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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샤나메(5)]

‘저 사람, 나를 기다리고 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꿀꺽. 마른 침까지 삼키며 티르는 허겁지겁 그를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사내는 흑단 같은 털을 가진, 보통 말보다 덩치가 월등히 큰 새카만 말을 타고 있다. 긴 천을 덮어쓴 탓에 눈만 드러난 커다란 덩치에 한쪽 손엔 바닥까지 닿는, 날이 대단히 살벌하게 번뜩이고 있는 이상한 칼을 쥐고 있었는데 그게 또 무척이나 특이했다.
창처럼 긴 손잡이에 폭이 넓고 긴, 한쪽에만 날이 있는 칼은 마치 활처럼 완만하게 휘어져 있었다. 다소 넓어 보이는 칼 면엔 검은색으로 이상한 문자를 그려 넣었고 날이 없는 등 쪽에는 구멍을 뚫고 화려한 장식을 달았다.
살벌하면서도 이국적인, 대단히 아름다운 칼이었다. 저절로 욕심이 생길만큼.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위로 올라가며 살피다 어느 한부분에서 티르의 시선이 딱 멈췄다. 밖으로 드러난 유일한 신체의 일부분. 당연한 순서처럼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황금색?’
티르는 그렇게 순수한 황금색을 본 적이 없었다. 태초에 신이 빚어 놓은 듯한, 믿을 수 없을 만큼 완전무결한 황금빛을 품은 눈동자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순간 숨이 탁 막혔다.
시리고 따뜻하고 격렬하고 잔잔하고 잔혹함과 동시에 사랑스러운…… 이상한 감정의 파도가 한꺼번에 그를 덮치고 있었다.
‘이상하다. 왜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하는 거지?’
자신의 몸이 어느새 덜덜 떨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티르는 그렇게 낯선 감정의 파편들과 조우했다. 따각따각. 다시 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막시무스는 그를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기로 결정했나보다. 그에게서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시…….”
“조용히. 그냥 간다.”
티르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를 발견한 직후부터 이상하리만치 격렬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이 아프다고 제멋대로 말해 버릴까봐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처박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끊임없이 묻고 있었다.
‘누구지? 누구야? 당신, 누구야?’
사내는 대답이 없었다. 다른 여타의 행인들처럼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가는데도 붙잡지 않았다. 다만, 막 스쳐가는 티르를 따라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소리 없이 스윽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흘러나오는 희미한 한마디.
-찾았다!
“건방진 놈!”
나리만은 시커멓게 멍이 든 이마를 매만지다 말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밀었다. 아무리 아끼는 놈이라지만 그 어린놈에게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끄응. 하필이면 카비아니 가 출신일 건 또 뭐람? 그냥 엘룬인만 되었어도……. 빌어먹을, 성격이라도 고분고분하면 좀 좋아?”
그 고운 얼굴에 성격은 어쩌자고 바라 그 늙은이를 빼다 박아서 사람을 이렇게 고생시키는지. 나리만은 진정 신이 원망스러웠다. 탐미주의자의 본능을 자극할 정도로 흠집 하나 없는 완벽한 몸에 드물디 드문 화려한 은발과 코발트빛 눈동자를 가진 그 아이를 발견했을 땐 그야말로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카비아니 가의 후계자씩이나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의 기분은 그날로 당장 지옥으로 곤두박질을 치고 말았다.
“끄응. 완벽하게 들어맞는 조건인데…… 아니란 건가? 정말로 카비아니 가의 자식이라는 말인가?”
소문으로 듣자하니 엘룬의 왕실 혈통이 그렇다 했다. 은발에 푸른 눈. 대대로 물을 다루는 능력을 타고 난단다. 그래서 처음 티르를 발견했을 땐 소문으로만 듣던 그 엘룬의 왕실 핏줄인줄 알았다. 드디어 엘룬의 핏줄까지도 곁에 둘 수 있게 되는 구나 싶어 감격을 했더랬다.
“차라리 엘룬의 왕실 인물이면 납치라도 했을 텐데 하필이면 바라 늙은이의 핏줄일건 또 뭐냔 말이다.”
성질 개 같고 이리저리 줄을 잘도 대는 노인네가 하필이면 돈까지 많아서 사람을 골치 아프게 하고 있었다.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 명단에서도 제일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노인네. 그를 건드릴 배짱이 나리만에겐 아직 없었다.
“끄응. 그 죽지도 않는 망할 늙은이 누가 대신 좀 안 죽여주려나? 아야야, 멍든 자리가 더 쑤시네. 어떤 놈이 걷어찬 건지 어디 잡히기만 해봐라.”
길게 드러누우며 있는 대로 투덜거려보지만 어떻게 해도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주인님, 나무리입니다.”
“무슨 일이냐?”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이 시간에? 누구라더냐?”
“저어, 사냥꾼인 듯 했습니다.”
“사냥꾼? 흥, 사냥꾼 따위가 감히 나를 보자 해? 일 없다. 내쳐라.”
보나마나 그의 밑에서 일을 좀 해보겠다는 놈일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누가 뭐래도 아덴부르크 제일의 노예상인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한동안 전쟁이 없어 노예거래가 다소 느슨해지긴 했다. 전쟁이 있어야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된 자들을 한꺼번에 배당받을 수 있을 텐데……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일이었다.
어쨌거나 소득이 전만 못한 것은 사실이므로 사냥꾼들을 더 늘릴 생각 같은 것은 아직 없었다. 지금 거느리고 있는 놈들만 해도 2백은 넘어가고 있는데다 노임을 주고 필요할 때마다 간간이 빌려 쓰는 놈들도 있으니 아쉬울 것이 없다.
“어르신, 잠시 시간을 내주십시오.”
“누, 누구냐? 물러가라고 했을 텐데?”
“카비아니 가의 나칼 님과 함께 사냥을 하는 자입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카비아니 가의 나칼?”
그러고 보니 카비아니 가에 망나니 같은 녀석이 하나 더 있긴 했다. 그게 나칼이었나? 하도 티르에게 집중하다 보니 나머지 떨거지에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물론 그럴만한 인물도 없었고. 그러고 보면 나칼인지 뭔지는 그의 주의를 끌만큼 아름답게 생기지 않은 게 분명하다. 오죽하면 기억도 안 날까.
‘그런 놈의 수하가 무엇 때문에 나를 찾아왔지?’
나칼의 이름을 들먹인 것을 보면 그와 관련이 되거나 크게는 카비아니 가의 일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설마?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처참하게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들어와라.”
최대한 침착하게 소리쳐놓고 나리만은 반쯤 일으켰던 몸을 냉큼 도로 눕혔다. 그리곤 여유가 철철 흘러넘쳐 보이도록 모로 드러누워서는 탁자위의 포도를 툭툭 건드리며 기다리기 시작했다. 곧 퀴레스를 걸친 덩치 큰 사냥꾼 하나가 소리도 없이 방밖에서 걸어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넙죽 엎드려 절을 한다.
“다망하신 중에도 이 미천한 것에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리. 소인은 탄탄이라고 합니다.”
“탄탄?”
“예. 나칼 님과 함께 사냥을 하고 있습지요.”
“흐음, 나칼이라…… 들어는 본 이름이네. 카비아니 가의 손자가 아니시던가? 그런데 그런 분의 사냥꾼이 내게는 무슨 볼일이지?”
야야, 별로 착하지도 않은 그 낯짝 오래 두고 보고 싶지 않으니 얼른 용건만 간단히 말혀라잉.
큼직큼직한 골격과 크고 작은 상처가 그득한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은근히 눈이 괴로웠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있는 대로 눈을 찌푸린 채 손짓으로 용건을 재촉해 버렸다.
“크흠, 나리께 작은 도움을 청하고 싶습니다.”
“도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저 아주 ‘작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뜻이지요. 나리께서도 절대 손해는 보지 않으실 겁니다.”
“흥! 그거야 내가 판단할 문제이고. 알다시피 난 더 필요한 게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원하시는 게 있으시잖습니까. 오직 카비아니 가에만 있는 것을.”
“……!”
흠칫!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그러자 어느새 득의만만한 미소를 머금은 놈이 낮은 목소리로 은근히 말했다.
“그것의 처리에 대해서 의논을 드리고 싶은 거랍니다. 생각이 있으십니까?”
있다마다. 그것에 대해서라면 생각만이 아니라 의지도 있다. 저절로 귀가 솔깃해지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나리만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들어…… 보고 싶군.”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절대로. 흐흐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는 나리만의 입가에도 어느새 미소가 맺히고 있었다. 그날, 그들은 밤이 늦도록 긴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또르르르…… 탁!
말간 것이 또르르 구르다 쌓아놓은 책 더미에 막혀 딱 멈추어 섰다. 수정처럼 생겨서는 수정이 아니라고 주장하듯 반짝반짝 빛나는 오색을 품고 있는 구슬.
“샤나메라…….”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티르는 가장 먼저 샤나메를 찾아 손에 쥐었다. 바라는 한시도 품에서 떼어놓지 말라고 했지만 그 말을 곧이들을 그가 아니었다. 몸에 좋은 것도 아니고 어차피 그다지 이로울 것도 없어 보이는 것을 뭐 좋다고 날마다 품고 다니기 씩이나 하겠는가.
당연히 티르는 샤나메를 썩은 구슬처럼 방구석 어딘가에 처박아 놓고 까맣게 잊어 버렸다. 아까 전, 돌아오는 길에 그 시커먼 사내와 마주칠 때까지만 해도 정말로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를 본 순간 그리고 무심을 가장하고 스쳐지나온 순간 문득 떠오른 것이 바로 샤나메였다.
“맞아. 같은 느낌이었어. 분명히 같았어.”
강약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건 분명히 같은 느낌이었다. 샤나메를 손에 쥐었을 때와 그 의문의 검은 사내의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 몸속을 치달리던 전율은 나란히 한 가지 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독한 이끌림!’
손 안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샤나메를 잠시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쓸모는 없는 것이 위험하기만 할 거라며 내팽개쳐둔 건 사실 진짜 이유가 아니었다. 티르는 샤나메가 두려웠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대로 끌려들어갈 것만 같아서.
그 안에 든 무언가를 확인해 버리면 그대로 먹혀버릴 것만 같아서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또렷하게 그것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잊기 위해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내도 그랬다.
“잡아먹힐 것만 같았어.”
공포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색깔의 두려움을 주던 사람이었다. 심장이 알아보는 사람.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의 이끌림. 그러나 동시에 달아나고도 싶게 만드는 사람.
“누구지? 누굴까?”
티르는 자꾸만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작은 도련님!”
“응. 응?”
문밖에서 빼꼼 고개를 들이미는 시녀 덕분에 티르는 퍼뜩 상념에서 벗어났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하고 계세요? 식사하셔야지요. 어서 나오세요. 다들 기다리고 계신답니다.”
“아아…….”
“빨리 일어나세요. 어르신께도 같이 기다리고 계신단 말이에요.”
“알았어. 간다, 가. 넌 만날 나만 구박하더라, 키아?”
“흥! 제일 말을 안 들으시는 걸 그럼 어째요? 얼른 오세요.”
갓 스물을 넘긴 시녀 키아는 가끔 제가 친누이라도 된 듯 티르를 다루곤 한다. 처음엔 말도 잘 못하더니. 익숙해졌다는 뜻일까? 하기는 함께 지낸지도 벌써 오년이 넘어가고 있으니 익숙해질 만도 했다.
“뭐, 나쁘지 않아.”
형제라거나 누이라는 존재를 가지지 못해서인지 티르는 그런 그녀의 행동을 약간은 신선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바라나 나칼로부터 얻지 못하는 것을 받아 채우고 있는 듯한 기분도 들고 또오…… 기억도 나지 않는 엄마의 느낌도 상상할 수 있으니까.
“흐음, 엄마라니……. 바라가 들으면 유치하다고 비웃을 거야.”
괜히 얼굴을 붉히며 티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곤 잠시 망설이다 데구르르 구르는 책상위의 샤나메를 집어 들어 주머니에 넣고는 방을 나섰다.
한 달 만에 온 식구가 모였다.
지난달 내내 나칼은 사냥을 나가 있었고 티르는 근신을, 바라는 샤나메를 구한답시고 싸돌아다니는 바람에 내내 혼자 밥 먹는 게 일이었는데 모처럼 세 식구가 동시에 한가해져 한자리에 둘러앉은 것이다.
게다가 다들 그럭저럭 기분도 괜찮아 보였다.
바라야 외출을 하고 돌아온 뒤부터(정확하게는 샤나메를 가지고 돌아온 뒤부터) 뭐가 그리 좋은지 날마다 싱글벙글인 상태라 그러려니 하지만 늘 찌푸리거나 무표정하던 나칼마저도 간간이 미소를 짓는 것을 보니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기분이 엉망인 건 나뿐인 건가?’
판크라티온 경기장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티르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그 망할 나리만 놈만 아니었어도!
“끄응.”
“쯧. 이 새끼야, 땅 꺼지겠다. 밥 먹다 말고 웬 한숨이야?”
“내가 뭘?”
“그 새끼 참…… 오늘 낮에 뭔 일이 있었다며?”
“그게 벌써 영감 귀에까지 들어갔어?”
“당연하지. 내 주머니에서 돈이 나갔는데 그럼 모를까? 돈 잃고 사고치고 할 건 다 했으면서 왜 새삼 죽상을 하고 지랄이냐? 또 뭐가 맘에 안 들어서?”
재미있다는 듯 실실 웃는 얼굴로 놀려댄다.
바라는 늘 그랬다. 무슨 짓을 하든 크게 화를 내거나 난리법석을 떠는 법이 없었다. 이래도 옳거니, 저래도 옳거니. 어릴 땐 다 사고를 치는 법이라며 이런 거 저런 거 다 해봐라 하고 아예 격려(?)를 해주기까지 했다. 덕분에 오늘날 티르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다.
“전부다 바라 탓이야.”
“엥? 뭐가? 네놈이 사고를 친 게 내 탓이라는 소리냐? 왜?”
“쳇. 내 성격이 이렇게 된 게 다 바라 탓이니까 그렇지.”
억지라는 건 알지만 이렇게라도 책임을 전가하지 않으면 속이 터져 못 살 것만 같았다. 그래서 티르는 아예 대놓고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뭐라는 줄 알아?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래. 어쩌면 그렇게 성질이 똑같으냐고. 보고 닮을 사람이 없어서 바라를 닮았냐고 안타깝기 그지없다네? 어떻게 책임질 거야?”
“흥! 새삼스럽게 책임은 무슨? 아, 열심히 밥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있잖아. 그리고 네 성격이 어디가 어때서? 그만하면 훌륭하지.”
“웃기시네. 지랄 맞은 그 성격을 모르는 인간은 간첩밖에 없단다. 쳇, 이젠 안 되겠어. 변화가 필요해. 내 성격이 이렇게까지 삭막해진 건 역시 집안에 여자가 없기 때문이야. 바라, 장가가.”
“쿨럭!”
“풉!”
어지간히 충격적인 발언이었는지 바라와 나칼이 동시에 먹던 것을 뿜어내며 나자빠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티르는 다시 한 번 꿋꿋하게 주장했다.
“날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희생이란 걸 해보란 말이야. 이렇게 시커먼 사내들만 사는 건 옳지 않아.”
“쿨룩. 미친놈. 이 새끼야, 니들 아비 형제 본 걸로 내 결혼 생활은 볼 장 다 봤어. 뭐 좋을 게 있다고 또 그 짓을 하겠냐? 순서대로라면 이젠 니들 차례지. 난 한번 해봤으니 열외란 말이다.”
“그런 게 어딨어? 난 할머니가 필요해.”
“아나 쑥떡! 난 쭉쭉 빵빵한 영계랑 노는 게 좋다. 니들이나 노력해봐. 킥킥, 아니면 이번 생일을 기대해 보던가.”
“엉? 생일?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짓이라니? 다 깊은 애정의 발로지. 어쨌거나 기대해봐, 이 새끼야. 그나저나 나칼 네놈은 형편이 어떠냐?”
아직도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나칼을 향해 바라는 허를 찌르듯 불쑥 물었다.
“구질구질한 사냥꾼 놈들이랑 어울려 다니는 짓은 그만하고 제대로 자립을 해야지. 그래, 나이도 찼으니 장가를 가는 것도 좋고.”
“크흠, 아직은 생각이 없습니다.”
“왜? 왜 생각이 없느냔 말이다.”
“아직 할 일이 많지 않습니까?”
“흥! 네 할 일이 뭐가 그리 많아? 떼 지어 다니며 사고치는 것도 일이더냐? 미친놈, 이젠 더 이상 어리지도 않은 것이 하는 짓이라곤…… 쯧쯧. 이 새끼야, 네 할아비 나이 드는 꼴을 봐서라도 얼른 장가가 애새끼나 하나 떡하니 나아주는 게 도리지. 그것까지 저 어린 티르 놈에게 바라야 하냐?”
노골적인 편애에 나칼은 울컥 숨이 막혔다.
같은 사고를 쳐도 티르는 귀엽고 자신은 미친놈이 되는 것 따위야 이미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긴 하지만 그것마저도 이젠 점점 더 견뎌내기가 힘들어지고 있었다.
어차피 결심한 일도 있고 해서 마지막 순간까지 잘해야지 하던 생각도 순식간에 무너지고 그 사이로 지독한 증오가 스며들었다. 나칼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시죠. 뭘 더 바라십니까? 제 자식이라고 특별히 예뻐하실 분도 아니면서.”
“미친놈, 말하는 꼬락서니하고는. 성질머리가 그 따위이니 예뻐할 수가 있나. 이 새끼야, 장가가기 싫으면 대신 어울려 다니는 사냥꾼들 치워. 더 이상은 그놈들을 내 집안에서 보기 싫다.”
“……!”
“왜 대답이 없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흥! 암만 봐도 그놈들은 아니야. 눈들이 영 마음에 안 든단 말이다. 정 데리고 다닐 놈들이 없으면 집안의 무사들과 어울려 보던가. 그게 백번은 낫겠다.”
무사들과 어울려 보려고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이 다가가기도 전에 그들은 이미 티르를 챙기고 있었다. 티르에게는 하루 종일 달라붙어 이것저것 가르쳐 주면서 그에겐 어쩌다 한번 적선하듯 시선을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농장 관리인들이나 소작농들은 또 어떤가?
그가 가면 굽실거리면서도 일부러 다가들려고 하지 않는 폼이 역력한데 티르에겐 너도나도 달려가 말을 붙이기 바빴다. 집안의 사냥꾼이나 장사치들은 물론이고 시녀들이며 노예들까지도 죄다 비슷했다.
그를 내몬 것은 바로 바라와 티르였다. 그러면서 이젠 몇 안 되는 지기들마저 떼어놓겠다고? 다 빼앗아놓고 더 빼앗겠다고?
‘티르, 네 이놈! 두고 보아라. 더 이상은 빼앗기지 않겠다. 이 웃기지도 않는 네놈의 형 노릇은 그만 둘 테다. 이제 더는 안 해!’
소리 없는 절규가 갈 곳을 몰라 방황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