번에야말로 본때를 보여주고 말테니. 자낙, 내 서재에 가서 부지를 가져와라. 그리고 막시무스에게 판크라티온을 보러 가자고 전해.”
“예, 도련님.”
아예 전투도끼까지 지참하고 나서겠다는 말에 친구인 다니무스가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늘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 사는 다니무스는 시의 서기관인 데메네스의 아들이다. 부전자전이라는 말처럼 서기관이 되는 것이 장래소망인 그런 녀석.
언제나 유하고 차분한 다니무스와 다혈질에 급한 성격인 티르는 그 극과 극을 달리는 성격차이에도 불구하고 제법 잘 어울려 다니고 있었다.
취향이라든가 생각 같은 것이 의외로 비슷한 구석이 많아 그렇게 오랫동안 붙어 다니고서도 아직 말싸움도 한번 해본 적이 없다.
이런 일련의 사정을 모르는 몇몇 사람들은 착한 다니무스가 티르의 지랄 맞은 성격을 일방적으로 받아주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티르에게 잘못 보였다가는 서기관인 아버지에게 해가 갈 테니 어쩔 수 없이 꾹 참고 있는 거라나?
“아무래도 내가 손해를 보고 있는 것 같아.”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정문 쪽으로 향하면서 티르가 새삼스럽게 투덜거렸다.
“무슨 소리야?”
“사람들은 내가 널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하거든.”
“에엥?”
“파티에 나가면 내 지랄 맞은 성격을 다 받아주느라 애쓴다고 위로를 받을지도 몰라, 다니무스.”
“에, 그건 불쌍하다는 뜻인 것 같은데? 맙소사! 그런 시선으로 보고 있었단 말이야? 쇼크다. 그럼 이제부터 나도 성질을 부리면서 다녀볼까, 티르?”
“흥! 그런다고 알아나 주면. 젠장, 이게 다 바라 탓이야. 바라 때문에 내 성격까지 이렇게 되어버린 거라고.”
애꿎은 바라에게 돌을 던지며 티르는 슬쩍 미간을 모았다. 어제 그에게 대강 언질을 받은 직후 바라는 나칼의 일에 대해서 집사에게 따로 보고를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성질 급한 노인네가 아직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어쩌려는 거지? 아무 말 없이 넘어갈 영감이 아닌데…….’
이번 노예사냥에서 나칼 일당들 덕분에 입은 피해는 자그마치 2 탈란톤을 윗돌 지경이었다. 그 정도면 그냥 빈손으로 돌아온 것보다도 더 나빴다.
상황이 그 모양이니 바라는 나칼에게 무언가 대가를 요구할지도 몰랐다. 아니면 티르의 경우처럼 꼼짝 못하게 감금을 시키든가.
“여어~ 티르, 판크라티온을 보러 간다고?”
상념을 깨고 들려오는 우렁찬 목소리에 티르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다 죽어가던 어제와 달리 아주 쌩쌩해진 막시무스가 그들을 발견하고 무사 하나를 대동한 채 회랑을 가로질러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긴 원정을 다녀온 덕분에 며칠간 휴가를 얻을 수 있게 되어 그런지 오늘은 그럭저럭 기분이 좋아보였다. 하긴 망친 사냥보다는 휴식이 백배는 더 좋겠지.
“서쪽 원형경기장 부근이랬지?”
“응. 혹시 쉬러 가는 걸 방해한 거야?”
“천만에. 휴가는 내일부터라고, 친구. 그럼 가볼까나?”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어 보이더니 막시무스는 활기찬 동작으로 그들을 잡아끌었다. 그 역시도 판크라티온을 전차경주 다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 어느 쪽에든 돈을 걸 가능성이 컸다. 티르는 당연히 로무네스 일당 쪽에다 걸 생각이었다. 나리만 놈에게 이득이 되는 일 따위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서쪽 원형경기장은 카비아니 가의 저택에서 약 반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걷기에는 꽤 멀지만 그렇다고 마차를 꺼내기엔 귀찮을만한 거리다. 따라서 그들은 마차를 꺼내는 대신 말을 타고 저택을 나섰다.
아덴부르크의 거리는 거의 매일 분주해 보일 때가 많다.
상설시장이나 이런저런 가게들이 양쪽 대로 주변을 다 차지하고 주욱 늘어서 있는데다가 이웃한 세키네 항구 쪽에서 들어오는 상인들과 거래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사실 늘 분주하기도 했다.
거기에 용병들과 노예사냥꾼들이 활개를 치고 시의 수비를 담당하는 병사들과 유지들이 거느린 사병들이 한데 뒤엉켜 다니고 있으니 그 복잡함을 어찌 말로 다 설명을 할 수 있을까. 한 마디로, 달리 거대 상업도시가 아닌 것이다.
“휴우, 오늘따라 어째 더 붐비는 것 같았어.”
복작대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느라 한바탕 진땀을 뺀 일을 생각하며 티르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이런, 이쪽도 만만치 않게 득실대는 것 같은데? 어이, 작은 도련님 앞으로 내려갈 거지?”
“응. 다니무스, 앞으로 가자.”
“좋아. 앞장 서.”
야외에 마련된 간이 경기장은 꽉꽉 들어찬 시커먼 사내들로 인해 떠나갈듯 온통 들썩이고 있었다. 빨리 온다고 왔는데도 빈자리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반구형의 경기장 맞은편에 마련된, 차일이 쳐진 높은 특석도 이미 만원.
하는 수 없이 그들은 계단을 지나 앞쪽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티르가 높은 뒷자리보다는 선수들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앞자리를 선호하기 때문이었다.
“어? 이쪽은 한산하네. 여기로 하자.”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찬 다른 자리에 비해서 유난히 썰렁하게 비어있는 맨 앞자리가 티르의 눈에 띄었다. 다른 자리는 모두 미어터지는데 그 자리는 덩치 큰 사내 셋이 죄다 차지하고 있었다. 욕심도 많은 것들 같으니라고.
‘내가 양보의 미덕을 가르쳐주마.’
먼저 앉아있던 사내들의 시선이 그를 향해 일제히 내리꽂히는 것을 모른 척 하고 티르는 냉큼 그들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셋 중 하나가 당장 그의 움직임을 막고 나섰다.
“이 자리는 이미 우리가 다 샀다. 다른 자리로 가라.”
“눈 삐었어? 당신 눈에는 빈자리가 있어 보이는 거야? 쩨쩨하게 굴지 말고 이 자리 우리한테 팔아. 후하게 쳐줄게.”
“장난하나? 필요 없으니 썩 물러가라. 그런…….”
“아아, 그냥 내버려둬라, 자일로스.”
“하, 하지만 전…….”
“그만!”
가운데 앉아있던 젊은 청년이 팔짱을 낀 채 툭 내뱉자 사내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아무 말 못하고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상황으로 보아 청년의 신분이 더 높은 듯 했다. 그렇다면 양 옆의 두 사내들은 청년의 집안에서 거느리고 있는 무사 나부랭이나 뭐 그 비슷한 위치에 있는 놈들인가? 아아, 아무렴 어때. 자리를 얻었으면 됐지.
“아, 고마워. 자, 여기 돈!”
남이야 기분이 나쁘거나 말거나 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이 그저 흐뭇해 티르는 실실 웃으면서 의기양양하게 돈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팔짱을 낀 채 앞만 보고 있던 청년이 그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어라?’
사내다움이 물씬 풍기는 얼굴에 단단한 턱과 꾹 다문 입 그리고 화려한 흑발 아래에서 진지하게 빛나는 푸른색 눈동자.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도 숨 막히게 하는 무언가를 사내는 가지고 있었다. 위엄이라든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 같은.
그 기세에 눌려 티르는 저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떨었다. 순간 ‘씨익‘ 청년의 입가에 그려지는 보기 좋은 미소. 저절로 반발심이 생기게 만드는 그 자신만만함 아니 오만함이라니.
자극을 받은 티르는 애써 어깨를 펴고 고개를 빳빳이 치켜든 자세로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맞받았다.
그러자 청년의 미소가 점점 더 짙어지는가 싶더니 그것은 이내 유쾌한 소리가 되어 밖으로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
“쳇, 괜히 웃고 지랄이야.”
어쩐지 져버린 기분을 감출 수 없어 티르는 짧게 투덜거리다 홱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역시 저 당돌한 것이 뉘 집 자식인지가 궁금해지고 말았다. 그래서 모르는 척 옆자리에 앉은 막시무스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저 청년이 누구인지 알아, 막시?
-전혀. 처음 보는 자다. 아무래도 우리 도시 사람이 아닌 것 같아.
-그걸 어떻게 알아?
-이 도시에서 노예가 아닌 무사들을 거느리고 다닐만한 신분을 가진 사람 중에 내가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저만한 검을 아무렇지 않게 패용하고 다닐만한 사람도.
검? 막시무스 자신이 검을 쓰는 사람이라 그런지 다른 것보다 허리춤에 매달린 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모양이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검이기에? 티르는 안 보는 척 연기하며 곁눈질로 슬금슬금 청년의 허리춤을 살폈다.
눈깔만한 푸른 사파이어가 박힌 검의 황금빛 손잡이가 나 보란 듯이 눈에 들어왔다. 가짜라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맑고 시푸르게 빛나는 보석과 황금으로 세공한 검. 다른 것은 더 볼 필요도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설명 받은 느낌이었으니까.
-보통 신분은 아니야. 틀림없이.
섣부른 행동으로 다시 청년의 비위를 건드려 일을 크게 만들까봐 두려웠는지 막시무스가 짧게 덧붙였다.
“쳇, 누굴 바보로 알아?”
“바보 아닌 거 아니까 말리는 거다. 어어, 시작한다!”
커다란 징소리와 함께 마침내 옷을 홀딱 벗은 선수들이 경기장 한복판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티르는 침을 꼴깍 삼키며 목을 길게 뺐다.
용병들이 거의 대부분인 로무네스 일당은 붉은 천을 팔뚝에 묶었고 저 보기 싫은 나리만의 노예사냥꾼들은 흰 천을 둘렀다. 눅눅한 모래가 채워진 경기장 한복판에서 그들은 곧 일대일로 격렬한 싸움을 벌일 것이었다.
“휘익. 쟈칼, 놈들을 죽여 버려라!”
“웃기지 마라. 로무네스 쪽도 만만치 않아.”
“흥, 어림없다. 나리만 나리의 사냥꾼들은 이번 사냥에서 큰 활약을 했다고.”
“지랄하고 자빠졌네. 사냥이랑 판크라티온이랑 같아? 로무네스, 네게 걸겠다. 무조건 이겨버려!”
누군가가 나리만의 사냥꾼들을 응원하자 순간 울컥한 티르는 방금 전까지 옆자리의 청년 일행을 신경 쓰던 것도 잊고 어느새 벌떡 일어나 고래고래 소리를 치고 있었다. 망할 나리만 놈이 돈을 왕창 잃고 인상을 구기는 꼴을 꼭 봐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쿡쿡. 볼수록 재미있는 아이다.’
슈라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서서 팔딱팔딱 뛰어대는 티르를 꽤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독특한 외모 때문이 아닌 순간순간 넘쳐 오르는 생동감만으로 다른 이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는 녀석이 제법 신기했다.
확실히 보통이 아니다. 거칠 것이 없어 자유롭다 못해 오만하게까지 느껴지는 성격하며 아직 누구도 함부로 받아내지 못하던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맞받기까지 한 걸 보면 보통이 넘어도 훌쩍 넘는 수준이다. 저도 모르게 욕심이 날만큼.
‘아덴부르크에서 보석이 자라고 있었던가?’
당돌하게도 밀고 들어와 자리 양보를 강요할 때까지만 해도 별 관심이 없었는데 이제는 아예 흥미가 생겨버리고 말았다. 어쩐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는 안색을 굳히고 있는 자일로스에게 가만히 속삭였다.
-어느 가문의 아이인지 알아보아라.
-전하?
-그냥 조금 흥미가 생겼다. 꽤 재미있는 아이 같아서. 쿡쿡.
-그뿐이십니까?
-음…… 아니. 아직 어리긴 하다만 이왕이면 내 사람이 되었으면 싶구나. 필요하다면 그의 가문까지도 내 그늘로 들어오길 바란다. 알아 보거라.
-존명!
슈라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느새 확신하고 있었다. 저 어린 녀석이 무사히 자라기만 한다면 훗날 그의 한쪽 날개가 되어 줄 수 있으리라는 확신. 위대한 영웅 루스탐에게 그의 친우이자 충신인 라크시가 있었듯 저 녀석이 자라 그의 라크시가 되어줄 수 있다면…….
-나는 마침내 대륙을 지배하는 위대한 황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거야! 로무네스, 꺾어버려! 그놈의 팔을 꺾어버려!”
완전히 경기에 취한 꼬마가 숨 가쁜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아까 전부터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