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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 * *
‘그만둬야겠다.’
장미는 집에서 눈뜨는 것과 동시에 그렇게 결심했다. 그리고 곧바로 몸을 벌떡 일으켜 종이와 펜을 챙긴 장미는 밥상 겸 책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꽂아 넘기고 마른침을 삼킨다. 이어 심호흡을 한 뒤 펜 끝을 몇 번 딸깍거리다 비로소 집중한 표정으로 사직서를 준비했다.
장미는 오후 알바 시간에 맞춰 마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전날의 소란 따윈 언제 있었냐는 듯 마트 안의 광경은 평소와 같았다. 혹시 꿈이었던가? 하지만 머지않아 장미를 발견한 몇몇 직원들이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반응을 보였고 그녀는 역시 전날의 일이 꿈이 아니었다며 자신이 미치지 않았음을 무척 다행으로 여겼다. 장미는 등 뒤로 연신 따갑게 꽂히는 왕언니의 눈길에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더욱 공고히 다지며 사직서를 받아 줄 과장을 찾아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아, 과장님!”
얼마 후 장미는 막 창고에서 나오는 과장을 발견해 쪼르르 달려갔다. 막상 과장의 사람 좋은 얼굴을 보자 어쩐지 기세가 쭈그러들었지만 그래도 애써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어, 장미 왔어? 뭔데.”
평소에도 왕언니의 괴롭힘에서 은근슬쩍 구해 주곤 했던 과장은 어제 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평소처럼 장미를 맞아 주었다. 장미는 그런 과장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끼며 멋쩍게 뒷목을 쓸었다. 정말 면목이 없었다.
“잠시…….”
“응?”
과장은 할 말이 있다는 얼굴로 어렵게 운을 떼는 장미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장은 자기가 방금 나왔던 창고 쪽을 손짓하며 먼저 안으로 들어갔고 장미도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직원들이 박스를 나르고 있는 길목을 피해 구석에 섰다. 과장이 진지하게 물었다.
“뭐야, 설마 나한테 고백하려는 거야?”
“…….”
“농담이야. 그런 미친놈 보는 시선은 그만둬 줘.”
과장도 스스로 민망하긴 한지 괜히 호탕한 척 핫핫핫 웃었다. 순간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짜게 식은 표정을 지었던 장미는 곧 웃음을 그친 과장이 다시 시선을 마주쳐 오자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사직서 봉투를 공손하게 내밀었다.
“이거요.”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글씨체로 ‘사직서’라고 쓰인 흰 봉투를 받아 든 과장은 그것을 내려다보며 얼마간 말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가 고개를 들어 장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옅게 패인 나이 주름이 조금 더 깊어진 듯도 싶다. 말을 고르는 듯 잠시 뜸을 들이던 과장은 일단 부드럽게 장미를 달래 보려고 시도했다.
“어제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원래 일하다 보면 별의별 일 다 생기는 거야.”
하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장미는 이 대화가 길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머지않아 과장도 눈을 내리깐 채 묵묵히 듣기만 하는 장미의 모습에서 설득당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을 읽은 듯 약간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이렇게 문제 생길 때마다 매번 사표 쓸 거야? 그럼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거 아무것도 없어. 실수는 반성하고 다음에 또 그런 일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면 되는 거야.”
“…….”
“아, 혹시 너 아직도 몸이 안 좋아서 그래? 며칠 휴가 낼래?”
장미에겐 가르치듯 달래는 방식이 먹히지 않는다고 판단한 과장이 이번엔 방법을 바꿔 휴가 카드를 꺼내 들었다. 장미는 갑자기 이 대화의 방향이 엉뚱하게 튀려고 하자 그제야 황급히 두 손을 저으며 반응했다. 어영부영 휩쓸리면 또 이곳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장미는 절대 그런 이도 저도 아닌 결과를 바라지 않았다.
“아니에요. 몸은 이제 괜찮아졌어요. 그냥 더 못할 거 같아서 그래요.”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그러면 곤란하잖아. 여기도 다른 사람 찾을 시간을 줘야지.”
“……정말로 죄송합니다.”
결국 설득에 실패한 과장은 꾸벅 허리를 숙이고 사과하는 장미를 보며 심란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이내 한 번 더 확인하듯 물었다.
“정말 그만둘 거야?”
“네.”
맥 빠진 것 같은 모습에 비해 장미의 대답은 단호했다. 도저히 더는 여기서 못해 먹겠다는 의지가 전해지는 듯도 해서 과장은 장미를 더 붙잡을 수 없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까보다 더욱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뭐. 그동안 수고했고. 그간 일한 건 계좌로 넣어 줄게.”
“감사합니다.”
과장은 들고 있던 서류철에 장미의 사직서를 끼워 넣으며 그만 가 보라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장미는 과장에게 한 번 더 꾸벅 인사를 한 뒤에 돌아섰다. 창고에서 나오자마자 또 등 뒤로 찌를 듯한 왕언니―과장이 사직서를 받아들인 시점부턴 왕언니도 뭣도 아니긴 하지만―의 눈길이 따라붙었지만, 장미는 이제 더 신경 쓸 이유가 없었으므로 무감하게 휴대폰을 꺼내 보며 그녀를 여유로이 무시하고 마트를 나섰다.
“후융…….”
장미는 마트 밖으로 나오자마자 후련 섭섭한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패기 넘치게 나오긴 했다만 이제 뭐 한다지. 장미는 다음 구직처를 얻기 위해 곧장 알바앱을 열어 구직 정보를 들여다보았다. 괜찮은 조건을 찾아 손가락으로 앱 페이지를 넘기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문득 진동과 함께 화면 맨 위로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친구인 미진에게서 온 내용이었다.
[그만뒀어?]
장미는 이내 피식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구래]
[ㅋㅋㅋㅋ 술 사 줄게 일루 와라 백수야]
[어디로?]
[봉봉]
[옹야]
동네 주점인 봉봉 비어는 여기선 좀 거리가 있어서 장미는 버스를 타고 가게 근처 정류장에서 내렸다. 오랜만에 풀어 헤쳐질 정신머리를 기뻐하며 희희낙락하게 사뿐사뿐 발을 옮기던 장미는 주점 바로 옆 골목 앞을 지나다 갑자기 표정을 굳히며 우뚝 멈춰 섰다. 시야 곁다리긴 했지만 방금 골목 안쪽에서 무언가 희끄무레한을 본 듯했다.
‘뭐였지, 방금.’
익숙하고도 불길한 기분으로 고개를 돌린 장미는 설마설마하며 눈매를 좁혔다. 골목 안쪽으로 시선을 집중하길 잠시, 그녀는 곧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
절로 헉 소리가 나올 것 같았지만 장미는 재빨리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이제 저녁 5시가 조금 넘은 아직 이른 시간.
시간과 상관없이 컴컴하게 깔린 골목의 어둠에 숨어 사냥 중인 동족이 있었다. 장미는 자기도 모르게 그쪽으로 한 발 뗐지만 이내 멈칫하며 자기 자신을 다그쳤다.
‘어쩌려고……!’
장미는 천천히 물러나 자리를 뜨는 척하며 골목의 바깥 벽으로 몸을 숨겼다. 그녀는 긴장한 얼굴로 고개만 빼꼼히 내밀어 골목의 깊은 안쪽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초조하게 훔쳐보았다.
골목 벽에 붙은 한 남녀. 남자가 여자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 얼핏 연인 사이에 불타오르는 애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듯 보이기도 했지만 장미는 제 코끝까지 다가온 혈향에 절대 저 남자가 여자의 목에 입술만 대고 있기만 한 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장미는 조용히 머리를 물리고 벽에 붙어 서서 눈빛을 음울하게 가라앉혔다.
‘가야 해. 여기서 괜히 얼쩡대다 심기를 거스르면 날 죽이려 들지도 몰라…….’
장미는 괜히 머뭇거리는 발을 무겁게 옮기며 결국 완전히 그곳을 떠났다.
‘괜찮겠지? 그냥 조금 피곤하고 말 정도만 먹겠지. 설마 죽이진 않을 거야.’
그리고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불안해지려는 마음을 억지로 털어 냈다. 별거 아니라고.
딸랑.
주점의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서자 문에 달린 종이 청량하게 울렸다. 서빙하던 직원이 친절하게 웃으며 장미를 맞아 주었다.
“어서 오세요!”
슬쩍 웃은 장미는 고개를 까딱 움직여 직원의 인사를 받아 주곤 안쪽으로 몇 발짝 더 들어갔다. 그때 문득 좁은 통로에서 마주친 한 남자가 장미를 거칠게 밀치며 급히 지나가려 했다. 장미는 남자의 팔에 부딪힌 어깨가 금세 얼얼해져 절로 인상을 썼다.
“아, 뭐야.”
장미는 순간적으로 기분이 확 상해 자길 밀친 남자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남자도 장미에게 눈길을 돌렸다. 근육질에 키가 큰, 굉장히 날카로운 인상의 미남이다. 뭐 미남은 미남이고 불쾌한 건 불쾌한 거라서 일단 조심하라 한마디 하려 했던 장미였지만 그 남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 속에 깃든 흉포한 기운을 엿보곤 그대로 굳어 버렸다.
“뭐야, 라니. 방금 나한테 한 말이야?”
남자가 물었다.
‘이놈 봐라? 다짜고짜 반말이라니.’
장미는 내심 기가 막혔으나 순간적으로 겁을 먹어 버린 탓에 쏘아붙이기는커녕 소심하게 어깨를 움츠리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뇨. 아, 뭐야―라고 제가 지은 노래가 있는데……. 그게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중얼거리는 노래로……, 아 뭐야, 뭐야, 뭐야― 이런 인생 따위 뭐야 뭐야 뭐야……, 하고 구절이 세 번 반복되는…….”
“…….”
남자는 별 그지 같은 노래를 다 들었다는 듯이 장미를 쳐다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쩐지 욕설과 함께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질 거 같았지만 남자는 곧 휴대폰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가게를 나가 버렸다.
“후우우.”
그제야 장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움츠리고 있던 어깨를 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저쪽 구석 자리에 앉은 검은 머리의 친구가 보였다. 장미는 터덜터덜 그쪽으로 다가갔다.
“좀 늦었네.”
“어? 어…….”
미진은 얼빠진 얼굴로 다가와 의자에 앉는 장미를 보고 무슨 오해를 한 건지 금세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방금 잘생긴 남자랑 부딪친 거 봤어. 이것아, 그럼 좀 더 섹시한 표정으로 바라봐 줬어야지! 숙맥처럼 뭐 하는 거람.”
“잘생겼어도 어딘가 하자 있을 거야.”
장미는 그 남자에게 눈빛으로 위협당해 바보처럼 횡설수설했던 일을 되씹으며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미진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게 뭐 어때서? 그것도 나름 좋지 않아? 나쁜 남자가 얼마나 매력적인데.”
“어휴. 나쁜 남자면 감옥 가야지. 그게 뭐 좋아할 거리라고.”
“됐다, 됐어. 너랑 무슨 말을 못 해.”
“내가 뭐.”
장미는 뾰로통하게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풀었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 계속 아깝다고 아쉬움을 표하는 미진을 보면서 방금 전의 남자를 다시 한 번 떠올려 봤다. 근데 또 생각해 봐도 역시 무섭긴 마찬가지라 장미는 절대 아쉽지 않다고 고개를 저었다.
‘내 목을 쳐서 떨어뜨릴 기세였어.’
장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틀림없이 성격에 하자가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단지 생긴 게 사납고 날카로웠기 때문이 아니다. 그 눈엔 본질적으로 얼음처럼 냉혹하고 잔인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런 분위기는 쉬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도 인간이.’
장미는 태생적으로 타고난 짐승 같은 감각으로 그 남자에게서 불길함을 느낄 수 있었다. 부디 저가 순간이나마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기를 바랐다. 그 남자를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쫙 끼치며 어깨를 작게 떤 장미는 절로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었다. 그러자 미진이 곧바로 장미의 팔을 때렸다.
“아야.”
“엄살은. 깨물지 마. 입술에 주름 생겨.”
장미는 그제야 이로 괴롭히고 있던 제 입술을 풀어 줬다. 미진은 조금 전 그 남자가 영 아쉬운 듯 또다시 장미를 핀잔했다.
“어휴. 바보야. 그런 남자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인 줄 아니?”
“그믄흐르?”
어금니를 꽉 물고 말한 장미가 미진을 못마땅하게 흘겨보다가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일단 뭘 좀 먹으면서 진정하고 싶었다.
“난 생맥이랑 치킨. 넌?”
“생맥.”
점원에게 생맥주 둘과 프라이드치킨을 주문한 장미는 메뉴판을 옆에 치워 놓고 미진에게 물었다.
“근데 나 어제 어떻게 집에 갔다니?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장미는 어제 미진이 자기에게 생마늘을 던졌다는 건 알고 있었다. 기절 직전, 남들보다 조금 뛰어난 시야로 미진의 얼굴을 똑똑히 확인하기도 했고 깨어나서 미진과의 전화통화로 대충 들은 바가 있기도 했다. 단지 집에 온 과정을 묻는 걸 깜빡했다.
미진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마트 집 배달 서비스.”
“아.”
마트 트럭에 실려 왔구나. 장미는 이제 이해했다며 고개를 작게 주억였다. 미진은 장미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다들 네가 왜 기절한 건지 이해를 못 해서 내가 참 난감했다.”
“고생했다. 친구야.”
“사실 내 주변에 생마늘 닿았다고 기절하는 애도 너밖에 없어. 무슨 알레르기가 그따위야? 일단 기절해서 모면한 건 좋았다만 핑계가 뭐 핑계 같아야지.”
“나한테 따져 봤자거든.”
“그러면서 익히거나 다른 양념이랑 섞인 건 괜찮다고? 진짜 뭐 그따위야?”
“내가 그렇게 되고 싶어서 됐냐고.”
“특이체질 나셨어요. 진짜. 완전 유난스러워.”
미진이 어제를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장미는 결국 울컥해서는 변명하듯 외쳤다.
“야. 마늘이 얼마나 독한데! 네가 몰라서 그렇지. 의외로 마늘 알레르기 주변에 많다? 우리 고모도 알레르기 있어서 생마늘 손질할 땐 방독면 쓰고 해.”
부루퉁하게 말하는 장미를 보며 미진이 폭소했다.
“뭐? 푸핫! 방금 나 웃기려고 한 소리야?”
“진짜라니까.”
미진은 한참 깔깔대며 웃었다. 그러다 빈정 상해 투덜거리는 장미를 향해 일부러 못생긴 표정을 만들어 보이며 놀리듯 말했다.
“녜녜. 그러시겠져.”
“아오! 지 사정 아니라고…….”
곧 맥주와 치킨이 나오며 투닥거림은 잠시 소강을 맞았다. 치킨에선 약간 마늘 냄새가 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어느 요리에나 들어가는 수준이라 장미는 큰 거부감 없이 한 조각 뜯어 먹으며 맥주를 마셨다. 이내 냅킨에 손을 닦은 장미는 휴대폰을 켜서 아까 보다 만 알바앱을 다시 뒤적였고 미진은 그 옆에서 함께 화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바로 또 알바하게?”
“응. 요즘 돈이 좀 궁해서.”
“뭘 그렇게 쓸데가 많은데?”
“원래 써도써도 부족한 게 돈이야.”
“반박할 수가 없군. 아, 잠깐.”
미진이 장미를 툭 치며 빠르게 내려가던 화면을 멈추게 했다.
“다시 올려 봐. 어, 다시 아래. 스톱.”
“……글로벌 앤티크 주식회사?”
장미는 화면에 보이는 상호를 읽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하는 데야? 국제적으로 골동품을 취급하는 덴가?’
뭔가 애매한 어감인걸. 장미가 새삼 앤티크의 정의를 생각하고 있을 때 미진은 화면에 뜬 구인 내용을 확인하며 말했다.
“보수 괜찮지 않아? 그리고 주소 봐 봐. 네 집에서 얼마 안 걸려. 끽해야 15분 정도?”
“어. 그러네?”
“여기 좋다. 여기서 해.”
“그럴까?”
“다른 사람 누르기 전에 얼른 눌러. 신청. 신청.”
“어, 어.”
장미는 다급하게 말하는 미진 때문에 덩달아 마음이 급해져 재빨리 신청 버튼을 눌렀다. 뜻밖에 얼마 안 가 글로벌 앤티크 주식회사에서 장미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해 왔고 내일 당장 면접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장미는 이게 웬 떡이냐 하며 바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곧 전화를 마친 장미는 끊어진 휴대폰을 쥐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오오오. 바로 됐어! 신기해. 누르자마자 된 건 처음이야.”
“그러게. 너 오늘 운 좋은가 보다. 아까 그 미남도 그렇고.”
“그건 별 상관 없잖아.”
“아니지. 생각해 봐. 그런 미남이 허구한 날 길거리에 굴러다니진 않잖아? 그런데 넌 그런 미남과 무려 옷깃이 스쳤다고. 오늘 넌 대박 운이 틀림없어.”
그 말에 장미는 갑자기 손의 떨림을 멈추고 테이블 위로 휴대폰을 툭 떨어뜨렸다. 미진이 왜 그러냐고 의아한 듯 묻자 장미는 두 손을 깍지 껴 이마에 기대며 침울하게 말했다.
“복권을 샀어야 했는데.”
“……치킨이나 뜯어.”
장미는 다리를 들고 서글프게 뜯어 먹기 시작했다.
* * *
‘그만둬야겠다.’
장미는 집에서 눈뜨는 것과 동시에 그렇게 결심했다. 그리고 곧바로 몸을 벌떡 일으켜 종이와 펜을 챙긴 장미는 밥상 겸 책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꽂아 넘기고 마른침을 삼킨다. 이어 심호흡을 한 뒤 펜 끝을 몇 번 딸깍거리다 비로소 집중한 표정으로 사직서를 준비했다.
장미는 오후 알바 시간에 맞춰 마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전날의 소란 따윈 언제 있었냐는 듯 마트 안의 광경은 평소와 같았다. 혹시 꿈이었던가? 하지만 머지않아 장미를 발견한 몇몇 직원들이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반응을 보였고 그녀는 역시 전날의 일이 꿈이 아니었다며 자신이 미치지 않았음을 무척 다행으로 여겼다. 장미는 등 뒤로 연신 따갑게 꽂히는 왕언니의 눈길에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더욱 공고히 다지며 사직서를 받아 줄 과장을 찾아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아, 과장님!”
얼마 후 장미는 막 창고에서 나오는 과장을 발견해 쪼르르 달려갔다. 막상 과장의 사람 좋은 얼굴을 보자 어쩐지 기세가 쭈그러들었지만 그래도 애써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어, 장미 왔어? 뭔데.”
평소에도 왕언니의 괴롭힘에서 은근슬쩍 구해 주곤 했던 과장은 어제 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평소처럼 장미를 맞아 주었다. 장미는 그런 과장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끼며 멋쩍게 뒷목을 쓸었다. 정말 면목이 없었다.
“잠시…….”
“응?”
과장은 할 말이 있다는 얼굴로 어렵게 운을 떼는 장미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장은 자기가 방금 나왔던 창고 쪽을 손짓하며 먼저 안으로 들어갔고 장미도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직원들이 박스를 나르고 있는 길목을 피해 구석에 섰다. 과장이 진지하게 물었다.
“뭐야, 설마 나한테 고백하려는 거야?”
“…….”
“농담이야. 그런 미친놈 보는 시선은 그만둬 줘.”
과장도 스스로 민망하긴 한지 괜히 호탕한 척 핫핫핫 웃었다. 순간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짜게 식은 표정을 지었던 장미는 곧 웃음을 그친 과장이 다시 시선을 마주쳐 오자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사직서 봉투를 공손하게 내밀었다.
“이거요.”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글씨체로 ‘사직서’라고 쓰인 흰 봉투를 받아 든 과장은 그것을 내려다보며 얼마간 말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가 고개를 들어 장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옅게 패인 나이 주름이 조금 더 깊어진 듯도 싶다. 말을 고르는 듯 잠시 뜸을 들이던 과장은 일단 부드럽게 장미를 달래 보려고 시도했다.
“어제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원래 일하다 보면 별의별 일 다 생기는 거야.”
하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장미는 이 대화가 길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머지않아 과장도 눈을 내리깐 채 묵묵히 듣기만 하는 장미의 모습에서 설득당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을 읽은 듯 약간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이렇게 문제 생길 때마다 매번 사표 쓸 거야? 그럼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거 아무것도 없어. 실수는 반성하고 다음에 또 그런 일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면 되는 거야.”
“…….”
“아, 혹시 너 아직도 몸이 안 좋아서 그래? 며칠 휴가 낼래?”
장미에겐 가르치듯 달래는 방식이 먹히지 않는다고 판단한 과장이 이번엔 방법을 바꿔 휴가 카드를 꺼내 들었다. 장미는 갑자기 이 대화의 방향이 엉뚱하게 튀려고 하자 그제야 황급히 두 손을 저으며 반응했다. 어영부영 휩쓸리면 또 이곳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장미는 절대 그런 이도 저도 아닌 결과를 바라지 않았다.
“아니에요. 몸은 이제 괜찮아졌어요. 그냥 더 못할 거 같아서 그래요.”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그러면 곤란하잖아. 여기도 다른 사람 찾을 시간을 줘야지.”
“……정말로 죄송합니다.”
결국 설득에 실패한 과장은 꾸벅 허리를 숙이고 사과하는 장미를 보며 심란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이내 한 번 더 확인하듯 물었다.
“정말 그만둘 거야?”
“네.”
맥 빠진 것 같은 모습에 비해 장미의 대답은 단호했다. 도저히 더는 여기서 못해 먹겠다는 의지가 전해지는 듯도 해서 과장은 장미를 더 붙잡을 수 없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까보다 더욱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뭐. 그동안 수고했고. 그간 일한 건 계좌로 넣어 줄게.”
“감사합니다.”
과장은 들고 있던 서류철에 장미의 사직서를 끼워 넣으며 그만 가 보라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장미는 과장에게 한 번 더 꾸벅 인사를 한 뒤에 돌아섰다. 창고에서 나오자마자 또 등 뒤로 찌를 듯한 왕언니―과장이 사직서를 받아들인 시점부턴 왕언니도 뭣도 아니긴 하지만―의 눈길이 따라붙었지만, 장미는 이제 더 신경 쓸 이유가 없었으므로 무감하게 휴대폰을 꺼내 보며 그녀를 여유로이 무시하고 마트를 나섰다.
“후융…….”
장미는 마트 밖으로 나오자마자 후련 섭섭한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패기 넘치게 나오긴 했다만 이제 뭐 한다지. 장미는 다음 구직처를 얻기 위해 곧장 알바앱을 열어 구직 정보를 들여다보았다. 괜찮은 조건을 찾아 손가락으로 앱 페이지를 넘기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문득 진동과 함께 화면 맨 위로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친구인 미진에게서 온 내용이었다.
[그만뒀어?]
장미는 이내 피식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구래]
[ㅋㅋㅋㅋ 술 사 줄게 일루 와라 백수야]
[어디로?]
[봉봉]
[옹야]
동네 주점인 봉봉 비어는 여기선 좀 거리가 있어서 장미는 버스를 타고 가게 근처 정류장에서 내렸다. 오랜만에 풀어 헤쳐질 정신머리를 기뻐하며 희희낙락하게 사뿐사뿐 발을 옮기던 장미는 주점 바로 옆 골목 앞을 지나다 갑자기 표정을 굳히며 우뚝 멈춰 섰다. 시야 곁다리긴 했지만 방금 골목 안쪽에서 무언가 희끄무레한을 본 듯했다.
‘뭐였지, 방금.’
익숙하고도 불길한 기분으로 고개를 돌린 장미는 설마설마하며 눈매를 좁혔다. 골목 안쪽으로 시선을 집중하길 잠시, 그녀는 곧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
절로 헉 소리가 나올 것 같았지만 장미는 재빨리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이제 저녁 5시가 조금 넘은 아직 이른 시간.
시간과 상관없이 컴컴하게 깔린 골목의 어둠에 숨어 사냥 중인 동족이 있었다. 장미는 자기도 모르게 그쪽으로 한 발 뗐지만 이내 멈칫하며 자기 자신을 다그쳤다.
‘어쩌려고……!’
장미는 천천히 물러나 자리를 뜨는 척하며 골목의 바깥 벽으로 몸을 숨겼다. 그녀는 긴장한 얼굴로 고개만 빼꼼히 내밀어 골목의 깊은 안쪽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초조하게 훔쳐보았다.
골목 벽에 붙은 한 남녀. 남자가 여자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 얼핏 연인 사이에 불타오르는 애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듯 보이기도 했지만 장미는 제 코끝까지 다가온 혈향에 절대 저 남자가 여자의 목에 입술만 대고 있기만 한 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장미는 조용히 머리를 물리고 벽에 붙어 서서 눈빛을 음울하게 가라앉혔다.
‘가야 해. 여기서 괜히 얼쩡대다 심기를 거스르면 날 죽이려 들지도 몰라…….’
장미는 괜히 머뭇거리는 발을 무겁게 옮기며 결국 완전히 그곳을 떠났다.
‘괜찮겠지? 그냥 조금 피곤하고 말 정도만 먹겠지. 설마 죽이진 않을 거야.’
그리고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불안해지려는 마음을 억지로 털어 냈다. 별거 아니라고.
딸랑.
주점의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서자 문에 달린 종이 청량하게 울렸다. 서빙하던 직원이 친절하게 웃으며 장미를 맞아 주었다.
“어서 오세요!”
슬쩍 웃은 장미는 고개를 까딱 움직여 직원의 인사를 받아 주곤 안쪽으로 몇 발짝 더 들어갔다. 그때 문득 좁은 통로에서 마주친 한 남자가 장미를 거칠게 밀치며 급히 지나가려 했다. 장미는 남자의 팔에 부딪힌 어깨가 금세 얼얼해져 절로 인상을 썼다.
“아, 뭐야.”
장미는 순간적으로 기분이 확 상해 자길 밀친 남자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남자도 장미에게 눈길을 돌렸다. 근육질에 키가 큰, 굉장히 날카로운 인상의 미남이다. 뭐 미남은 미남이고 불쾌한 건 불쾌한 거라서 일단 조심하라 한마디 하려 했던 장미였지만 그 남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 속에 깃든 흉포한 기운을 엿보곤 그대로 굳어 버렸다.
“뭐야, 라니. 방금 나한테 한 말이야?”
남자가 물었다.
‘이놈 봐라? 다짜고짜 반말이라니.’
장미는 내심 기가 막혔으나 순간적으로 겁을 먹어 버린 탓에 쏘아붙이기는커녕 소심하게 어깨를 움츠리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뇨. 아, 뭐야―라고 제가 지은 노래가 있는데……. 그게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중얼거리는 노래로……, 아 뭐야, 뭐야, 뭐야― 이런 인생 따위 뭐야 뭐야 뭐야……, 하고 구절이 세 번 반복되는…….”
“…….”
남자는 별 그지 같은 노래를 다 들었다는 듯이 장미를 쳐다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쩐지 욕설과 함께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질 거 같았지만 남자는 곧 휴대폰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가게를 나가 버렸다.
“후우우.”
그제야 장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움츠리고 있던 어깨를 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저쪽 구석 자리에 앉은 검은 머리의 친구가 보였다. 장미는 터덜터덜 그쪽으로 다가갔다.
“좀 늦었네.”
“어? 어…….”
미진은 얼빠진 얼굴로 다가와 의자에 앉는 장미를 보고 무슨 오해를 한 건지 금세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방금 잘생긴 남자랑 부딪친 거 봤어. 이것아, 그럼 좀 더 섹시한 표정으로 바라봐 줬어야지! 숙맥처럼 뭐 하는 거람.”
“잘생겼어도 어딘가 하자 있을 거야.”
장미는 그 남자에게 눈빛으로 위협당해 바보처럼 횡설수설했던 일을 되씹으며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미진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게 뭐 어때서? 그것도 나름 좋지 않아? 나쁜 남자가 얼마나 매력적인데.”
“어휴. 나쁜 남자면 감옥 가야지. 그게 뭐 좋아할 거리라고.”
“됐다, 됐어. 너랑 무슨 말을 못 해.”
“내가 뭐.”
장미는 뾰로통하게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풀었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 계속 아깝다고 아쉬움을 표하는 미진을 보면서 방금 전의 남자를 다시 한 번 떠올려 봤다. 근데 또 생각해 봐도 역시 무섭긴 마찬가지라 장미는 절대 아쉽지 않다고 고개를 저었다.
‘내 목을 쳐서 떨어뜨릴 기세였어.’
장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틀림없이 성격에 하자가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단지 생긴 게 사납고 날카로웠기 때문이 아니다. 그 눈엔 본질적으로 얼음처럼 냉혹하고 잔인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런 분위기는 쉬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도 인간이.’
장미는 태생적으로 타고난 짐승 같은 감각으로 그 남자에게서 불길함을 느낄 수 있었다. 부디 저가 순간이나마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기를 바랐다. 그 남자를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쫙 끼치며 어깨를 작게 떤 장미는 절로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었다. 그러자 미진이 곧바로 장미의 팔을 때렸다.
“아야.”
“엄살은. 깨물지 마. 입술에 주름 생겨.”
장미는 그제야 이로 괴롭히고 있던 제 입술을 풀어 줬다. 미진은 조금 전 그 남자가 영 아쉬운 듯 또다시 장미를 핀잔했다.
“어휴. 바보야. 그런 남자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인 줄 아니?”
“그믄흐르?”
어금니를 꽉 물고 말한 장미가 미진을 못마땅하게 흘겨보다가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일단 뭘 좀 먹으면서 진정하고 싶었다.
“난 생맥이랑 치킨. 넌?”
“생맥.”
점원에게 생맥주 둘과 프라이드치킨을 주문한 장미는 메뉴판을 옆에 치워 놓고 미진에게 물었다.
“근데 나 어제 어떻게 집에 갔다니?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장미는 어제 미진이 자기에게 생마늘을 던졌다는 건 알고 있었다. 기절 직전, 남들보다 조금 뛰어난 시야로 미진의 얼굴을 똑똑히 확인하기도 했고 깨어나서 미진과의 전화통화로 대충 들은 바가 있기도 했다. 단지 집에 온 과정을 묻는 걸 깜빡했다.
미진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마트 집 배달 서비스.”
“아.”
마트 트럭에 실려 왔구나. 장미는 이제 이해했다며 고개를 작게 주억였다. 미진은 장미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다들 네가 왜 기절한 건지 이해를 못 해서 내가 참 난감했다.”
“고생했다. 친구야.”
“사실 내 주변에 생마늘 닿았다고 기절하는 애도 너밖에 없어. 무슨 알레르기가 그따위야? 일단 기절해서 모면한 건 좋았다만 핑계가 뭐 핑계 같아야지.”
“나한테 따져 봤자거든.”
“그러면서 익히거나 다른 양념이랑 섞인 건 괜찮다고? 진짜 뭐 그따위야?”
“내가 그렇게 되고 싶어서 됐냐고.”
“특이체질 나셨어요. 진짜. 완전 유난스러워.”
미진이 어제를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장미는 결국 울컥해서는 변명하듯 외쳤다.
“야. 마늘이 얼마나 독한데! 네가 몰라서 그렇지. 의외로 마늘 알레르기 주변에 많다? 우리 고모도 알레르기 있어서 생마늘 손질할 땐 방독면 쓰고 해.”
부루퉁하게 말하는 장미를 보며 미진이 폭소했다.
“뭐? 푸핫! 방금 나 웃기려고 한 소리야?”
“진짜라니까.”
미진은 한참 깔깔대며 웃었다. 그러다 빈정 상해 투덜거리는 장미를 향해 일부러 못생긴 표정을 만들어 보이며 놀리듯 말했다.
“녜녜. 그러시겠져.”
“아오! 지 사정 아니라고…….”
곧 맥주와 치킨이 나오며 투닥거림은 잠시 소강을 맞았다. 치킨에선 약간 마늘 냄새가 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어느 요리에나 들어가는 수준이라 장미는 큰 거부감 없이 한 조각 뜯어 먹으며 맥주를 마셨다. 이내 냅킨에 손을 닦은 장미는 휴대폰을 켜서 아까 보다 만 알바앱을 다시 뒤적였고 미진은 그 옆에서 함께 화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바로 또 알바하게?”
“응. 요즘 돈이 좀 궁해서.”
“뭘 그렇게 쓸데가 많은데?”
“원래 써도써도 부족한 게 돈이야.”
“반박할 수가 없군. 아, 잠깐.”
미진이 장미를 툭 치며 빠르게 내려가던 화면을 멈추게 했다.
“다시 올려 봐. 어, 다시 아래. 스톱.”
“……글로벌 앤티크 주식회사?”
장미는 화면에 보이는 상호를 읽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하는 데야? 국제적으로 골동품을 취급하는 덴가?’
뭔가 애매한 어감인걸. 장미가 새삼 앤티크의 정의를 생각하고 있을 때 미진은 화면에 뜬 구인 내용을 확인하며 말했다.
“보수 괜찮지 않아? 그리고 주소 봐 봐. 네 집에서 얼마 안 걸려. 끽해야 15분 정도?”
“어. 그러네?”
“여기 좋다. 여기서 해.”
“그럴까?”
“다른 사람 누르기 전에 얼른 눌러. 신청. 신청.”
“어, 어.”
장미는 다급하게 말하는 미진 때문에 덩달아 마음이 급해져 재빨리 신청 버튼을 눌렀다. 뜻밖에 얼마 안 가 글로벌 앤티크 주식회사에서 장미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해 왔고 내일 당장 면접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장미는 이게 웬 떡이냐 하며 바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곧 전화를 마친 장미는 끊어진 휴대폰을 쥐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오오오. 바로 됐어! 신기해. 누르자마자 된 건 처음이야.”
“그러게. 너 오늘 운 좋은가 보다. 아까 그 미남도 그렇고.”
“그건 별 상관 없잖아.”
“아니지. 생각해 봐. 그런 미남이 허구한 날 길거리에 굴러다니진 않잖아? 그런데 넌 그런 미남과 무려 옷깃이 스쳤다고. 오늘 넌 대박 운이 틀림없어.”
그 말에 장미는 갑자기 손의 떨림을 멈추고 테이블 위로 휴대폰을 툭 떨어뜨렸다. 미진이 왜 그러냐고 의아한 듯 묻자 장미는 두 손을 깍지 껴 이마에 기대며 침울하게 말했다.
“복권을 샀어야 했는데.”
“……치킨이나 뜯어.”
장미는 다리를 들고 서글프게 뜯어 먹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