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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하게 물어 주세요


1화

프롤로그



‘어라? 장미잖아?’

마트에서 채소를 고르던 미진은 절친한 친구를 발견하고 카트를 멈췄다.

‘쟤가 아르바이트한다던 데가 여기였어?’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엔가 알바할 곳이 너네 집이랑 가깝다면서 혹여 봐도 알은척 말라는 걸 들은 것 같기도 했다. 과제 하느라 전혀 관심 두지 않았지만.

마트 유니폼을 입은 장미는 왕언니쯤으로 보이는 여직원에게 혼나고 있었다.

“유치원생을 데려다 놔도 너보단 잘하겠다. 이게 뭐니? 이게.”

진열된 물건들을 툭툭 치며 짜증 내는 여직원 앞에서 장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만 말아 물고 있었다. 부루퉁해지려는 입술을 애써 모아 잡고 있는 거다. 미진은 마침 앞에 있는 감자를 골라 카트에 넣고 장미 쪽으로 몇 발짝 더 다가갔다. 참견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사야 할 당근이 그쪽 길목에 있었다.

“줄 하나도 딱딱 못 맞춰? 내가 너한테 뭐 어려운 거 시킨 거니?”

“죄송합니다.”

“죄송하단 말은 나도 이제 신물이 나. 내가 너 말고도 하루에 죄송하단 말을 몇 번이나 들을 거 같아? 지금 그 말 듣자고 이러는 게 아니야.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잖아. 기미가. 너 여기서 며칠 일했니? 어?”

“죄송합니다.”

“묻는 건 대답 안 하고 또 죄송하다 하지. 그렇게 말 돌린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잖아!”

“…….”

눈을 내리깐 장미가 더는 사과할 말을 찾지 못한 듯 입을 다물어 버렸다.

‘성깔 오지네.’

미진은 당근을 고르며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마늘도 사야 하나. 당근 칸 옆으로 까지 않은 육쪽마늘이 푸짐하게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미진은 고민했다. 깐 건 비싸고. 근데 안 깐 걸 사 가면 결국 자신이 다 까야 할 거 같다. 그냥 깐 거로 살까.

“니들 그만 서 있고 이제 일해. 장미는 카운터 밀렸으니까 그쪽으로 가 보고.”

40대쯤으로 보이는 나이 든 직원이 보다 못한 듯 결국 끼어들어 두 사람에게 한 소리 했다. 여직원은 아직도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나이 든 직원의 직급이 더 높은지 마지못해 입을 다무는 모습이다. 장미는 자리를 뜨기 전 여직원에게 한 번 더 깊게 허리를 숙였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언니.”

보는 사람 안쓰러울 정도로 굽신거리며 여직원에게 사과한 장미는 허리를 펴고 돌아서자마자 줄곧 경직되었던 표정을 비로소 흐물흐물 풀어 내렸다. 마치 이제 살았다는 듯 상쾌하고 해맑은 얼굴이었다.

‘하여간 속 편해서 좋겠다.’

미진은 카운터로 생기발랄하게 뛰어가는 장미를 보며 혀를 쯧쯧 찼다. 하지만 불행히도 장미의 수난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한 중년의 남자 손님이 반으로 가른 수박을 카운터에 쿵 소리 나도록 내려놓았다. 놀라서 어깨를 들썩이는 장미를 향해 남자 손님은 마트 사람 다 들으라는 듯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봐! 수박이 곯았잖아! 돈 받고 감히 이따위 걸 팔아? 너넨 대체 손님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어?”

“어, 어, 죄송합니다. 바꿔 드릴게요.”

“당연하지! 바쁘니까 빨리 가져와!”

“네. 죄송합니다. 기다려 주세요.”

교환을 위해선 매장 정리하는 다른 직원을 불러야 했지만 그때 하필 장미의 근처엔 다른 직원이 없었다. 남자 손님은 한 번 더 고함을 치며 장미를 재촉했고 당황한 장미는 직접 카운터를 빠져나가 과일 코너로 달려갔다.

다행히 수박이 있는 곳은 가까웠다. 장미는 크고 좋아 보이는 수박 하나를 골라 들고 아직도 씩씩대는 손님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너무 다급하게 움직였던 나머지 거의 다 와서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으꺅―!”

커다란 수박은 장미의 손에서 맥없이 빠져나갔다. 장미가 멀어지는 수박을 향해 망연히 손을 내뻗었지만 이미 수박은 속수무책으로 멀어져 갔다.

“어어……?!”

“으억!”

유독 단단하고 동그랬던 수박은 데굴데굴 빠르게 바닥을 굴러 클레임을 건 남자 손님의 두 다리를 볼링핀 맞히듯 때려 버렸고 보기보다 하체가 부실했던 그 손님은 바로 옆에 있던 아주머니의 카디건을 잡아당기며 넘어졌다.

“꺄악!”

아주머니는 놀라 손을 휘젓다가 근처에 있던 아이의 아이스크림을 손으로 날려 버렸다. 그대로 아이의 얼굴을 후려친 아이스크림은 피자 반죽처럼 들러붙었다가 피부를 타고 꾸물꾸물 흘러내렸다.

“…….”

순식간에 난장판이 된 마트 안은 잠시 정적이 흘렀다.

“우에엥……!”

문득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그밖엔 누구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커질수록 장미의 얼굴에선 식은땀이 비처럼 흘러내렸다.

“풉……!”

미진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목구멍에서부터 치미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애썼다. 그러다 시선을 돌려 안 깐 마늘을 내려다본다. 미진은 그때까지도 깐 마늘과 안 깐 마늘 중 하나를 택하지 못해 자리를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이것도 운명이라.

미진은 줄기에서 큼직한 마늘 한 덩이를 떼어 내 몇 번 손안에서 만지작거리다 이내 장미를 향해 세게 집어 던졌다. 미진이 알기로 장미는 생마늘 알레르기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장미는 어색한 고갯짓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문득 저를 향해 날아오는 마늘을 발견하곤 눈동자를 울망거렸다. 마늘은 장미의 이마를 세게 때리더니 다시 어디론가 날아갔고 장미는 천국을 발견한 영혼처럼 감동으로 충만해진 미소를 지으며 뒤로 넘어갔다. 드디어 이 지옥에서 벗어난다는 후련함 가득한 프레쉬한 미소였다.

어째서 먹는 것도 아니고 단지 이마에 마늘을 후려 맞는 것만으로도 기절하는지는 미진도 알 길이 없었다. 뭐 굳이 깊이 알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근데 사실 이유는 간단했다.

장미는 그저 생마늘에 기절할 정도의 아주 연약한 뱀파이어였을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