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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불편한 관계
10개월 후.
일반 사원 평균 나이 28.5세. 젊은 패기로 똘똘 뭉친 <지성가구>는 대한민국 가구, 인테리어 제조 및 유통업계의 중심에 있었다. 섬세하고 세련된 디자인과 6년째 믿고 사는 우수한 기술력으로 고객 만족도 1위란 명예를 차지할 수 있었다.
“송 피엠님! 방금 와이넷 홈쇼핑에서 독점 판매 기획안 보내왔습니다!”
하지만 그에 따른 리스크는 분명 존재했다.
“CM쇼핑 측 담당 MD 전화받았습니다. 바로 넘길게요, 송 피엠님!”
“아…….”
한계다. 다정은 쓰러지듯 책상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3주 내내 지속된 철야와 야근의 결과물은 지독했다.
다정은 프로젝트 매니저(Project Manager: PM)였다. 기획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외주받아 해당 기업에 한시적으로 근무하며, 달성 목표를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것에 목적을 둔다.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기업도 있지만 다정은 계약직 프리랜서였다. 하지만 결코 계약 기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소수의 몇 명만 제외하면 그동안 쌓아 온 평판과 커리어는 꽤 좋은 편에 속했으니까.
“다정 씨. 이거, 내가 마무리 지으려고 했는데 잘 안 되네. 부탁 좀 하자. 자기 능력 대단하다며. 이런 건 일도 아니지?”
그 소수의 몇 명 중 한 명이 바로 3팀의 김미래 팀장이었다.
미래는 다정의 책상에 툭, 파일철을 던지듯 내려 두고 홀가분하게 떠났다.
‘저 싸갈스 바갈쓰가 진짜.’
미래는 프로젝트 매니저로 입사한 다정을 늘 못마땅하게 여겼다. 평소엔 팀이 달라 부딪칠 일이 적었지만,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중 하나를 3팀과 처음으로 협업하게 되자 때를 놓치지 않고 다정을 신명 나게 부려 먹었다.
다정은 눈을 뒤집어 까고서 미래를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정신없어 죽겠는데.
1월은 새해라서, 3월은 봄 기획 때문에, 5월은 가정의 달이라 정신없고, 7월은 여름 시즌이라서, 10월은 추석이라서, 12월은 크리스마스라 바빴다.
“차라리 나를 죽여라, 그냥.”
다정은 점차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다.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기 무섭게 이정연 주임이 헐레벌떡 달려와 바짝 붙어 섰다.
“송 피엠님. 제가 보낸 메신저 확인하셨어요?”
“아직 못 했지.”
“오늘 본부장님께 기획안 결재받는 날인 거, 잊지 않으셨죠?”
“응. 그럼.”
누구 말처럼 복지 좋은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다정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약봉지를 꺼내 들자, 정연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웬 약이에요? 송 피엠님 어디 아프세요?”
멀쩡한 게 더 이상했다. 편두통과 방광염을 달고 산 지 벌써 한 달째인데.
탕비실에 도착한 다정은 종이컵에 정수기 물을 따르고 미리 꺼내 놓은 알약들을 입안으로 전부 털어 넣었다.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던 이 주임은 바로 옆에서 떠날 줄 몰랐다. 그래. 내가 졌다.
“몇 시까지 제출하래?”
“3시요. 15분 남았어요.”
“응, 알겠어요. 가서 일 봐요.”
“절대 늦으면 안 돼요. 아시죠?”
알다마다. 시간 약속에 있어선 누구보다 예민한 남자를 모를 리가.
좋은 기회로 <지성가구>와 프로젝트 매니저 계약을 맺은 순간부터 귀에 박히도록 들어 왔고, 10개월 동안 여실히 경험했다. ‘그 남자’에 대한 모든 것을.
다정은 자비 없이 콰직 구겨 낸 종이컵을 그대로 휴지통에 던져 버렸다.
아무리 이력서 취미 특기 사항에 마땅한 것이 없어 ‘일’이라고 써 놨다지만, 어디까지나 자신 있다는 뜻이었지 업무를 많이 달라는 취지는 아니었단 말이다. 사람 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르다더니, 딱 그 짝이다.
“계약 기간만 끝나 봐라. 죽었다 깨어나도 이쪽 방향으론 오줌도 안 싼다.”
아무래도 면접 때 일로 복수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유치한 인간.
다정은 어금니를 바득 갈았다.
* * *
본부장실 앞에 당도한 다정은 물끄러미 문패를 바라보았다.
청심환이라도 챙겨 먹고 올걸.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뒤로하고 다정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내쉬며 정확히 세 번 노크했다.
“들어와요.”
익숙한 음성이 고막 안으로 꽂혔다. 다정은 경건하게 마음을 다잡으며 집무실로 들어섰다.
“판매처 기획안 결재받으러 왔습니다. 본부장님.”
눈이 마주치자마자 반사적으로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당연히 나쁜 의미로.
“가져와요.”
어디서든 지고 들어가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저 예리한 눈만큼은 차마 마주할 엄두가 나질 않는다. 머릿속은 이미 암전 상태였다.
다정은 쭈뼛쭈뼛 집무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시원한 향수 냄새가 코끝에 잠시 머물렀다.
그에게선 항상 같은 향기가 났다. 마시는 차도 늘 카모마일이었다. 손목을 채우고 있는 시계 브랜드마저도.
10개월, 곁에서 악바리로 버티며 알아낸 것 하나. 그는 한번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좀처럼 싫증 내는 일이 없다. 신중했고, 보다 더 섬세한 남자였다. 그만큼 쉽게 곁을 내주지 않는다. 그것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다정은 조심조심 기획안 파일을 집무 책상에 내려 두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집무실은 시계 초침 소리와 서류 종이 넘어가는 소리를 제외하곤 적막했다.
“…….”
다정은 슬그머니 눈동자를 올려 그의 반응을 살폈다. 변화가 있었다면 어떤 답이 나올지 예상 정돈 가능할 텐데,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은 여전했다.
기획팀 본부장 차은도.
걸출한 외모와 능력으로 많은 사원들 사이에선 이미 소문난 화제의 인물이었다. 물론, 그 ‘화제’의 의미는 조금 다르다.
전체적인 인상은 몹시 차가웠다. 이국적인 외모. 굴곡진 입체감 때문에 보다 각진 이목구비는 부드러움과 거리가 멀었다.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냉미남 스타일에 가까웠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은 자세는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처럼 그의 짙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으면 절로 간담이 서늘해졌다. 입술이라도 선하게 움직이면 그나마 나을 텐데, 일자로 꽉 다물린 입술은 좀처럼 움직이는 일이 없어서 숨통이 턱턱 막혔다.
외모도 성격도 일을 처리하는 방식도 모두 각진 사람. 흔히 말하는,
FM.
차은도를 설명하기에 이보다 적합한 단어가 있을까.
미국 지사에서 기획팀 팀장을 맡고 있다가 2년 전, 혜성처럼 등장했단다. 반응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고.
물론 다른 측근에서는 그의 뒤를 봐주는 큰손이 있다거나, 이와는 반대로 임원들과 사이가 좋지 않단 소문도 간간히 들렸지만, 팽팽하게 대립하는 루머 중 무엇이 사실인지는 모른다. 증명된 것도 없다.
하지만 기하급수적으로 오른 분기별 매출 변동 추이 그래프를 확인해 본 사람은 누구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능력 하난 끝내준다는 뜻이다.
그러나 적어도 다정과는 상극이었다.
서류를 다음 장으로 넘기려다 말고 기다란 손가락이 문득 허공에서 멈췄다. 곧이어 그의 시선이 천천히 정면으로 올라왔다. 매서운 눈이 날렵하게 빛났다.
“왜 갑자기 바뀐 겁니까.”
살 떨리는 고요한 목소리에 다정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떤…….”
“협력업체.”
수많은 서류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검은색 글자들 중, 아주 살짝 변동된 부분이었다. 같은 기획안을 다섯 번 정도 검토하다 보면 흘러가듯 빠트리는 부분이 있을 법도 한데, 그는 절대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귀신이야?
은도는 다정을 똑바르게 바라보았다. 어디 한번 설명해 보란 거다. 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던 다정은 침을 꼴딱 삼키며 겨우 입을 열었다.
“본부장님도 아시겠지만, 요즘은 홈쇼핑보다 이커머스(전자상거래)를 통해 얻어지는 매출이 급증하는 추세입니다. 그래서 홈쇼핑에 주력하고 있는 와이넷 기업보다, 후자에 집중하고 있는 CM 업체를 선택한.”
다정의 말을 끊어 내고 은도가 손을 들었다.
“그건, 20대부터 40대까지의 연령층을 겨냥한 프로젝트였을 때고.”
분명 자신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묵직하게 핵심을 찔러 오는 그의 지적은 피해 갈 수 없었다. 점점 목이 움츠러들었다. 다정의 시선이 다시금 아래로 향했다.
은도는 기다란 손가락 사이에 끼워 둔 펜 끝을 서류 위에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CM쇼핑은 개편된 시기가 얼마 되지 않아 기반이 불안한 반면, 와이넷 홈쇼핑은 꾸준히 높은 성적을 보이고 있는 걸로 아는데. 그런 기본적인 정보조차 몰랐다고 하진 않겠죠. 7년 차 프로젝트 매니저가.”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다정의 입술이 축 늘어졌다.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어디까지나 본부장은 실무진들을 대표하는 사람일 뿐, 그 역시 상부에 결재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므로 확실한 근거가 있지 않고서는 쉽게 통과시킬 수 없다.
물론, 이해는 한다만.
“그런데, 왜.”
내 말에 반박할 수 있으면 어디 한번 해 보라는 추궁 담긴 눈빛이 곧게 쏟아지자 다정은 입술을 꾹 짓이겨 물었다.
역시. 이번에도 입 닫고 있을 줄 알았다는 그의 무덤덤한 표정엔 약간의 한심스러움이 묻어나 있었다.
그 모습을 두 눈으로 직면하게 된 다정은 주먹을 꽉 말아 쥐며 고개를 번쩍 추켜들었다. 집요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한 적은 입사 이래, 처음이었다. 다정은 혀로 입술을 축이고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본부장님.”
속으로 욕을 했으면 했지, 단 한 번도 반박한 적 없다. 그런 그녀가 돌연 날을 세워 오니 초지일관 무표정한 은도의 얼굴에 변화가 생겼다.
“까라면 까겠습니다.”
첫 시작부터 과격한 단어 선택에 은도의 미간이 미약하게 구겨졌다. 다정은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분명, 본부장님 말씀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의견엔 변함없을 겁니다. 와이넷 기업이 진행하고 있는 벤치마킹은 어디까지나 시도일 뿐이지, 이커머스에 주력하고 있는 CM 기업을 따라잡긴 힘듭니다.”
여러 기업을 돌아다니며 쌓아 온 판별력을 종잇장 구기듯 하지는 말아 달라고, 돌려 말하는 중이다.
“만약 제가 고객이라면, 쇼 호스트의 말보단 직접 경험해 본 다른 고객들의 현실적인 리뷰가 더 믿음직스러울 것 같거든요.”
어떤 호통을 듣게 되려나.
아마,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이대로 업무에만 치여 살다간 정말 죽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각오하고 던진 자살골이었다.
“……다행히 말은 할 줄 아네.”
응?
“송다정 씨가 CM쇼핑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의외네요.”
생각지 못한 반응에 당황한 다정은 눈을 껌뻑거리며 은도를 멀거니 응시했다.
“그래도 다시 제출해요.”
“네?”
지금 결재 가지고 밀당하냐? 다정의 눈썹이 억울한 시옷 자 모양으로 변했다.
“내가 까라면 까겠다면서.”
“그건!”
“까요, 그럼.”
“그, 그럼 다시 까야 하는 이유라도 말씀해 주시면…….”
그는 삐딱하게 다정을 응시하며 검지로 파일철을 꾹, 찔렀다.
“왜 이 많은 서류들 중에서 해당 업체에 대한 시장 조사나 자료 분석은 한두 장뿐일까요.”
이 이상 잔말 말고 마케팅 부서를 구워삶든 영업팀을 달달 볶든 자료를 더 추가하여 가져오란 소리다. 결재받으러 온 지 다섯 번째 만에 겨우 얻어 낸 힌트였다.
“더 말해 줘야 합니까?”
“……시정하겠습니다.”
다정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잘못을 시인하며 바짝 꼬리를 내렸다. 착잡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뭐 하고 있습니까. 기회를 줬으면 뛰어가서 잡아야지.”
결국 이번에도, 다정의 패배였다.
10개월 후.
일반 사원 평균 나이 28.5세. 젊은 패기로 똘똘 뭉친 <지성가구>는 대한민국 가구, 인테리어 제조 및 유통업계의 중심에 있었다. 섬세하고 세련된 디자인과 6년째 믿고 사는 우수한 기술력으로 고객 만족도 1위란 명예를 차지할 수 있었다.
“송 피엠님! 방금 와이넷 홈쇼핑에서 독점 판매 기획안 보내왔습니다!”
하지만 그에 따른 리스크는 분명 존재했다.
“CM쇼핑 측 담당 MD 전화받았습니다. 바로 넘길게요, 송 피엠님!”
“아…….”
한계다. 다정은 쓰러지듯 책상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3주 내내 지속된 철야와 야근의 결과물은 지독했다.
다정은 프로젝트 매니저(Project Manager: PM)였다. 기획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외주받아 해당 기업에 한시적으로 근무하며, 달성 목표를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것에 목적을 둔다.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기업도 있지만 다정은 계약직 프리랜서였다. 하지만 결코 계약 기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소수의 몇 명만 제외하면 그동안 쌓아 온 평판과 커리어는 꽤 좋은 편에 속했으니까.
“다정 씨. 이거, 내가 마무리 지으려고 했는데 잘 안 되네. 부탁 좀 하자. 자기 능력 대단하다며. 이런 건 일도 아니지?”
그 소수의 몇 명 중 한 명이 바로 3팀의 김미래 팀장이었다.
미래는 다정의 책상에 툭, 파일철을 던지듯 내려 두고 홀가분하게 떠났다.
‘저 싸갈스 바갈쓰가 진짜.’
미래는 프로젝트 매니저로 입사한 다정을 늘 못마땅하게 여겼다. 평소엔 팀이 달라 부딪칠 일이 적었지만,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중 하나를 3팀과 처음으로 협업하게 되자 때를 놓치지 않고 다정을 신명 나게 부려 먹었다.
다정은 눈을 뒤집어 까고서 미래를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정신없어 죽겠는데.
1월은 새해라서, 3월은 봄 기획 때문에, 5월은 가정의 달이라 정신없고, 7월은 여름 시즌이라서, 10월은 추석이라서, 12월은 크리스마스라 바빴다.
“차라리 나를 죽여라, 그냥.”
다정은 점차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다.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기 무섭게 이정연 주임이 헐레벌떡 달려와 바짝 붙어 섰다.
“송 피엠님. 제가 보낸 메신저 확인하셨어요?”
“아직 못 했지.”
“오늘 본부장님께 기획안 결재받는 날인 거, 잊지 않으셨죠?”
“응. 그럼.”
누구 말처럼 복지 좋은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다정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약봉지를 꺼내 들자, 정연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웬 약이에요? 송 피엠님 어디 아프세요?”
멀쩡한 게 더 이상했다. 편두통과 방광염을 달고 산 지 벌써 한 달째인데.
탕비실에 도착한 다정은 종이컵에 정수기 물을 따르고 미리 꺼내 놓은 알약들을 입안으로 전부 털어 넣었다.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던 이 주임은 바로 옆에서 떠날 줄 몰랐다. 그래. 내가 졌다.
“몇 시까지 제출하래?”
“3시요. 15분 남았어요.”
“응, 알겠어요. 가서 일 봐요.”
“절대 늦으면 안 돼요. 아시죠?”
알다마다. 시간 약속에 있어선 누구보다 예민한 남자를 모를 리가.
좋은 기회로 <지성가구>와 프로젝트 매니저 계약을 맺은 순간부터 귀에 박히도록 들어 왔고, 10개월 동안 여실히 경험했다. ‘그 남자’에 대한 모든 것을.
다정은 자비 없이 콰직 구겨 낸 종이컵을 그대로 휴지통에 던져 버렸다.
아무리 이력서 취미 특기 사항에 마땅한 것이 없어 ‘일’이라고 써 놨다지만, 어디까지나 자신 있다는 뜻이었지 업무를 많이 달라는 취지는 아니었단 말이다. 사람 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르다더니, 딱 그 짝이다.
“계약 기간만 끝나 봐라. 죽었다 깨어나도 이쪽 방향으론 오줌도 안 싼다.”
아무래도 면접 때 일로 복수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유치한 인간.
다정은 어금니를 바득 갈았다.
* * *
본부장실 앞에 당도한 다정은 물끄러미 문패를 바라보았다.
청심환이라도 챙겨 먹고 올걸.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뒤로하고 다정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내쉬며 정확히 세 번 노크했다.
“들어와요.”
익숙한 음성이 고막 안으로 꽂혔다. 다정은 경건하게 마음을 다잡으며 집무실로 들어섰다.
“판매처 기획안 결재받으러 왔습니다. 본부장님.”
눈이 마주치자마자 반사적으로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당연히 나쁜 의미로.
“가져와요.”
어디서든 지고 들어가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저 예리한 눈만큼은 차마 마주할 엄두가 나질 않는다. 머릿속은 이미 암전 상태였다.
다정은 쭈뼛쭈뼛 집무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시원한 향수 냄새가 코끝에 잠시 머물렀다.
그에게선 항상 같은 향기가 났다. 마시는 차도 늘 카모마일이었다. 손목을 채우고 있는 시계 브랜드마저도.
10개월, 곁에서 악바리로 버티며 알아낸 것 하나. 그는 한번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좀처럼 싫증 내는 일이 없다. 신중했고, 보다 더 섬세한 남자였다. 그만큼 쉽게 곁을 내주지 않는다. 그것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다정은 조심조심 기획안 파일을 집무 책상에 내려 두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집무실은 시계 초침 소리와 서류 종이 넘어가는 소리를 제외하곤 적막했다.
“…….”
다정은 슬그머니 눈동자를 올려 그의 반응을 살폈다. 변화가 있었다면 어떤 답이 나올지 예상 정돈 가능할 텐데,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은 여전했다.
기획팀 본부장 차은도.
걸출한 외모와 능력으로 많은 사원들 사이에선 이미 소문난 화제의 인물이었다. 물론, 그 ‘화제’의 의미는 조금 다르다.
전체적인 인상은 몹시 차가웠다. 이국적인 외모. 굴곡진 입체감 때문에 보다 각진 이목구비는 부드러움과 거리가 멀었다.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냉미남 스타일에 가까웠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은 자세는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처럼 그의 짙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으면 절로 간담이 서늘해졌다. 입술이라도 선하게 움직이면 그나마 나을 텐데, 일자로 꽉 다물린 입술은 좀처럼 움직이는 일이 없어서 숨통이 턱턱 막혔다.
외모도 성격도 일을 처리하는 방식도 모두 각진 사람. 흔히 말하는,
FM.
차은도를 설명하기에 이보다 적합한 단어가 있을까.
미국 지사에서 기획팀 팀장을 맡고 있다가 2년 전, 혜성처럼 등장했단다. 반응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고.
물론 다른 측근에서는 그의 뒤를 봐주는 큰손이 있다거나, 이와는 반대로 임원들과 사이가 좋지 않단 소문도 간간히 들렸지만, 팽팽하게 대립하는 루머 중 무엇이 사실인지는 모른다. 증명된 것도 없다.
하지만 기하급수적으로 오른 분기별 매출 변동 추이 그래프를 확인해 본 사람은 누구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능력 하난 끝내준다는 뜻이다.
그러나 적어도 다정과는 상극이었다.
서류를 다음 장으로 넘기려다 말고 기다란 손가락이 문득 허공에서 멈췄다. 곧이어 그의 시선이 천천히 정면으로 올라왔다. 매서운 눈이 날렵하게 빛났다.
“왜 갑자기 바뀐 겁니까.”
살 떨리는 고요한 목소리에 다정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떤…….”
“협력업체.”
수많은 서류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검은색 글자들 중, 아주 살짝 변동된 부분이었다. 같은 기획안을 다섯 번 정도 검토하다 보면 흘러가듯 빠트리는 부분이 있을 법도 한데, 그는 절대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귀신이야?
은도는 다정을 똑바르게 바라보았다. 어디 한번 설명해 보란 거다. 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던 다정은 침을 꼴딱 삼키며 겨우 입을 열었다.
“본부장님도 아시겠지만, 요즘은 홈쇼핑보다 이커머스(전자상거래)를 통해 얻어지는 매출이 급증하는 추세입니다. 그래서 홈쇼핑에 주력하고 있는 와이넷 기업보다, 후자에 집중하고 있는 CM 업체를 선택한.”
다정의 말을 끊어 내고 은도가 손을 들었다.
“그건, 20대부터 40대까지의 연령층을 겨냥한 프로젝트였을 때고.”
분명 자신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묵직하게 핵심을 찔러 오는 그의 지적은 피해 갈 수 없었다. 점점 목이 움츠러들었다. 다정의 시선이 다시금 아래로 향했다.
은도는 기다란 손가락 사이에 끼워 둔 펜 끝을 서류 위에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CM쇼핑은 개편된 시기가 얼마 되지 않아 기반이 불안한 반면, 와이넷 홈쇼핑은 꾸준히 높은 성적을 보이고 있는 걸로 아는데. 그런 기본적인 정보조차 몰랐다고 하진 않겠죠. 7년 차 프로젝트 매니저가.”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다정의 입술이 축 늘어졌다.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어디까지나 본부장은 실무진들을 대표하는 사람일 뿐, 그 역시 상부에 결재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므로 확실한 근거가 있지 않고서는 쉽게 통과시킬 수 없다.
물론, 이해는 한다만.
“그런데, 왜.”
내 말에 반박할 수 있으면 어디 한번 해 보라는 추궁 담긴 눈빛이 곧게 쏟아지자 다정은 입술을 꾹 짓이겨 물었다.
역시. 이번에도 입 닫고 있을 줄 알았다는 그의 무덤덤한 표정엔 약간의 한심스러움이 묻어나 있었다.
그 모습을 두 눈으로 직면하게 된 다정은 주먹을 꽉 말아 쥐며 고개를 번쩍 추켜들었다. 집요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한 적은 입사 이래, 처음이었다. 다정은 혀로 입술을 축이고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본부장님.”
속으로 욕을 했으면 했지, 단 한 번도 반박한 적 없다. 그런 그녀가 돌연 날을 세워 오니 초지일관 무표정한 은도의 얼굴에 변화가 생겼다.
“까라면 까겠습니다.”
첫 시작부터 과격한 단어 선택에 은도의 미간이 미약하게 구겨졌다. 다정은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분명, 본부장님 말씀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의견엔 변함없을 겁니다. 와이넷 기업이 진행하고 있는 벤치마킹은 어디까지나 시도일 뿐이지, 이커머스에 주력하고 있는 CM 기업을 따라잡긴 힘듭니다.”
여러 기업을 돌아다니며 쌓아 온 판별력을 종잇장 구기듯 하지는 말아 달라고, 돌려 말하는 중이다.
“만약 제가 고객이라면, 쇼 호스트의 말보단 직접 경험해 본 다른 고객들의 현실적인 리뷰가 더 믿음직스러울 것 같거든요.”
어떤 호통을 듣게 되려나.
아마,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이대로 업무에만 치여 살다간 정말 죽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각오하고 던진 자살골이었다.
“……다행히 말은 할 줄 아네.”
응?
“송다정 씨가 CM쇼핑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의외네요.”
생각지 못한 반응에 당황한 다정은 눈을 껌뻑거리며 은도를 멀거니 응시했다.
“그래도 다시 제출해요.”
“네?”
지금 결재 가지고 밀당하냐? 다정의 눈썹이 억울한 시옷 자 모양으로 변했다.
“내가 까라면 까겠다면서.”
“그건!”
“까요, 그럼.”
“그, 그럼 다시 까야 하는 이유라도 말씀해 주시면…….”
그는 삐딱하게 다정을 응시하며 검지로 파일철을 꾹, 찔렀다.
“왜 이 많은 서류들 중에서 해당 업체에 대한 시장 조사나 자료 분석은 한두 장뿐일까요.”
이 이상 잔말 말고 마케팅 부서를 구워삶든 영업팀을 달달 볶든 자료를 더 추가하여 가져오란 소리다. 결재받으러 온 지 다섯 번째 만에 겨우 얻어 낸 힌트였다.
“더 말해 줘야 합니까?”
“……시정하겠습니다.”
다정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잘못을 시인하며 바짝 꼬리를 내렸다. 착잡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뭐 하고 있습니까. 기회를 줬으면 뛰어가서 잡아야지.”
결국 이번에도, 다정의 패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