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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참변(1)]
슬픔? 아니 슬픔이라기보다 공포에 가까웠다. 나는 그때 분명히 공포를 느끼고 있었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위대한 샤 티르의 수줍은 고백 中-
생일 날 아침, 티르는 꿈을 꾸었다.
말 울음소리가 요란한 초원에서 바람을 맞고 있는 꿈. 붉은 비가 내리고 도망치라는 누군가의 절규가 하늘을 울리는.
생각해 보니 지난해에도 그랬고 지지난해에도 그랬다. 그럼 그게 연중행사였단 말인가?
“아! 싫다, 정말.”
아직 침대에 누운 채 티르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며칠 전에도 꾸긴 했지만 생각할수록 도대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꿈이었다. 휙휙 스쳐가는 몇몇 장면만으로 이루어진 주제에 잘도 사람 마음을 들쑤신다.
“쳇! 뭐냐고, 대체.”
흠뻑 젖은 베개를 집어던지고 부은 눈을 거칠게 닦아냈다.
정확한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는 죽어가는 어떤 여자의 아래에 깔린 채 그녀의 최후를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겠다는 듯 아주 담담한 얼굴로.
시커멓게 벌어진 상처를 통해 그의 온몸으로 피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는데 우습게도 그는 그것을 비라고 여겼다. 웅덩이를 이루며 고여 마침내 코와 입을 막는 그것 때문에 자꾸 숨이 막히는데도 피하지 못한 채 버둥거린다. 생명의 빛이 점점 꺼져가는 눈 아래에서 살기 위해 그렇게 처절하게 몸부림을 친 것이다.
그는 그 죽어가는 눈을 마주한 채 누워 소리가 나지 않는 유언을 오랫동안 듣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곧 암흑. 휭휭 우는 바람소리. 멀어지는 말발굽소리. 두근두근 뛰어대는 심장소리. 소리만 잔뜩 듣다 마침내 잠에서 깨어났다.
“무슨 말을 더 한 것 같은데…….”
입모양을 되새김질 해봐도 무슨 말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도망치라는 말이 가져다 준 충격이 너무 커서 나머지는 저절로 희미해진 것일까?
“돌겠네, 진짜. 왜 하필이면 그런 꿈을 꾸는 거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손으로 꾹꾹 누르며 티르는 꾸물꾸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키가 클 징조도 아니고 대체 이게 뭐하자는 짓인지 모르겠다.
‘혹시 어렸을 때의 기억일까?’
꿈에라도 그런 경험을 했을 리는 없지만 정기적으로 꾸는 걸 보면 글쎄…… 혹시 또 모를 일이었다.
시녀에게 부탁해 찬물로 얼굴을 닦고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티르는 내내 꿈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덕분에 누군가가 다가와 등짝을 탁 때렸을 땐 그야말로 죽을 듯이 놀라버리고 말았다.
“으악!”
“어라? 뭘 그렇게 놀라는 거야, 작은 도련님?”
“허, 막시? 뭐, 뭐야 갑자기 나타나서는?”
“갑자기라니? 등 뒤에서 열심히 불러도 대답이 없어서 건드린 거잖아.”
“그, 그랬나?”
“뭐야, 정말로 못 들었나보네. 호오, 뭣 때문에 아침부터 이렇게 넋이 나간 몰골인 거지?”
“넋이 나가긴 누가? 그냥 좀 멍한 것뿐이야. 잠을 좀 설쳐서 그런 거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하다 문득 그에게 꿈 얘기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막시무스도 일단은 어른이고 어른의 관점에서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이란 게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저기 말이야, 막시. 내가 밤에 꿈을 꾸었거든.”
“꿈?”
“그러니까 말이야…….”
간밤의 꿈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자 막시무스는 잠시 얼굴을 굳히더니 곧 이런 말을 했다.
“티르, 네가 그런 꿈을 꾼 건 아마도 오늘이 특별한 날이기 때문인 것 같아. 그 꿈 이야기는 당분간 아무한테도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왜?”
“어르신께서 슬퍼하실 테니까. 잊은 거냐? 오늘이 네 생일이긴 하지만 동시에 또 어떤 날인지를?”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그의 생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기도 했다. 나칼과 자신의 아버지들이 사냥에서 돌아오지 못한 날.
“끄응. 그랬구나. 어쩐지 생일날만 되면 꾼다했지. 역시 아버지의 일 때문에 그런 거였어. 근데 솔직히 말하면 그것도 기분 나빠. 왜 하필 내 생일날 돌아가셨담?”
“하하, 그게 어디 사람 마음대로 되는 일이냐? 그보다 벌써부터 집안이 북적대고 있던데 얼른 나가보지 그래? 모르긴 해도 굉장한 선물들이 도착하고 있을 걸?”
“음, 그러고 보니 바라도 기대하라고 하긴 했었지. 그럼 가볼까?”
꿈 따위는 벌써 잊은 듯 티르는 히죽 웃는 얼굴로 달려 나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막시무스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워낙 어릴 때의 일이라 그대로 잊은 줄만 알았는데…….
“어르신께서도 알고 계시려나?”
어쨌거나 바라를 만나보기는 해야 했다. 며칠 전에 찾아왔었던 손님에 대해서도 알려야했고 무엇보다 바라의 생각을 알아야 했으니까.
막시무스는 걸음을 재촉했다.
오기 전에 미리 기별을 넣어 독대를 허락받은 터라 본채로 들어서면서도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대리석 기둥이 서있는 회랑을 지나 곧바로 바라의 서재로 들이닥쳤다.
준비성이 철저한 양반답게 바라는 주위를 죄다 물려놓은 채 혼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싱글 웃는 얼굴이었다. 요 며칠 계속 그런 얼굴이긴 했지만 어쩐지 오늘은 그마저도 심상치 않게만 보인다.
바라는 그 모르게 일을 벌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하 투란에서 온 물건‘이라는 소리가 나올 리가 없는 거다. 분명히 생일 선물이랍시고 티르에게 줄 무언가를 하 투란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것도 대단히 어마어마한 것을. 그것이 지난 며칠 동안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네가 웬일로 날 다 보자고 하냐?”
“끄응. 시치미 떼지 마십시오. 대체 하 투란에서 뭘 가져오신 겁니까?”
“엉? 네가 그 일을 어떻게 알아? 티르가 말하던?”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단단히 단속을 해놓으셨으면서 잘도 물으십니다. ……손님이 찾아왔었습니다. 하 투란에서 왔다고 하더군요. 작은 도련님의 생일 선물을 가져왔다고 하면서 이상한 말을 남겼기에 온 겁니다.”
“무슨 말?”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것일까? 바라는 어느새 진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더 이상 말을 돌려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아 막시무스는 며칠 전 다녀간 하라 일행에 대한 일을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대체 뭘 가져오신 겁니까?”
“알 것 없다.”
“어르신!”
“그 일에 대해서는 너도 입을 다무는 게 좋을 게다, 막시무스. 하 투란에서 왔다는 자들에게는 사람을 붙여 티르에게 접근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그런다고 해서 일이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자는 목숨을 걸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럼 너도 목숨을 걸어!”
서슬 퍼런 고함에 막시무스는 기가 질려버렸다. 조용해진 그를 향해 바라가 말했다.
“티르메네스는 내 운명이다. 어이없게 죽어버린 두 아들놈들 대신 신은 내게 그 녀석을 주었어.”
“우연이었을 뿐입니다.”
“우연? 그 넓은 초원 한복판에서, 그것도 시체 밑에서 아이를 발견할 확률이 얼마나 되느냐? 운명이었다. 내게도, 네게도 티르메네스는 운명인 거야.”
바라는 지그시 눈을 감고 그날을 회상을 했다.
두 아들이 나란히 사냥을 떠난 지 보름쯤 되던 날,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어린 막시무스가 혼자 돌아왔다. 겨우 열넷. 아비를 따라 처음으로 사냥길을 따라나섰던 아이가 혼자 그 먼 길을 달려 구원을 요청하러 왔을 때 바라는 난생 처음으로 눈앞이 캄캄해지는 경험을 했다.
이미 늦었으면 어쩌나, 누구 하나라도 잃으면 어쩌나.
입이 타고 애가 타고 간이 졸아들었다. 그리고 그 끔찍한 상상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났을 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해 짧은 순간이나마 정신을 놓고 말았다.
“누군가가 교묘하게 유인한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냥꾼들이 샨타이 족의 영역 안으로 들어갔을 리가 없습니다.”
“유인을 당했든, 싸움에 졌든…… 약했던 건 내 아들들이었다. 어리석어 당한 거다. 무의미한 일도 아니었다. 그 일로 나는 절망을 배웠고 너는 강해졌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티르메네스를 얻었다.”
잔인한 샨타이 족의 손에 죽은 아들들의 시체를 수습해 돌아오던 길에 바라는 운명처럼 티르메네스를 발견했다. 을씨년스럽게 내려앉는 땅거미를 등에 지고 애써 울음을 참으며 돌아오던 길, 문득 초원을 향해 고개를 든 바라의 눈에 황금빛 빛 무리가 들어온 것은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자객이었는지 아니면 강도였는지 알 길은 없었다. 작은 마차는 부서졌고 말들은 흩어졌다. 끔찍하게 난자당한 몇 구의 시신 아래에서 방긋 웃고 있는 아이를 발견한 순간 바라는 그만 울고 말았다. 참았던 눈물이, 절규가 그제야 터져 나와 한참을 울다가 간신히 아이를 안아들었다.
그때 그 자리에 어린 막시무스가 있었다.
아비를 잃은 막시무스와 자식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바라는 티르메네스를 얻음으로써 그렇게 간신히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두 아들 대신이었다. 내게 티르메네스는 그런 의미다. 이미 운명으로 받아들였는데 포기할 순 없지.”
“어르신께는 운명일지 몰라도 제게는 책임입니다. 대체 뭘 구해다 주신 겁니까?”
“알 것 없다. 그건 너라고 해도 알려줄 수 없어.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것으로 인해 그 아이가 날개를 얻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
그 말을 끝으로 바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본 막시무스는 결국 그를 통해서는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였다. 한창 예민해진 그의 신경이 문밖에 서성대는 희미한 인기척을 잡아챘다.
“누구냐!”
버럭 소리치며 막시무스는 재빨리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한발 늦어 복도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분명히 누군가가 있었는데…….
“젠장!”
회랑에 늘어선 거대한 대리석 기둥 뒤로 몸을 숨긴 키아는 숨 쉬는 일마저 멈춘 채 질끈 눈을 감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단 한순간만 늦었더라도 문 앞에서 그대로 잡힐 뻔 했다.
그녀는 한손으로 입을 막고 한손은 거칠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내리 눌렀다. 이 자리에서 들키면 자신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게 되리라. 그만큼 오늘 들은 이야기는 엄청났다. ‘주인‘에게 알려야 한다는 것 자체가 두려움으로 다가올 정도다. 그러나 알리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미안해요, 티르메네스님.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제가 죽어요.’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막시무스가 도로 방안으로 사라지자 키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곧 잔뜩 기척을 죽인 걸음으로 조심스럽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역시 부잣집 녀석의 생일은 다르구나.”
속속 도착하는 선물들을 보며 다니무스는 한탄했다.
그래, 대 카비아니 가의 작은 도련님께 바치는 선물이라 이거지? 작은 것이라도 어느 것 하나 평범하지 않은 것이 없다보니 역시 사람은 있고 봐야 한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고 있었다. 대체 우리 아버님은 이제껏 뭘 하셨나. 돈 좀 두둑이 모아두지 않으시고.
“우어, 저것 좀 봐. 보석을 박은 허리띠잖아? 근사하지, 티르? 응응?”
“흐음, 뭐 별로.”
“뭐냐, 그 시큰둥한 반응은? 호강이 넘쳐서 이젠 요강스럽다는 뜻이냐?”
“미친놈, 지랄은…….”
호들갑을 떠는 다니무스에 비해 티르는 전혀 기운이 없었다.
생일이라고 일찌감치 온갖 꽃으로 치장한 방으로 모셔져 호사스런 음식상을 받았다. 그리고 속속 도착하는 선물들을 착착 받아 대강 눈도장을 찍어준 다음 마치 전시하듯 방 한쪽에 늘어놓는 일을 한동안 반복했다.
바다를 건너온 고운 비단, 상아로 만든 장식품들, 조랑말부터 혈통이 좋은 다크호스까지 착실하게 선물로 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각종 보석이며 책들과 무기들도 빠지지 않았다.
무기류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은 왜 이리도 많은지 검부터 활까지 무기라고 생긴 것들은 종류별로 다 들어오고 있을 정도였다. 선물도 많았지만 찾아드는 사람은 더 많았다.
대체 어떻게 안 건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이 손님이랍시고 들이닥쳐 거하게 축하인사를 하고 있었다. 장사꾼, 노예상인, 지주들의 집사 혹은 무사, 사냥꾼들……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덕분에 티르는 일찌감치 지쳐버렸고 누가 보거나 말거나 그 길로 항복을 선언하고 소파위로 길게 늘어져 버린 참이었다.
“하암, 재미없어.”
“이 부분에선 확실히 취향이 다른가 보다. 난 지금 재미있어 죽겠거든.”
“어련하실까.”
“아아, 저건 영웅 헤카메테 이야기 전집이잖아? 갖고 싶었던 건데…… 우어어, 실록도 있다.”
“훗! 어이없는 놈.”
보석 박힌 허리띠가 굉장하네 어쩌네 노래를 하던 것도 잊고 다니무스는 어느새 책 무더기에 코를 박고 있었다. 누가 서기관의 아들내미 아니랄까봐 어지간히도 책을 좋아하는 녀석이었다.
“도련님, 나리만 나리께서 선물을 보내오셨습니다.”
“뭐? 누구?”
익숙한 이름에 늘어져 있던 티르가 발딱 몸을 일으켰다. 그 처죽일 놈이!
“당장 내다버려!”
“그, 그래도 선물이라잖아요. 호호, 일단 받으세요, 도련님. 선물은 아무 죄도 없는 거니까요. 네?”
“그래, 티르. 선물이 무슨 죄냐? 일단 받자? 응? 거참, 그 부자 나리가 뭘 보냈는지 무지 궁금하네.”
이름을 듣기가 무섭게 이맛살을 찌푸리는 티르를 무시하고 다니무스는 시녀에게 눈짓을 해 냉큼 선물을 들여오게 만들었다. 주인과는 달리 빼빼 마른 중년인 하나가 부담스러워 보이는 큰 보따리를 하나 받쳐 들고 비틀비틀 걸어 들어왔다.
“뵙게 되어 광영입니다, 도련님. 저는 나리만 나리를 모시고 있는 나무리라고 하는 자입니다. 저희 나리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마음에 드실 거라고, 꼭 받아주시길 바란다는 말씀도 함께 전하라고 하셨지요.”
“흥!”
아나 쑥떡! 나리만이 보낸 거라면 금뎅이도 똥으로 보일 지경인데 퍽이나 마음에 들겠다. 인상을 구기고 고개를 홱 돌리거나 말거나 나무리인지 나무수리인지 하는 놈은 그의 앞으로 보가 씌워진 예의 큼직한 물건을 들이밀었다.
“오, 큰데? 뭘까? 열어본다?”
“흥!”
외면하는 티르 대신 다니무스가 냉큼 보를 치웠다. 그러자 드러난 것은…… 1큐빗 정도 되는 길이의 눈부신 금덩이. 그냥 금덩이도 아닌 장미꽃을 물고 묘한 자세로 누워있는 나리만의 황금 동상이었다. 황금 동상 어쩌고 하더니 나리만은 티르의 동상이 아닌 제 동상을 만들어서 보내온 것이다.
순간 왁자지껄하던 방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당황한 다니무스가 들고 있던 보를 가져다 슬그머니 도로 덮었지만 그런다고 해서 이미 본 것이 안 본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티르는 다시 한 번 눈이 뒤집어지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이 새끼가!”
“앗, 티르!”
“죽여 버리겠어! 이 새끼, 죽어라! 죽어, 죽어, 죽어엇!”
선물로 들어온 칼 중 하나를 잡아챈 티르는 미친 듯이 나리만의 동상을 난자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살벌하고 엄청난지 누구도 나서서 말릴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
“푸웁! 푸하하하하!”
그 광기의 현장에 난데없는 웃음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크고 시원하게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팔이 빠져라 황금 동상을 난도질하던 티르조차도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돌아봤을 정도로 유쾌한 웃음소리.
“여어~ 다시 만나게 되었군, 꼬마.”
웃음소리의 주인이 한쪽 손을 가볍게 들어 보이며 아는 척을 해왔다. 떡대 같은 시커먼 무사 둘을 거느리고 나타나 당당하게 웃고 있는 문제의 인물은 바로…… 슈라였다. 판크라티온 경기장에서 반강제로 자리를 양보 당했던 그 까만 머리의 청년.
티르는 청년을 금방 알아보았다. ‘절대 보통 신분은 아니야.’라고 속삭이던 막시무스의 말도 동시에 기억해냈다. 근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꼬마?”
“아아, 사소한 건 그냥 넘어가주는 게 예의다, 꼬마.”
“하! 뭐야, 당신?”
“슈라.”
“뭐?”
“당신이 아니고 슈라란 말이다. 슈라 혹은 슈라 형님. 둘 중에 하나가 좋겠다. 아니면 허니도 좋고. 하하하!”
“허, 허, 허…… 미친 거야?”
딴에는 농담이랍시고 덧붙인 한마디가 순식간에 그를 미친놈으로 둔갑시키고 말았다. 그만큼 충격적이고도 썰렁했다. 다시는 농담 같은 거 하지 말았으면 싶을 정도로.
티르는 너덜거리는 나리만의 황금 동상을 발로 걷어찬 다음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똑바로 섰다. 청년이 그보다 머리 하나 반 정도는 더 컸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우러러 보는 자세가 되어 버렸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봐도 서글서글한 인상 하나는 봐줄만한 얼굴이었지만 별로 친하고 싶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어쩐지 자신보다 조금 그러니까 아주 조금 잘나 보이는 것 같아서.
‘이 인간이 언제 봤다고 불쑥 찾아와서 지랄이지? 아니 우리 집은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아니 뭐…… 찾으려고 마음만 먹는다면야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또 카비아니 가의 저택이었다. 아덴부르크의 시민치고 카비아니 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길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묻기만 해도 단박에 올 수 있었으리라.
다만 궁금한 것은 어떻게 안으로 들어왔으며 왜 왔느냐 하는 것. 한마디로 티르는 그의 용건이 대단히 궁금했다.
“어떻게 들어왔지? 정문에서 그냥 들여보내 주던가?”
“응.”
“뭣?”
“친구의 생일 선물을 가져왔다고 했더니 그냥 들여보내주더군. 생각보다 경비가 허술했다. 아덴부르크 제일의 부잣집이라고 해서 조금 기대했는데 말이야. 앞으로 그 점에 대해 신경을 좀 쓰는 게 어떨까?”
“제, 젠장! 그 자식들이 미쳤나.”
노골적인 충고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화가 났다.
멍청한 자식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신분 하나 확인하지 않고 낯선 사람을 그냥 막 들여보내다니. 선물만 들고 있으면 강도한테도 고분고분 문을 열어줄 놈들이 아닌가. 화가 나다 못해 순간적으로 배신감마저 들었다. 그러나 성질을 부리는 것은 잠시 뒤로 미루기로 했다.
일단은 눈앞에 닥친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티르는 눈앞에서 싱글싱글 웃고 있는, 자칭 슈라라는 청년을 향해 이렇다할 말 한마디 없이 불쑥 손부터 내밀었다.
“응? 뭐지?”
“선물 가져왔다며?”
“킥. 물론. 하지만 그냥은 못 주겠는데?”
“뭐라?”
얼래? 이건 또 무슨 경우람? 생일 선물을 가져왔다는 명목으로 정문을 통과한 주제에 막상 달라니까 그냥은 못 주겠다?
티르의 미간이 다시 팍 일그러졌다. 어째 돌아가는 시츄에이션이 점점 더 마음에 들지 않고 있었다. 티르는 본능적으로 그가 자신에게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일방적으로 줄 생각은 없고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것도 있을 것이다…… 뭐, 이를테면 그런 뜻인 거다.
이런 경우엔, 선물 아니 선물이든 뭐든 받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조건이 붙는 선물은 아주 거하거나 위험해서 여차하면 발목을 잡힐 수도 있으므로. 티르는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어차피 아쉬울 것이 없는 그였다.
“선물 필요 없으니까 그냥 가.”
“저런. 난 꼭 주고 싶은데?”
“받을 생각 없어졌어. 더구나 당신은 불청객이잖아?”
“훗, 다시 말하지만 사소한 것에는 신경 쓰지 말자고, 꼬마. 좋아, 처음이니 내가 한번은 양보하지.”
아주 큰 인심을 쓴다는 듯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리더니 그는 곧 품을 뒤져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푸른색 비단 주머니가 티르의 손바닥위에 얌전히 놓여졌다. 그리고 불쑥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말.
-도움이 필요할 때 이것을 가지고 카도니아로 오너라. 내 이름은 슈라 알렉산드로스 아문. 잊지 말아라, 꼬마.
“카도니아?”
티르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여기는 동부 투란 제국. 그럼 카도니아는? 당연히 적국이다. 이곳 동부 투란 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카도니아 제국인 것이다. 그런데 저 인간이 카도니아 사람이란다.
“너어……!”
“하하하, 볼일 다 봤으니 이만 가볼까? 그럼 다음에 또 보자, 꼬마. 곧!”
미처 붙잡을 새도 없이 휑하니 사라지는 그의 잘난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티르는 새삼 어이없어 했다. 여차하면 적국의 간첩으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이대로 사라지다니!
“어쩐지 처음부터 재수 없어 보인다 했어. 젠장!”
손에 든 물건을 품에 넣지도, 그렇다고 과감히 버리지도 못한 채 티르는 그렇게 멍하니 굳어가고 있었다.
“티르, 저 치가 뭐래냐? 그건 또 뭐고?”
“묻지 마. 괴롭다.”
“괴로우면 내가 대신 열어봐 주마. 이리 줘봐.”
“안 돼! 이건 그러니까…… 돌려줄 거야. 그러니 신경 끄라고.”
호기심이 덕지덕지 매달린 얼굴로 주머니를 흘깃 거리는 다니무스를 외면하고 티르는 냉큼 슈라가 남긴 주머니를 품속에 넣어버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받아버렸으니. 더구나 돌려준다고 해서 얌전히 받을 인간도 아니었다.
돌려받을 거면 애초에 주지도 않았으리라.
짧은 순간이었지만 티르는 슈라에게서 함부로 흔들 수 없는 단호함을 읽었다. 너무도 강해 흡사 명령을 받은 듯한 느낌이었다.
‘카도니아로 오너라.’
확실히 부탁이 아닌 명령이었다.
“뭔데 돌려준다는 소리를 다 하냐? 천하의 티르메네스님이?”
“어? 막시무스!”
“엄청난 선물이라도 받은 모양이지?”
“천만에. 그 반대.”
들어오기는 한참 전에 들어왔으면 무엇을 했는지 이제야 어슬렁어슬렁 나타난 막시무스를 향해 티르는 잽싸게 다가갔다. 그리곤 다니무스의 의아한 시선을 뒤로한 채 영문을 몰라 하는 그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왔다.
“골치 아프게 됐어.”
“뭐가? 그새 무슨 일이 있었나?”
“그 자식 아니, 판크라티온 경기장에서 본 그 ‘대단한 신분‘일 거라던 자식 기억나? 요란한 검을 차고 있었잖아.”
“아아! 그 사람은 왜? 설마…….”
“맞아. 어떻게 알고 왔는지 방금 전에 그 자식이 다녀갔어. 이걸 선물이랍시고 던져주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졌지.”
품안에 든 주머니를 삐죽 보여주며 티르는 냉큼 귓속말로 덧붙였다.
“그 자식 카도니아에서 왔대.”
“뭣?”
“도움이 필요하면 이걸 가지고 찾아오라나? 누굴 간첩으로 만들려고……. 완전히 어이상실이야. 게다가 그 넓은 땅에서 저를 어떻게 찾으라고 대뜸 이름만 가르쳐주고 오라 마라야? 이름이 뭐라더라? 슈라 알렉산드로스…….”
“아문?”
“어? 아는 이름이야?”
“마, 맙소사!”
막시무스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슬픔? 아니 슬픔이라기보다 공포에 가까웠다. 나는 그때 분명히 공포를 느끼고 있었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위대한 샤 티르의 수줍은 고백 中-
생일 날 아침, 티르는 꿈을 꾸었다.
말 울음소리가 요란한 초원에서 바람을 맞고 있는 꿈. 붉은 비가 내리고 도망치라는 누군가의 절규가 하늘을 울리는.
생각해 보니 지난해에도 그랬고 지지난해에도 그랬다. 그럼 그게 연중행사였단 말인가?
“아! 싫다, 정말.”
아직 침대에 누운 채 티르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며칠 전에도 꾸긴 했지만 생각할수록 도대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꿈이었다. 휙휙 스쳐가는 몇몇 장면만으로 이루어진 주제에 잘도 사람 마음을 들쑤신다.
“쳇! 뭐냐고, 대체.”
흠뻑 젖은 베개를 집어던지고 부은 눈을 거칠게 닦아냈다.
정확한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는 죽어가는 어떤 여자의 아래에 깔린 채 그녀의 최후를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겠다는 듯 아주 담담한 얼굴로.
시커멓게 벌어진 상처를 통해 그의 온몸으로 피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는데 우습게도 그는 그것을 비라고 여겼다. 웅덩이를 이루며 고여 마침내 코와 입을 막는 그것 때문에 자꾸 숨이 막히는데도 피하지 못한 채 버둥거린다. 생명의 빛이 점점 꺼져가는 눈 아래에서 살기 위해 그렇게 처절하게 몸부림을 친 것이다.
그는 그 죽어가는 눈을 마주한 채 누워 소리가 나지 않는 유언을 오랫동안 듣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곧 암흑. 휭휭 우는 바람소리. 멀어지는 말발굽소리. 두근두근 뛰어대는 심장소리. 소리만 잔뜩 듣다 마침내 잠에서 깨어났다.
“무슨 말을 더 한 것 같은데…….”
입모양을 되새김질 해봐도 무슨 말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도망치라는 말이 가져다 준 충격이 너무 커서 나머지는 저절로 희미해진 것일까?
“돌겠네, 진짜. 왜 하필이면 그런 꿈을 꾸는 거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손으로 꾹꾹 누르며 티르는 꾸물꾸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키가 클 징조도 아니고 대체 이게 뭐하자는 짓인지 모르겠다.
‘혹시 어렸을 때의 기억일까?’
꿈에라도 그런 경험을 했을 리는 없지만 정기적으로 꾸는 걸 보면 글쎄…… 혹시 또 모를 일이었다.
시녀에게 부탁해 찬물로 얼굴을 닦고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티르는 내내 꿈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덕분에 누군가가 다가와 등짝을 탁 때렸을 땐 그야말로 죽을 듯이 놀라버리고 말았다.
“으악!”
“어라? 뭘 그렇게 놀라는 거야, 작은 도련님?”
“허, 막시? 뭐, 뭐야 갑자기 나타나서는?”
“갑자기라니? 등 뒤에서 열심히 불러도 대답이 없어서 건드린 거잖아.”
“그, 그랬나?”
“뭐야, 정말로 못 들었나보네. 호오, 뭣 때문에 아침부터 이렇게 넋이 나간 몰골인 거지?”
“넋이 나가긴 누가? 그냥 좀 멍한 것뿐이야. 잠을 좀 설쳐서 그런 거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하다 문득 그에게 꿈 얘기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막시무스도 일단은 어른이고 어른의 관점에서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이란 게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저기 말이야, 막시. 내가 밤에 꿈을 꾸었거든.”
“꿈?”
“그러니까 말이야…….”
간밤의 꿈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자 막시무스는 잠시 얼굴을 굳히더니 곧 이런 말을 했다.
“티르, 네가 그런 꿈을 꾼 건 아마도 오늘이 특별한 날이기 때문인 것 같아. 그 꿈 이야기는 당분간 아무한테도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왜?”
“어르신께서 슬퍼하실 테니까. 잊은 거냐? 오늘이 네 생일이긴 하지만 동시에 또 어떤 날인지를?”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그의 생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기도 했다. 나칼과 자신의 아버지들이 사냥에서 돌아오지 못한 날.
“끄응. 그랬구나. 어쩐지 생일날만 되면 꾼다했지. 역시 아버지의 일 때문에 그런 거였어. 근데 솔직히 말하면 그것도 기분 나빠. 왜 하필 내 생일날 돌아가셨담?”
“하하, 그게 어디 사람 마음대로 되는 일이냐? 그보다 벌써부터 집안이 북적대고 있던데 얼른 나가보지 그래? 모르긴 해도 굉장한 선물들이 도착하고 있을 걸?”
“음, 그러고 보니 바라도 기대하라고 하긴 했었지. 그럼 가볼까?”
꿈 따위는 벌써 잊은 듯 티르는 히죽 웃는 얼굴로 달려 나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막시무스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워낙 어릴 때의 일이라 그대로 잊은 줄만 알았는데…….
“어르신께서도 알고 계시려나?”
어쨌거나 바라를 만나보기는 해야 했다. 며칠 전에 찾아왔었던 손님에 대해서도 알려야했고 무엇보다 바라의 생각을 알아야 했으니까.
막시무스는 걸음을 재촉했다.
오기 전에 미리 기별을 넣어 독대를 허락받은 터라 본채로 들어서면서도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대리석 기둥이 서있는 회랑을 지나 곧바로 바라의 서재로 들이닥쳤다.
준비성이 철저한 양반답게 바라는 주위를 죄다 물려놓은 채 혼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싱글 웃는 얼굴이었다. 요 며칠 계속 그런 얼굴이긴 했지만 어쩐지 오늘은 그마저도 심상치 않게만 보인다.
바라는 그 모르게 일을 벌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하 투란에서 온 물건‘이라는 소리가 나올 리가 없는 거다. 분명히 생일 선물이랍시고 티르에게 줄 무언가를 하 투란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것도 대단히 어마어마한 것을. 그것이 지난 며칠 동안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네가 웬일로 날 다 보자고 하냐?”
“끄응. 시치미 떼지 마십시오. 대체 하 투란에서 뭘 가져오신 겁니까?”
“엉? 네가 그 일을 어떻게 알아? 티르가 말하던?”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단단히 단속을 해놓으셨으면서 잘도 물으십니다. ……손님이 찾아왔었습니다. 하 투란에서 왔다고 하더군요. 작은 도련님의 생일 선물을 가져왔다고 하면서 이상한 말을 남겼기에 온 겁니다.”
“무슨 말?”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것일까? 바라는 어느새 진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더 이상 말을 돌려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아 막시무스는 며칠 전 다녀간 하라 일행에 대한 일을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대체 뭘 가져오신 겁니까?”
“알 것 없다.”
“어르신!”
“그 일에 대해서는 너도 입을 다무는 게 좋을 게다, 막시무스. 하 투란에서 왔다는 자들에게는 사람을 붙여 티르에게 접근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그런다고 해서 일이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자는 목숨을 걸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럼 너도 목숨을 걸어!”
서슬 퍼런 고함에 막시무스는 기가 질려버렸다. 조용해진 그를 향해 바라가 말했다.
“티르메네스는 내 운명이다. 어이없게 죽어버린 두 아들놈들 대신 신은 내게 그 녀석을 주었어.”
“우연이었을 뿐입니다.”
“우연? 그 넓은 초원 한복판에서, 그것도 시체 밑에서 아이를 발견할 확률이 얼마나 되느냐? 운명이었다. 내게도, 네게도 티르메네스는 운명인 거야.”
바라는 지그시 눈을 감고 그날을 회상을 했다.
두 아들이 나란히 사냥을 떠난 지 보름쯤 되던 날,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어린 막시무스가 혼자 돌아왔다. 겨우 열넷. 아비를 따라 처음으로 사냥길을 따라나섰던 아이가 혼자 그 먼 길을 달려 구원을 요청하러 왔을 때 바라는 난생 처음으로 눈앞이 캄캄해지는 경험을 했다.
이미 늦었으면 어쩌나, 누구 하나라도 잃으면 어쩌나.
입이 타고 애가 타고 간이 졸아들었다. 그리고 그 끔찍한 상상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났을 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해 짧은 순간이나마 정신을 놓고 말았다.
“누군가가 교묘하게 유인한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냥꾼들이 샨타이 족의 영역 안으로 들어갔을 리가 없습니다.”
“유인을 당했든, 싸움에 졌든…… 약했던 건 내 아들들이었다. 어리석어 당한 거다. 무의미한 일도 아니었다. 그 일로 나는 절망을 배웠고 너는 강해졌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티르메네스를 얻었다.”
잔인한 샨타이 족의 손에 죽은 아들들의 시체를 수습해 돌아오던 길에 바라는 운명처럼 티르메네스를 발견했다. 을씨년스럽게 내려앉는 땅거미를 등에 지고 애써 울음을 참으며 돌아오던 길, 문득 초원을 향해 고개를 든 바라의 눈에 황금빛 빛 무리가 들어온 것은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자객이었는지 아니면 강도였는지 알 길은 없었다. 작은 마차는 부서졌고 말들은 흩어졌다. 끔찍하게 난자당한 몇 구의 시신 아래에서 방긋 웃고 있는 아이를 발견한 순간 바라는 그만 울고 말았다. 참았던 눈물이, 절규가 그제야 터져 나와 한참을 울다가 간신히 아이를 안아들었다.
그때 그 자리에 어린 막시무스가 있었다.
아비를 잃은 막시무스와 자식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바라는 티르메네스를 얻음으로써 그렇게 간신히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두 아들 대신이었다. 내게 티르메네스는 그런 의미다. 이미 운명으로 받아들였는데 포기할 순 없지.”
“어르신께는 운명일지 몰라도 제게는 책임입니다. 대체 뭘 구해다 주신 겁니까?”
“알 것 없다. 그건 너라고 해도 알려줄 수 없어.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것으로 인해 그 아이가 날개를 얻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
그 말을 끝으로 바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본 막시무스는 결국 그를 통해서는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였다. 한창 예민해진 그의 신경이 문밖에 서성대는 희미한 인기척을 잡아챘다.
“누구냐!”
버럭 소리치며 막시무스는 재빨리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한발 늦어 복도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분명히 누군가가 있었는데…….
“젠장!”
회랑에 늘어선 거대한 대리석 기둥 뒤로 몸을 숨긴 키아는 숨 쉬는 일마저 멈춘 채 질끈 눈을 감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단 한순간만 늦었더라도 문 앞에서 그대로 잡힐 뻔 했다.
그녀는 한손으로 입을 막고 한손은 거칠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내리 눌렀다. 이 자리에서 들키면 자신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게 되리라. 그만큼 오늘 들은 이야기는 엄청났다. ‘주인‘에게 알려야 한다는 것 자체가 두려움으로 다가올 정도다. 그러나 알리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미안해요, 티르메네스님.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제가 죽어요.’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막시무스가 도로 방안으로 사라지자 키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곧 잔뜩 기척을 죽인 걸음으로 조심스럽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역시 부잣집 녀석의 생일은 다르구나.”
속속 도착하는 선물들을 보며 다니무스는 한탄했다.
그래, 대 카비아니 가의 작은 도련님께 바치는 선물이라 이거지? 작은 것이라도 어느 것 하나 평범하지 않은 것이 없다보니 역시 사람은 있고 봐야 한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고 있었다. 대체 우리 아버님은 이제껏 뭘 하셨나. 돈 좀 두둑이 모아두지 않으시고.
“우어, 저것 좀 봐. 보석을 박은 허리띠잖아? 근사하지, 티르? 응응?”
“흐음, 뭐 별로.”
“뭐냐, 그 시큰둥한 반응은? 호강이 넘쳐서 이젠 요강스럽다는 뜻이냐?”
“미친놈, 지랄은…….”
호들갑을 떠는 다니무스에 비해 티르는 전혀 기운이 없었다.
생일이라고 일찌감치 온갖 꽃으로 치장한 방으로 모셔져 호사스런 음식상을 받았다. 그리고 속속 도착하는 선물들을 착착 받아 대강 눈도장을 찍어준 다음 마치 전시하듯 방 한쪽에 늘어놓는 일을 한동안 반복했다.
바다를 건너온 고운 비단, 상아로 만든 장식품들, 조랑말부터 혈통이 좋은 다크호스까지 착실하게 선물로 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각종 보석이며 책들과 무기들도 빠지지 않았다.
무기류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은 왜 이리도 많은지 검부터 활까지 무기라고 생긴 것들은 종류별로 다 들어오고 있을 정도였다. 선물도 많았지만 찾아드는 사람은 더 많았다.
대체 어떻게 안 건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이 손님이랍시고 들이닥쳐 거하게 축하인사를 하고 있었다. 장사꾼, 노예상인, 지주들의 집사 혹은 무사, 사냥꾼들……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덕분에 티르는 일찌감치 지쳐버렸고 누가 보거나 말거나 그 길로 항복을 선언하고 소파위로 길게 늘어져 버린 참이었다.
“하암, 재미없어.”
“이 부분에선 확실히 취향이 다른가 보다. 난 지금 재미있어 죽겠거든.”
“어련하실까.”
“아아, 저건 영웅 헤카메테 이야기 전집이잖아? 갖고 싶었던 건데…… 우어어, 실록도 있다.”
“훗! 어이없는 놈.”
보석 박힌 허리띠가 굉장하네 어쩌네 노래를 하던 것도 잊고 다니무스는 어느새 책 무더기에 코를 박고 있었다. 누가 서기관의 아들내미 아니랄까봐 어지간히도 책을 좋아하는 녀석이었다.
“도련님, 나리만 나리께서 선물을 보내오셨습니다.”
“뭐? 누구?”
익숙한 이름에 늘어져 있던 티르가 발딱 몸을 일으켰다. 그 처죽일 놈이!
“당장 내다버려!”
“그, 그래도 선물이라잖아요. 호호, 일단 받으세요, 도련님. 선물은 아무 죄도 없는 거니까요. 네?”
“그래, 티르. 선물이 무슨 죄냐? 일단 받자? 응? 거참, 그 부자 나리가 뭘 보냈는지 무지 궁금하네.”
이름을 듣기가 무섭게 이맛살을 찌푸리는 티르를 무시하고 다니무스는 시녀에게 눈짓을 해 냉큼 선물을 들여오게 만들었다. 주인과는 달리 빼빼 마른 중년인 하나가 부담스러워 보이는 큰 보따리를 하나 받쳐 들고 비틀비틀 걸어 들어왔다.
“뵙게 되어 광영입니다, 도련님. 저는 나리만 나리를 모시고 있는 나무리라고 하는 자입니다. 저희 나리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마음에 드실 거라고, 꼭 받아주시길 바란다는 말씀도 함께 전하라고 하셨지요.”
“흥!”
아나 쑥떡! 나리만이 보낸 거라면 금뎅이도 똥으로 보일 지경인데 퍽이나 마음에 들겠다. 인상을 구기고 고개를 홱 돌리거나 말거나 나무리인지 나무수리인지 하는 놈은 그의 앞으로 보가 씌워진 예의 큼직한 물건을 들이밀었다.
“오, 큰데? 뭘까? 열어본다?”
“흥!”
외면하는 티르 대신 다니무스가 냉큼 보를 치웠다. 그러자 드러난 것은…… 1큐빗 정도 되는 길이의 눈부신 금덩이. 그냥 금덩이도 아닌 장미꽃을 물고 묘한 자세로 누워있는 나리만의 황금 동상이었다. 황금 동상 어쩌고 하더니 나리만은 티르의 동상이 아닌 제 동상을 만들어서 보내온 것이다.
순간 왁자지껄하던 방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당황한 다니무스가 들고 있던 보를 가져다 슬그머니 도로 덮었지만 그런다고 해서 이미 본 것이 안 본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티르는 다시 한 번 눈이 뒤집어지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이 새끼가!”
“앗, 티르!”
“죽여 버리겠어! 이 새끼, 죽어라! 죽어, 죽어, 죽어엇!”
선물로 들어온 칼 중 하나를 잡아챈 티르는 미친 듯이 나리만의 동상을 난자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살벌하고 엄청난지 누구도 나서서 말릴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
“푸웁! 푸하하하하!”
그 광기의 현장에 난데없는 웃음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크고 시원하게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팔이 빠져라 황금 동상을 난도질하던 티르조차도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돌아봤을 정도로 유쾌한 웃음소리.
“여어~ 다시 만나게 되었군, 꼬마.”
웃음소리의 주인이 한쪽 손을 가볍게 들어 보이며 아는 척을 해왔다. 떡대 같은 시커먼 무사 둘을 거느리고 나타나 당당하게 웃고 있는 문제의 인물은 바로…… 슈라였다. 판크라티온 경기장에서 반강제로 자리를 양보 당했던 그 까만 머리의 청년.
티르는 청년을 금방 알아보았다. ‘절대 보통 신분은 아니야.’라고 속삭이던 막시무스의 말도 동시에 기억해냈다. 근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꼬마?”
“아아, 사소한 건 그냥 넘어가주는 게 예의다, 꼬마.”
“하! 뭐야, 당신?”
“슈라.”
“뭐?”
“당신이 아니고 슈라란 말이다. 슈라 혹은 슈라 형님. 둘 중에 하나가 좋겠다. 아니면 허니도 좋고. 하하하!”
“허, 허, 허…… 미친 거야?”
딴에는 농담이랍시고 덧붙인 한마디가 순식간에 그를 미친놈으로 둔갑시키고 말았다. 그만큼 충격적이고도 썰렁했다. 다시는 농담 같은 거 하지 말았으면 싶을 정도로.
티르는 너덜거리는 나리만의 황금 동상을 발로 걷어찬 다음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똑바로 섰다. 청년이 그보다 머리 하나 반 정도는 더 컸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우러러 보는 자세가 되어 버렸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봐도 서글서글한 인상 하나는 봐줄만한 얼굴이었지만 별로 친하고 싶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어쩐지 자신보다 조금 그러니까 아주 조금 잘나 보이는 것 같아서.
‘이 인간이 언제 봤다고 불쑥 찾아와서 지랄이지? 아니 우리 집은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아니 뭐…… 찾으려고 마음만 먹는다면야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또 카비아니 가의 저택이었다. 아덴부르크의 시민치고 카비아니 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길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묻기만 해도 단박에 올 수 있었으리라.
다만 궁금한 것은 어떻게 안으로 들어왔으며 왜 왔느냐 하는 것. 한마디로 티르는 그의 용건이 대단히 궁금했다.
“어떻게 들어왔지? 정문에서 그냥 들여보내 주던가?”
“응.”
“뭣?”
“친구의 생일 선물을 가져왔다고 했더니 그냥 들여보내주더군. 생각보다 경비가 허술했다. 아덴부르크 제일의 부잣집이라고 해서 조금 기대했는데 말이야. 앞으로 그 점에 대해 신경을 좀 쓰는 게 어떨까?”
“제, 젠장! 그 자식들이 미쳤나.”
노골적인 충고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화가 났다.
멍청한 자식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신분 하나 확인하지 않고 낯선 사람을 그냥 막 들여보내다니. 선물만 들고 있으면 강도한테도 고분고분 문을 열어줄 놈들이 아닌가. 화가 나다 못해 순간적으로 배신감마저 들었다. 그러나 성질을 부리는 것은 잠시 뒤로 미루기로 했다.
일단은 눈앞에 닥친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티르는 눈앞에서 싱글싱글 웃고 있는, 자칭 슈라라는 청년을 향해 이렇다할 말 한마디 없이 불쑥 손부터 내밀었다.
“응? 뭐지?”
“선물 가져왔다며?”
“킥. 물론. 하지만 그냥은 못 주겠는데?”
“뭐라?”
얼래? 이건 또 무슨 경우람? 생일 선물을 가져왔다는 명목으로 정문을 통과한 주제에 막상 달라니까 그냥은 못 주겠다?
티르의 미간이 다시 팍 일그러졌다. 어째 돌아가는 시츄에이션이 점점 더 마음에 들지 않고 있었다. 티르는 본능적으로 그가 자신에게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일방적으로 줄 생각은 없고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것도 있을 것이다…… 뭐, 이를테면 그런 뜻인 거다.
이런 경우엔, 선물 아니 선물이든 뭐든 받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조건이 붙는 선물은 아주 거하거나 위험해서 여차하면 발목을 잡힐 수도 있으므로. 티르는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어차피 아쉬울 것이 없는 그였다.
“선물 필요 없으니까 그냥 가.”
“저런. 난 꼭 주고 싶은데?”
“받을 생각 없어졌어. 더구나 당신은 불청객이잖아?”
“훗, 다시 말하지만 사소한 것에는 신경 쓰지 말자고, 꼬마. 좋아, 처음이니 내가 한번은 양보하지.”
아주 큰 인심을 쓴다는 듯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리더니 그는 곧 품을 뒤져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푸른색 비단 주머니가 티르의 손바닥위에 얌전히 놓여졌다. 그리고 불쑥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말.
-도움이 필요할 때 이것을 가지고 카도니아로 오너라. 내 이름은 슈라 알렉산드로스 아문. 잊지 말아라, 꼬마.
“카도니아?”
티르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여기는 동부 투란 제국. 그럼 카도니아는? 당연히 적국이다. 이곳 동부 투란 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카도니아 제국인 것이다. 그런데 저 인간이 카도니아 사람이란다.
“너어……!”
“하하하, 볼일 다 봤으니 이만 가볼까? 그럼 다음에 또 보자, 꼬마. 곧!”
미처 붙잡을 새도 없이 휑하니 사라지는 그의 잘난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티르는 새삼 어이없어 했다. 여차하면 적국의 간첩으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이대로 사라지다니!
“어쩐지 처음부터 재수 없어 보인다 했어. 젠장!”
손에 든 물건을 품에 넣지도, 그렇다고 과감히 버리지도 못한 채 티르는 그렇게 멍하니 굳어가고 있었다.
“티르, 저 치가 뭐래냐? 그건 또 뭐고?”
“묻지 마. 괴롭다.”
“괴로우면 내가 대신 열어봐 주마. 이리 줘봐.”
“안 돼! 이건 그러니까…… 돌려줄 거야. 그러니 신경 끄라고.”
호기심이 덕지덕지 매달린 얼굴로 주머니를 흘깃 거리는 다니무스를 외면하고 티르는 냉큼 슈라가 남긴 주머니를 품속에 넣어버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받아버렸으니. 더구나 돌려준다고 해서 얌전히 받을 인간도 아니었다.
돌려받을 거면 애초에 주지도 않았으리라.
짧은 순간이었지만 티르는 슈라에게서 함부로 흔들 수 없는 단호함을 읽었다. 너무도 강해 흡사 명령을 받은 듯한 느낌이었다.
‘카도니아로 오너라.’
확실히 부탁이 아닌 명령이었다.
“뭔데 돌려준다는 소리를 다 하냐? 천하의 티르메네스님이?”
“어? 막시무스!”
“엄청난 선물이라도 받은 모양이지?”
“천만에. 그 반대.”
들어오기는 한참 전에 들어왔으면 무엇을 했는지 이제야 어슬렁어슬렁 나타난 막시무스를 향해 티르는 잽싸게 다가갔다. 그리곤 다니무스의 의아한 시선을 뒤로한 채 영문을 몰라 하는 그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왔다.
“골치 아프게 됐어.”
“뭐가? 그새 무슨 일이 있었나?”
“그 자식 아니, 판크라티온 경기장에서 본 그 ‘대단한 신분‘일 거라던 자식 기억나? 요란한 검을 차고 있었잖아.”
“아아! 그 사람은 왜? 설마…….”
“맞아. 어떻게 알고 왔는지 방금 전에 그 자식이 다녀갔어. 이걸 선물이랍시고 던져주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졌지.”
품안에 든 주머니를 삐죽 보여주며 티르는 냉큼 귓속말로 덧붙였다.
“그 자식 카도니아에서 왔대.”
“뭣?”
“도움이 필요하면 이걸 가지고 찾아오라나? 누굴 간첩으로 만들려고……. 완전히 어이상실이야. 게다가 그 넓은 땅에서 저를 어떻게 찾으라고 대뜸 이름만 가르쳐주고 오라 마라야? 이름이 뭐라더라? 슈라 알렉산드로스…….”
“아문?”
“어? 아는 이름이야?”
“마, 맙소사!”
막시무스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