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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 1화
Prologue
하얀 손이 목을 감싸 쥐었다. 화덕에 잘 구운 빵처럼 짙은 피부가 서서히 짓눌렸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 밭은 숨을 내쉬었다.
“마법사가 내리는 죽음은 특별한 줄 알았더니 여느 인간과 다르지 않군.”
흠칫, 놀란 인영이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내가 입술을 죽 찢었다.
“전사는 망설이지 않아.”
베개 밑으로 손을 내린 그가 단도를 꺼냈다. 망설임 없이 휘두른 검에 피가 튀었다.
Chapter 1. 전사의 나라
“마력이 줄고 있소.”
“벌써 백 년이 지났군.”
“백 명의 마법사인가, 한 명의 왕족인가.”
“답은 뻔하지 않소?”
왕실 마탑주의 말에 다른 탑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타이나의 귀한 자산을 백 명이나 잃을 순 없었다. 그들의 시선이 탑 너머 화려한 왕궁으로 향했다. 다행히 이번엔 왕족이 두 명이었다.
***
천 년 전, 대륙이 온전히 하나였을 때. 아직은 인간이 국가가 없이 대륙 곳곳에 흩어져 살았을 때.
인간을 향한 용의 공격으로 거대한 전쟁이 일어났다. 무려 십 년이나 이어진 ‘용인 전쟁’의 승리는 인간에게 돌아갔지만, 하나의 대륙이 쪼개지고 인구도 반으로 줄어드는 큰 피해를 보게 되었다. 그 후 살아남은 인간들은 각자의 이해에 따라 여러 왕국을 세우니 이것이 ‘초승달 대륙 역사’의 시작이다.
천 년 후, 초승달 대륙 동남부에 위치한 사막 왕국 랑그도프.
대륙 소금 유통의 삼분지 일을 차지하는 소금 사막을 지나면 황금빛 모래가 가득한 모래사막이 나오고 그 안으로 더 들어가면 수십 개의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오십여 개의 부족이 터를 잡은 광활한 초원 지대가 나온다. 현지인들은 이곳을 ‘위대한 전사들의 땅’이라고 부르지만, 대륙인들은 부족 연합 국가 ‘랑그도프’라 불렀다.
현재 랑그도프의 패권을 차지한 부족은 ‘붉은 늑대’ 부족으로 이번 대 라하(*부족 연합 대표)도 붉은 늑대의 족장이었다.
뜨겁다 못해 살을 태울 듯한 햇볕이 내리쬐는 정오.
오아시스와 가장 가깝고 주변 파오(*원형 천막) 중 가장 큰 파오 안으로 사내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라하!”
수하들과 칼을 손질하며 낄낄대던 라하 타다흐가 심드렁한 얼굴로 사내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기에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오두방정인 게야?”
사내는 주변 대전사들에게 눈인사하고 타다흐 앞에 무릎 꿇었다.
“기뻐하십시오! 바탄 님이 전사의 사냥을 마치고 귀환 중이십니다!”
“오오!”
“드디어!”
“역대 가장 이른 시일이 아닌가? 역시 바탄 님이로다!”
“경하드립니다, 라하!”
대전사들이 환호하며 라하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타다흐는 코를 씰룩이며 헛기침했다. 체면 때문에 참고 있지만, 그 또한 마음이 벅찼다. 전사의 사냥은 부족을 이어받을 후계자가 치르는 성인식으로 대형 몬스터를 이른 시일에 잡아 올수록 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보자……. 칠 일이던가?”
“바란 님은 열흘이었지요.”
“이거 바란 님이 지셨습니다, 그려.”
나이 든 대전사들이 홍소를 터뜨리자 타다흐가 파오 밖을 힐끔거렸다. 어슬렁거리던 그림자가 씩씩거리며 물러났다. 그의 입꼬리가 짓궂게 올라갔다.
“적당히 놀리시게.”
타다흐와 마찬가지로 바깥 동향을 눈치챘던 대족장들이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삼 일 차이지 타다흐의 차자인 바란 또한 놀라운 성과를 보였다. 다만 제 형에 대한 자격지심이 있어 쉽게 발끈했기 때문에 때때로 대전사들은 이런 식으로 그를 놀리곤 했다. 그래도 음습한 성격은 아니라 크게 마음에 담아 두진 않을 터였다.
“그럼, 부족의 위대한 전사를 마중 가 볼까.”
타다흐는 벌떡 일어나 파오 밖으로 나갔다. 이미 주변은 전사들의 귀환으로 떠들썩했다. 파오에서 훌쩍 떨어져 있던 바란이 불퉁한 얼굴로 제 아비에게 다가왔다.
“아저씨들은 그래도 아버지는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뭐 어쩌라고? 누가 엿들으라고 했누?”
“아버지!”
바란의 고함에 곁에 서 있던 부인이 옆구리를 퍽 찔렀다. 억! 허리를 숙인 바란이 이내 피식 웃었다.
“아. 진짜 아쉽네.”
고작 삼 일이라니. 좀 더 노력했다면 능히 좁힐 수 있는 시일이었다.
“이 자리가 그리도 탐나느냐?”
타다흐의 은근한 물음에 바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리 싫어하는 사람도 있답니까?”
“하긴.”
정점에 선다는 것. 원하는 게 있으면 약탈해서라도 쟁취하는 랑그도프의 전사라면 당연히 꿈꿀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그래도 졌으니 포기해.”
“누가 그걸 모릅니까? 그냥 아까워서 그럽니다, 아까워서.”
타다흐가 앞서 걷자 바란이 툴툴거리며 뒤따랐다. 두 사람은 바탄의 귀환을 보기 위해 망루로 올랐다. 여전히 심통 맞은 차자의 얼굴에 타다흐가 그의 등을 퍽! 내리쳤다.
“이놈아. 그런 얼굴로 네 형을 맞았다간 쥐어 터진다.”
“흥.”
바란은 코웃음 치면서도 애써 표정을 풀었다. 사이좋은 형제이긴 하나 기어오른다 싶으면 가차 없는 게 바탄이었다. 괜히 트집 잡혀서 맞긴 싫었다.
“오는구나.”
먼 곳을 응시하며 라하가 중얼거리자 바란도 같은 방향을 쳐다보았다. 수천의 파오 너머로 뿌연 바람을 몰고 한 무리의 전사단이 달려오고 있었다.
“온다……!”
“부족의 수호신이다!”
“우리의 자랑! 붉은 늑대 부족의 수호신이 귀환한다!”
“와아아아아아!”
경계 초소 인근에 바글바글 모인 부족민들이 열렬히 환호했다. 그 사이에서 전사들이 낑낑대며 길을 만들었다. 귀환할 이들이 지나갈 자리였다.
뿌우우우우……!
뿔피리가 길게 울었다. 전사단의 선두를 달리던 사내가 손을 번쩍 들었다. 목덜미까지 바짝 깎은 붉은 머리, 다른 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신장, 사막의 모래처럼 짙은 피부, 탄탄한 근육이 자리 잡은 몸, 짙은 눈썹 아래 이목구비가 또렷한 사내다운 얼굴까지. 타다흐의 첫째 아들이자 붉은 늑대 부족의 대전사인 바탄이었다.
바탄이 번쩍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 들린 거대한 사막 몬스터의 머리를 본 부족민들이 두 팔을 휘두르며 열광했다.
“우와아아아!!”
“엄청 커!!”
“훠우! 이거 어마어마한데요.”
광적으로까지 느껴지는 환호에 예눅(*말과 비슷하게 생긴 사막 몬스터)을 재촉해 바탄의 뒤로 바짝 붙은 코카투가 휘파람을 불었다. 열기에 감염됐는지 예눅이 콧김을 뿜으며 이마에 달린 두 개의 뿔을 연신 허공으로 휘저었다.
손을 내린 바탄이 몬스터의 머리를 뒤로 휙 던졌다. 묵묵히 따라오던 단장, 붉은매가 그것을 받아 수레에 실었다.
“코카투. 가장 큰 것은 라하의 파오에 넣고 나머지는 부족민들에게 돌려.”
“예. 바탄 님. 다들 좋아할 겁니다. 부족의 수호신이 잡은 몬스터의 부산물이니까요.”
“저도 목걸이 하나 만들 겁니다.”
“난 팔찌.”
전사들이 들뜬 목소리로 떠들었다. 사막인들은 사냥한 몬스터의 이빨과 손톱, 뼈 등을 가공해서 장신구로 만드는데 강한 전사가 사냥한 것일수록 귀하게 여겼다.
“이제 들어가자.”
바탄이 손을 내리고 예눅의 속도를 줄였다. 저 멀리 망루에 오른 타다흐와 바란이 보였다. 그는 부족 입구에서 완전히 멈춘 채 타다흐를 향해 소리쳤다.
“나, 붉은 늑대 수호신의 가호를 받은 바탄이 부족의 위대한 시험을 마치고 귀환했으니! 우리의 위대한 영웅인 라하께 승리의 축복을 받고자 합니다!”
까마득히 먼 거리임에도 목소리가 천둥처럼 또렷이 들렸다. 타다흐는 흐뭇하게 웃으며 칼을 번쩍 들었다. 라하의 허락에 전사단이 천천히 부족 내로 들어갔다.
“와아아아아!”
“바탄 님! 바탄 님! 바탄 님!”
전사들이 들어오자 부족의 여인들이 아름답게 짠 직물을 그들에게 바쳤다. 그 뒤로 아이들이 너도나도 달려 나와 전사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태워 주세요!”
“저도! 저도!”
“바탄 님!”
전사들은 기꺼이 아이들의 작은 몸을 들어 제 앞에 태웠다. 바탄도 한 아이를 골라 품에 안았다. 주변 아이들이 부럽다는 눈으로 그 아이를 쳐다봤다.
“꽉 잡아라.”
“네, 넵!”
설마 제가 선택될 줄 몰랐는지 아이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동그란 머리를 내려다본 바탄이 피식 웃었다. 그는 아이의 손을 잡아 예눅의 갈기를 쥐여 줬다. 평생 한 주인만을 섬기는 짐승이기에 뿔을 쥐여 주는 건 위험했다.
바탄은 구부정하게 상체를 수그린 아이의 허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려 곧게 세웠다.
“몸을 펴고 당당히 고개를 들어라. 우리가 곧 너의 미래다.”
“네. ……네!”
완전히 긴장이 풀린 건 아니지만 아이는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씰룩이며 힘차게 대답했다. 커다란 예눅 위에서 본 세상은 아이에게 미래를 보여 주었다. 환호하는 사람들. 거칠게 투레질하는 예눅의 사나운 목울음. 당당하게 전진하는 위대한 전사들. 아이의 눈에 굳은 의지가 실렸다.
전사단이 오아시스에 가까워질수록 사람의 행렬도 점차 줄어들었다. 신의 물방울로 불리는 오아시스엔 십삼 인의 대전사와 라하의 파오만이 존재했다. 일반 부족민은 오아시스와 연결된 수로를 통해 물을 공급받고 있기에 허락 없인 그곳으로 접근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앞에 태웠던 아이들도 예눅에서 내려 부모들에게 돌아갔다.
“쌈쫀!”
바탄이 예눅에서 내리자 바란의 아들 야나바하가 오동통한 팔다리를 휘저으며 달려왔다. 조카를 번쩍 든 바탄이 씩 웃었다.
“내 어린 전사가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하는구나. 얄미운 놈은 저렇게 미적미적하는데 말이다. 바다 거북이가 육지로 올라온 줄 알겠다!”
그 말에 전사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바란의 전사단도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부들거렸다.
“누가 미적거렸다고 그러는 거야! 환영하면 될 거 아니야!”
버럭 소리친 바란이 힘껏 제 형을 껴안았다. 육중한 몸에 갇힌 바탄이 환하게 웃으면서 팔꿈치로 명치를 후려쳤다. 컥, 몸을 움츠린 바란이 옆으로 쓰러졌다.
“아빠?”
“자. 할아버지에게 가자.”
“할부지!”
놀라서 제 아비를 쳐다본 야나바하가 금세 관심을 돌렸다. 아들에게 외면당한 바란이 곰 같은 덩치를 말고 코를 훌쩍였다. 그 모습을 부인이 한심하게 쳐다봤다.
바탄은 야나바하를 안은 채 타다흐에게 다가갔다. 라하의 주변에 늘어선 대전사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젊은 대전사를 환영했다. 야나바하를 바닥에 내린 바탄이 무릎을 꿇었다. 그를 향해 타다흐가 손을 내밀었다.
“전사의 사냥을 치른 붉은 늑대의 수호신에게 무한한 영광이 있으리라.”
바탄이 그 손을 잡고 손바닥에 입술을 깊이 눌렀다.
“부족의 미래를 위해 전사의 혼을 바치겠습니다.”
흐뭇하게 웃은 타다흐가 크게 소리쳤다.
“이번 후계자 경쟁은 바탄의 승리다! 이에 소족장의 의식을 치르겠다!”
“우리의 위대한 전사!”
쿵! 하고 전사들이 발뒤꿈치로 땅을 두드렸다. 일정하게 울리는 발소리를 배경으로 부족의 제사장이자 주술사인 아다일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허리가 잔뜩 굽은 작은 체구의 노파는 족장과 소족장만이 달 수 있는 붉은 깃털 두 개를 바탄의 머리띠에 꽂았다. 세 개를 꽂은 타다흐보다 하나 모자란 수였다.
“붉은 늑대 신의 힘이 그대의 영혼에 깃들 것이고.”
단도로 엄지를 그은 아다일라가 피를 바탄의 이마에 꾹 눌렀다.
“전사의 의지가 꺾이지 않은 한 신의 가호가 영원히 그대를 지키리라.”
뒤이어 그의 손에 떠오른 빛무리가 붉은 점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이마에 묻은 피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랜 사냥으로 피로했던 몸에 활기가 차올랐다. 바탄은 신기하다는 얼굴로 손을 쥐었다 풀었다.
의식을 마친 아다일라가 뒤로 물러나자 타다흐가 기쁘게 외쳤다.
“이로써 바탄이 붉은 늑대 부족의 소족장이 되었음을 선언하겠다!”
와아아아아아……!
거센 함성이 터져 나왔다. 대전사를 비롯해 모든 전사가 기뻐하며 바탄을 연호했다.
“소라하! 소라하!”
“우리의 위대한 수호신!”
‘소라하’란 소리에 타다흐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족장인 타다흐가 라하의 자리에 있기에 바탄 또한 붉은 늑대 부족의 소족장이자 랑그도프 부족 연합 국가의 소라하가 되었다. 현재 다른 부족엔 그만한 전사가 없으니 이변이 없는 한 다음 대 라하 또한 붉은 늑대 부족이 차지하게 될 터였다.
바란마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면서 제 형을 축하했다.
“이제 ‘라 마챠카’만 맞으면 되겠어.”
라 마챠카란 말에 바탄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내 마음대로 됐으면 이 나이에 혼자 살고 있겠냐.”
“이제 소족장이 됐으니 시간이 없어. 성년이 된 후 일 년 안에 찾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 나야 성년식 전에 찾아서 미리 전사의 사냥을 치렀지만, 형은 나이를 꽉 채웠잖아.”
“…….”
“느긋하게 굴다간 끽 가는 거야.”
바란이 손날로 제 목을 그었다. 가벼운 태도와 달리 눈빛은 진중했다. 그는 이미 반려를 찾았기에 걱정 없지만 바탄은 아니었다. 붉은 늑대 부족을 비롯해 랑그도프의 수많은 대전사는 성년식 일 년 후까지 반려를 얻지 못하면 미쳐 버리는 저주에 시달렸다. 이는 천 년 넘게 내려오는 저주로 살해당한 용이 내린 벌이었다.
‘긴 여행의 동반자’라고 불리는 ‘라 마챠카’.
일종의 반려를 가리키는 말로 오로지 본인만이 알아볼 수 있기에 라하인 타다흐라도 간섭할 수 없었다. 바탄은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바란의 말이 아니라도 사태가 심각하다는 건 그가 가장 잘 알았다. 끝까지 반려를 찾지 못하면 소라하가 되어도 소용없었다.
바탄이 은글슬쩍 아다일라에게 접근했다.
“아다일라.”
흠흠, 헛기침한 바탄이 은근슬쩍 물었다.
“그…… 라 마챠카 말이요. 올해는 생길 것 같습니까?”
“흐음.”
몸을 돌린 아다일라의 까만 눈이 기묘하게 빛났다. 그의 동공에 붉은색 고리가 생겼다. 신점을 볼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바탄은 숨을 멈추고 대답을 기다렸다.
“흘흘흘. 소족장. 올해엔 생기겠소.”
“헉! 정말입니까?”
드디어 내게도 빛이! 바탄이 어깨를 들썩이며 활짝 웃었다. 아다일라의 신점은 백발백중이니 틀릴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한껏 들떠서 돌아가는 바탄을 보며 아다일라가 고개를 내저었다.
“쯧쯧. 그리 좋아할 일은 아니건만.”
신점에 보인 건 검은 사슬에 매인 은빛 사슴이었다.
“뭐 어쩌겠누. 위대한 전사에겐 그만큼의 고난과 역경이 따르는 것을.”
이내 고개를 내린 아다일라가 낄낄거리며 제 파오로 돌아갔다.
두 달 후. 마도 왕국 타타이나에서 사신단이 출발했다. 마법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떠나는 은빛 마차를 국민들이 꽃을 뿌리며 배웅했다.
Chapter 2. 너는 내 운명 (1)
“마지막 외출을 하고 싶습니다.”
왕자의 말에 왕은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지켜보는 호위 기사의 눈이 짙게 가라앉았다.
***
“루마 제국은 매번 그랬던 대로 귀족을 보냈으니 문제없지만…….”
타타이나 왕국에서 온 공문을 보며 타다흐는 일정 박자로 무릎을 두드렸다. 올해는 삼국 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삼 년마다 개최하는 삼국 회의는 초승달 대륙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세 나라가 무역 교류를 위해 만든 것으로 삼 년마다 각 나라를 돌아가며 개최하는데 이번엔 랑그도프 차례였다.
타타이나.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대륙 안쪽에 위치한 거대한 섬 왕국이다. 국왕을 비롯해 수많은 마법사가 존재하는 마법 왕국으로 마석의 근원지였다.
루마 제국.
내륙 서북부를 장악한 나라로 단일 종교를 바탕으로 강력한 신성력을 자랑하는 신성제국이다. 그들이 삼국 회의에서 내놓는 건 기름이었다.
마지막으로 랑그도프.
오십여 개 부족이-소수 부족을 제외한 숫자다- 연합해 세운 왕국으로 전사들의 나라라 불린다. 대륙 소금의 삼분지 일을 차지하고 있기에 주 무역품 또한 소금이었다.
Prologue
하얀 손이 목을 감싸 쥐었다. 화덕에 잘 구운 빵처럼 짙은 피부가 서서히 짓눌렸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 밭은 숨을 내쉬었다.
“마법사가 내리는 죽음은 특별한 줄 알았더니 여느 인간과 다르지 않군.”
흠칫, 놀란 인영이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내가 입술을 죽 찢었다.
“전사는 망설이지 않아.”
베개 밑으로 손을 내린 그가 단도를 꺼냈다. 망설임 없이 휘두른 검에 피가 튀었다.
Chapter 1. 전사의 나라
“마력이 줄고 있소.”
“벌써 백 년이 지났군.”
“백 명의 마법사인가, 한 명의 왕족인가.”
“답은 뻔하지 않소?”
왕실 마탑주의 말에 다른 탑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타이나의 귀한 자산을 백 명이나 잃을 순 없었다. 그들의 시선이 탑 너머 화려한 왕궁으로 향했다. 다행히 이번엔 왕족이 두 명이었다.
***
천 년 전, 대륙이 온전히 하나였을 때. 아직은 인간이 국가가 없이 대륙 곳곳에 흩어져 살았을 때.
인간을 향한 용의 공격으로 거대한 전쟁이 일어났다. 무려 십 년이나 이어진 ‘용인 전쟁’의 승리는 인간에게 돌아갔지만, 하나의 대륙이 쪼개지고 인구도 반으로 줄어드는 큰 피해를 보게 되었다. 그 후 살아남은 인간들은 각자의 이해에 따라 여러 왕국을 세우니 이것이 ‘초승달 대륙 역사’의 시작이다.
천 년 후, 초승달 대륙 동남부에 위치한 사막 왕국 랑그도프.
대륙 소금 유통의 삼분지 일을 차지하는 소금 사막을 지나면 황금빛 모래가 가득한 모래사막이 나오고 그 안으로 더 들어가면 수십 개의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오십여 개의 부족이 터를 잡은 광활한 초원 지대가 나온다. 현지인들은 이곳을 ‘위대한 전사들의 땅’이라고 부르지만, 대륙인들은 부족 연합 국가 ‘랑그도프’라 불렀다.
현재 랑그도프의 패권을 차지한 부족은 ‘붉은 늑대’ 부족으로 이번 대 라하(*부족 연합 대표)도 붉은 늑대의 족장이었다.
뜨겁다 못해 살을 태울 듯한 햇볕이 내리쬐는 정오.
오아시스와 가장 가깝고 주변 파오(*원형 천막) 중 가장 큰 파오 안으로 사내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라하!”
수하들과 칼을 손질하며 낄낄대던 라하 타다흐가 심드렁한 얼굴로 사내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기에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오두방정인 게야?”
사내는 주변 대전사들에게 눈인사하고 타다흐 앞에 무릎 꿇었다.
“기뻐하십시오! 바탄 님이 전사의 사냥을 마치고 귀환 중이십니다!”
“오오!”
“드디어!”
“역대 가장 이른 시일이 아닌가? 역시 바탄 님이로다!”
“경하드립니다, 라하!”
대전사들이 환호하며 라하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타다흐는 코를 씰룩이며 헛기침했다. 체면 때문에 참고 있지만, 그 또한 마음이 벅찼다. 전사의 사냥은 부족을 이어받을 후계자가 치르는 성인식으로 대형 몬스터를 이른 시일에 잡아 올수록 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보자……. 칠 일이던가?”
“바란 님은 열흘이었지요.”
“이거 바란 님이 지셨습니다, 그려.”
나이 든 대전사들이 홍소를 터뜨리자 타다흐가 파오 밖을 힐끔거렸다. 어슬렁거리던 그림자가 씩씩거리며 물러났다. 그의 입꼬리가 짓궂게 올라갔다.
“적당히 놀리시게.”
타다흐와 마찬가지로 바깥 동향을 눈치챘던 대족장들이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삼 일 차이지 타다흐의 차자인 바란 또한 놀라운 성과를 보였다. 다만 제 형에 대한 자격지심이 있어 쉽게 발끈했기 때문에 때때로 대전사들은 이런 식으로 그를 놀리곤 했다. 그래도 음습한 성격은 아니라 크게 마음에 담아 두진 않을 터였다.
“그럼, 부족의 위대한 전사를 마중 가 볼까.”
타다흐는 벌떡 일어나 파오 밖으로 나갔다. 이미 주변은 전사들의 귀환으로 떠들썩했다. 파오에서 훌쩍 떨어져 있던 바란이 불퉁한 얼굴로 제 아비에게 다가왔다.
“아저씨들은 그래도 아버지는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뭐 어쩌라고? 누가 엿들으라고 했누?”
“아버지!”
바란의 고함에 곁에 서 있던 부인이 옆구리를 퍽 찔렀다. 억! 허리를 숙인 바란이 이내 피식 웃었다.
“아. 진짜 아쉽네.”
고작 삼 일이라니. 좀 더 노력했다면 능히 좁힐 수 있는 시일이었다.
“이 자리가 그리도 탐나느냐?”
타다흐의 은근한 물음에 바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리 싫어하는 사람도 있답니까?”
“하긴.”
정점에 선다는 것. 원하는 게 있으면 약탈해서라도 쟁취하는 랑그도프의 전사라면 당연히 꿈꿀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그래도 졌으니 포기해.”
“누가 그걸 모릅니까? 그냥 아까워서 그럽니다, 아까워서.”
타다흐가 앞서 걷자 바란이 툴툴거리며 뒤따랐다. 두 사람은 바탄의 귀환을 보기 위해 망루로 올랐다. 여전히 심통 맞은 차자의 얼굴에 타다흐가 그의 등을 퍽! 내리쳤다.
“이놈아. 그런 얼굴로 네 형을 맞았다간 쥐어 터진다.”
“흥.”
바란은 코웃음 치면서도 애써 표정을 풀었다. 사이좋은 형제이긴 하나 기어오른다 싶으면 가차 없는 게 바탄이었다. 괜히 트집 잡혀서 맞긴 싫었다.
“오는구나.”
먼 곳을 응시하며 라하가 중얼거리자 바란도 같은 방향을 쳐다보았다. 수천의 파오 너머로 뿌연 바람을 몰고 한 무리의 전사단이 달려오고 있었다.
“온다……!”
“부족의 수호신이다!”
“우리의 자랑! 붉은 늑대 부족의 수호신이 귀환한다!”
“와아아아아아!”
경계 초소 인근에 바글바글 모인 부족민들이 열렬히 환호했다. 그 사이에서 전사들이 낑낑대며 길을 만들었다. 귀환할 이들이 지나갈 자리였다.
뿌우우우우……!
뿔피리가 길게 울었다. 전사단의 선두를 달리던 사내가 손을 번쩍 들었다. 목덜미까지 바짝 깎은 붉은 머리, 다른 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신장, 사막의 모래처럼 짙은 피부, 탄탄한 근육이 자리 잡은 몸, 짙은 눈썹 아래 이목구비가 또렷한 사내다운 얼굴까지. 타다흐의 첫째 아들이자 붉은 늑대 부족의 대전사인 바탄이었다.
바탄이 번쩍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 들린 거대한 사막 몬스터의 머리를 본 부족민들이 두 팔을 휘두르며 열광했다.
“우와아아아!!”
“엄청 커!!”
“훠우! 이거 어마어마한데요.”
광적으로까지 느껴지는 환호에 예눅(*말과 비슷하게 생긴 사막 몬스터)을 재촉해 바탄의 뒤로 바짝 붙은 코카투가 휘파람을 불었다. 열기에 감염됐는지 예눅이 콧김을 뿜으며 이마에 달린 두 개의 뿔을 연신 허공으로 휘저었다.
손을 내린 바탄이 몬스터의 머리를 뒤로 휙 던졌다. 묵묵히 따라오던 단장, 붉은매가 그것을 받아 수레에 실었다.
“코카투. 가장 큰 것은 라하의 파오에 넣고 나머지는 부족민들에게 돌려.”
“예. 바탄 님. 다들 좋아할 겁니다. 부족의 수호신이 잡은 몬스터의 부산물이니까요.”
“저도 목걸이 하나 만들 겁니다.”
“난 팔찌.”
전사들이 들뜬 목소리로 떠들었다. 사막인들은 사냥한 몬스터의 이빨과 손톱, 뼈 등을 가공해서 장신구로 만드는데 강한 전사가 사냥한 것일수록 귀하게 여겼다.
“이제 들어가자.”
바탄이 손을 내리고 예눅의 속도를 줄였다. 저 멀리 망루에 오른 타다흐와 바란이 보였다. 그는 부족 입구에서 완전히 멈춘 채 타다흐를 향해 소리쳤다.
“나, 붉은 늑대 수호신의 가호를 받은 바탄이 부족의 위대한 시험을 마치고 귀환했으니! 우리의 위대한 영웅인 라하께 승리의 축복을 받고자 합니다!”
까마득히 먼 거리임에도 목소리가 천둥처럼 또렷이 들렸다. 타다흐는 흐뭇하게 웃으며 칼을 번쩍 들었다. 라하의 허락에 전사단이 천천히 부족 내로 들어갔다.
“와아아아아!”
“바탄 님! 바탄 님! 바탄 님!”
전사들이 들어오자 부족의 여인들이 아름답게 짠 직물을 그들에게 바쳤다. 그 뒤로 아이들이 너도나도 달려 나와 전사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태워 주세요!”
“저도! 저도!”
“바탄 님!”
전사들은 기꺼이 아이들의 작은 몸을 들어 제 앞에 태웠다. 바탄도 한 아이를 골라 품에 안았다. 주변 아이들이 부럽다는 눈으로 그 아이를 쳐다봤다.
“꽉 잡아라.”
“네, 넵!”
설마 제가 선택될 줄 몰랐는지 아이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동그란 머리를 내려다본 바탄이 피식 웃었다. 그는 아이의 손을 잡아 예눅의 갈기를 쥐여 줬다. 평생 한 주인만을 섬기는 짐승이기에 뿔을 쥐여 주는 건 위험했다.
바탄은 구부정하게 상체를 수그린 아이의 허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려 곧게 세웠다.
“몸을 펴고 당당히 고개를 들어라. 우리가 곧 너의 미래다.”
“네. ……네!”
완전히 긴장이 풀린 건 아니지만 아이는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씰룩이며 힘차게 대답했다. 커다란 예눅 위에서 본 세상은 아이에게 미래를 보여 주었다. 환호하는 사람들. 거칠게 투레질하는 예눅의 사나운 목울음. 당당하게 전진하는 위대한 전사들. 아이의 눈에 굳은 의지가 실렸다.
전사단이 오아시스에 가까워질수록 사람의 행렬도 점차 줄어들었다. 신의 물방울로 불리는 오아시스엔 십삼 인의 대전사와 라하의 파오만이 존재했다. 일반 부족민은 오아시스와 연결된 수로를 통해 물을 공급받고 있기에 허락 없인 그곳으로 접근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앞에 태웠던 아이들도 예눅에서 내려 부모들에게 돌아갔다.
“쌈쫀!”
바탄이 예눅에서 내리자 바란의 아들 야나바하가 오동통한 팔다리를 휘저으며 달려왔다. 조카를 번쩍 든 바탄이 씩 웃었다.
“내 어린 전사가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하는구나. 얄미운 놈은 저렇게 미적미적하는데 말이다. 바다 거북이가 육지로 올라온 줄 알겠다!”
그 말에 전사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바란의 전사단도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부들거렸다.
“누가 미적거렸다고 그러는 거야! 환영하면 될 거 아니야!”
버럭 소리친 바란이 힘껏 제 형을 껴안았다. 육중한 몸에 갇힌 바탄이 환하게 웃으면서 팔꿈치로 명치를 후려쳤다. 컥, 몸을 움츠린 바란이 옆으로 쓰러졌다.
“아빠?”
“자. 할아버지에게 가자.”
“할부지!”
놀라서 제 아비를 쳐다본 야나바하가 금세 관심을 돌렸다. 아들에게 외면당한 바란이 곰 같은 덩치를 말고 코를 훌쩍였다. 그 모습을 부인이 한심하게 쳐다봤다.
바탄은 야나바하를 안은 채 타다흐에게 다가갔다. 라하의 주변에 늘어선 대전사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젊은 대전사를 환영했다. 야나바하를 바닥에 내린 바탄이 무릎을 꿇었다. 그를 향해 타다흐가 손을 내밀었다.
“전사의 사냥을 치른 붉은 늑대의 수호신에게 무한한 영광이 있으리라.”
바탄이 그 손을 잡고 손바닥에 입술을 깊이 눌렀다.
“부족의 미래를 위해 전사의 혼을 바치겠습니다.”
흐뭇하게 웃은 타다흐가 크게 소리쳤다.
“이번 후계자 경쟁은 바탄의 승리다! 이에 소족장의 의식을 치르겠다!”
“우리의 위대한 전사!”
쿵! 하고 전사들이 발뒤꿈치로 땅을 두드렸다. 일정하게 울리는 발소리를 배경으로 부족의 제사장이자 주술사인 아다일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허리가 잔뜩 굽은 작은 체구의 노파는 족장과 소족장만이 달 수 있는 붉은 깃털 두 개를 바탄의 머리띠에 꽂았다. 세 개를 꽂은 타다흐보다 하나 모자란 수였다.
“붉은 늑대 신의 힘이 그대의 영혼에 깃들 것이고.”
단도로 엄지를 그은 아다일라가 피를 바탄의 이마에 꾹 눌렀다.
“전사의 의지가 꺾이지 않은 한 신의 가호가 영원히 그대를 지키리라.”
뒤이어 그의 손에 떠오른 빛무리가 붉은 점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이마에 묻은 피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랜 사냥으로 피로했던 몸에 활기가 차올랐다. 바탄은 신기하다는 얼굴로 손을 쥐었다 풀었다.
의식을 마친 아다일라가 뒤로 물러나자 타다흐가 기쁘게 외쳤다.
“이로써 바탄이 붉은 늑대 부족의 소족장이 되었음을 선언하겠다!”
와아아아아아……!
거센 함성이 터져 나왔다. 대전사를 비롯해 모든 전사가 기뻐하며 바탄을 연호했다.
“소라하! 소라하!”
“우리의 위대한 수호신!”
‘소라하’란 소리에 타다흐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족장인 타다흐가 라하의 자리에 있기에 바탄 또한 붉은 늑대 부족의 소족장이자 랑그도프 부족 연합 국가의 소라하가 되었다. 현재 다른 부족엔 그만한 전사가 없으니 이변이 없는 한 다음 대 라하 또한 붉은 늑대 부족이 차지하게 될 터였다.
바란마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면서 제 형을 축하했다.
“이제 ‘라 마챠카’만 맞으면 되겠어.”
라 마챠카란 말에 바탄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내 마음대로 됐으면 이 나이에 혼자 살고 있겠냐.”
“이제 소족장이 됐으니 시간이 없어. 성년이 된 후 일 년 안에 찾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 나야 성년식 전에 찾아서 미리 전사의 사냥을 치렀지만, 형은 나이를 꽉 채웠잖아.”
“…….”
“느긋하게 굴다간 끽 가는 거야.”
바란이 손날로 제 목을 그었다. 가벼운 태도와 달리 눈빛은 진중했다. 그는 이미 반려를 찾았기에 걱정 없지만 바탄은 아니었다. 붉은 늑대 부족을 비롯해 랑그도프의 수많은 대전사는 성년식 일 년 후까지 반려를 얻지 못하면 미쳐 버리는 저주에 시달렸다. 이는 천 년 넘게 내려오는 저주로 살해당한 용이 내린 벌이었다.
‘긴 여행의 동반자’라고 불리는 ‘라 마챠카’.
일종의 반려를 가리키는 말로 오로지 본인만이 알아볼 수 있기에 라하인 타다흐라도 간섭할 수 없었다. 바탄은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바란의 말이 아니라도 사태가 심각하다는 건 그가 가장 잘 알았다. 끝까지 반려를 찾지 못하면 소라하가 되어도 소용없었다.
바탄이 은글슬쩍 아다일라에게 접근했다.
“아다일라.”
흠흠, 헛기침한 바탄이 은근슬쩍 물었다.
“그…… 라 마챠카 말이요. 올해는 생길 것 같습니까?”
“흐음.”
몸을 돌린 아다일라의 까만 눈이 기묘하게 빛났다. 그의 동공에 붉은색 고리가 생겼다. 신점을 볼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바탄은 숨을 멈추고 대답을 기다렸다.
“흘흘흘. 소족장. 올해엔 생기겠소.”
“헉! 정말입니까?”
드디어 내게도 빛이! 바탄이 어깨를 들썩이며 활짝 웃었다. 아다일라의 신점은 백발백중이니 틀릴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한껏 들떠서 돌아가는 바탄을 보며 아다일라가 고개를 내저었다.
“쯧쯧. 그리 좋아할 일은 아니건만.”
신점에 보인 건 검은 사슬에 매인 은빛 사슴이었다.
“뭐 어쩌겠누. 위대한 전사에겐 그만큼의 고난과 역경이 따르는 것을.”
이내 고개를 내린 아다일라가 낄낄거리며 제 파오로 돌아갔다.
두 달 후. 마도 왕국 타타이나에서 사신단이 출발했다. 마법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떠나는 은빛 마차를 국민들이 꽃을 뿌리며 배웅했다.
Chapter 2. 너는 내 운명 (1)
“마지막 외출을 하고 싶습니다.”
왕자의 말에 왕은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지켜보는 호위 기사의 눈이 짙게 가라앉았다.
***
“루마 제국은 매번 그랬던 대로 귀족을 보냈으니 문제없지만…….”
타타이나 왕국에서 온 공문을 보며 타다흐는 일정 박자로 무릎을 두드렸다. 올해는 삼국 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삼 년마다 개최하는 삼국 회의는 초승달 대륙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세 나라가 무역 교류를 위해 만든 것으로 삼 년마다 각 나라를 돌아가며 개최하는데 이번엔 랑그도프 차례였다.
타타이나.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대륙 안쪽에 위치한 거대한 섬 왕국이다. 국왕을 비롯해 수많은 마법사가 존재하는 마법 왕국으로 마석의 근원지였다.
루마 제국.
내륙 서북부를 장악한 나라로 단일 종교를 바탕으로 강력한 신성력을 자랑하는 신성제국이다. 그들이 삼국 회의에서 내놓는 건 기름이었다.
마지막으로 랑그도프.
오십여 개 부족이-소수 부족을 제외한 숫자다- 연합해 세운 왕국으로 전사들의 나라라 불린다. 대륙 소금의 삼분지 일을 차지하고 있기에 주 무역품 또한 소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