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뷰어

03. 지려 버려!



외부 미팅이 늘어지는 바람에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집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은도는 재킷 단추를 풀어내다 말고 집무 책상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추진 중에 있는 여러 기획안과 각종 서류들이 부서별로 차곡차곡 쌓여 있다.

불만은 없다. 살인적인 업무량을 감당하고 있는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분명 대책은 필요했다.

‘백업해 줄 인원을 충당해 달라.’

은도는 직원들의 간절한 희망 사항을 잘 알고 있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상부들이 게으른 탓이지. 은도가 입김을 불어 준 결과, 작년부터 신입 사원 채용 인원이 대폭 늘어났다. 그러나 그들이 실전에 투입되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유예 시간이 필요했다.

은도는 작은 의견 하나하나를 귀담아들을 줄 아는 실무진이었다.

물론, 아무도 모른다는 게 가장 큰 함정이었지만.

“본부장님. 부탁하신 커피 가져왔습니다.”

진우의 양손엔 커피 캐리어가 각각 하나씩 들려 있었다.

개수로만 봐도 은도 혼자 마실 양은 아니었다.

“미안합니다. 이런 것까지 부탁해서.”

“아닙니다.”

평소 같았다면, 진우를 시키지 않고 직접 가지러 갔겠지만 촉박한 스케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주세요.”

“제가 올려 두겠습니다. 본부장님.”

“괜찮습니다.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고.”

비서를 작은 일까지 떠맡는 심부름꾼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은도는 단호히 거절하며 팔을 뻗었다. 결국 진우는 들고 있던 테이크아웃 커피 캐리어를 넘겨 드려야 했다.

“1팀 직원들은 저녁 식사 하러 간 겁니까? 자리가 비어 있던 것 같은데.”

은도는 오늘 어느 팀이 야근을 하는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퇴근했단 사실까진 모르고 있었다. 진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우는 조금 열려 있는 집무실 문틈 사이로 기획팀 사무실을 힐긋 확인하며 대답했다.

“확실하진 않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누가 보면 큰일이라도 나는 건가 생각할지 몰라도 은도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진우에겐 익숙했다.

“서 실장님도 그만 퇴근하세요.”

“예.”

진우는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였다.

기획팀 직원들이 불편해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됐다. 그가 무표정하게 있으면 괜히 죄지은 기분이 들곤 했으니까.

하지만 비서를 ‘실장님’이라며 높게 대우해 주는 직속 상사도 거의 없을뿐더러, 꼭 저렇게 아무도 몰래 뒤에서만 좋은 일을 행하시니. 볼수록 참 귀여우신 분이다.

그 누가 알겠는가.

기획팀 본부장님의 과묵한 성격 뒤에 숨겨진 심각한 낯가림을.

슬쩍 흘리는 방법도 있었지만, 회장님의 지시 때문에 그럴 수도 없다.

‘언젠간 직원들도 알아주겠지.’

직원들의 업무 책상에 커피를 올려 두고 있는 은도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며, 진우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 * *



라떼 3잔, 아이스 아메리카노 7잔. 그중 9잔이 1팀 직원들의 업무 책상 위에 놓였다. 평소 직원들이 마시는 음료를 지나가던 길에 유심히 봐 두고 기억해 둔 것이 이럴 땐 참 좋은 역할을 했다.

순간 이상하단 직감이 들었던 건, 비어 있는 다정의 자리에 커피를 올려 둔 때였다.

책상 위에 정신없이 어질러진 서류들. 화면 보호기가 되어 있지 않아 업무를 보던 상태 그대로 켜져 있는 모니터. 마지막으로 의자에 떡하니 놓여 있는 핸드백까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다른 직원들의 자리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은도는 그녀가 업무와 야근을 대신 도맡게 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미련한 건지. 무식한 건지.”



‘내가 만약 계약이 끝난 후에도 계속 내 곁에 남아 달라 하면. 그렇게 해 줄 수 있습니까?’



사정을 전부 묵살하고 밑도 끝도 없이 던진 질문에도 그녀는 당황한 내색 한 번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필요 이상으로 당돌했고, 당혹스러울 정도로 솔직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어디까지나 프리랜서입니다. 한곳에 오래 머무를 생각도 없을뿐더러, 귀속될 마음도 없습니다.’



제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르게 마주하던 직원은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면접자가.



‘그렇지만 뽑아 주신다면 계약 기간 동안만큼은 후회 없으실 겁니다!’



다급한 목소리에 비해서 흔들림 없던 또렷한 그녀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은도의 시선이 흘러가듯 아래로 향했다. 반쯤 열려 있는 서랍 안에 하얀색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함부로 엿보는 취미는 없었으나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은도는 주변을 한 번 살핀 뒤, 조심스럽게 서랍을 마저 열었다.



「사 직 서」



봉투 겉면에 큼지막하게 쓰인 글씨를 확인하자마자 은도의 눈살이 확 구겨졌다. 얼마나 망설인 건지. 수도 없이 꺼내 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 때문인가.’

채용한 건 어디까지나 오기였다.

솔직히, 다른 직원보다 유독 송다정 앞에서 깐깐하게 굴었던 건 인정한다. 취미도 일, 특기도 일이라 하기에. 회사에 지원하게 된 계기가 복지 때문이라 해서. 초반부터 패기를 부리는 태도가 괘씸했다.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이 달라졌다. 하나를 알려 주면 송다정은 만족스러운 세 가지 이상의 결과물을 가져왔다. 속으론 분명 부당하단 생각을 할 법도 한데, 군말 없이 버텼다. 독종이었다.

욕심은 욕심을 부르게 되는 법이라고, 이제는 자연스럽게 그 이상을 바라게 됐다.

그녀가 자신을 기피 대상으로 여긴다는 것쯤은 웬만큼 눈치채고 있었다. 눈만 마주쳐도 썩은 물을 마신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표정부터 굳히는데, 모를 리가 있나. 그러나 막상 사직서를 직면하게 되니 충격이 컸던 걸지도 모르겠다.

꿉꿉한 마음을 뒤로하고 서랍을 원상 복귀 시켜 놨더니, 이번엔 다른 것이 시선을 붙들었다. 다정이 대충 벗어 던져 둔 분홍색 고양이 슬리퍼.

“취향 한번 참…….”

은도의 잇새로 짧은 실소가 터졌다.



* * *



다정은 편의점에서 저녁을 대충 해결했다.

진우 선배한테 연락해 볼까?

하지만 느닷없이 연락해서 뭘 어쩔 텐가. 오전에 있던 일은 오해였다고? 아니. 그렇게 되면 더 우스워진다. 번호만 알았지 연락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데.

한숨이 터지려는 찰나, 기가 막힌 타이밍에 휴대폰이 울렸다.

[다정 씨. 저번에 내가 부탁한 거 왜 아직도 소식이 없어? 못해도 다음 주까진 해결해 줘. 아, 설마 계약직 프리랜서라서 팀워크가 뭔지 모르는 건 아니지? ㅋ]

‘ㅋ’ 하나 붙었다고 이렇게 열이 받을 수가 있나.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김 팀장. 이 여자를 진짜 어쩌지.

다정은 신경질적으로 팔을 내렸다. 휴대폰의 속박에서 풀려나니 자연스레 주변을 훑게 됐다.

“기가 막힌다, 진짜.”

어찌 된 게 나 빼고 다 퇴근하는 것 같냐.

하지만 원망한들 누굴 탓하겠는가. 좋다고 지옥 불에 뛰어든 내 잘못이지.

쉽게 체념한 다정은 걸음을 돌렸다. 3분쯤 걸었을까. 회사 정문과 고작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발길이 우뚝 멈춰 섰다.

‘일 났다.’

다정은 위기가 닥쳤음을 직감했다.

두 번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았던 찌릿함이 아랫배에서 격하게 요동쳤다.

“아…….”

젠장. 또 시작이다.

밀린 업무 때문에 점심은 고사하고 제때 약을 챙겨 먹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약으로 완치하기에는 시기가 너무 지났다며 경고하던 산부인과 의사의 말을 흘려듣지 말았어야 했다.

어제 점심때 먹은 약이 끝이었는데. 생각하기 무섭게 잔뇨감과 아린 통증이 파도처럼 거세게 밀려왔다.

오, 주여. 다정은 두 손으로 배를 감싸고 끙끙거렸다.

일단 회사로 들어가자. 오로지 그 일념 하나로 안간힘을 써서 허리를 세웠다. 하지만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얼마 남지 않은 목적지를 두 눈에 새기며 힘겹게 걸음을 뗐을 때, 익숙한 사람 형체가 아른거렸다.

맙소사.

당신이 왜 여기서 나와?

그렇다. 회사 정문에서 본부장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저 인간이 왜. 대체 왜 지금? 분명 외근 나갔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쩜 타이밍마저 이렇게 개 같을 수가. 없던 적의감마저 휘몰아친다.

“윽!”

고비는 점점 더 극한으로 다다랐다. 환각이 아닐까 생각하며 다정은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떴다. 하지만 틀림없었다.

끝내주는 슈트 핏만 봐도 저건,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차은도다.

번쩍 정신이 돌아왔다. 다정은 정색하며 반사적으로 얼굴을 틀었다.

‘오지 마! 제발 오지 마!’

아, 빌어먹을. 시선이 정통으로 부딪쳤다. 그는 어느새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다정은 머리를 더욱 깊게 수그렸다.

그런다고 가려질 크기가 아닌데.

“……뭐 하는 겁니까. 여기서.”

긴박한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윽한 남자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 울고 싶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내려다보고 있을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야속한 아랫배는 찌릿, 찌릿 쉴 새 없이 잔뇨감과 통증을 번갈아 가며 선사해 주었다.

미치겠네!

“괜찮아요?”

다정은 최대한 허벅지를 배배 꼬며 힘을 주었다.

“아, 예. 괜찮, 윽.”

말도 안 나온다. 하반신이 부르르 떨렸다.

평소엔 마주쳐도 일절 무시했으면서 왜 오늘따라 어울리지 않게 친한 척이랍니까.

눈을 가늘게 뜬 다정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심각한 제 몸 상태와 달리 그는 태연했다.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예의고 나발이고 이대로라면 진짜 큰일 날 것 같았다. 못해도 5년 내내 밤잠을 설치게 할 흑역사감이란 말이다.

다정은 오만상을 지으며 천천히 은도를 스쳐 지나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이봐요. 송다정 씨.”

은도가 순발력 있게 다정의 팔을 잡아챘다.

“본부장님!”

일촉즉발의 상황에 다다르자, 본의 아니게 격양된 음성이 터졌다. 은도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스쳤다.

“제가 지금 진짜 급해서요. 그래서. 그러니까 잠시만, 제가, 뜨하흑!”

시야가 흐릿해졌다. 복통은 둘째 치고 자칫하면 오줌이 줄줄 흐를 위기였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지만 머릿속은 새하얘지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이성이 반쯤 날아가 버린 상태에서 다정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은도의 묵직한 팔을 꽉 그러쥐었다.

그나마 감사한 건, 그가 냉정히 내치지 않았다는 것 정도랄까. 이대로 움직이면. 정말 끝이다.

“본부장님…….”

그녀가 애원하듯 그를 부르자, 은도의 미간 사이로 주름이 깊어졌다. 그러면서도 다정이 쓰러지지 않도록 순발력을 발휘해 팔을 뻗어 그녀를 받쳐 주었다.

“저 좀 살려, 흐윽.”

이건 무조건 꿈이어야만 한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눈에 뵈는 게 없다.

‘그러니까 나더러 뭘 어떻게 해 달라고.’

어지간히 당황한 듯, 은도는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묵직한 한숨을 토해 냈다.

“송다정 씨 지금 상태가 어떤지 말을 해 줘야 내가.”

“집이요!”

“……뭐?”

상대가 본부장이고 나발이고 다정은 여느 때보다 절박하게 매달렸다.

“제발! 제발 저 지금 당장 퇴근 좀 시켜 주세요!”

나 진짜 지려 버릴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