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뷰어

5화



최대한 아쉬운 척 천천히 손을 놓고 그를 배웅한 성녀는 페이트가 저 멀리 떠나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조용히 문을 닫고.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기분 나빠! 너무 기분 나빠! 소름 끼쳐!”

미친 사람처럼 정신없이 옷을 집어 던지고 페이트와 몸이 닿은 부위를 천으로 문지르며 방에 마련된 물로 몸을 씻기 시작했다. 큰 병에 담긴 물을 세수하기 위한 그릇에 가득 부어 피부가 닿은 손, 팔, 얼굴, 가슴, 어깨 등을 빠짐없이 씻고 닦았다. 그 꼴이 언젠가 그녀의 몸을 정신없이 닦아 내던 꿈속의 미래와 겹쳐져 그게 또 기분 나쁘다.

꿈속의 그는 정말 집착이 심해서. 처음에는 아인즈의 허락을 받고 남들과 순서대로 안던 것을 빈번하게 찾아와 독차지하더니 한참 뒤에는 다른 남자가 먼저 와서 안고 있는 것을 보고 친구를 때려눕혔다.

‘그때는 뭐 다행이었나?’

집착이 심하긴 했지만 다른 놈들과 비교하면 다루기 쉽고 비교적 정신이 멀쩡한 놈이었으니까. 그래서 일부러 유혹한 것이기도 하다. 틀림없이 아인즈 다음으로 지위가 높았기도 했고.

“적어도 다른 놈들을 때려잡기에는 제일 편할 테니까. 그러니까 참아야지.”

상반신을 다 드러내고 물을 뒤집어쓴 꼴로 아르모니아는 새하얀 그녀의 팔을 쥐어뜯을 듯이 꽉 붙잡았다. 기분 나쁜 기억이 떠올라서. 우는 건지 화내는 건지 알 수 없었던 남자의 그 얼굴.



“아아아! 이렇게 엉망으로 더러워져서. 저 망할 놈. 괜찮아? 아팠지? 걱정하지 마. 저놈이 널 못 괴롭히도록 내가 계속 붙어 있을 테니까. 자, 다리 벌려 봐. 씻어 줄게. 상처는 안 났지? 저놈에게 안긴 게 기억도 안 나도록 내가 기분 좋게 안아 줄게.”

‘무슨 발정기가 온 짐승도 아니고.’

페이트는 그 끔찍한 날부터 거의 매일 빠짐없이 제파스 가문에 찾아와 그녀를 안았다. 가끔은 집에 돌아가지도 않고 며칠을 묵으면서. 아인즈는 그런 그를 내버려 두었기에 페이트는 자기가 성녀와 결혼한 대상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남에게 안긴 흔적을 깨끗하게 씻어 내고, 닦고, 위로해 줄 생각은 않고 바로 자기 냄새를 덮어 버리려던 행동.



“내가 너무 성급하게 움직였나?”

천으로 몸을 닦아 낸 아르모니아는 한숨을 쉬며 의자를 찾아 주저앉았다. 머리 아픈 표정을 숨기지 않고 이마를 짚으며 생각 없이 성급하게 꼬신 건 아닌가 걱정했다. 꿈이 아닌 미래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지만 너무 막 나간 거 같아서. 아무래도 혼란스럽기도 했고 두려움이 몰려와 저도 모르게 그런 행동을 저질러 버렸는데.

“애초에 피하기만 할 거라면 물러나기 전에 왕을 만나서 의사를 전달하면 그만이었지.”

물러난 후와 물러나기 전은 다르니까. 왕이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계속 신을 섬기며 다른 성당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성녀의 말은 왕의 말과 거의 같은 무게가 있으니 지금 말하면 왕도 뭐라 할 수 없겠지. 하지만 그건 하나의 방도일 뿐.

“전부 기억하고 있는데 그렇게 둘 수는 없지.”

꿈이 아닌 앞으로 일어날 미래인 것을 아는데, 모든 걸 기억하고 있는데 그냥 모른 척 넘어갈 수 있을까? 그 미래가 두려워 도망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하지만 그러면.

“내 고통은 어쩌고?”

아르모니아는 성녀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아름다운 호박색의 눈동자로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노려봤다. 그리고 탁자 위에 주먹을 내리치며 지옥이나 다름없던 악몽을 떠올린다. 그것을 모두 기억하니 도망칠 수 없다!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라고 해도! 아직 그들이 그런 생각을 품지 않았다고 해도!

“그것들을 전부 죽여 버리기 전에는 화가 가라앉지 않아.”

다루기 쉽고 써먹기 쉬운 말. 아인즈 다음으로 지위가 높고 누구보다 집착이 심하며 단순하기 짝이 없는 남자. 그러니 다른 녀석들을 처리하기에는 적당할 테지. 특히 하급 귀족이었던 자들이라면 더욱.

‘전부 8명.’

그중 4명은 결혼식 밤 이후로는 아르모니아를 안으러 오지 않았다. 다른 자들과 달리 지위가 낮기도 했고 계속하다 걸리면 잘못될까 두려워 몸을 사린 거겠지.

“먼저 그것들부터.”

하지만 단 한 번이라고 잊을 생각은 없다. 기억하고 있는데 그걸 넘어갈 수는 없지. 이유도 없이 성녀의 권한으로 그들을 어찌할 수는 없으니 대놓고 난리를 칠 수 있는 단순한 바보를 이용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다른 녀석들을 전부 처리하면 그때는.

“그놈도 죽여야지.”

아직 머리카락에서 물이 떨어지는 모습이 천사처럼 아름다운 성녀, 그녀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무서운 악마 같은 얼굴로 이곳에 없는 누군가를 노려봤다.

“한 놈도 살려 두지 않는다.”

꿈을 꾸기 전의 그녀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말과 절대로 지을 수 없는 표정을 드러내며. 이미 알맹이는 순수하고 고결한 성녀가 아니게 된 여자가 분노와 복수심에 불타며 악몽을 저주한다.

“왜 내가 다시 과거로 올 수 있었는지, 아니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본 건지는 모르지만. 그게 정말 일어날 일이라면 바꿔야지.”

신께서 허락해 준 게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렇게 절망하며 신을 찾을 때는 대답이 없으시더니 이런 무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니 해야지. 반드시 해야지.

‘그 바보를 열심히 유혹해서, 멍청한 머리를 이용해 그것들을 죽이고, 모든 게 끝나면 그때 버리면 돼. 그러면 돼. 그러면 잘못은 모두 그가 한 것이 되니까.’

안 그래도 친구라는 것들을 두들겨 패던 성질머리가 어디 갈까? 다만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아인즈의 존재. 페이트는 한 번도 그에게 반항하거나 화를 낸 적이 없다. 신분이 더 높은 것도 있고 아르모니아와 결혼한 진짜 신랑이 그라는 사실 때문이었을까? 말로는 그걸 불평한 적이 수도 없이 많지만 아르모니아는 그가 아인즈에게 싸움을 건 것을 본 적이 없다. 모든 일의 원인인 그 남자야 말로 절대 가만 둘 수 없는 인물인데.

“됐어. 우선은 다른 놈들부터 처리하고 생각하자.”

어차피 젊은 귀족 자제를 처리하는 일은 왕에게 말해도 불가능한 일일 테니까. 이유도 없이 그 많은 숫자를 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성녀를 부정하다고 생각하고 내칠 수도 있으니. 이 자리는 지금 잃을 수 없는 지위다. 왕과 거의 동등한 상징적인 자리에 앉아 있는 순간은 어느 누구도 그녀를 건드릴 수 없으니까. 권력이 없을 뿐 자기를 지킬 수는 있어야지.

“하지만 지금은……. 좀 쉬고 싶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도 안 되는 상황에 너무 기를 쓰고 화를 냈다. 아르모니아는 정말 어디가 아픈 사람처럼 옷도 챙겨 입지 않은 채 침대 위로 풀썩 쓰러져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녀는 다시 페이트를 만났다.

“정말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어차피 다른 사람들은 특별한 행사가 없으면 제 식사를 챙겨 줄 때나 오니까. 오히려 산책한다며 나가 있는 쪽이 더 조용하죠.”

성녀는 선택받은 순간부터 20살이 될 때까지 대성당 내에서 생활하게 된다. 주로 하는 일은 계절마다 돌아오는 세례식 때 아이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는 일, 나라의 특별한 기념일에 국민에게 축복의 말을 전하는 일, 왕족이나 고위급 귀족, 혹은 평민들이 단체로 결혼식을 올릴 때 그들의 앞날을 위해 축하하는 것.

보통 이런 날은 대성당 안에서 연회가 열려 성녀와 얼굴을 마주할 수 있으나 그것이 허락된 자는 그리 많지 않으며 이런 특별한 날이 아니면 얼굴을 볼 기회조차 없다. 1년 중 그런 행사를 세어 보면 평범한 날이 훨씬 더 많은 게 당연하기에 그녀의 업무는 평소 그냥 제단 앞에서 기도를 올리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면 된다. 성녀가 머무는 공간은 따로 배치되어 있으며 접근이 허락된 자는 하루 3번 식사를 옮겨 주는 자, 아침에 새 옷을 들고 오는 자 정도. 제 주위는 스스로 정리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지니고 청소는 스스로 한다. 오히려 청소라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는 게 적절한 말이리라.

즉, 이제 남들과 교류하는 행사가 모두 끝난 성녀는 만날 사람이 없고 찾아올 사람도 없다는 의미. 그래서 페이트는 남들 몰래 대성당 내에 있는 성녀의 거처로 숨어 들어와 그녀를 만났다. 다만 그들이 만나는 장소는 아르모니아의 방이 아닌 밖에 있는 작은 숲. 방은 혹시라도 사람이 찾아와 볼 수가 있으니까. 하지만 정원이나 다름없는 성당 내의 숲이라면 괜찮다. 이곳은 정말 그녀 외에 어떤 인간도 찾아올 수 없으니까.

“생각보다 쉽게 들어올 수 있어서 안심했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쉬운데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게 놀랍군요.”

“안 된다고 강하게 인식이 박혀 있으니까요. 이 나라 사람들은 그런 걸 참 잘 지키니까.”

진짜 숲보다는 작지만 충분히 숲처럼 보이는 작은 정원. 여러 나무로 둘러싸인 공간은 성녀만의 개인적인 공간. 그러니 여기서 그녀가 무엇을 하든 하늘이 아니고서야 알 수 있는 자는 없다. 순수하고 고결해야 할 성녀가 남몰래 남자를 만나는 거라든가, 그 남자와 함께 옷을 벗은 채 서로의 몸을 만져 주고 있는 거라든가. 두 사람은 햇볕이 내리쬐는 정원에서 아낌없이 피부를 드러낸 채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남자의 몸이 그렇게 신기합니까?”

“물론이죠.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요. 어렸을 때의 기억은 거의 없고. 있었다고 해도 아버지나 형제의 알몸을 볼 일이 많지는 않았을 거 같지만요.”

아르모니아는 후후 웃으면서 페이트의 드러난 상체를 여기저기 더듬었다. 하늘에는 아직 태양이 화창하게 땅을 비추고 있는데 수치심도 없는 것인지 그들은 제대로 된 남녀의 경험도 없는 몸으로 호기심 넘치는 아이처럼 서로의 몸을 더듬어 댔다. 커다란 나무 아래에 기댄 페이트는 자기 무릎 위에 앉은 아르모니아의 호기심 넘치는 시선을 살피며 살며시 웃었다.

“이렇게 보니 참 아이 같으십니다.”

“음란한 여자라서 실망하셨나요?”

일부러 그런 소리를 하자 페이트는 당황해서 전력으로 고개를 저으며 그 말을 부정했다.

“설마요! 이 나이대의 사람이면 자기랑 다른 몸을 궁금해하는 게 당연합니다! 실제로……. 저도 그렇고. 제 친구 녀석들도 모이기만 하면 그런 소리만 떠드니까. 대부분 아침부터 밤까지 여자 몸이 어떤가? 뭐 그런 생각으로 꽉 차 있을 겁니다.”

뒤에 붙인 이야기는 자기가 직접 말하기 부끄러웠는지 시선을 피하는데 역시 이런 부분은 아직 소년 같다. 몸은 20대라고 믿어도 좋을 만큼 엄청나지만.

“멀리서 봤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당신은 정말 덩치가 크고 근육이 많네요. 그래서 더 인상 깊게 남았을까? 입고 있는 옷 아래가 어떤 몸일지, 책에 쓰여 있는 대로 남자의 근육이 그렇게 단단한지, 그런 게 정말 궁금했어요. 이런 건 다른 사람에게는 말 못할 소리라 아무에게도 안 했지만.”

당신만이 특별한 거라는 의미로 아르모니아는 벗은 몸으로 살며시 페이트의 가슴에 기댔다. 그에게 하는 말은 언제나 반은 거짓이다. 그러나 예전에도 타고난 덩치가 인상 깊게 남았다고 생각하긴 했으니 아주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의 몸을 만지듯이 탄탄하기 그지없는 그의 가슴과 살짝 솟아 있는 유두를 건드린다.

“남자들은 여자랑 다르게 가슴이 안 나오니 좋을 거 같아요. 근육은 별개겠지만.”

“가슴이 크면 좋은 게 아닌가요? 남자들은 대부분 큰 여자를 좋아하는데. 여자들도 그런 거 같고.”

“처음 가슴이 나왔을 때가 아마 13살이었나? 기분 탓이었는지 원래 그런 건지 통증이 있었죠. 비슷할 때 생리가 시작되고, 이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어찌나 불편하던지 아프지만 않다면 가슴 따위는 나오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