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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소년이 생각보다 순진한 덕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었다. 리에이나는 소년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협탁 위에 올려 둔 책에 시선을 던졌다.
‘카르셰타움의 위대한 역사라…….’
정작 노예의 신분으로 리에이나가 바라본 세상은 온갖 더러운 것들이 끓어오르는 도가니에 불과했다. 그런데 책에는 제국의 역사를 위대하게 꾸며내고 있었다. 다른 노예들이 이 책을 보면 속으로 꽤나 황당해할 것이다. 물론 노예들은 이런 책을 접할 기회도 없을뿐더러 글자도 읽지 못했다. 리에이나는 어릴 적 영주의 딸로 입양될 뻔했으나 너무 어릴 때라서 글자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
‘다른 곳에서도 글자를 배운 적이 없었는데…….’
그제야 리에이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자신은 아까까지만 해도 이 도련님께 어려운 내용의 책을 읽어 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난 어떻게 글자를 읽을 줄 아는 거지?’
대다수의 노예들은 글자를 모르며, 리에이나 또한 노예였다. 소녀는 지금까지 살면서 글자를 배워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요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리에이나는 막힘없이, 또 의식 없이 글자를 읽어 내려갔었다.
리에이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스스로의 뺨을 꼬집었다. 그러자 뺨에 알싸한 고통이 퍼지며 조금 부어올랐다. 그렇다는 말은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닌 현실이란 걸 의미했다.
‘내가 어떻게…….’
감히 주인의 허락 없이 그의 물건을 만져서는 안 되는 법이었지만 리에이나는 잠든 그레이 몰래 다시 책을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도 리에이나는 아까처럼 막힘없이 글을 읽어 내려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글을 배웠을 리는 없는데…….’
리에이나는 기억을 되짚어 봤지만 아무리 기억 곳곳을 뒤져 보아도 글자를 배운 기억은 없었다.
* * *
안 좋은 의미로 뇌리에 강렬하게 남았던 첫째 날이 지나고도 며칠이나 지났다. 그레폴라섬에 위치한 카르타 공의 별장에서의 하루하루는 매일이 외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아들을 위해 열었다는 생일 연회는 아무리 봐도 카르타 공이 즐기기 위한 자리로밖에 안 보였다. 카르타 공은 꼭 연회 자리에 그레이를 불러내고는 했는데 그가 어린 아들에게 하는 짓은 일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짓거리였다.
그는 그레이에게 독한 포도주를 억지로 마시게 했으며 어린 몸에 술이 받아지지 않아 토해 내면, 그제야 달콤한 음료를 마시게 해 줬다. 정작 제 아비의 학대에 가까운 짓에도 그레이는 언제나 차분함을 유지했다. 포도주를 토해 내는 그 순간까지도.
리에이나는 언제나 매일 아침 기상을 한숨과 함께 시작했다. 리에이나는 불면증이 있는 그레이를 위해 특별히 옆방에 배치되었는데, 카르타 공만 아니라면 그레이 한 명을 돌보는 일은 사실 생각했던 것보다 어렵지 않았다.
“도련님, 소셋물을 가져왔습니다.”
우선 매일 아침, 첫 번째로 할 일은 따뜻한 소셋물을 그레이의 방까지 가져가는 거였다.
조숙하다고 해도 그레이는 어린아이였다. 아예 그레이만을 모시게 된 리에이나는 이 소년의 세수까지 손수 시켜 줬다. 원래 있었을 유모는 어디에 간 건지 의아하기는 했으나 노예에게는 감히 주인에게 질문을 던질 자격이 없었다.
리에이나는 그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냈다. 따뜻한 물을 손에 적셔 그레이의 얼굴을 닦아 냈다. 작고 하얀 얼굴은 곱디고와서 리에이나로 하여금 묘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어리다고는 해도 분명 제 주인인데도 감히 사랑스럽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있잖아, 리리.”
“네, 도련님.”
귓불 뒤까지 꼼꼼하게 씻겨 주고 천으로 물기를 닦아 낸 다음 깔끔하게 옷을 입혔다. 거울 앞에 앉은 그레이는 머리를 손질해 주는 리에이나를 거울로 바라보며 조용히 웃고 있었다. 리에이나가 작은 주인의 부름에 답하자 소년은 갑자기 상황과 맞지 않게 엉뚱한 것을 물었다.
“불편한 점은 없어?”
“네, 없습니다.”
“거짓말하지 말고.”
“……정말입니다. 제게 과분할 만큼 좋은 생활이에요.”
“흐음……. 그럼 갖고 싶은 것은?”
“그것 또한…… 없습니다.”
“사람이 어찌 갖고 싶은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가 있어.”
“…….”
“깨닫지 못하는 거면 곰곰이 생각해 봐.”
그레이의 친절은 리에이나에게는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그도 그럴 것이, 리에이나는 어리지만 노예를 향한 주인의 이유 없는 친절이 좋게 끝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어느 주인들은 노예를 찢어 죽이거나 험한 데에 팔아넘기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친절을 베풀어 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리에이나는 그레이의 이런 친절이 달갑지 않았다.
거기다가 그레이는 리에이나를 ‘사람’이라고 했지만, 노예를 사람 취급해 주는 귀족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친절은 감사합니다, 도련님. 하지만 정말로 제겐 갖고 싶은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준다 해도 마다하고.”
“…….”
“주고 싶다 해도 갖고 싶은 게 없다 하니, 좀 답답하네.”
어린아이의 포근한 향과 부드러운 피부를 가졌지만 전혀 아이 같지 않은 조숙함은 소년과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절묘하게 어울러 맞았다.
리에이나는 그런 그레이에게 오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가 싫은 거 같으면서도 싫지 않았고, 사랑스러운 거 같으면서도 거부감이 생기고, 호기심이 피어나면서도 최대한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감히 노예 주제에 주인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생각하고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만.
하지만 여기, 감히 주인에 대해서 쉽게 떠들어 댈 수 있는 노예가 한 명 있었다.
“작은 도련님 말이야. 묘하게 기분 나쁘지 않니……?”
그건 바로 같은 방을 쓰는 같은 노예, 하리에나였다. 하리에나는 본래 태생이 고귀한 자였다. 타국의 공주로 태어났으나 침략을 받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카르타 공이 황제께 포상으로 받은 여인이었다.
잠자리 여부와 상관없이 기분이 내키면 노예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죽이고 학대하는 카르타 공도 하리에나만큼은 꽤 긴 세월 동안 품에 끼고 산다고 하니, 노예 신분임에도 그녀의 콧대가 높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공주였을 적과 비교하면 지금이 훨씬 불편하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노예로 끌려온 패전국의 다른 사람들보다는 형편이 나은 처지였다.
“언니, 그런 말씀은 하시면 안 돼요.”
“아무렴 어때. 그 작은 도련님이 뭐라 하든, 주인님은 날 벌하시지 않을 텐데.”
“그렇게 방심하다가 혀를 잘리게 될걸요.”
“걱정인지 저주인지, 헷갈리는데?”
리에이나와 같은 방을 쓰는 하리에나는 소녀에게 꽤 잘 대해 주는 편이었다. 그녀 말로는 헤어진 어릴 적 동생이 떠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유가 어찌 됐건 같은 방을 쓰는 사람이 제게 호의적이라는 건 여러모로 편리한 일이긴 했다.
“그치만 기분 나쁘다는 건 괜히 하는 말이 아니야.”
이부자리에 누워 있던 하리에나는 무언가를 떠올리듯이 이마에 주름을 만들어 내며 몸서리치는 시늉을 했다.
“뭐, 하긴. 이교도니까 당연한 건가.”
“이교도라니요? 나라에 번영을 가져왔다고 숭배받는 가문인데.”
“얘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야.”
“…….”
“카르타 공의 사적인 공간인 침실로 들어가면 뱀을 상징하는 온갖 것들을 구경할 수 있다잖니. 나도 몇 번 우연히 발견한 적이 있다니까.”
“절 놀리는 거죠?”
“순진하긴. 못 믿겠으면 아서라.”
과거에는 만물이 신이었다고 한다. 바람, 태양, 물, 등등. 자연부터 시작해서 곰과 호랑이, 하다못해 한낱 개미까지 신으로 추앙받던 시대가 있다고 들었었다. 하지만 리에이나가 모든 것이 신으로 모셔지던 시기를 기억하기에는, 그것은 너무도 먼 옛날의 일이었다.
인간의 몸을 빌려 태어나 카르셰타움을 건국했다는 네 명의 신들을 모시는 종교가, 지금 이 나라의 국교였다.
가이아, 가이우스, 솔레이, 테라…….
이런 신들이 아닌 다른 신을 숭배하는 것은 국법에 어긋났다. 한낱 노예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높은 신분을 가진 그들이 그런 이교도일 리가 없었다. 하물며 황권이 강한 나라에서 이 정도의 권력을 유지하려면 그만큼 황실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의미인데, 이교도들을 황실에서 가만둘 리가 없었다.
‘역시 나를 놀리려 드는 모양이지.’
자신을 어리다고 놀리려 드는 하리에나가 얄미워서 리에이나는 그녀를 흘겨보다가 그대로 이부자리에 누웠다.
“전 피곤하니까 잘래요.”
“애늙은이 같기는. 늦잠이라도 자면 그 작은 도련님이 널 때리기라도 하든?”
“도련님께 아직까지 매 맞은 적은 없어요.”
하지만 앞으로의 일은 모르는 거였다. 주인이 말을 하는 도중에 재채기만 해도 목이 날아갈 수 있는데, 늦잠을 잔 죄로 매를 맞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들은 노예들을 가축으로 여겼으나, 가축도 아픔을 느낄 줄은 알았다. 리에이나는 매 맞는 게 정말로 싫었다. 그러니 매를 맞지 않으려면 주인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주어진 일은 제대로 해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짓궂은 하리에나는 어린 소녀가 늦잠을 자서 주인께 매를 맞기라도 바라는 듯 계속 허리를 찔렀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단호한 리에이나는 그런 유치한 장난에 넘어가지 않았다. 끈기 있게 무시하자 결국 하리에나도 더는 리에이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 덕에 리에이나는 편안하게 잠에 들 수 있었다.
아니, 그럴 뻔했다.
이제 막 선잠에 들던 참이었다. 갑자기 여자의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이 방 안에 있는 건 자신과 하리에나뿐이니, 이 울음소리의 주인공이 누구겠는가.
“언니, 아직도 안 자요……?”
어쩔 수 없이 리에이나는 옆에 누워 있을 하리에나에게 손을 뻗었다.
찰그락.
하지만 리에이나의 손은 하리에나에게 닿지 않았다. 쇠사슬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대신 들릴 뿐이었다.
리에이나는 다시 몸을 움직여 보려 했다.
찰그락―
그러나 역시 철로 된 것이 흔들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방에 사슬이 있을 리가 없는데…….’
막 잠에 들던 중이라 비몽사몽했던 정신이 찬물에 맞은 것처럼 서서히 깨기 시작했다. 지금 이 상황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한 리에이나는 퍼뜩 눈을 떴다.
“어……?”
눈을 뜬 리에이나의 앞에는 좀 더 현실감이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
리에이나는 묶여 있었다. 두 발목과 손목에 족쇄가 채워져 있었고, 족쇄와 연결된 사슬은 벽과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슬의 길이가 너무나 짧아 사실상 벽에 붙어 있는 수준이었다.
‘난 아까까지만 해도 자려고 누워 있었는데…….’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 속에서 리에이나는 혼돈에 빠졌다. 눈 떠 보니 족쇄에 묶여져 있다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손과 발을 움직이기 위해 힘을 잔뜩 줬으나 그렇다고 족쇄가 풀릴 리가 없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겁을 먹은 리에이나는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리에이나의 귓가에 잔잔한 호수처럼 높낮이가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봤는데―.”
성인 남성의 목소리였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동시에 어딘지 익숙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리에이나는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면 지금 이 상황에 대한 의문이 풀릴 줄 알았다. 하지만 리에이나는 되레 더 큰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난 네 눈이 갖고 싶은 건가 봐.”
분명 성인 남성의 목소리, 그리고 성인 남성의 키와 골격이었다.
그러나,
“작은 도련님……?”
그는 지금 리에이나가 모시고 있는 그레이와 똑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이렇게 네 눈에…….”
그의 눈동자가 희번득 빛났다.
“시선을 빼앗길 리가 없잖아.”
소년이 생각보다 순진한 덕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었다. 리에이나는 소년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협탁 위에 올려 둔 책에 시선을 던졌다.
‘카르셰타움의 위대한 역사라…….’
정작 노예의 신분으로 리에이나가 바라본 세상은 온갖 더러운 것들이 끓어오르는 도가니에 불과했다. 그런데 책에는 제국의 역사를 위대하게 꾸며내고 있었다. 다른 노예들이 이 책을 보면 속으로 꽤나 황당해할 것이다. 물론 노예들은 이런 책을 접할 기회도 없을뿐더러 글자도 읽지 못했다. 리에이나는 어릴 적 영주의 딸로 입양될 뻔했으나 너무 어릴 때라서 글자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
‘다른 곳에서도 글자를 배운 적이 없었는데…….’
그제야 리에이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자신은 아까까지만 해도 이 도련님께 어려운 내용의 책을 읽어 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난 어떻게 글자를 읽을 줄 아는 거지?’
대다수의 노예들은 글자를 모르며, 리에이나 또한 노예였다. 소녀는 지금까지 살면서 글자를 배워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요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리에이나는 막힘없이, 또 의식 없이 글자를 읽어 내려갔었다.
리에이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스스로의 뺨을 꼬집었다. 그러자 뺨에 알싸한 고통이 퍼지며 조금 부어올랐다. 그렇다는 말은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닌 현실이란 걸 의미했다.
‘내가 어떻게…….’
감히 주인의 허락 없이 그의 물건을 만져서는 안 되는 법이었지만 리에이나는 잠든 그레이 몰래 다시 책을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도 리에이나는 아까처럼 막힘없이 글을 읽어 내려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글을 배웠을 리는 없는데…….’
리에이나는 기억을 되짚어 봤지만 아무리 기억 곳곳을 뒤져 보아도 글자를 배운 기억은 없었다.
* * *
안 좋은 의미로 뇌리에 강렬하게 남았던 첫째 날이 지나고도 며칠이나 지났다. 그레폴라섬에 위치한 카르타 공의 별장에서의 하루하루는 매일이 외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아들을 위해 열었다는 생일 연회는 아무리 봐도 카르타 공이 즐기기 위한 자리로밖에 안 보였다. 카르타 공은 꼭 연회 자리에 그레이를 불러내고는 했는데 그가 어린 아들에게 하는 짓은 일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짓거리였다.
그는 그레이에게 독한 포도주를 억지로 마시게 했으며 어린 몸에 술이 받아지지 않아 토해 내면, 그제야 달콤한 음료를 마시게 해 줬다. 정작 제 아비의 학대에 가까운 짓에도 그레이는 언제나 차분함을 유지했다. 포도주를 토해 내는 그 순간까지도.
리에이나는 언제나 매일 아침 기상을 한숨과 함께 시작했다. 리에이나는 불면증이 있는 그레이를 위해 특별히 옆방에 배치되었는데, 카르타 공만 아니라면 그레이 한 명을 돌보는 일은 사실 생각했던 것보다 어렵지 않았다.
“도련님, 소셋물을 가져왔습니다.”
우선 매일 아침, 첫 번째로 할 일은 따뜻한 소셋물을 그레이의 방까지 가져가는 거였다.
조숙하다고 해도 그레이는 어린아이였다. 아예 그레이만을 모시게 된 리에이나는 이 소년의 세수까지 손수 시켜 줬다. 원래 있었을 유모는 어디에 간 건지 의아하기는 했으나 노예에게는 감히 주인에게 질문을 던질 자격이 없었다.
리에이나는 그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냈다. 따뜻한 물을 손에 적셔 그레이의 얼굴을 닦아 냈다. 작고 하얀 얼굴은 곱디고와서 리에이나로 하여금 묘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어리다고는 해도 분명 제 주인인데도 감히 사랑스럽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있잖아, 리리.”
“네, 도련님.”
귓불 뒤까지 꼼꼼하게 씻겨 주고 천으로 물기를 닦아 낸 다음 깔끔하게 옷을 입혔다. 거울 앞에 앉은 그레이는 머리를 손질해 주는 리에이나를 거울로 바라보며 조용히 웃고 있었다. 리에이나가 작은 주인의 부름에 답하자 소년은 갑자기 상황과 맞지 않게 엉뚱한 것을 물었다.
“불편한 점은 없어?”
“네, 없습니다.”
“거짓말하지 말고.”
“……정말입니다. 제게 과분할 만큼 좋은 생활이에요.”
“흐음……. 그럼 갖고 싶은 것은?”
“그것 또한…… 없습니다.”
“사람이 어찌 갖고 싶은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가 있어.”
“…….”
“깨닫지 못하는 거면 곰곰이 생각해 봐.”
그레이의 친절은 리에이나에게는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그도 그럴 것이, 리에이나는 어리지만 노예를 향한 주인의 이유 없는 친절이 좋게 끝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어느 주인들은 노예를 찢어 죽이거나 험한 데에 팔아넘기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친절을 베풀어 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리에이나는 그레이의 이런 친절이 달갑지 않았다.
거기다가 그레이는 리에이나를 ‘사람’이라고 했지만, 노예를 사람 취급해 주는 귀족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친절은 감사합니다, 도련님. 하지만 정말로 제겐 갖고 싶은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준다 해도 마다하고.”
“…….”
“주고 싶다 해도 갖고 싶은 게 없다 하니, 좀 답답하네.”
어린아이의 포근한 향과 부드러운 피부를 가졌지만 전혀 아이 같지 않은 조숙함은 소년과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절묘하게 어울러 맞았다.
리에이나는 그런 그레이에게 오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가 싫은 거 같으면서도 싫지 않았고, 사랑스러운 거 같으면서도 거부감이 생기고, 호기심이 피어나면서도 최대한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감히 노예 주제에 주인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생각하고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만.
하지만 여기, 감히 주인에 대해서 쉽게 떠들어 댈 수 있는 노예가 한 명 있었다.
“작은 도련님 말이야. 묘하게 기분 나쁘지 않니……?”
그건 바로 같은 방을 쓰는 같은 노예, 하리에나였다. 하리에나는 본래 태생이 고귀한 자였다. 타국의 공주로 태어났으나 침략을 받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카르타 공이 황제께 포상으로 받은 여인이었다.
잠자리 여부와 상관없이 기분이 내키면 노예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죽이고 학대하는 카르타 공도 하리에나만큼은 꽤 긴 세월 동안 품에 끼고 산다고 하니, 노예 신분임에도 그녀의 콧대가 높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공주였을 적과 비교하면 지금이 훨씬 불편하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노예로 끌려온 패전국의 다른 사람들보다는 형편이 나은 처지였다.
“언니, 그런 말씀은 하시면 안 돼요.”
“아무렴 어때. 그 작은 도련님이 뭐라 하든, 주인님은 날 벌하시지 않을 텐데.”
“그렇게 방심하다가 혀를 잘리게 될걸요.”
“걱정인지 저주인지, 헷갈리는데?”
리에이나와 같은 방을 쓰는 하리에나는 소녀에게 꽤 잘 대해 주는 편이었다. 그녀 말로는 헤어진 어릴 적 동생이 떠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유가 어찌 됐건 같은 방을 쓰는 사람이 제게 호의적이라는 건 여러모로 편리한 일이긴 했다.
“그치만 기분 나쁘다는 건 괜히 하는 말이 아니야.”
이부자리에 누워 있던 하리에나는 무언가를 떠올리듯이 이마에 주름을 만들어 내며 몸서리치는 시늉을 했다.
“뭐, 하긴. 이교도니까 당연한 건가.”
“이교도라니요? 나라에 번영을 가져왔다고 숭배받는 가문인데.”
“얘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야.”
“…….”
“카르타 공의 사적인 공간인 침실로 들어가면 뱀을 상징하는 온갖 것들을 구경할 수 있다잖니. 나도 몇 번 우연히 발견한 적이 있다니까.”
“절 놀리는 거죠?”
“순진하긴. 못 믿겠으면 아서라.”
과거에는 만물이 신이었다고 한다. 바람, 태양, 물, 등등. 자연부터 시작해서 곰과 호랑이, 하다못해 한낱 개미까지 신으로 추앙받던 시대가 있다고 들었었다. 하지만 리에이나가 모든 것이 신으로 모셔지던 시기를 기억하기에는, 그것은 너무도 먼 옛날의 일이었다.
인간의 몸을 빌려 태어나 카르셰타움을 건국했다는 네 명의 신들을 모시는 종교가, 지금 이 나라의 국교였다.
가이아, 가이우스, 솔레이, 테라…….
이런 신들이 아닌 다른 신을 숭배하는 것은 국법에 어긋났다. 한낱 노예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높은 신분을 가진 그들이 그런 이교도일 리가 없었다. 하물며 황권이 강한 나라에서 이 정도의 권력을 유지하려면 그만큼 황실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의미인데, 이교도들을 황실에서 가만둘 리가 없었다.
‘역시 나를 놀리려 드는 모양이지.’
자신을 어리다고 놀리려 드는 하리에나가 얄미워서 리에이나는 그녀를 흘겨보다가 그대로 이부자리에 누웠다.
“전 피곤하니까 잘래요.”
“애늙은이 같기는. 늦잠이라도 자면 그 작은 도련님이 널 때리기라도 하든?”
“도련님께 아직까지 매 맞은 적은 없어요.”
하지만 앞으로의 일은 모르는 거였다. 주인이 말을 하는 도중에 재채기만 해도 목이 날아갈 수 있는데, 늦잠을 잔 죄로 매를 맞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들은 노예들을 가축으로 여겼으나, 가축도 아픔을 느낄 줄은 알았다. 리에이나는 매 맞는 게 정말로 싫었다. 그러니 매를 맞지 않으려면 주인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주어진 일은 제대로 해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짓궂은 하리에나는 어린 소녀가 늦잠을 자서 주인께 매를 맞기라도 바라는 듯 계속 허리를 찔렀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단호한 리에이나는 그런 유치한 장난에 넘어가지 않았다. 끈기 있게 무시하자 결국 하리에나도 더는 리에이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 덕에 리에이나는 편안하게 잠에 들 수 있었다.
아니, 그럴 뻔했다.
이제 막 선잠에 들던 참이었다. 갑자기 여자의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이 방 안에 있는 건 자신과 하리에나뿐이니, 이 울음소리의 주인공이 누구겠는가.
“언니, 아직도 안 자요……?”
어쩔 수 없이 리에이나는 옆에 누워 있을 하리에나에게 손을 뻗었다.
찰그락.
하지만 리에이나의 손은 하리에나에게 닿지 않았다. 쇠사슬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대신 들릴 뿐이었다.
리에이나는 다시 몸을 움직여 보려 했다.
찰그락―
그러나 역시 철로 된 것이 흔들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방에 사슬이 있을 리가 없는데…….’
막 잠에 들던 중이라 비몽사몽했던 정신이 찬물에 맞은 것처럼 서서히 깨기 시작했다. 지금 이 상황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한 리에이나는 퍼뜩 눈을 떴다.
“어……?”
눈을 뜬 리에이나의 앞에는 좀 더 현실감이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
리에이나는 묶여 있었다. 두 발목과 손목에 족쇄가 채워져 있었고, 족쇄와 연결된 사슬은 벽과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슬의 길이가 너무나 짧아 사실상 벽에 붙어 있는 수준이었다.
‘난 아까까지만 해도 자려고 누워 있었는데…….’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 속에서 리에이나는 혼돈에 빠졌다. 눈 떠 보니 족쇄에 묶여져 있다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손과 발을 움직이기 위해 힘을 잔뜩 줬으나 그렇다고 족쇄가 풀릴 리가 없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겁을 먹은 리에이나는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리에이나의 귓가에 잔잔한 호수처럼 높낮이가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봤는데―.”
성인 남성의 목소리였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동시에 어딘지 익숙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리에이나는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면 지금 이 상황에 대한 의문이 풀릴 줄 알았다. 하지만 리에이나는 되레 더 큰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난 네 눈이 갖고 싶은 건가 봐.”
분명 성인 남성의 목소리, 그리고 성인 남성의 키와 골격이었다.
그러나,
“작은 도련님……?”
그는 지금 리에이나가 모시고 있는 그레이와 똑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이렇게 네 눈에…….”
그의 눈동자가 희번득 빛났다.
“시선을 빼앗길 리가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