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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련(初戀) 1화

서장


위화국(衛和國) 삼백구십이 년, 본국에서 천 리 정도 떨어진, 만경(滿卿)이라는 번국(藩國)을 겸치하는 제후 진초왕(秦椒王)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혼인 후 장장 팔 년 만에 얻은 귀한 후사에 관한 일이었다.

귀이 얻은 아들이 한 살이 되던 해, 진초왕은 자식의 무사를 기원함과 운명을 점치기 위해 아들을 데리고 천왕대신(天王大神)을 모시는 신녀를 찾아갔다.

아들을 마주한 신녀의 표정은 못 볼 꼴이라도 본 듯 한없이 어두웠다. 그리고 한참 동안 아이의 얼굴을 구석구석 뚫어져라 훑어보더니 쯧, 하고 크게 혀를 차며 말하는 것이다.

“부모 잡아먹을 악귀를 낳아 왔구먼.”

진초왕은 신녀의 말에 경악하며 실의에 빠졌다. 신녀는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진초왕을 본체만체하며 계속해서 꺄르르 배냇짓하는 아이의 눈만을 바라보았다. 진초왕은 심상찮음을 알아채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맞잡고 엎드렸다.

“어찌하면 됩니까? 굿을 하면 됩니까?”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비는 진초왕에게 신녀는 끌끌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액이 단단히 씐 아이일세. 이 아이를 가까이 두면 자네들에게도 그 해가 미칠걸세.”

“그럴 리가 없습니다.”

탕! 신녀가 부채를 든 손으로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그 삼엄한 기세에 진초왕은 움찔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어디 못 믿겠으면 한번 잘 길러 보게나. 그 아이는 커 갈수록 몸에 지닌 액 때문에 시름시름 앓고 병들 걸세. 그건 두 번째로 치고, 아비인 자네에게마저 그 액이 스며들 테지. 내 이런 아이를 한두 번 본 게 아니니.”

단호한 신녀의 말에도 진초왕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는 양 아들을 데리고 신당을 뛰쳐나왔다. 팔 년 만에 얻은 귀한 장자다. 아직 걸음마도 떼지 않은 핏덩이가 부모를 잡아먹을 악귀라니.

진초왕은 그날, 처음으로 신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내내 그래 왔던 것처럼 아들을 금지옥엽 다루듯 키웠다.

아들이 두 살이 되던 해, 이유 모를 열병이 도졌을 때에도 그저 단순한 감기려니 여겼다. 하지만 아들의 기침이 하루가 지날수록 늘어 가고 점점 왕가 재정이 악화되는 것으로도 모자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뭄까지 이어지자 점괘를 계속해서 외면할 수가 없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아들이 애물단지로 전락한 건 시간문제였다. 진초왕은 결국 아들 소운을 별궁에 유폐했다. 자그마치 십수 년 전 이야기다.



1장 (1)


“정윤아, 네 무엇을 보고 있느냐.”

“새를 보고 있습니다, 스승님.”

“어찌 새를 보고 있느냐.”

“쟤는 글공부 안 해서 좋겠다 싶……아얏!”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곰방대가 날아왔다. 눈물이 찔끔 터질 만큼 아픈 타격에 정윤은 양손으로 머리를 붙잡았다. 곰방대로 맞아 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을 절대 모른다.

씨이……. 얻어맞은 머리를 양손으로 문지르며 정윤은 방금 전 제자의 정수리를 냅다 후려친 곰방대를 태평하게 입에 물고 있는 스승을 노려보았다.

“스승님, 왜 멀쩡한 회초리는 놔두고 허구한 날 곰방대로 때리시는 겁니까!”

“그러게 누가 딴청 부리라더냐?”

저가 잘못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윤의 뾰로통한 표정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정윤의 스승이자 이름뿐인 학관장직을 맡고 있는 허 노인은 호탕하게 껄껄 웃으며 담배 연기를 뿜었다.

계속 그리 망나니처럼 굴어 보거라. 네 아비에게 다 일러바쳐 줄 것이니. 허 노인이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반 협박조로 놀리자 정윤은 심통 가득한 얼굴로 책에 시선을 돌렸다.

“이 아둔한 놈아, 내가 네 나이 때에는 사서(四書)를 모두 떼고 오경(五經)을 공부 중이었다. 언제까지 그리 허송세월할 테냐?”

허 노인이 끌끌 혀를 차며 말하자 정윤은 그에 질세라 냉큼 ‘나이 열넷에 대학을 뗀 스승님이 별종인 겁니다’ 하고 말대꾸했다.

말을 끝내기 무섭게 곰방대가 머리로 날아왔다. 재빨리 양손으로 스승의 곰방대를 막아 낸 정윤은 식은땀을 흘리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오호라, 요놈 봐라?’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정윤을 내려다보던 허 노인은 정자 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아닛, 저게 뭐냐!’ 하고 다급히 외쳤다.

“저도 이제 가만 앉아 때리시는 대로 맞는 나이는 지났습니다, 스승님.”

같은 수법에 계속 당하는 모질이가 아니라고요. 정윤이 그리 너스레를 떨자 허 노인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러고는 반대쪽 손으로 재빨리 꿀밤을 날렸다.

“아얏!”

“한참 멀었느니라.”

엣헴. 방금 전 제자의 정수리를 찍어 내린 손으로 곱게 기른 수염을 쓰다듬으며 점잔 떠는 스승이 얄미워 정윤은 이가 갈렸다. 하는 수 없이 입을 삐죽 내밀고 걸상에 턱을 박은 채 웅얼웅얼 글을 읽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쭉 읽어 내릴 때마다 허 노인은 뻐끔뻐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대강 ‘옳지, 그렇지’ 하고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런 스승의 모습을 볼 때마다 정윤은 제대로 듣고 계시긴 한 건가 싶어 불신 가득한 눈빛으로 제 스승을 흘깃거렸다.

그때,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윤의 몸종 원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인, 벌써 오시(午時)가 넘었습니다.”

“응? 벌써 그리되었나?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어찌 저리 한결같이 공부가 끝난다고만 하면 좋아 죽는 것인지, 원.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지는 어린 제자를 바라보며 허 노인은 웃음을 삼켰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어허, 어딜 가는 게냐. 스승이 먼저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이놈이.”

누가 쫒아오기라도 하듯 벌떡 일어나 줄행랑을 치려던 정윤의 뒷덜미를 낚아챈 허 노인은 입을 삐죽 내미는 제자를 다시금 자리에 앉혔다. 그러고는 덮인 책을 곰방대 끝으로 펼쳐 내곤 이리저리 가리키기 시작했다.

“다음 시간까지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열 번 필사하거라.”

“스승니임…….”

“스무 번으로 바꿔 주랴?”

헙-! 정윤은 헛숨을 들이켜며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픽 웃으며 담뱃대를 입에 문 허 노인은 되었으니 이만 가 보라며 휘휘 손짓했다. 벌떡 일어난 정윤은 감사 인사를 다 끝내기도 전에 정자 밖으로 뛰쳐나갔다.

“당최 무얼 하기에 끝나기 무섭게 저리 바삐 뛰쳐나가는지.”

짧은 다리로 재빨리 뛰어가는 귀여운 뒷모습을 바라보며 허 노인은 허허 고놈 참- 하고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중반상도 거르고 가는 듯한데, 저 꼬마 도령에게 헛바람을 넣은 장본인이 누구인지 심히 궁금한 허 노인이었다.

“아직도 다 안 되었느냐? 뭘 하느라 이리 늦는 건데?”

“아유, 조금만 기다리세요. 평소 주전부리는 좋아하지도 않으시던 분이 요즘 왜 이럴까.”

어선방(御膳房)에서 밀가루 전병을 만들고 있던 식관장은 정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재촉하자 곤란한 듯한 얼굴로 손을 바삐 움직였다. 식관장의 노련한 손놀림 끝에 완성되는 당과와 전병들을 바라보며 정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방에서 기다리시지. 어찌 여기까지 오셔서 노비를 귀찮게 구십니까, 저하.”

“보자기에다 곱게 싸거라.”

“누구 주기라도 하시게요?”

“주긴? 싸 들고 못가에서 먹으려 그런다!”

정윤이 필요 이상으로 반응하며 대답하자 식관장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별수 있나. 이 집안에서 두 번째로 귀하신 소왕께서 친히 해 달라는데.

식관장은 정윤이 말한 대로 광이 번쩍번쩍 나는 비단 보자기에다 구절판을 올리고 그 안에 전병과 당과를 가지런히 놓은 뒤 둘둘 말아 단단히 여몄다. 보따리를 받아 든 정윤은 곧장 어선방을 뛰쳐나갔다.

어선방을 나온 정윤은 단단히 여민 보자기를 풀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품 안에 꽁꽁 숨겨 두었던 서책을 꺼내 그 안에 넣고는 다시 보자기를 싸맸다. 정윤은 뿌듯한 얼굴로 보자기를 소중하게 품에 안고는 어디론가 향했다.

정윤이 어디를 향하든, 정윤의 뒤를 따르는 이는 총 넷이었다. 그중 하나는 봉춘이라는 몸종이었으며 나머지는 전부 호위 무사였다. 맏이인 원일과 둘째 누이 원양, 그리고 막내 원상. 세쌍둥이인 그들은 정윤이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하다시피 한 정윤의 심복이었다.

아비는 정무상 늦게까지 침궁을 비운다. 금일은 어미 당수연 또한 유시(酉時)까지 돌아오지 않는 날이다. 저녁까지 어미와 아비가 둘 다 집을 비우는 건 근 엿새 만의 일이었다.

올해 열넷인 정윤의 다리로 본궁인 지천각에서 사백 보 정도 걸으면 커다란 연못가가 하나 있었다. 그 연못을 가로지르는 큰 다리를 지나면 인적 드문 팔각정과 높은 성벽이 나온다.

팔각정 옆에는 커다란 교목이 서 있는데, 그 나무 옆에 작은 수풀이 있었다. 수풀 앞에 무릎을 꿇는 자신들의 어린 주인을 바라보며 봉춘과 세 쌍둥이는 초조한 듯 입을 달싹거렸다.

성 내벽에 엉겨 붙어 있는 수풀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더듬거리던 정윤의 낯빛이 원하던 것을 발견한 듯 밝아졌다. 손에 잡히는 것을 그대로 치워 내자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드러났다.

정윤이 몸을 웅크리고 그 구멍 안에 앞서 들어가기 시작하자 원일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나무를 탔다. 뛰어난 무장인 원일에게 이깟 성벽을 넘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정윤이 담을 넘어간 것을 확인한 원양과 원상은 재빨리 양쪽으로 흩어졌다. 봉춘은 높은 처마 위로 몸을 날리는 원양과 원상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자님, 오셨어요?”

“형님은?”

“그것이……그 제부터 체기가 심하게 드셔서.”

몸종 영순이 착잡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한껏 밝았던 정윤의 낯색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자신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다급히 뛰어가는 정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영순은 낮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높은 성벽 앞에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떡하니 서서 미동도 않는 원일을 힐끗 바라본 영순은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작년부터 부모의 눈을 피해 은밀히 성벽을 넘어오는 작은 군주님 덕에 별궁의 주방은 의도치 않게 풍족해지고 있었다.



침대에 앉아 서책에 시선이 꽂혀 있던 소운의 미간이 미미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멀찍이서 방해꾼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탓이다. 거칠게 열리는 장지문과 함께 형니임-! 하고 앳되고도 익숙한 목소리가 우렁차게 방 안을 채웠다.

“체기가 드셨다고 들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침상으로 쪼르르 달려온 정윤은 옆에 놓여 있는 걸상을 질질 끌고 와 폭삭 앉으며 걱정 어린 어조로 물음을 건넸다.

“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걱정되어 애써 물었건만, 돌아오는 대답은 싸늘한 타박이니 속이 상할 법도 한데 정윤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하나뿐인 형님을 염려하는 기특한 아우에게 너무 매정한 것이 아니냐며 혀를 내두를 게 분명했다.

“식사는 제대로 하셨습니까? 더 수척해지신 것 같습니다.”

“그러는 너는. 또 중반을 거르고 온 것이냐?”

“지금 절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아우가 끼니를 걸렀을까 봐 걱정하는 것이지요? 그렇지요? 정윤의 입에서는 분명히 확인하려는 듯 거듭 되물음이 쏟아져 나왔다. 눈치도 없이 꼬치꼬치 캐묻는 정윤의 물음에 소운은 헛웃음을 지었다.

소운의 그 물음 한마디가 뭐가 그리 좋은지 정윤의 입가에는 싱글벙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헤실헤실 웃으며 모른 척 서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소운을 바라보던 정윤은 아차, 하고 이제야 떠올랐다는 듯 탁자 위에 올려놓은 보자기를 들고 왔다.

“이만 가거라.”

“헤헤, 형님. 이것 보십시오. 제가 형님 드리려고 이렇게 다식과 전병을 가져왔습니다. 꿀떡도 있어요.”

한껏 상기된 얼굴로 다식판을 펼쳐 드는 정윤과는 달리 소운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또래 소년 소녀들이라면 싫어하려 해도 싫어할 수가 없고, 오히려 없어서 못 먹는 진귀한 주전부리가, 그것도 몇 가지나 되는 당과들이 한가득 담긴 다식판을 보고서도 시큰둥하다니.

어미가 이른 오전부터 집을 비운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주방에 달려가 만들 것을 지시하고, 글공부를 하는 내내 온몸이 간질거리는 것을 겨우겨우 참아 내고서 이리 달려왔던 정윤이다. 정성스레 준비한 선물을 본체만체하는 형님의 반응에 속이 상할 법도 한데, 정윤은 웃음을 잃지 않고 서책 하나를 꺼냈다.

“필요 없으니 이만 가거라.”

“형님. 제가 뭘 가져왔게요?”

등 뒤에 무언가를 숨겨 두곤 헤실헤실 웃기만 하는 정윤을 소운은 의아함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드디어 서책에서 시선을 떼고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형님의 모습에 정윤의 입가가 기쁨으로 꿈틀거렸다.

짠! 정윤은 등 뒤에 숨겨 둔 서책을 양손으로 잡고 소운의 눈앞에 내밀었다. 다소 두꺼운 서책의 표지에 적힌 글자를 읽은 소운의 눈빛이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것을 똑똑히 확인한 정윤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소학(小學)은 이제 지겹지 않으십니까? 슬슬 사서(四書)로 넘어가셔야지요.”

엣헴! 오늘만큼은 콧대를 높이 세울 자격이 있었다. 의기양양하게 허리에 양손을 짚고 턱을 꼿꼿이 세운 정윤은 무언가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소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지만, 소운의 관심은 그런 정윤보다 그가 가져온 서책에 쏠려 있었다.

정윤은 이미 서책을 펼쳐 들고 푹 빠져 있는 소운을 바라보며 침대에 팔을 대고 엎드렸다. 그리고 낮은 높이에서 곱디고운 형님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소소한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



만경군주 진초왕의 외동아들 기정윤의 나이가 열둘이 되던 해의 일이다. 왕가의 후계자로 길러지고 있던 정윤은 여러 의미로 고단한 삶을 살고 있었다.

고작 열두 살짜리가 뭐가 고단하겠느냐고 코웃음을 칠 수도 있겠다만, 아침 일찍 일어나 부모님께 문안 인사를 드리자마자 글공부, 공부, 공부, 공부로도 모자라 검술 훈련, 훈련, 훈련. 하루 온종일 한 시진 정도의 자유 시간을 제외하고 문무만 지겹도록 닦는 생활을 반복하는 정윤으로선 고단하다 말하기 충분했다.

장차 군주가 될 자가 가감승제(加減乘除)를 익히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산술법을 공부하던 정윤은, 잠깐 머리를 식힐 겸 운화각 주변을 산보 중이었다.

그러다가 궁에 기거하는 이들도 잘 가지 않는, 인적 드문 구석의 별궁을 발견했다. 정윤은 그날 그런 전각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황궁과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호화스럽고 넓은 성에 살다 보니 정윤은 가끔 당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제집 안마당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평소 나무를 타는 것에는 관심도 없던 정윤이 그날은 이상하게 나무를 타려고 고집을 부려 원 남매는 곤욕을 치렀다. 혹시라도 나무에서 떨어져 다치기라도 한다면 자신들과 몸종 봉춘의 목이 날아갈 것임이 분명했지만, 하고자 하는 일에는 반드시 실천으로 옮기는 기질을 타고났던 정윤을 완력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기어코 나무에 올라탄 주인을 초조한 눈빛으로 지붕에 올라간 닭 쫒는 개처럼 올려다보기만 하던 원가와 봉춘은 의아함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성벽 너머에 시선이 팔려 있는 정윤의 모습에 덩달아 궁금증이 일었다.

「저긴 어디야? 처음 보는 곳인데.」

이 층으로 이루어진, 다소 높은 성벽으로 사방이 꽉 막혀 있는 작은 규모의 전각이 하나 보였다. 마당에는 빨랫감이 널어져 있는 것을 보니 사람이 사는 곳인 듯싶었다. 성의 종놈들이 사는 곳인가? 아니, 종놈들이 사는 곳이라고 치기엔 너무 조용하고 외지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모르는 전각의 정체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던 정윤은 날렵하게 나무 위로 올라온 원일을 바라보았다.

「별궁인가 봅니다.」

「뭐 하는 곳인지 알아?」

「오며 가며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뭐 하는 곳인지는 잘 모릅니다.」

별궁? 한데 왜 자신은 지금껏 알지 못했지? 하긴. 성의 규모가 너무 크다 보니 모를 만도 하지. 정윤은 그리 중얼거리며 나무 위에서 정체 모를 별궁을 주시했다. 원일은 혹여나 제 주인이 나무에서 떨어질까 염려되어 ‘이만 내려가시지요’ 하고 말을 건넸지만, 높은 곳에서 아래를 관찰하는 것에 재미를 들렸던 것인지 정윤은 내려갈 마음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아무도 없는 작은 별궁을 바라보는 것이 뭐가 재밌는 것인지. 속이 바싹 타들어 가는 원 남매를 뒤로하고 별궁 곳곳을 훑어보던 정윤은 이 층 창문이 벌컥 열리자 흠칫 숨을 삼켰다.

문을 열고 이 층 툇마루로 나오는 소년은 이제 막 십 대 중반을 넘어선 듯했다. 얼핏 보면 여인네처럼 곱디고운 이목구비 탓에 소녀인가 오해할 뻔 했지만, 차림새를 보고 사내인 것을 알았다.

건강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핏기 없는 얼굴색과 전체적으로 가늘어 보이는 뼈대 탓에 하늘하늘하다, 여리여리하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법한 소년이었다.

잘 정돈하지 않고 반절만 묶은 옅은 머리칼과 화려하지 않고 간솔해 보이지만 그 재질은 고급임이 분명한 비단옷, 그리고 태생적으로 감춰지지 않는 고귀한 풍채 등을 보건대 성에서 잡일을 하는 부류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

이미 날씨는 많이 풀렸을 터인데 몸에 걸친 면포 자락 탓에 더욱 여려 보이는 소년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난간에 손을 얹었다. 툇마루 난간에 올라타 재잘대는 참새를 보더니 나지막이 입꼬리를 올리며 희고 가녀린 손을 슬며시 내민다. 매정한 참새는 소년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내미는 손을 피해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참새가 날아가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들고 멀리 바라보는 소년의 눈동자에는 왠지 모를 슬픔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쟨 누구야?」

「모르겠습니다.」

「모릅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정윤은 한참 동안 무언가에 홀린 듯 툇마루에서 바람을 쐬는 소년을 바라보다, 자신도 모르게 함께 나무에 올라타 있는 원 남매에게 물음을 던졌다. 원 남매는 조용히 목소리를 낮추고 입을 모아 대답했다. 제 심복들의 대답을 듣긴 한 것인지, 정윤의 시선은 한 사람에게로 꽂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공자니임! 이만 내려가셔야 합니다! 마마와 전하께서 아시면……!」

정윤과 원 남매가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지 알 턱이 없었던 봉춘은 다급하게 외쳤다. 목소리를 낮추지 않은 터라 성벽 너머로 목소리가 흘러 들어가고 말았다. 타인의 목소리를 들은 소년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그러다가 이내, 나무에 올라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정윤과 원 남매를 발견한 건지 눈에 띄게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아무래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옷을 입고 허리춤에 검을 찬 원 남매를 보고 놀란 듯싶었다. 소년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원 남매들과 정윤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다 이내 서둘러 툇마루에서 집 안으로 몸을 숨겼다.

「너희가 자객이라도 되는 줄 알고 놀랐나 보다. 그러게 왜 여기까지 올라와선!」

「주군께서 나무에 오르지만 않으셨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정윤은 제 주인에게 꼬박꼬박 말대꾸는 잘한다며 투덜거렸다. 원양의 타박이 틀린 말은 아닌지라 더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정윤의 원망은 봉춘에게로 향했다.

「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그래? 나 여기 있다고 동네방네 떠벌릴 참이냐?」

「하지마아안…….」

봉춘은 울상을 지으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려가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잡아 드릴까요?」

「됐다.」

자식이 귀한 황금 성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란 터라 자존심만은 하늘을 찌르는 정윤이다. 정윤은 단칼에 원일의 손길을 뿌리치고는 가벼이 나무를 내려갔다. 꾸준히 무예를 익히기도 했고 선천적으로 타고난 운동 신경 덕에 무리 없이 내려올 수 있었다.

내려오자마자 봉춘은 제 명줄이 깎이는 게 싫으시면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라며 유난을 떨었다. 봉춘의 호들갑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정윤은 조용하기만 한 팔각정 옆 교목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