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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노예(4)]
“블루다이아몬드?”
보기 드문 블루다이아몬드. 새파란 빛을 뿌리는 엄지손톱만한 크기의 다이아몬드 다섯 개가 화려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자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놈처럼 날뛰던 나리만까지도 움직임을 멈추고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블루다이아몬드는 상당히 희귀한 보석이었다. 이 아덴부르크를 통틀어 가진 자가 고작 두 명뿐일 정도다. 그중 하나가 바라였고 나머지 하나는 시장인 율리우스다. 그나마도 그들이 가진 건 겨우 새끼손톱만한 크기도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애초에 그보다 더 큰 크기의 블루다이아몬드가 존재할 거란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엄지손톱만한 크기의 블루다이아몬드라니!
“이런 보석이 대체 어떻게……?”
“5탈란톤은 충분히 받을 수 있는 보석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 그거야…….”
두말할 것도 없이 충분하고도 남는다. 아니 거래만 잘 한다면 1탈란톤 정도를 더 받을 수도 있다. 세상에 보석을 싫어하는 인간은 없으니까. 더구나 그냥 보석도 아닌 희귀하기로 유명한 블루다이아몬드라면 노리는 자들이 꽤 많을 것이다.
꿀꺽. 나리만의 눈에 감출 수 없는 탐욕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또 문득 의심이 든다. 대체 정체가 뭘까? 어디서 온 자이기에 이렇게 귀한 블루다이아몬드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을 수 있는 건가?
“그럼, 모든 계산이 끝난 듯 하니 저는 그만 떠나야겠습니다.”
“자, 잠깐!”
멍하니 서있는 티르의 어깨를 잡고 막 떠나려는 그를 나리만이 붙잡았다.
“제게 볼 일이 있으십니까?”
“……내가 우선매입자다.”
“그럼 5탈란톤에서 가격을 더 쳐주시겠다는 뜻입니까?”
“그, 그건……. 어쨌든 내가 포기하기 전에는 안 돼!”
“그러나 이미 계약은 다 끝났습니다.”
“그건 무효다! 사기야. 저놈들이 나를 속인거란 말이다.”
“그건 당신과 저들 사이의 문제지 나와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분명히 정당한 거래를 통해 대금을 지불하고 계약서를 작성했으며 동시에 노예를 건네받았습니다. 문제될 것은 전혀 없었지요. 이해가 되십니까?”
“으윽.”
그 또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티르메네스를 얻으려 했으며 결국 그렇게 했다는 뜻. 양보할 생각 따윈 단 한 푼도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이대로 그냥 빼앗겨야 한단 말인가?
‘젠장, 죽 쑤어 개 줄 일이 있을까.’
티르메네스 자체도 탐나지만 그가 가진 한 가지 가능성을 더 탐내던 나리만이었다. 바로 엘룬. 바라의 친 혈육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더 무게를 싣게 된 어떤 가정 하나가 나리만의 뇌리를 스치고 있었다.
‘아무나 저런 은발을 갖고 태어나는 건 아니야. 그래, 티르메네스는 그냥 엘룬인의 핏줄이 아닐 것이다. 틀림없이 왕실 핏줄일 가능성이 크지. 놈이 정말 엘룬의 왕실 핏줄이라면 이용가치는 무한대가 될 터!’
은발의 코발트빛 눈동자는 엘룬 왕실을 대표하는 특징이다. 대대로 물을 다스리는 능력을 타고난다는 자들답게 생김새도 그렇게 특별한 것이다.
나리만은 십 몇 해 전 엘룬 왕실에서 쌍둥이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오래전, 엘룬과 거래하는 몇몇 상인들 사이에서 은밀히 떠도는 소문을 그도 운 좋게 주워들은 것이다.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또 한 가지 사실. 그것은 엘룬의 왕실 인물들이 왕국이나 제국 사이에서 은밀히 거래되고 있다는 것. 그들의 능력과 아름다운 외모를 탐내는 곳은 얼마든지 있었다. 물이 부족한 곳이라면 더더욱.
나리만은 티르를 이용해 제국의 황실과 다리를 놓고 싶었다. 그리하여 이 좁디좁은 아덴부르크를 떠나 마침내 수도로 진출하려는 것이다.
‘쉽게 포기할 순 없지. 암, 그렇고말고.’
나리만은 다시 한 번 결심을 굳혔다.
“죽여 버리겠다!”
“헉! 탄탄!”
누구에게 당한 건지 얼굴이하 상반신 전체를 피로 물들인 탄탄이 검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이성 따윈 개에게나 줘버린 듯 입에 거품까지 문 모습이었다.
혼란이 가라앉기 시작한 내실의 풍경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서로를 향해 칼을 휘두르던 무사들이 그들을 중심으로 다시 갈라서서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는 상태라 탄탄의 움직임을 막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저놈이 미쳤나?”
“탄탄, 무슨 짓이냐?”
나리만이 어이없게 바라볼 때 나칼이 잽싸게 뛰쳐나가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일을 망칠 셈이냐?”
“일? 일을 망친 건 네놈이 아닌가?”
“뭐, 뭐라? 놈?”
“크크큭, 왜 놀라지?”
본색을 드러내며 미친놈처럼 웃는 그를 나칼은 경악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움찔 물러서자 탄탄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어리석은 놈, 아직도 네가 내 주인이라 생각하는 건가? 어림없는 소리! 네놈은 단지 도구였을 뿐이다. 카비아니 가를 내 손에 넣기 위한 도구!”
“그, 그게 무슨…….”
“그러게 진즉에 말을 들을 것이지. 잡아라!”
서슬 퍼런 외침에 문득 내실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곧 폭풍처럼 우르르 쏟아져 들어온 것은, 카비아니 가에 득실대던 사냥꾼들. 그들을 알아본 나칼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몸을 휘청거렸다.
“네, 네놈이!”
“크크크, 이제 알겠나?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네놈을 죽이지는 않을 테니. 넌 당분간 내 꼭두각시 노릇을 해주어야 하거든. 크하하하하!”
“흥! 탄탄, 그 전에 내 몫으로 주기로 한 것부터 내놓지 그러느냐? 멍청한 것 같으니라고. 일이 이렇게 되도록 뭘 한 거냐? 티르메네스가 팔리기 전에 행동했어야지!”
득의만만한 태도로 웃어젖히는 탄탄에게 나리만이 잔뜩 타박을 주었다. 둘 사이에 오고간 은밀한 거래가 이렇게 밝혀지고 있었다.
티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있는 나칼에게서 시선을 돌려 탄탄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조금만 더 힘을 썼다면 놈을 죽일 수 있었는데! 질끈 깨문 입술이 찢어지면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지만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몰려들어온 사냥꾼들이 슈라 일행과 티르를 산 빨강머리를 촘촘히 포위하고 있었다. 나리만의 무사들과 합하면 그 수가 나칼이 데려온 무사들의 세배가 넘어간다. 아직 밖에 남아있는 자들까지 합한다면 그보다 더 한 숫자가 나오리라. 결국 그들은 빠져나갈 수 없는 완벽한 함정에 빠진 것이다.
“입구를 막아라!”
“뭐야, 아무 상관없는 우리까지 다 죽이겠다는 소리인가?”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간도 큰 자들이군.”
“머리는 더 큽니다. 어찌 할까요?”
“글쎄, 저쪽은 알아서 살아남을 테니 우리끼리라도 살길을 도모해야 하지 않을까?”
“옳으신 말씀. 그럼 실례!”
짧은 사이, 숨 가쁘게 의견을 교환한 슈라 일행이 마침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내실엔 다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리만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압도적이기까지 한 자신들의 머릿수를 단단히 믿고 있는 것이다.
“흥, 죽여 버려라. 뒤처리는 내가 맡겠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만.”
“웃기는 소리. 상황판단을 잘하는 게 좋을 것이다. 자, 티르메네스를 이쪽으로 보내라, 애송이!”
“이런, 정말 곤란하게 만드시는 분들이군요.”
곤란하냐? 나도 곤란하다.
급박하고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알기는 아는 건지 사내는 태평하게 곤란하다는 소리만 자꾸 늘어놓고 있었다. 덕분에 티르는 어떻게 하면 혼자서 저 험난한 길을 뚫고 탈출할 수 있을까를 연구하느라 맹렬하게 머리를 굴려야 했다.
‘어떻게 해서든 저 싸가지 황태자 일행에게 묻어나가려고 했는데 다 틀려버린 건가? 이제 어쩌지?’
암만 봐도 별다른 재주라고는 없어 보이는 빨강머리를 믿느니 차라리 자신의 손에 들린 손바닥만 한 단검을 믿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하도 꽉 쥐어 이젠 쉬이 펴지지도 않을 것 같은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티르는 남몰래 한숨을 삼켰다.
“놈을 잡아라!”
와락 달려든 사냥꾼들에게 나칼이 잡혔다. 주변에 무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쉽게 잡혀 맥이 다 빠질 정도였다. 그가 잡히자 몇 안 되는 카비아니 가의 무사들도 전의를 상실한 채 검을 내리고 말았다. 말 그대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자, 그대들도 순순히 항복을 하시지?”
“에,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어쩌지?”
“흥! 후회하게 될 것이다. 쳐라!”
사냥꾼들과 나리만 가의 무사들이 슈라 일행을 둘러싸고 본격적으로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쪽이야 무기 하나 지니지 않은 빨강머리와 티르뿐이니 큰 힘 들 일이 없다 싶었는지 그들을 먼저 제압해 놓으려는 것이다.
“티르메네스를 넘겨라!”
“그러니까 곤란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그놈의 곤란. 아무래도 당신은 그냥 입 닥치고 있는 게 좋겠다. 흥! 이봐, 탄탄. 이미 팔린 노예를 내놓으라는 건 강탈이 아닌가?”
“큭큭, 스스로가 노예임을 인정하는 거냐? 건방진 놈, 내 네놈을 그냥 둘 줄 아느냐?”
“왜, 배라도 가르려고? 내 칼 맛이 부족했던 모양이지?”
“으드득! 죽일 놈.”
티르 덕분에 온통 피로 물든 얼굴을 손으로 조심스레 훑으며 탄탄은 이를 갈았다. 놈이 만든 상처가 말도 못하게 욱신거리고 있었다. 다행히 눈은 멀쩡하지만 힘껏 내리그은 덕분에 깊게 벌어진 상처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흉터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용서할까보냐!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라, 탄탄. 티르메네스는 내 것이다.”
“끄응. 빌어먹을!”
“자, 이리 오너라, 티르메네스. 너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나밖에 없다. 이보다 더 험한 꼴을 겪고 싶지 않다면 순순히 말을 듣는 게 좋아.”
“차라리 죽여라, 이 돼지야!”
장미가시나 다름없는 단검을 제법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티르는 악을 썼다. 나리만에게 가느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무는 편이 나았다. 항복해 봐야 오히려 저들의 신세만 편하게 만들어주는 것일 텐데 두고두고 얼마나 배가 아플 것인가.
“이봐, 아무리 가망이 없어 보인다고 해도 멍청하게 서있지만 말고 방법을 좀 생각해 보는 게 어때? 날 샀으면 책임을 져야지.”
“후훗, 책임입니까?”
“그럼 그 돈을 처들이고도 그냥 죽게 내버려둘 생각이었어? 모르는 모양인데 사실은 나보다 당신 목숨이 더 위태로워. 나야 잡혀도 당분간은 살려둘 테지만 당신은 아니거든.”
“아, 그렇군요. 후환거리를 살려둘 순 없는 거니까. 역시 인간들이란…….”
“……?”
“우아하지 못한 생물이랍니다. 기억해 두십시오, 티르메네스님. 시간이 많이 지체됐군요. 그럼, 이제 가볼까요?”
우아하지 못한 생물? 인간이 인간에게 할 소린 아닌 것 같지 않아?
당최 이해하기가 어려운, 엉뚱한 말을 해놓고 그걸 또 기억해 두라는 소리에 티르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설마 애초의 예상대로 정신이 살짝 건강하지 못하신 형님이셨던 건가? 티르는 그 점이 못내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그런 생각은 한순간에 숨 막히는 경악으로 바뀌어 버렸다.
촤아악!
“헉!”
갑작스런 움직임을 느끼고 빨강머리에게 다가서던 나리만 가의 무사 하나가 피분수를 내뿜으며 힘없이 나동그라졌다. 휘두른 칼에 맞은 것도 아니고 무서운 힘에 내던져진 것도 아닌데 그냥 저 혼자 죽어 자빠진 것처럼 그렇게 심심하게 피를 뿜으며 넘어진 것이다.
그 갑작스런 사태에 주변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죽은 무사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정확하게 두 쪽이 나 있었다. 세로로. 쓰러지고 나서야 두 쪽으로 갈라지는 모습에 모두들 움직임은 물론이고 숨까지 멈추고 말았다.
“이제부터 미천한 인간들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여전히 방글방글 웃는 얼굴로 그가 말했다. 그때, 티르는 새빨갛게 번져가는 그의 미소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너무나 즐겁게 반짝이고 있을 그의 눈만은 차마 마주볼 수 없었다. 그가 즐거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 그 또한 다른 이들처럼 공포를 느낄 것만 같았다.
“자, 고개를 들고 어깨를 펴십시오. 당신은 저들을 지배하기 위해 태어나신 분이랍니다.”
“……!”
확 번져오는 피비린내와 정확히 반 토막이 나 꾸역꾸역 내장을 토해내는 눈앞의 시체를 외면하고 티르는 그가 시키는 대로 고개를 오만하게 치켜들었다. 머리꼭대기가 싸늘하게 식어 내리고 있었지만 눈앞의 사내에게 약한 모습 따윈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 자는 약한 나를 원하지 않는다.’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짓밟힐 것만 같았다. 아니 눈앞의 시체처럼 그도 두 쪽이 나 차디찬 땅위에 눕게 될지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될 순 없다. 절대 죽을 수 없어.’
티르는 이를 악물었다.
“무, 무엇들 하느냐? 잡아라!”
퍼뜩 정신을 차린 나리만이 허겁지겁 무사들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당당하게 앞으로 나서서 막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산책이라도 나온 듯 느긋하게 걷고 있는 그들을 피해 주춤주춤 물러서느라 바빴다.
“어쩐지 불공평한 것 같은데?”
사냥꾼들에게 둘러싸여 공격을 당하고 있는 자신들과 달리 너무나 쉽게 길을 뚫어버린 빨강머리를 보며 슈라가 가볍게 투덜거렸다.
“불만이시면 저자처럼 모범(?)을 보이십시오.”
“안타깝지만 저런 짓은 내 취향이 아니야. 전혀 깔끔하지가 못하잖아?”
“그럼 아무 소리 마시고 지금처럼 계속 깔끔하게 검을 휘두르시는 수밖에요.”
“흥! 그나저나…… 너도 느꼈나, 이라즈?”
푸른 눈동자 속을 스쳐가는 희미한 섬광. 잔뜩 낮춘 목소리로 슈라는 속삭이듯 물었다.
“당연히.”
“역시 ‘그쪽‘인 것 같지?”
“아마도.”
“이런, 난감하게 됐는걸. 하필이면 모처럼 마음에 든 꼬마가 ‘그쪽‘의 초대를 받다니 말이야.”
“전하께서 하시는 일이 늘 그렇지요 뭐. 언제는 술술 잘 풀린 적도 있었습니까? 이젠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만.”
“어이, 그렇게 말하면 내가 상처받을 것 같지 않아?”
“상처받으셨습니까?”
“관둬. 젠장, 다시 말하지만 넌 정말 인정머리 없는 놈이야.”
“억울하시면 여자가 되시라니까요?”
표정 하나 변하는 법 없이 툭툭 잘만 받아치는 이라즈에게 슈라는 결국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이런 싸움에서 그에게 이기기란 해가 서쪽에서 뜨는 일만큼이나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슈라였다.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요?”
툴툴대는 그에게 이라즈가 막 입구 쪽으로 사라지는 티르를 가리키며 물었다.
“당연한 걸 왜 묻고 그래? 그만 놀고 가자! 길을 뚫어라, 자일로스.”
“존명! 아랏차차! 비키랍신다!”
엄청난 일을 벌여놓고 사라지는 빨강머리 덕분에 살짝 넋이 나간 사냥꾼들을 손쉽게 밀쳐내고 누가 붙잡기 전에 그들은 후다닥 카비아니 가의 노예 거래소를 빠져나왔다. 그러나 그들이 밖으로 나왔을 때 티르와 빨강머리 청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까?”
다니무스의 물음에 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글쎄?”
“어디에서 온 자인지는 확인하셨겠지요?”
“아, 하 투란이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 어디의 누구에게 데려가겠다는 소리는 들었습니까?”
“그 하 투란에 있다는 혀, 형이라는 자가 아닐까? ……아마도.”
“하아,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대체 뭘 믿고 그 자에게 티르를 맡기신 거죠, 막시무스?”
“…….”
푹 고개가 꺾였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당장 감옥을 빠져나오는 일에 몰두 하느라 미처 거기까지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하라, 그는 강한 자였다. 그에게 맡기면 티르는 안전할 것 같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볼까? 티르를 그에게 맡겨두면 바라를 지키기가 더 수월할 듯 싶어 결정한 일이었다. 탈옥을 한 신세라 드러내놓고 움직일 수 없는 그에게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 티르는 조금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나리만이 있는 이상, 노예 신분으로 추락한 그를 이 아덴부르크에 사는 다른 누군가에게 맡길 수도 없었다.
천상, 멀리 도망시키거나 그와 함께 움직여야 하는데 그러기엔 바라가 너무 위험했다. 그리하여 막시무스는 ‘안전한 구출‘을 조건으로 티르를 하라에게 맡기고 자신은 바라를 지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티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일 것이었기에.
“변명입니까?”
“어쩌면. 하지만 벌써부터 후회하고 싶지 않다.”
“젠장, 책임이라면서요? 당신에게 티르메네스는 책임이라면서요? 이것이 당신이 말하는 그 잘난 책임이란 것입니까?”
“그래.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게 내 책임이다, 다니무스. 나는 티르를 위해서 바라를 지킨다. 그래야 녀석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
막시무스의 말에 다니무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곧 물었다.
“티르가 돌아올 수 있을까요?”
“녀석은 돌아온다. 반드시!”
“하지만 그 ‘하라‘라는 자가 다른 마음을 먹고 있는 거라면 어쩌지요? 알다시피, ‘형제‘라는 말이 안전을 보장해주지는 않잖아요. 혈육인줄 알았던 나칼도 저 모양인데.”
다니무스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처럼 불쑥 나타나 갑자기 ‘주인‘이며 ‘아우‘ 운운했다는 사람도 믿을 수 없다. 아니아니 믿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진짜 속내였다.
“이제와 티르메네스가 필요한 이유가 뭐랍니까, 대체? 어떻게 그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안 거죠?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최근에야 알고 찾아온 걸까요?”
궁금한 것도 많고 의심스러운 건 더 많고 알아내야 할 것들은 그보다 더 많았다. 온통 불명확하고 정확하지 않으며 또한 낯익지도 않았다. ‘어디에서, 누가, 왜, 어디로.’라는 간단한 질문조차 만족시킬 수 없는 상대는 누가 봐도 위험한 것이 아닌가.
그런 위험한 자에게 막시무스는 덜컥 티르를 맡기고 돌아왔다. 아니 밤손님처럼 은밀히 숨어들었다.
티르가 팔린 후 며칠이나 지난, 지난밤이 되어서야 그가 은밀히 자신을 찾아왔을 때 다니무스는 그야말로 기절할 듯이 놀라버렸다. 안 그래도 막시무스가 탈옥했다는 소문이 단 며칠 만에 시 전체로 번지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카비아니 가는 물론이고 그의 집과 자주 가는 술집 등등에 경비가 강화되었고 거리 곳곳마다 화상이 붙었다. ‘목격했거나 신고하는 자에게 포상함‘ 이라는 딱지를 떡하니 단.
“이제 어쩔 겁니까? 알고 있겠지만 지금 상태로는 카비아니 가 근처에도 갈 수 없어요. 경비가 너무 삼엄하다고요.”
“그래도 꼭 가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바라를 곁에서 지켜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해. 제길, 나칼 그 멍청한 자식 때문에 카비아니 가가 통째로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되는 것은 아닌지…….”
“휴우, 소문에 의하면 나칼이 티르를 팔아치운 뒤 오늘까지 저택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답니다. 자리에 누운 당주를 보살피느라 그런다고들 하는데 믿을 게 따로 있지, 설마하니 그 말이 사실이겠습니까?”
보는 눈들이 많으니 좋아 날뛰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전보다는 활발히 활동영역을 넓힐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요 며칠 나칼은 내내 저택 안에만 머물러 있었고 시내를 활보하는 것은 그가 거느린 사냥꾼들뿐이었다.
그런 사실이 막시무스와 다니무스의 불안을 더 부추기고 있었다.
나리만과 나칼이 손을 잡고 일을 벌였는데 그는 두문불출하고 나리만은 전보다 더 돈을 펑펑 써대며 날아다닌다? 게다가 한낱 노예사냥꾼에 불과했던 자들이 이젠 카비아니 가의 무사 노릇을 하고 있고?
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단박에 의심을 품을 만한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알려지지 않은 일이 더 있는 거다. 그들은 아직 모르는.
“혹시 나칼도 갇혀있는 건 아닐까요?”
“뭐? 설마. 누가 그 놈을 가둔다는 거냐? 놈이야말로 이번 일을 벌인 당사자인데.”
“하긴. 그럼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요, 나칼은?”
“난들 아나. 혹시 모르지. 뒤늦게 후환이 두려워져 그렇게 처박혀 있는 것인지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어쨌거나 티르는 무사히 벗어났고 나칼이 아끼던 사냥꾼 놈의 얼굴엔 흉터가 생겼으니까 말이에요. 역시 티르는 그냥 떠날 놈이 아니라니까. 히히.”
노예로 팔린 티르가 홧김에 사냥꾼의 얼굴을 그어놓고 도망쳤다는 소문을 다니무스도 들었다. 무사도 하나 죽였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건 증거가 없으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고 다만 더 살벌해진 탄탄의 얼굴을 멀리서 보고난 뒤에야 그는 티르가 얌전히 떠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하 투란이라…… 티르가 언제쯤 돌아올까요, 막시무스?”
“글쎄다. 그건 신만이 아시겠지. 하지만 한가지만은 확실하다. 언제가 되었든 녀석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것. 우린 바라 곁에서 그때를 기다려야 한다.”
“후우, 그러자면 일단은 어르신을 안전하게 지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카비아니 가로 숨어들어야 하는데 지금으로선 뾰족한 방법이 없잖아요. 음, 병문안 핑계를 대고 제가 한번 찾아가 볼까요?”
“들여보내줄까?”
“으음, 안되겠죠? 티르와 제가 절친한 사이였다는 건 카비아니 가의 개도 잘 아는 일일 테니. 하아, 어쩐다?”
낙담한 그들은 다시 각자의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때였다. 문득 막시무스의 뇌리를 스쳐가는 의외의 인물이 하나 있었다.
“로무네스!”
“에?”
“용병 로무네스 일당. 그 자들이 나리만의 사냥꾼들과 자주 판크라티온을 벌렸었지.”
“그거야……. 그런데 그게 왜요?”
“로무네스는 아칸의 친구다. 나칼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그 아칸 말이야.”
“에? 하지만 아칸은 노예 사냥꾼 출신이잖아요?”
“맞다. 그러나 사냥이 없을 때는 로무네스와 함께 용병일도 했었지. 그 일을 그만둔 건 나칼의 아버지 센이 죽고 난 후 나칼이 지라와 함께 그를 카비아니 가로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막시무스는 늘 나칼과 함께 돌아다니던 아칸과 지라를 떠올렸다. 그들은 의심할 바 없는 나칼의 최측근이었다. 비록 나칼이 카비아니 가의 모든 권력을 틀어쥔 뒤 그들이 아닌 노예 사냥꾼이었던 탄탄을 전면으로 내세우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나칼의 곁을 떠났다는 소리도 못 들었으니 아직은 그의 곁에 머물러 있을 확률이 컸다.
“그런데 아칸과 로무네스가 친구라고 해도 우리에겐 하나 도움 될 것이 없잖아요?”
“후후, 그렇지도 않다. 로무네스는 나와 약간의 친분이 있으니까.”
“예에? 아니 어떻게?”
“이게 다 티르 덕분이다. 녀석은 나리만이 싫어서 만날 로무네스 일당에게만 돈을 걸었잖아. 그러니 자연적으로 그와 안면이 생길밖에.”
“아하! 그럼 로무네스를 통해 카비아니 가의 상황을 알아볼 수 있겠군요. 아니 잘하면 나칼의 사정까지도…….”
둘의 얼굴이 동시에 환하게 밝아졌다. 실낱같은 희망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꼭 돌아와야 한다, 티르. 바라는 내가 지켜낼 테니 꼭 네 자리로 돌아와라. 넌 바라의 운명이고 내 책임이다.’
막시무스는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소리 없는 이 간절한 당부가 바람을 타고 높이 날아올라 하 투란으로 가고 있을 그의 꼬마에게 전해지기를.
“블루다이아몬드?”
보기 드문 블루다이아몬드. 새파란 빛을 뿌리는 엄지손톱만한 크기의 다이아몬드 다섯 개가 화려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자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놈처럼 날뛰던 나리만까지도 움직임을 멈추고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블루다이아몬드는 상당히 희귀한 보석이었다. 이 아덴부르크를 통틀어 가진 자가 고작 두 명뿐일 정도다. 그중 하나가 바라였고 나머지 하나는 시장인 율리우스다. 그나마도 그들이 가진 건 겨우 새끼손톱만한 크기도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애초에 그보다 더 큰 크기의 블루다이아몬드가 존재할 거란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엄지손톱만한 크기의 블루다이아몬드라니!
“이런 보석이 대체 어떻게……?”
“5탈란톤은 충분히 받을 수 있는 보석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 그거야…….”
두말할 것도 없이 충분하고도 남는다. 아니 거래만 잘 한다면 1탈란톤 정도를 더 받을 수도 있다. 세상에 보석을 싫어하는 인간은 없으니까. 더구나 그냥 보석도 아닌 희귀하기로 유명한 블루다이아몬드라면 노리는 자들이 꽤 많을 것이다.
꿀꺽. 나리만의 눈에 감출 수 없는 탐욕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또 문득 의심이 든다. 대체 정체가 뭘까? 어디서 온 자이기에 이렇게 귀한 블루다이아몬드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을 수 있는 건가?
“그럼, 모든 계산이 끝난 듯 하니 저는 그만 떠나야겠습니다.”
“자, 잠깐!”
멍하니 서있는 티르의 어깨를 잡고 막 떠나려는 그를 나리만이 붙잡았다.
“제게 볼 일이 있으십니까?”
“……내가 우선매입자다.”
“그럼 5탈란톤에서 가격을 더 쳐주시겠다는 뜻입니까?”
“그, 그건……. 어쨌든 내가 포기하기 전에는 안 돼!”
“그러나 이미 계약은 다 끝났습니다.”
“그건 무효다! 사기야. 저놈들이 나를 속인거란 말이다.”
“그건 당신과 저들 사이의 문제지 나와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분명히 정당한 거래를 통해 대금을 지불하고 계약서를 작성했으며 동시에 노예를 건네받았습니다. 문제될 것은 전혀 없었지요. 이해가 되십니까?”
“으윽.”
그 또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티르메네스를 얻으려 했으며 결국 그렇게 했다는 뜻. 양보할 생각 따윈 단 한 푼도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이대로 그냥 빼앗겨야 한단 말인가?
‘젠장, 죽 쑤어 개 줄 일이 있을까.’
티르메네스 자체도 탐나지만 그가 가진 한 가지 가능성을 더 탐내던 나리만이었다. 바로 엘룬. 바라의 친 혈육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더 무게를 싣게 된 어떤 가정 하나가 나리만의 뇌리를 스치고 있었다.
‘아무나 저런 은발을 갖고 태어나는 건 아니야. 그래, 티르메네스는 그냥 엘룬인의 핏줄이 아닐 것이다. 틀림없이 왕실 핏줄일 가능성이 크지. 놈이 정말 엘룬의 왕실 핏줄이라면 이용가치는 무한대가 될 터!’
은발의 코발트빛 눈동자는 엘룬 왕실을 대표하는 특징이다. 대대로 물을 다스리는 능력을 타고난다는 자들답게 생김새도 그렇게 특별한 것이다.
나리만은 십 몇 해 전 엘룬 왕실에서 쌍둥이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오래전, 엘룬과 거래하는 몇몇 상인들 사이에서 은밀히 떠도는 소문을 그도 운 좋게 주워들은 것이다.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또 한 가지 사실. 그것은 엘룬의 왕실 인물들이 왕국이나 제국 사이에서 은밀히 거래되고 있다는 것. 그들의 능력과 아름다운 외모를 탐내는 곳은 얼마든지 있었다. 물이 부족한 곳이라면 더더욱.
나리만은 티르를 이용해 제국의 황실과 다리를 놓고 싶었다. 그리하여 이 좁디좁은 아덴부르크를 떠나 마침내 수도로 진출하려는 것이다.
‘쉽게 포기할 순 없지. 암, 그렇고말고.’
나리만은 다시 한 번 결심을 굳혔다.
“죽여 버리겠다!”
“헉! 탄탄!”
누구에게 당한 건지 얼굴이하 상반신 전체를 피로 물들인 탄탄이 검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이성 따윈 개에게나 줘버린 듯 입에 거품까지 문 모습이었다.
혼란이 가라앉기 시작한 내실의 풍경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서로를 향해 칼을 휘두르던 무사들이 그들을 중심으로 다시 갈라서서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는 상태라 탄탄의 움직임을 막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저놈이 미쳤나?”
“탄탄, 무슨 짓이냐?”
나리만이 어이없게 바라볼 때 나칼이 잽싸게 뛰쳐나가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일을 망칠 셈이냐?”
“일? 일을 망친 건 네놈이 아닌가?”
“뭐, 뭐라? 놈?”
“크크큭, 왜 놀라지?”
본색을 드러내며 미친놈처럼 웃는 그를 나칼은 경악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움찔 물러서자 탄탄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어리석은 놈, 아직도 네가 내 주인이라 생각하는 건가? 어림없는 소리! 네놈은 단지 도구였을 뿐이다. 카비아니 가를 내 손에 넣기 위한 도구!”
“그, 그게 무슨…….”
“그러게 진즉에 말을 들을 것이지. 잡아라!”
서슬 퍼런 외침에 문득 내실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곧 폭풍처럼 우르르 쏟아져 들어온 것은, 카비아니 가에 득실대던 사냥꾼들. 그들을 알아본 나칼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몸을 휘청거렸다.
“네, 네놈이!”
“크크크, 이제 알겠나?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네놈을 죽이지는 않을 테니. 넌 당분간 내 꼭두각시 노릇을 해주어야 하거든. 크하하하하!”
“흥! 탄탄, 그 전에 내 몫으로 주기로 한 것부터 내놓지 그러느냐? 멍청한 것 같으니라고. 일이 이렇게 되도록 뭘 한 거냐? 티르메네스가 팔리기 전에 행동했어야지!”
득의만만한 태도로 웃어젖히는 탄탄에게 나리만이 잔뜩 타박을 주었다. 둘 사이에 오고간 은밀한 거래가 이렇게 밝혀지고 있었다.
티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있는 나칼에게서 시선을 돌려 탄탄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조금만 더 힘을 썼다면 놈을 죽일 수 있었는데! 질끈 깨문 입술이 찢어지면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지만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몰려들어온 사냥꾼들이 슈라 일행과 티르를 산 빨강머리를 촘촘히 포위하고 있었다. 나리만의 무사들과 합하면 그 수가 나칼이 데려온 무사들의 세배가 넘어간다. 아직 밖에 남아있는 자들까지 합한다면 그보다 더 한 숫자가 나오리라. 결국 그들은 빠져나갈 수 없는 완벽한 함정에 빠진 것이다.
“입구를 막아라!”
“뭐야, 아무 상관없는 우리까지 다 죽이겠다는 소리인가?”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간도 큰 자들이군.”
“머리는 더 큽니다. 어찌 할까요?”
“글쎄, 저쪽은 알아서 살아남을 테니 우리끼리라도 살길을 도모해야 하지 않을까?”
“옳으신 말씀. 그럼 실례!”
짧은 사이, 숨 가쁘게 의견을 교환한 슈라 일행이 마침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내실엔 다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리만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압도적이기까지 한 자신들의 머릿수를 단단히 믿고 있는 것이다.
“흥, 죽여 버려라. 뒤처리는 내가 맡겠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만.”
“웃기는 소리. 상황판단을 잘하는 게 좋을 것이다. 자, 티르메네스를 이쪽으로 보내라, 애송이!”
“이런, 정말 곤란하게 만드시는 분들이군요.”
곤란하냐? 나도 곤란하다.
급박하고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알기는 아는 건지 사내는 태평하게 곤란하다는 소리만 자꾸 늘어놓고 있었다. 덕분에 티르는 어떻게 하면 혼자서 저 험난한 길을 뚫고 탈출할 수 있을까를 연구하느라 맹렬하게 머리를 굴려야 했다.
‘어떻게 해서든 저 싸가지 황태자 일행에게 묻어나가려고 했는데 다 틀려버린 건가? 이제 어쩌지?’
암만 봐도 별다른 재주라고는 없어 보이는 빨강머리를 믿느니 차라리 자신의 손에 들린 손바닥만 한 단검을 믿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하도 꽉 쥐어 이젠 쉬이 펴지지도 않을 것 같은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티르는 남몰래 한숨을 삼켰다.
“놈을 잡아라!”
와락 달려든 사냥꾼들에게 나칼이 잡혔다. 주변에 무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쉽게 잡혀 맥이 다 빠질 정도였다. 그가 잡히자 몇 안 되는 카비아니 가의 무사들도 전의를 상실한 채 검을 내리고 말았다. 말 그대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자, 그대들도 순순히 항복을 하시지?”
“에,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어쩌지?”
“흥! 후회하게 될 것이다. 쳐라!”
사냥꾼들과 나리만 가의 무사들이 슈라 일행을 둘러싸고 본격적으로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쪽이야 무기 하나 지니지 않은 빨강머리와 티르뿐이니 큰 힘 들 일이 없다 싶었는지 그들을 먼저 제압해 놓으려는 것이다.
“티르메네스를 넘겨라!”
“그러니까 곤란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그놈의 곤란. 아무래도 당신은 그냥 입 닥치고 있는 게 좋겠다. 흥! 이봐, 탄탄. 이미 팔린 노예를 내놓으라는 건 강탈이 아닌가?”
“큭큭, 스스로가 노예임을 인정하는 거냐? 건방진 놈, 내 네놈을 그냥 둘 줄 아느냐?”
“왜, 배라도 가르려고? 내 칼 맛이 부족했던 모양이지?”
“으드득! 죽일 놈.”
티르 덕분에 온통 피로 물든 얼굴을 손으로 조심스레 훑으며 탄탄은 이를 갈았다. 놈이 만든 상처가 말도 못하게 욱신거리고 있었다. 다행히 눈은 멀쩡하지만 힘껏 내리그은 덕분에 깊게 벌어진 상처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흉터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용서할까보냐!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라, 탄탄. 티르메네스는 내 것이다.”
“끄응. 빌어먹을!”
“자, 이리 오너라, 티르메네스. 너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나밖에 없다. 이보다 더 험한 꼴을 겪고 싶지 않다면 순순히 말을 듣는 게 좋아.”
“차라리 죽여라, 이 돼지야!”
장미가시나 다름없는 단검을 제법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티르는 악을 썼다. 나리만에게 가느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무는 편이 나았다. 항복해 봐야 오히려 저들의 신세만 편하게 만들어주는 것일 텐데 두고두고 얼마나 배가 아플 것인가.
“이봐, 아무리 가망이 없어 보인다고 해도 멍청하게 서있지만 말고 방법을 좀 생각해 보는 게 어때? 날 샀으면 책임을 져야지.”
“후훗, 책임입니까?”
“그럼 그 돈을 처들이고도 그냥 죽게 내버려둘 생각이었어? 모르는 모양인데 사실은 나보다 당신 목숨이 더 위태로워. 나야 잡혀도 당분간은 살려둘 테지만 당신은 아니거든.”
“아, 그렇군요. 후환거리를 살려둘 순 없는 거니까. 역시 인간들이란…….”
“……?”
“우아하지 못한 생물이랍니다. 기억해 두십시오, 티르메네스님. 시간이 많이 지체됐군요. 그럼, 이제 가볼까요?”
우아하지 못한 생물? 인간이 인간에게 할 소린 아닌 것 같지 않아?
당최 이해하기가 어려운, 엉뚱한 말을 해놓고 그걸 또 기억해 두라는 소리에 티르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설마 애초의 예상대로 정신이 살짝 건강하지 못하신 형님이셨던 건가? 티르는 그 점이 못내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그런 생각은 한순간에 숨 막히는 경악으로 바뀌어 버렸다.
촤아악!
“헉!”
갑작스런 움직임을 느끼고 빨강머리에게 다가서던 나리만 가의 무사 하나가 피분수를 내뿜으며 힘없이 나동그라졌다. 휘두른 칼에 맞은 것도 아니고 무서운 힘에 내던져진 것도 아닌데 그냥 저 혼자 죽어 자빠진 것처럼 그렇게 심심하게 피를 뿜으며 넘어진 것이다.
그 갑작스런 사태에 주변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죽은 무사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정확하게 두 쪽이 나 있었다. 세로로. 쓰러지고 나서야 두 쪽으로 갈라지는 모습에 모두들 움직임은 물론이고 숨까지 멈추고 말았다.
“이제부터 미천한 인간들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여전히 방글방글 웃는 얼굴로 그가 말했다. 그때, 티르는 새빨갛게 번져가는 그의 미소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너무나 즐겁게 반짝이고 있을 그의 눈만은 차마 마주볼 수 없었다. 그가 즐거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 그 또한 다른 이들처럼 공포를 느낄 것만 같았다.
“자, 고개를 들고 어깨를 펴십시오. 당신은 저들을 지배하기 위해 태어나신 분이랍니다.”
“……!”
확 번져오는 피비린내와 정확히 반 토막이 나 꾸역꾸역 내장을 토해내는 눈앞의 시체를 외면하고 티르는 그가 시키는 대로 고개를 오만하게 치켜들었다. 머리꼭대기가 싸늘하게 식어 내리고 있었지만 눈앞의 사내에게 약한 모습 따윈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 자는 약한 나를 원하지 않는다.’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짓밟힐 것만 같았다. 아니 눈앞의 시체처럼 그도 두 쪽이 나 차디찬 땅위에 눕게 될지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될 순 없다. 절대 죽을 수 없어.’
티르는 이를 악물었다.
“무, 무엇들 하느냐? 잡아라!”
퍼뜩 정신을 차린 나리만이 허겁지겁 무사들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당당하게 앞으로 나서서 막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산책이라도 나온 듯 느긋하게 걷고 있는 그들을 피해 주춤주춤 물러서느라 바빴다.
“어쩐지 불공평한 것 같은데?”
사냥꾼들에게 둘러싸여 공격을 당하고 있는 자신들과 달리 너무나 쉽게 길을 뚫어버린 빨강머리를 보며 슈라가 가볍게 투덜거렸다.
“불만이시면 저자처럼 모범(?)을 보이십시오.”
“안타깝지만 저런 짓은 내 취향이 아니야. 전혀 깔끔하지가 못하잖아?”
“그럼 아무 소리 마시고 지금처럼 계속 깔끔하게 검을 휘두르시는 수밖에요.”
“흥! 그나저나…… 너도 느꼈나, 이라즈?”
푸른 눈동자 속을 스쳐가는 희미한 섬광. 잔뜩 낮춘 목소리로 슈라는 속삭이듯 물었다.
“당연히.”
“역시 ‘그쪽‘인 것 같지?”
“아마도.”
“이런, 난감하게 됐는걸. 하필이면 모처럼 마음에 든 꼬마가 ‘그쪽‘의 초대를 받다니 말이야.”
“전하께서 하시는 일이 늘 그렇지요 뭐. 언제는 술술 잘 풀린 적도 있었습니까? 이젠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만.”
“어이, 그렇게 말하면 내가 상처받을 것 같지 않아?”
“상처받으셨습니까?”
“관둬. 젠장, 다시 말하지만 넌 정말 인정머리 없는 놈이야.”
“억울하시면 여자가 되시라니까요?”
표정 하나 변하는 법 없이 툭툭 잘만 받아치는 이라즈에게 슈라는 결국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이런 싸움에서 그에게 이기기란 해가 서쪽에서 뜨는 일만큼이나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슈라였다.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요?”
툴툴대는 그에게 이라즈가 막 입구 쪽으로 사라지는 티르를 가리키며 물었다.
“당연한 걸 왜 묻고 그래? 그만 놀고 가자! 길을 뚫어라, 자일로스.”
“존명! 아랏차차! 비키랍신다!”
엄청난 일을 벌여놓고 사라지는 빨강머리 덕분에 살짝 넋이 나간 사냥꾼들을 손쉽게 밀쳐내고 누가 붙잡기 전에 그들은 후다닥 카비아니 가의 노예 거래소를 빠져나왔다. 그러나 그들이 밖으로 나왔을 때 티르와 빨강머리 청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까?”
다니무스의 물음에 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글쎄?”
“어디에서 온 자인지는 확인하셨겠지요?”
“아, 하 투란이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 어디의 누구에게 데려가겠다는 소리는 들었습니까?”
“그 하 투란에 있다는 혀, 형이라는 자가 아닐까? ……아마도.”
“하아,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대체 뭘 믿고 그 자에게 티르를 맡기신 거죠, 막시무스?”
“…….”
푹 고개가 꺾였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당장 감옥을 빠져나오는 일에 몰두 하느라 미처 거기까지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하라, 그는 강한 자였다. 그에게 맡기면 티르는 안전할 것 같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볼까? 티르를 그에게 맡겨두면 바라를 지키기가 더 수월할 듯 싶어 결정한 일이었다. 탈옥을 한 신세라 드러내놓고 움직일 수 없는 그에게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 티르는 조금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나리만이 있는 이상, 노예 신분으로 추락한 그를 이 아덴부르크에 사는 다른 누군가에게 맡길 수도 없었다.
천상, 멀리 도망시키거나 그와 함께 움직여야 하는데 그러기엔 바라가 너무 위험했다. 그리하여 막시무스는 ‘안전한 구출‘을 조건으로 티르를 하라에게 맡기고 자신은 바라를 지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티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일 것이었기에.
“변명입니까?”
“어쩌면. 하지만 벌써부터 후회하고 싶지 않다.”
“젠장, 책임이라면서요? 당신에게 티르메네스는 책임이라면서요? 이것이 당신이 말하는 그 잘난 책임이란 것입니까?”
“그래.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게 내 책임이다, 다니무스. 나는 티르를 위해서 바라를 지킨다. 그래야 녀석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
막시무스의 말에 다니무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곧 물었다.
“티르가 돌아올 수 있을까요?”
“녀석은 돌아온다. 반드시!”
“하지만 그 ‘하라‘라는 자가 다른 마음을 먹고 있는 거라면 어쩌지요? 알다시피, ‘형제‘라는 말이 안전을 보장해주지는 않잖아요. 혈육인줄 알았던 나칼도 저 모양인데.”
다니무스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처럼 불쑥 나타나 갑자기 ‘주인‘이며 ‘아우‘ 운운했다는 사람도 믿을 수 없다. 아니아니 믿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진짜 속내였다.
“이제와 티르메네스가 필요한 이유가 뭐랍니까, 대체? 어떻게 그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안 거죠?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최근에야 알고 찾아온 걸까요?”
궁금한 것도 많고 의심스러운 건 더 많고 알아내야 할 것들은 그보다 더 많았다. 온통 불명확하고 정확하지 않으며 또한 낯익지도 않았다. ‘어디에서, 누가, 왜, 어디로.’라는 간단한 질문조차 만족시킬 수 없는 상대는 누가 봐도 위험한 것이 아닌가.
그런 위험한 자에게 막시무스는 덜컥 티르를 맡기고 돌아왔다. 아니 밤손님처럼 은밀히 숨어들었다.
티르가 팔린 후 며칠이나 지난, 지난밤이 되어서야 그가 은밀히 자신을 찾아왔을 때 다니무스는 그야말로 기절할 듯이 놀라버렸다. 안 그래도 막시무스가 탈옥했다는 소문이 단 며칠 만에 시 전체로 번지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카비아니 가는 물론이고 그의 집과 자주 가는 술집 등등에 경비가 강화되었고 거리 곳곳마다 화상이 붙었다. ‘목격했거나 신고하는 자에게 포상함‘ 이라는 딱지를 떡하니 단.
“이제 어쩔 겁니까? 알고 있겠지만 지금 상태로는 카비아니 가 근처에도 갈 수 없어요. 경비가 너무 삼엄하다고요.”
“그래도 꼭 가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바라를 곁에서 지켜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해. 제길, 나칼 그 멍청한 자식 때문에 카비아니 가가 통째로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되는 것은 아닌지…….”
“휴우, 소문에 의하면 나칼이 티르를 팔아치운 뒤 오늘까지 저택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답니다. 자리에 누운 당주를 보살피느라 그런다고들 하는데 믿을 게 따로 있지, 설마하니 그 말이 사실이겠습니까?”
보는 눈들이 많으니 좋아 날뛰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전보다는 활발히 활동영역을 넓힐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요 며칠 나칼은 내내 저택 안에만 머물러 있었고 시내를 활보하는 것은 그가 거느린 사냥꾼들뿐이었다.
그런 사실이 막시무스와 다니무스의 불안을 더 부추기고 있었다.
나리만과 나칼이 손을 잡고 일을 벌였는데 그는 두문불출하고 나리만은 전보다 더 돈을 펑펑 써대며 날아다닌다? 게다가 한낱 노예사냥꾼에 불과했던 자들이 이젠 카비아니 가의 무사 노릇을 하고 있고?
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단박에 의심을 품을 만한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알려지지 않은 일이 더 있는 거다. 그들은 아직 모르는.
“혹시 나칼도 갇혀있는 건 아닐까요?”
“뭐? 설마. 누가 그 놈을 가둔다는 거냐? 놈이야말로 이번 일을 벌인 당사자인데.”
“하긴. 그럼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요, 나칼은?”
“난들 아나. 혹시 모르지. 뒤늦게 후환이 두려워져 그렇게 처박혀 있는 것인지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어쨌거나 티르는 무사히 벗어났고 나칼이 아끼던 사냥꾼 놈의 얼굴엔 흉터가 생겼으니까 말이에요. 역시 티르는 그냥 떠날 놈이 아니라니까. 히히.”
노예로 팔린 티르가 홧김에 사냥꾼의 얼굴을 그어놓고 도망쳤다는 소문을 다니무스도 들었다. 무사도 하나 죽였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건 증거가 없으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고 다만 더 살벌해진 탄탄의 얼굴을 멀리서 보고난 뒤에야 그는 티르가 얌전히 떠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하 투란이라…… 티르가 언제쯤 돌아올까요, 막시무스?”
“글쎄다. 그건 신만이 아시겠지. 하지만 한가지만은 확실하다. 언제가 되었든 녀석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것. 우린 바라 곁에서 그때를 기다려야 한다.”
“후우, 그러자면 일단은 어르신을 안전하게 지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카비아니 가로 숨어들어야 하는데 지금으로선 뾰족한 방법이 없잖아요. 음, 병문안 핑계를 대고 제가 한번 찾아가 볼까요?”
“들여보내줄까?”
“으음, 안되겠죠? 티르와 제가 절친한 사이였다는 건 카비아니 가의 개도 잘 아는 일일 테니. 하아, 어쩐다?”
낙담한 그들은 다시 각자의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때였다. 문득 막시무스의 뇌리를 스쳐가는 의외의 인물이 하나 있었다.
“로무네스!”
“에?”
“용병 로무네스 일당. 그 자들이 나리만의 사냥꾼들과 자주 판크라티온을 벌렸었지.”
“그거야……. 그런데 그게 왜요?”
“로무네스는 아칸의 친구다. 나칼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그 아칸 말이야.”
“에? 하지만 아칸은 노예 사냥꾼 출신이잖아요?”
“맞다. 그러나 사냥이 없을 때는 로무네스와 함께 용병일도 했었지. 그 일을 그만둔 건 나칼의 아버지 센이 죽고 난 후 나칼이 지라와 함께 그를 카비아니 가로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막시무스는 늘 나칼과 함께 돌아다니던 아칸과 지라를 떠올렸다. 그들은 의심할 바 없는 나칼의 최측근이었다. 비록 나칼이 카비아니 가의 모든 권력을 틀어쥔 뒤 그들이 아닌 노예 사냥꾼이었던 탄탄을 전면으로 내세우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나칼의 곁을 떠났다는 소리도 못 들었으니 아직은 그의 곁에 머물러 있을 확률이 컸다.
“그런데 아칸과 로무네스가 친구라고 해도 우리에겐 하나 도움 될 것이 없잖아요?”
“후후, 그렇지도 않다. 로무네스는 나와 약간의 친분이 있으니까.”
“예에? 아니 어떻게?”
“이게 다 티르 덕분이다. 녀석은 나리만이 싫어서 만날 로무네스 일당에게만 돈을 걸었잖아. 그러니 자연적으로 그와 안면이 생길밖에.”
“아하! 그럼 로무네스를 통해 카비아니 가의 상황을 알아볼 수 있겠군요. 아니 잘하면 나칼의 사정까지도…….”
둘의 얼굴이 동시에 환하게 밝아졌다. 실낱같은 희망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꼭 돌아와야 한다, 티르. 바라는 내가 지켜낼 테니 꼭 네 자리로 돌아와라. 넌 바라의 운명이고 내 책임이다.’
막시무스는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소리 없는 이 간절한 당부가 바람을 타고 높이 날아올라 하 투란으로 가고 있을 그의 꼬마에게 전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