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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그리하여 다음 말은 흐느끼듯, 작고도 물기 서린 말이 되어 버렸다. 흔들리는 눈으로 이쪽을 보는 황자의 얼굴이 위태로웠다.

이미 상흔에 입을 맞춰 주던 호연을 봤을 때부터 내도록 참아 온 충동이었다. 이 충동이 해일처럼 넘쳐 호연을 덮치기라도 할까 봐 계속 밖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지금,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호연이 자꾸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얼굴을 한없이 바라보던 이가 결국 손을 뻗어 작은 귓불을 매만졌다. 조심스런 손길에 호연이 눈을 감는다. 목 안이 타들어 가는 감각을 누르다 참지 못하고 그대로 머리를 잡아당겼다. 두 입술이 닿고, 포개지고, 혀끝이 맞닿는 순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그 얼굴을 붙들고 혀를 섞었다.

“응……!”

뭉근하게 문지르는 감각에 작은 얼굴이 진저리를 친다. 아귀처럼 무엇이든 삼켜 대던 입술이 호연에게 닿을 때는 조심스러웠다. 주지 않으면 뺏겠다던 오만한 생각은 지워진 지 오래다. 내게 달라고. 주면, 소중히 하겠다고. 태어나 처음으로 간절해 본 경험이었다.

“호연아, 조금만 더. 응?”

긴 입맞춤에 지친 어깨가 늘어지기 시작한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호연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허락해 준 것일지 모른다. 하여 그만두고 싶지가 않았다.

“잠시만…….”

그러나 짤막하게 부르는 말 한마디에 손발이 굳는다. 퍼뜩 놀란 얼굴로 뒤로 물러서는 걸 보며 호연의 눈에 의아함이 서렸다.

“싫은 것이냐?”

손끝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이제는 호연이 싫어하는 일을 자행하는 습관을 버렸다. 하여 마음은 아귀처럼 집어삼키라 말한들 몸이 동하지 않는다. 눈빛과 행동이 예전과는 다른 황자를 지켜보던 호연이 먼저 주태원의 목에 팔을 감았다. 두 팔로 자신을 끌어안는 모습에 주태원의 팔 힘이 강해졌다.

“호연아.”

더 닿을 순 없을까. 아예 한 몸이 될 순 없을까. 차라리 녹여서 삼킬 순 없을까. 기갈이 그를 집어삼키고 밤과 낮 역시 삼켰다. 눈앞에 호연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처연하게 눈을 감고 그를 받아들이는 여인뿐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달이고, 해고, 별이었다. 호연이 없는 하늘은 언제고 텅 빈 채로 흘러 시간도, 세월도 모르게 만든다.

“……보지 마라.”

덤벼들듯, 입맞춤을 쏟아 내던 주태원이 아랫입술을 짓이긴 후 일어섰다. 정에 들끓는 눈을 보면 또 겁을 먹고 달아날까 무섭다. 상처를 줄까 두려웠다. 하여 호연을 바닥에 눕히고 손으로 그 눈을 가렸다. 온 뺨에, 이마에, 귓불에. 온통 입술을 내리면서도 호연의 눈을 바라보지는 못했다.

눈을 가리자 곧 하얀 손이 다가온다. 그의 커다란 손을 작은 두 손으로 붙잡고 그 자리에 누운 호연이 어여뻤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영원히 이 땅에 가둬 두고 싶었다. 설원 같은 곳에 자국을 남기고 그게 상흔으로 남아 지워지지 않길 바랐다. 호연을 끌어안은 채 더운 숨을 뱉던 황자가 작은 어깨에 이마를 문질렀다.

이럴 때면 아직까지 무엇이 변했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용서받고 싶은지 아닌지, 그조차도 알 수 없었다. 미움받는 편이 호연의 기억에 오래 남을 수 있다면, 그 발을 붙들 수 있다면 아마 망설임 없이 그편을 택했을 것이다.

이것이 이기(利己)였다. 그가 일평생 마음 안에 키워 온 아귀의 정체.

그러나 그리 하면 호연이 힘이 든다. 미워하는 이가 더 힘들어 제대로 살질 못한다. 호연을 손에 쥐고 싶은 마음보다 웃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이것이 이타(利他)였다. 그의 몸에 맞지 않는 옷. 평생 이해하지 못할 감각.

옷섶이 흐드러지게 풀리고 어깨가 드러난 채 흐느끼는 그의 여인. 가린 손 틈 사이로 흐릿한 눈이 보였다.

이 눈이 좋았다.

호연의 흐린 눈이 좋았다.

그가 주는 모든 것을 독이 아닌 꿀로 받아들이는 인내와 무지가 좋았다.

그러나 몰라서 받아들인 게 아니었다. 나쁜 것이라도, 지독할지라도 그가 준 것이기에 그리 기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아프고, 힘겨워 매일 밤을 그 같은 체증에 시달렸으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던 황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하나씩 넘겨 주며 그저 애틋하게 바라봤다.

“만일 지금.”

갈라진 목소리를 들으며 눈꺼풀을 열었다. 커다란 손으로 가려졌던 세상이 드러나자 붉은 눈으로 자신을 보는 주태원이 보였다.

“연민이든 연정이든. 그 어느 것을 끌어와 몸을 열어 주려 하는 것이라면 여기서 멈춰야 한다, 호연아.”

이제 그는 하나를 주면 하나를 원하는 공평한 거래 따윈 할 수 없게 된 지 오래였다. 호연에 관한 일이라면 더 갖고 싶고, 많이 갖고 싶고, 모든 것을 갖고 싶었다. 그렇기에 호연은, 앞으로도 그에게 무엇이라도 하나 쥐여 주려는 생각을 해선 안 된다. 그는 언제든 더한 것을 원할 테니까. 갈증이 오롯이 이 여인에게로만 달려가는 것을 알기에 다가갈 수 없었다.

“언젠가 네가 날 용서하게 되는 날, 그때는 모든 선택을 네게 맡길 생각이었다. 원하는 곳으로 가고 원하는 사람 곁에 있을 수 있도록. 하니 네가 시신에게 말을 거는 것조차 허하지 못하는 사내를 다시 만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쯤에서 그만둬.”

호연의 작은 어깨를 밀쳐 자신에게서 떼어 냈다. 그러고도 힘겨워, 말에 한 글자씩 힘을 실어 다짐하듯 뱉었다.

“나는 죽을 때까지 네 곁을 맴돈다 해도, 더는 네 발목을 그어 내리는 아귀로 살고 싶지는 않으니까.”

추국장에서 보인 여경의 행태가 지독하다 여기면서도 그의 속내는 여전히 그와 다르지 않다. 하여 지금 그의 모습이 낯선 것은 호연뿐만이 아니라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가면 언젠가 모든 상처를 털어 낸 여인이 자신의 곁을 떠날 걸 아는데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호연을 위한 편을 택하는 스스로가 싫었다.

웃지 못하는 호연이 그의 마음을 움켜쥐며 할퀴고 있다. 결국 굽이쳐 그의 발을 척국의 동토 위로 올린 유일한 감정이었다. 이 감정을 끌어안은 이상 더는 호연을 붙잡을 수 없다.

“어디든 가거라. 어디서든 원하는 대로 살아. 그리 해도 널 잊지 못해.”

마지막으로 깊게 입을 맞춘 주태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호연을 앉힌 뒤 번진 연지를 닦아 주며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그때 간택비를 뽑은 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 하나를 집어 든 것이었어.”

“…….”

“네가 없으면 그대로 문이 닫히는 세상을.”

곧 깨져 나갈 유리처럼 피어난 미소가 보였다. 그대로 손을 내밀어 호연의 입술을 매만지고 눈가에 입을 맞춘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이, 내가. 두렵다고.

그날 느낀 두려움의 실체가 이것이었다. 너만은 내 손안에서 부서지게 둘 수 없는 아픔이, 끝끝내 아집과 같은 길을 달린다.

여러 번 호연에게 입맞춤을 남기던 낯이 곧 자리를 떠났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닥치는 곳에 홀로 남은 호연이, 눈물로 범벅이 된 볼을 감싼 채 모로 기댔다.

“……저하.”

그러다 이내 흔들리는 팔로 몸을 일으켜 밖으로 향했다. 황자의 모습을 찾아, 그 기척이라도 찾기 위해 걷고 또 걸었다.

무엇이 변했는지 그동안은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깨달았고, 깨달은 순간 눈시울이 젖어 들었다. 입을 다물고, 기다린다. 호연이 말을 하면 귀를 기울인다. 놓칠까 봐 불안한 것이 훤히 보이는데, 그런데도 그 마음을 누르고 호연이 가고 싶은 대로, 원하는 곳으로 가도록 뒤에서 바라본다.

“저하.”

물기에 젖은 목소리가 허공으로 울렸다. 기어이 자신이 그를 바꿨다. 한 사람의 생을 바꿨다. 그것이 기쁘기보단 서글프고 마음이 찢겨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저하…….”

“호연아!”

길을 잃은 아이처럼 웅크려 울고 있는 등을 누군가 붙든다. 돌아서니 죽연이 걱정 어린 낯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라버니…….”

호연의 고운 아미가 일그러졌다. 그대로 커다란 품에 달려들어 흐느꼈다. 죽연은 황망하기 그지없는 상황에 눈을 크게 뜨면서도 이내 누이가 오열하는 것을 보고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왜 그러느냐, 어?”

“모르겠어요. 모르겠습니다. 저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제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치던 호연이 울부짖으며 죽연의 옷자락을 붙든다.

“어찌 해야 할지 알려 주세요, 오라버니. 이 마음을 버리고 싶어요. 이 마음만 도려내고 싶어요. 보기만 해도 아픈 것은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영문도 모른 채 그저 괜찮냐고 묻는 물음이 아득했다. 온 세상이 비에 젖는 것만 같아서, 눈으로 연못에 피어난 연꽃을 바라보았다.

홀로 선 아이가 울고 있다. 예호가 울고 있다. 겉은 예호인데 그것이 주태원인 것처럼 보였다. 품에 다 안을 수도 없는 사내가 작고, 약하고, 선명하게만 보였다. 죽을 때까지 그럴 것 같아 두려웠다.

금방이라도 땅으로 꺼질 것처럼 주저앉는 호연의 모습에 죽연의 안색이 창백해진 게 보였다. 그를 알면서도 변변히, 괜찮다는 말 한마디 뱉을 수가 없었다.

피하고 달아나고 싶었다. 그러나 영영 그리 할 수 없을 것이다. 예감이 발목을 붙들어 구덩이로 자신을 끌고 들어가는 지독한 밤이었다.



***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은 것 알았을 때 예화는 내 곁을 떠나려고 했다.”

비 내리는 녹궁의 정취가 대청까지 물씬 풍겨 왔다. 가을로 넘어가기 위한 절기. 댓잎은 푸르기보단 창백한 녹음을 띤 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갑작스런 죽연의 말을 듣고 이쪽을 바라보는 호연의 얼굴 역시 그만큼이나 차고 푸르렀다.

“마음 약한 여인이니 홀로 남을 내가 걱정되어 그리 했겠지. 그럼에도 가지 못하게 곁에 붙든 건 내 아집이었어. 차라리 그때 놓아줬으면 조금은 마음 편히 갔을지도 모르는데.”

차가운 차를 한 잔 담아 온 죽연이 아직까지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는 호연을 착잡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다 큰 여인이 마치 예호가 놀라 쓰러졌을 때처럼 운다. 그 모습이 안쓰럽고 그런 한편 처연했다.

“버리고 도려내고 싶다 하였지.”

“…….”

“그리 할 수 없다는 것은 너도 알지 않느냐.”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호연의 눈이 깊게 감겼다. 이미 오래전, 간택의 마지막에 제 입으로 뱉은 말이었다. 그때는 그 결심이 이만한 깊이를 불러올 줄 몰랐다. 이렇게나 많은 세월을 잡아먹을 줄도 몰랐다.

“자책할 필요도 없는 일이야. 원래가 그런 것을 어쩌겠느냐.”

처마 밑에 앉은 죽연의 낯이 고즈넉하게 빛났다. 잔에 떠 있는 찻잎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이내 머나먼 허공으로 시선을 던진다.

“벗어날 수가 없어.”

“…….”

“도망칠 수도 없다.”

“…….”

“그게 연정이야, 호연아.”

호연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다시 가지려고 한 것이 아니라, 빼앗고 가둬 두려 한 것이 아니라 오직 호연이 곳곳에 멍처럼 남은 미움으로 인해 고통받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했던 황자의 모습만이 떠오른다.

그날 주태원의 발치를 붙든 것도 이것이었을까. 자신을 물어뜯어 상처 낼 수밖에 없도록 몰아붙인 것도 이 악귀 같은 감정이었을까.

“너처럼 목석같은 성정에도 물길을 내서 결국 꽃을 피우는, 그게 연정이라고. ……아마 비가 그치기 전까진 네 눈가도 마르지 않을 모양이다.”

이리 울보인 줄 몰랐다고 말하며 놀리던 죽연이, 다가와 마른 천을 건넨다.

“이제 어찌 할 셈이냐.”

대답 대신 천을 받아 든 호연이 닦을 새도 없이 자꾸만 쏟아지는 눈물을 훔치며 하늘을 바라봤다.

예화가 죽던 날도 이리 울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눈물이 비처럼 흘렀다. 오래도록 메말랐던 마음을 적시며, 호연의 세상에 우기(雨氣)를 불러왔다.



***



이튿날, 죽연은 그를 부르는 황제의 부름에 따라 편전으로 향했다. 추국장에서 여경과 문중헌의 세력이 무너지던 순간, 실은 그들의 마지막보다도 죽연과 주태원이 함께 찾아낸 사실이 더욱 큰 화두가 됐다. 원인만 알면 끝일 줄 알았던 일의 실상이 밝혀지고 난 후엔 화양통이 발칵 뒤집힌 형국이었다.

“이미 들어 알겠지만, 사친왕을 부른 것은 지금 양영의 여아들이 걸린 몹쓸 병 때문이오.”

피곤에 절어 있던 황제의 눈이 죽연을 바라본다. 도성의 상황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다들 제 자식의 손목에 걸어 둔 박영을 끊어 내려 사방을 오갔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그렇다고 아직 뼈대가 여물지도 못한 여아들의 몸에 쇳물을 붓거나 도끼를 가져다 대는 무자비한 일을 자행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광증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오?”

그리하여 여전히 추국장에 머무는 주태원 대신 죽연이 이리로 불려 온 것이다. 진중하게 묻는 황제의 앞에서, 죽연도 총명한 눈빛을 내보이며 말을 고했다.

“확답은 드릴 수 없나이다. 또한 아직 초경을 시작하지 않은 아이들에 한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를 바라보던 황제는 대신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경외를 읽었다. 사활을 건다는 것. 언제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살았다는 것. 그로 인해 아직도 새파랗게 날이 살아 있는 이들에 대한 감탄이 오롯이 죽연의 발밑으로 쏟아진다.

“내가 무엇을 도우면 되겠소.”

향후 양영의 흥망을 결정지을지 모르는 어깨다. 하여 황제는 그곳에 날개를 달아 두기로 오래전부터 결심하였다. 이 같은 결정이 비단 그에서 그치지 않고 태자가 이끌어 나갈 양영에도 광명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