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0화 자하크(2)]

-보이나?
‘글쎄? 그렇게 갑자기 물으면 내가 많이 당혹스럽지 않을까? 웬만하면 조금 더 있다가 물어봐 줄래? 사실은,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됐거든.’
그의 손끝을 바라보며 티르는 멍하니 생각했다.
꿈 치고는 대단히 생생했지만 내용은 본의 아니게 난감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벌써 며칠 째더라? 닷새? 엿새?
요즘 티르는 매일 밤 거의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 그는 언젠가 보았던 황금빛 눈동자의 사내를 만났다. 처음 보았을 때처럼, 그는 여전히 전신을 꼼꼼하게 흑색의 천으로 가린 채 이국적인 검을 비껴 쥐고 말위에 앉아 있다.
동상처럼 길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던 모습 그대로 사막의 황금빛 모래위에 나타난 그는 언제부터인가 소리 없이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다. 집요하게 지켜보는 시선을 따라가다 마침내 그를 발견한 날부터 그는 매일 밤 티르의 꿈속으로 찾아온다.
꿈속에서조차도 그를 향한 지독한 이끌림은 여전했다. 그 숨 막힐 듯한 이끌림에도 불구하고 다가서기가 두려울 만큼 강한데다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이질적인 분위기 때문에 티르는 한동안 그를 멀찍이서 바라보기만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저도 모르게 한발 한발 다가서게 되었고 마침내 오늘 그를 향해 손을 내밀기에 이른 것이다.
“당신은 참 이상해.”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다 티르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수줍은 소녀처럼 가만히 중얼거렸다.
“분명히 낯선데 낯익은 것 같거든.”
-……?
“무서운데 안 무서워. 달아나고 싶은데 더 가까이 가고 싶기도 해. 당신을 발견한 것이 기쁜데 슬픈 것도 같아. 왜 이렇지?”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저 그렇게라도 혼란스러운 자신의 감정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뿐.
“어디 보자. 이 사막에도 물이 있다고?”
생뚱맞은 말을 해놓은 것이 어쩐지 조금 민망해 티르는 고개를 돌려 사막을 살펴보는 척 했다. 황금빛 달 아래에서 출렁이고 있는 사막의 밤 풍경은 여신의 몸매처럼 사뭇 관능적인 구석이 있었다. 모난 것이 없는 부드러운 모래 언덕들의 굴곡이 딱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물이라, 물…….”
정말로 물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살펴보는 것도 대강대강. 근데 저 모래 속 깊은 곳에는 뭐가 있으려나? 끝까지 파 내려가다 보면 혹시라도 단단한 땅을 만나게 되려나? 자하크의 말처럼 물이 흐르진 않겠지만 그래도 저 깊은 곳에는 단단한 땅이 한 조각쯤(?)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흐응. 역시 모래만 있는 땅은 재미없어.”
허리를 굽혀 반짝이는 모래 위를 쓸다 손을 깊숙이 푹 넣어보았다. 그리곤 아무 생각 없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난 단단한 땅이 더 좋아. 이렇게 푹푹 빠지는 건 영 취향이 아니라고.”
다음 순간이었다. 콰드드득!
둔한 굉음과 함께 갑자기 발밑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영문을 몰라 티르는 모래 속에 파묻은 손을 미처 빼지도 못하고 한동안 그대로 굳어 있었다.
‘꿈이니까 죽지는 않을 테지.’
그런 믿음이 있었다. 꿈에서 깨버리면 다시 원래의 자리에 누운 채 눈을 뜨게 될 것이라는 믿음. 그래서 땅이 흔들리는 것 정도는 크게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그러나 모래 속에 파묻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기운은 경우가 달랐다.
“얼래? 축축해?”
-물이 온다.
“물?”
멍하니 중얼거리는 순간, 발밑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모래를 뚫고 퐁퐁 솟구쳐 오르는 물줄기. 콰르르르……. 그의 발밑에서 솟아난 물이 순식간에 모래를 적시며 언덕을 흘러내려가더니 낮은 곳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잉크가 번지듯 점점 어두운 색깔로 모래를 물들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둥글게 고여 들기 시작한다.
고여 든 물은 곧 작은 웅덩이가 되었고 그것은 아직도 솟구치고 있는 물 덕분에 빠르게 커져만 갔다. 웅덩이에서 못으로 못은 이내 호수가 되었다. 새파랗게 보일만큼 맑은 사막의 호수.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티르는 벌린 입을 미처 다물지도 못하고 있었다. 물이라니……. 온통 모래만 있는 사막에서 갑자기 물이 솟아나 호수가 생기다니. 이건…….
“아, 꿈이었지 참!”
그렇다, 꿈이었다. 꿈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다행히도.
“그러면 그렇지. 괜히 걱정했잖아?”
안도의 한숨마저 내쉬며 티르는 그제야 모래 속에 든 손을 꺼내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바짝 마른 고운 모래가 아닌 물에 젖은 진한 흙덩어리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흙?”
젖은 모래가 아닌 아덴부르크에서나 보던 진한 빛깔의 찰진 흙이 그의 손안에 남아 있다. 의아한 생각에 티르는 냉큼 발밑을 파보았다. 그러자 어이없게도 모래 대신 자신이 바라던 단단한 흙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우와, 진짜 흙이네? 역시 꿈이구나. 흙이 좋다니까 금방 흙이 나타났잖아? 물도 나오고 호수도 생기고…….”
-…….
꿈이라고 꿋꿋하게 믿고 있는 티르를 보며 자하크는 조금 난감함을 느끼고 있었다. 어째서 꿈이어야 하는 것일까? 사막으로 흙을 부르고 땅 속 깊은 곳을 흐르던 물을 불러온 것은 분명히 티르 자신의 힘이었다. 그런데도 믿지 않는다. 왜?
‘두려운 건가, 너는?’
샤나메가 움직였는데도 힘이 아직 부화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그런 이유일지 모른다.
허리에 두 손을 얹고 달을 향해 ‘하하‘ 웃어대는 티르를 살피며 자하크는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꿈이니까 뭐든 원하는 게 생기는 거구나. 좋았어! 그렇다면 이곳에다 오아시스를 만들 테다.”
-오아시스?
“웅. 오아시스가 없어서 오는 내내 얼마나 힘들었다구. 온통 모래, 모래, 모래. 지겹게스리. 아까부터 이쯤에 오아시스가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있었어. 아, 걱정 마. 이건 꿈이니까 금방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럼 시작해 볼까?”
천진한 황금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티르는 호기롭게 소리쳤다.
이 미칠 듯이 유쾌한 기분! 꿈이라 그런지 온몸에서 기운이 펄펄 나고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마음이 둥둥, 몸도 둥둥. 한없이 유쾌한 것이 마치 훨훨 하늘을 날고 있는 것 같았다.
“으하하하. 좋아, 좋아. 나무도 만들고 풀이랑 꽃도 만들어야지. 물속엔 물고기가 있는 게 좋겠지? 이것저것 마구마구 생겨나라!”
드드드드…….
유쾌한 장난꾸러기 요정처럼 이곳저곳으로 펄펄 뛰어다니며 양손을 뻔쩍 치켜들고 ‘생겨나라‘ 외치자 다시 땅의 진동이 시작되었다. 콰득 콰득…….
모래로 뒤덮인 땅이 일어나 언덕이 되고 깊은 곳에 묻혀있던 바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찰진 흙 위에서 싹이 돋아나더니 금방 쑥쑥 자라 풀이 되고 꽃이 되고 가지를 늘어뜨린 기다란 나무가 되기도 한다.
툭툭! 금방 자라난 나무에서 열매가 맺혀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그 열매가 자라 나무가 된다. 시간이 빨리 돌아가고 있기라도 한 듯 모든 것들이 숨 가쁠 정도로 쑥쑥 자라 마치 포식하듯 흙을 뒤덮고 있었다.
“물고기, 물고기, 물고기!”
-…….
“물고기이이! 나타나라! 쨘~ 얼래? 왜 안 생기지?”
호숫가를 돌아다니면서 바라던 대로 꽃이며 나무를 잔뜩 만들어놓고 신나하던 것도 잠시. 티르는 이제 호수를 향해 물고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것과는 달리 물고기는 금방 나타나지 않고 있다.
“아, 왜 안 생겨? 차별하는 거야?”
물속에 얼굴까지 처박고 물고기타령을 하고 있는데도 안 생기다니. 이놈의 꿈이 갑자기 왜 이렇게 비협조적인 된 거지? 너무 많은 걸 바라서 피곤해졌나? 아니면 깰 때가 다 된 건가.
그러고 보니 어느새 달이 많이 희미해져 있었다. 황금빛 찬란하던 아름다운 타후티는 이제 아덴부르크에서 사용하는 은화처럼 희끄무레하다.
“에, 김새라. 한참 재미있었는데.”
재미만 있었나? 재미는 물론이고 스릴도 있었다.
순식간에 쑥쑥 자라는 풀이며 나무도 신기하고 호수의 맑은 물은 신기하다 못해 경이로운데다 그것들을 감싸고 있는 흙은 황금빛 모래보다 아름답다.
“그러고 보니 나 혼자만 논 것 같네. 같이 놀자고 해놓고 나만 신나서 돌아다녔잖아? 자하크, 심심했지?”
-……아니.
“거짓말. 계속 가만히 서서 바라보기만 했으면서.”
혼자만 신나 이것저것 만들어대느라 자하크를 미처 신경 쓰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그래서 티르는 냉큼 그를 끌어다 호숫가에 앉히고는 그 옆에 주저앉았다.
“봐봐, 물이라고. 시원해. 그런데 물고기는 생기지 않아.”
-…….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티르는 황금빛 불꽃 문양이 선명하게 자리 잡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그 모습조차도 자하크의 눈엔 어찌 그리 귀엽기만 한지……. 지켜보는 내내 생동감 있게 살아있는 그를 느꼈다.
생명의 기운이 가득한 아이. 흙을 옮겨오고 물을 이끌고 꽃과 나무를 키우는 사이 사방에 금빛으로 빛나는 생명의 빛을 뿌리고 있었다는 걸 본인은 모르고 있겠지? 그 아름다운 풍경을 그 혼자서만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아이는 모르고 있을 것이다.
‘오래전에도 그런 존재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건, 누구였더라?’
욱씬. 문득 심장 저 너머가 아팠다.
아득하게 잊고 있던 그 누군가가 생각 날듯 말듯. 자하크는 한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뚝!
시린 눈물 한 방울이 그의 무릎을 베고 잠든 아이의 얼굴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달이 안타까운 듯 느릿느릿 기울고 있었다.
쾅!
“허튼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다 죽어가는 그 늙은이를 위해서라도 말이야. 크크크.”
험하게 닫힌 문 너머에서 음험한 기운이 잔뜩 실린 웃음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탄탄, 네 이놈!”
나칼은 하얗게 뼈가 드러나도록 불끈 주먹을 쥐었다. 하루 종일 잘근잘근 씹힌 입술은 찢어져 딱지가 앉았고 광대뼈 부근은 시퍼렇게 피멍이 들어 있었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탄탄 놈이 또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늦은 시간까지 기다리고 있던 아칸과 지라가 황급히 다가와 부산스럽게 몸을 살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짜증스러웠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만 쉬고 싶다.”
“도련님!”
“그만! 지금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아칸.”
초라해져버린 자신의 처지가 부끄러우면서도 원망스럽다. 대외적으로야 대 카비아니 가의 당주 대리라는 딱지를 달고 있지만 실상이라는 것은 노예나 다름없는 지경이 아닌가.
‘죽일 놈, 감히 나를 꼭두각시로 만들겠단 말인가?’
저택내의 대소사는 거의 대부분 탄탄이 처리하고 있었다. 카비아니 가에서 운영하고 있는 사업과 농노들을 관리하는 일에도 그가 나서고 있었고 재산운용 쪽에도 슬슬 손을 뻗어오고 있다. 더구나 나리만이 노예 시장을 비롯한 사업 쪽을 빠른 속도로 잠식해 오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이대로 가다간 두 놈에게 눈 뜨고 전 재산을 빼앗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칼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다못해 외출 한번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저택 내에서도 어디를 가나 탄탄의 수하들이 따라붙었다.
그는 이미 별채로 쫓겨난 상태였다. 바라를 간병한다는 명목으로 대외적인 활동은 금지되었고 전엔 무시로 나가곤 했던 사냥도 나갈 수 없었다. 아칸, 지라와 함께 별채에 머물면서 언제 의식이 돌아올 지 알 수 없는 바라를 살피는 일이 그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그나저나 보물이란 건 또 뭐지?’
초저녁 무렵, 탄탄은 그를 불러 이상한 소리를 했다.
지난달 바라가 오랜 외출에서 돌아오면서 귀한 물건을 가져왔는데 그것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이다. 보물이라니? 그와 관련해 나칼은 바라로부터 어떤 이야기도 들은 기억이 없었다. 그리하여 또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보나마나 티르메네스 놈에게는 얘기를 했겠지.’
아니나 다를까. 탄탄은 문제의 보물이 티르메네스의 손에 있는 듯 하다고 말했다. 놈이 가지고 달아난 거라나? 그 부분에서 살짝 통쾌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집요하게 추궁하는 탄탄에게 몇 대 맞고 났더니 곧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딴 것, 내가 알게 뭐야. 있는 지도 모르던 것을 이제와 어떻게 찾겠냐고?”
탄탄은 보물이 카비아니 가의 것이라고 우겼다. 카비아니 가의 것이라면 노예로 팔린 티르메네스보다 당연히 그에게 우선권이 있다면서 돌려받아야 한다고 속살거렸다.
‘제 놈이 가지고 싶은 거겠지. 흥!’
무슨 수를 써서든 티르메네스를 찾아내 보물을 돌려받을 것처럼 구는 탄탄 때문에 그는 적잖이 짜증이 나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탄탄을 죽이고 사냥꾼들을 모두 저택에서 몰아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기엔 그의 힘이 너무 작았다.
‘빌어먹을! 속은 거야. 이용당하고 만 거라고.’
나칼은 협박을 당하고 있었다. 허투루 굴면 그가 한 일을 대내외에 다 알려버리겠노라고 탄탄은 공공연히 떠벌렸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신들은 그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움직인 것뿐이란다. 사실은 그 반대인데!
‘바라가 옳았던 거다. 바라의 말대로 진즉에 놈들을 처리했었더라면…….’
이제와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마는, 그래도 뼛속 깊이 후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후회로 물든 그의 시선이 침대 쪽으로 돌아갔다. 목숨은 건졌으나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창백한 바라가 혼자 누워 있었다. 죄의 무게만큼이나 시커먼 죄책감이 그를 덮쳐왔다.
“바라, 나는…….”
차마 더 보지 못하고 나칼은 냉큼 고개를 돌렸다. 그 바람에 이불 사이에서 놓인, 미세하게 움찔거리는 바라의 손가락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오아시스?”
하라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푸른 하늘이 고스란히 비치고 있는 넓은 호수. 우거진 나무와 풀숲. 그리고 단단하게 그를 받치고 있는 찰진 흙. 그것은 틀림없는 오아시스였다.
“이게 대체 어떻게……?”
그는 조용히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다시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러나 눈앞의 오아시스는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헛것을 본 것이 아닌 것이다.
“맙소사!”
이번에는 입이 벌어졌다. 칼리굴란 사막에 오아시스라니! 가도 가도 오직 황금빛 모래만 있다고 해서 불타는 열사의 사막이요 움직이는 모래의 사막이라는 이름까지 붙은 그 칼리굴란 사막에 오아시스가 생겼다.
이곳을 지나 동부 투란 제국으로 들어갈 갈 때만 해도 없었던 오아시스가 그야말로 갑자기 생겨난 것이다. 그것도 대단히 아름다운 오아시스가!
“아! 오아시스 같은 건 없다고 했는데…… 뭐라고 설명하지?”
그의 고개가 갑자기 뒤로 돌아갔다. 다행히 티르는 아직도 잠들어 있었다. 그날, 갑자기 사라졌던 티르는 새벽이 되어서야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오는 모습을 직접 본 것은 아니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깜빡 졸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돌아와 있었다.
카멜루스의 등에 몸을 말고 엎어져 도롱도롱 코를 골고 있는 티르를 보다 하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이틀째다. 이틀 동안 그는 계속 잠만 자고 있었다. 아무리 흔들어대도, 시끄럽게 떠들어도 깨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흙투성이가 된 채 돌아와 계속 죽은 듯이 잠만 자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앞으로 얼마나 더 잘 것인지에 대해서도 그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저 스스로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하라는 갑자기 생겨난 오아시스와 티르를 번갈아 바라보다 혼잣말처럼 나직이 물었다. 문득 어떤 생각 하나가 머리를 스쳐갔다. 만에 하나, 이 난데없이 생겨난 오아시스와 그가 관련이 있다면?
‘엘룬의 왕족들처럼 물을 다루는 능력만 가지고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호수는 만들 수 있다 쳐도 숲은 어림없다. 주인처럼 어둠의 힘을 타고 났다면 더더욱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거지?’
아직 부화하지 않은 그의 힘이 갑자기 두려워지는 순간이었다.
부화하지 않은 힘으로도 오아시스를 만들 정도인데 만약 그의 힘이 완벽하게 깨어난다면?
“후우, 무슨 생각을…… 그가 했다는 증거도 없는데. 내가 너무 앞서가고 있는 거다.”
하라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더는 생각할 수 없다. 아니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아야 하는 것이기에.
“이봐아~“
간신히 생각을 접고 있는데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울리더니 그의 어깨위에 ‘턱‘ 하고 손이 올라왔다.
“비 맞았나? 혼자 뭘 그렇게 궁시렁 거리고 있는 거지?”
슈라였다. 얄미운 인간. 아니 얄미운 인간들의 주인.
원래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법이라더니 이라즈와 자일로스라고 불리는, 그 인간들이 딱 그랬다.
“내버려두십시오. 아무래도 취미생활인 것 같은데…….”
“아, 저런 것도 취미가 되는 겁니까, 이라즈? 병이 아니고?”
“전하께서는 폭풍만 치면 창문을 열고 비바람 맞아가며 ‘으하하하‘하고 웃는 취미를 가지셨습니다. 바로 그런 게 병입니다.”
“아, 그렇군요.”
“이것들이…….”
‘다시 시작이군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조용했던 때라곤 모두가 잠든 한밤중뿐이었다. 그 외엔 저렇게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니 그냥 떠들기만 하면 차라리 나았다.
“이라즈, 죽어랏! 자일로스가 포기한 이상 내 손으로 직접 베어주겠다.”
“원하시면 얼마든지.”
“진담이냐?”
“물론입니다. 단, 한 가지만 기억하십시오. 언젠가 제국 제일의 점술사가 말하길, 전하께서는 저보다 딱 하루 더 사신다고 했습니다.”
“……!”
“저보다 장수하신다니 기쁘시겠습니다.”
“이런 제길! 그래도 받아랏!”
채챙! 늘 칼부림까지 겸한다는 것이 진짜 문제였다.
뜨거운 사막을 지나면서 끊임없이 떠들다 못해 칼부림까지 해대니 그 일련의 과정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대단했다.
전처럼 약간이나마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거라면 어떻게든 견뎌보겠지만 이틀 내내 잠만 자고 있는 티르를 핑계로 그들은 단박에 일행이 되어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즉, 빼도 박도 못하고 그 투닥거림을 곁에서 고스란히 견뎌야 하는 것이다.
“후우, 저 먼저 가겠습니다.”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펄펄 날뛰는 세 사람을 뒤로 하고 하라는 냉큼 오아시스로 접어들었다. 그리곤 그늘이 진 평평한 자리를 골라 티르를 눕힌 다음 호수를 돌며 혹 위험한 것은 없는지 근처의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다행히 모든 곳이 조용했다. 벌레나 작은 동물들이 스며든 흔적은 있었지만 딱히 위험한 징후 같은 것은 아직 없다. 물론 물이 있으니 곧 더 크고 위험한 짐승들이 찾아오긴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들 같은.
“마을이 생기기엔 작지만 쉬어가기에는 좋으니 곧 인간들이 차지하게 되겠지요.”
그 전에 사라지지만 않는다면.
생명의 기운이 가득한 아름다운 오아시스의 풍경을 잠시 돌아보다 하라는 다시 잠든 티르의 곁으로 돌아왔다. 언제 따라왔는지 슈라 일당이 벌써 그의 곁에 둘러앉아 진을 치고 있었다.
“애 혼자 놔두고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거지? 이렇게 두었다가 누가 집어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끄응. 그럴 만큼 간 큰 인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우리처럼?”
“……!”
여차하면 집어갈 수도 있다는 소리. 하긴 원래 그럴 목적으로 따라오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잠깐이나마 그런 사실을 잊고 있었던 스스로에게 하라는 조금 놀라버렸다.
‘어느 틈에 이렇게 경계심이 약해져 버린 거지?’
열흘 긴장하다 마지막 하루만 방심해도 빼앗겨 버릴 판에 요 며칠 함께 했다고 그새 경계를 풀어버린 사실이 새삼 경악스러웠다. 그만큼 슈라 일행은 용의주도했고 그들에게 시달린 하라는 지쳐 있었다는 뜻이리라.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좋아. 똑바로 하라고.”
“그런 의미에서…… 그만 떨어지십시오.”
언제 움직인 건지, 티르 곁에 찰싹 붙어 모로 누워있는 슈라를 향해 하라는 서늘한 눈빛을 보냈다. 머리도 쓰다듬고 눈앞에서 홰홰 손도 휘젓고 은근슬쩍 찝쩍대는 수준이 가히 일품.
역시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사람이다. 티르의 순결을 위해서라도 하라는 꼭 그와 거리를 둘 것을 다짐했다. 버티는 슈라를 반강제로 떼어내 멀찍이 보내버린 다음 하라는 티르의 곁에 앉아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