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4화


“으, 머리야.”
평생 마실 술을 요 며칠 한꺼번에 몰아 마시는 기분이다. 세인은 침대 옆 사이드테이블 위를 더듬어 투명한 크리스털 잔에 담겨 있는 물을 한 번에 쭉 들이켰다. 아, 물이 왜 이렇게 달달…….
“더 타 줘?”
어라, 이 소름 끼치게 익숙한 목소리는…….
평소 멀리하던 소주를 두 잔이나 들이부은 것에 따른 후유증이라고 하기엔 목소리가 지나치게 선명했다. 세인이 고개를 흔들며 초점이 잡힐 듯 말 듯 한 눈에 힘을 주어 아른거리는 인영을 바라보았다.
“허억!”
“맛있지? 이 몸이 직접 제조한 꿀물인데 맛없을 리가.”
침대가에 걸터앉아 삐딱하게 말하는 그는 틀림없는 이도균이었다. 아니, 이 인간이 왜 내 방에……! 따져 물으려던 세인은 문득 자신이 있는 곳의 풍경이 꽤 낯설다는 사실을 느끼곤 곧 더한 충격에 빠져들었다.
“제, 제, 제가 왜 여기에…….”
“뭘 그렇게 놀라? 어렸을 땐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던 곳인데.”
“지금은 어린애가 아니잖아요!”
“내외할 줄도 알고, 놀라운 사실인데.”
“놀려요, 지금? 설명을 하라고요,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누가 잡아먹기라도 하는지 킹사이즈 이불을 동아줄마냥 품에 가득 끌어안고 노려보는 세인의 모습이, 도균은 한편으론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섭섭하기도 했다. 며칠 공을 들여 밥을 주던 길고양이가 털을 세우고 발톱을 드러내는 꼴 같다고나 할까.
어제 비탈진 길을 끙끙거리며 올라와야 했던 걸 생각하니 조금 심술이 나서 도균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남녀가 한 침대에서 일어났는데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한데?”
“네에?”
“앞으론 일상이 될 테니까 익숙해지도록 해. 이런 식이면 아침마다 심장마비 걸릴 것 같으니까.”
“잠깐, 잠깐만요. 나…… 잠만 잤죠?”
“글쎄. 과연 잠만 잤을까?”
도균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는 의미심장하게 되묻자 세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저 작은 머리로 무슨 발칙한 상상을 하고 있을지 도균은 훤히 들여다볼 수 있을 것…….
“저 혹시…… 잠꼬대하고 그랬어요? 코는…… 안 골았죠? 이는요?”
“뭐?”
“제가 잠결에 막 발로 차거나 때리고 그랬어요? 네?”
도균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한 건 이런 반응이 아닌데. 도균이 얼굴을 번쩍 쳐들고 세인의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너랑 내가 한 침대에서 잤다는데 걱정되는 게 정말 그것뿐이야?”
“그럼 뭘 더 걱정해야 해요? 헉! 혹시 나 더 심각했어요?”
“그게 아니라……. 모르는 척하는 거야, 정말 모르는 거야?”
“뭘요?”
“남자랑 여자랑 침대에서 순수하게 잠만 자는 것 말고, 다른 뭔가를 하기도 한다는 거.”
“다른 거요? 다른 거 뭐…….”
하얗게 질렸던 세인의 얼굴이 뒤늦게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래. 네가 지금 생각하는 바로 그거. 게다가 우리는 장래 부부가 될…….”
“훗.”
뭐야, 그 웃음은? 설마…… 비웃음?
피식피식 뜸하게 이어지던 세인의 웃음소리에 가속도가 붙을수록 도균의 얼굴은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갔다. 한참 만에야 정신을 차린 그녀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내며 손사래를 쳤다.
“아, 저도 알아요. 이런 경우에 보통 제일 먼저 걱정해야 하는 게 뭔지. 근데 그걸 도련님이랑 저랑? 말도 안 돼. 그런 쪽으론 전혀 오해 안 했으니까 염려 마세요.”
하. 천진한 얼굴로 잘도 비수를 꽂는다. 도균은 자신할 수 있었다. 지금껏 살면서 들어온 말 중에 좀 전의 것처럼 그를 자극해 온 말은 단연코 없었다고.
기분이 몹시 나빴다. 나쁘다, 라는 말로는 그 정도를 표현하기에 턱없이 부족했지만 어쨌든 최악이다.
“어째서 그렇게 단호하게 오해인데?”
“네?”
“다른 남자랑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일지 모른다. 그런데 이도균이랑은 ‘절대로’ 그럴 일 없다. 내가 제대로 해석한 거 맞나?”
“그렇잖아요. 도련님은 그게 상상이 되세요?”
“넌 상상이 안 된다?”
“그, 그렇죠. 도련님이랑 저는 남자랑 여자로 묶기에는 좀…….”
급속 냉각기의 냉풍을 맞은 듯한 도균의 얼굴에 세인은 자신이 뭔가 커다란 실수를 했음을 직감했지만 대체 대화의 어느 부분이 그의 심기를 거슬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또 눈치를 보기 시작하는 세인의 모습에 도균은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져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조금 나긋해진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하기 시작했다.
“난 너한테 결혼하자고 했어. 보여? 어제 일, 꿈이 아니라고.”
세인은 도균이 들이미는 그녀 자신의 손을 전혀 타인의 것처럼 낯설게 바라보았다.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반지가 반짝거리며 제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소꿉장난이나 하자고 이런 거 건넬 남자 없어. 나는 너랑 진짜 결혼을 하려는 거야.”
“당연히 결혼을 하면 진짜 결혼이겠죠. 가짜 결혼도 있나요.”
“내가 말하는 진짜 결혼은, 너랑 나란히 침대에 누워서 청순하게 ‘잠만’ 자지는 않겠단 소리고.”
도균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전혀 몰랐다는 듯 세인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도균은 곧 결의에 찬 얼굴로 세인을 일으켰다. 얼떨떨한 얼굴로 도균의 손에 의해 바닥을 밟은 그녀는 강제로 욕실에 집어넣어졌다.
“왜, 왜요?”
“씻어. 나가게.”
“어디요?”
“어디든.”
“네?”
그가 피식 웃었다. 한숨에 가까운 웃음이었는데 세인은 도균이 그 웃음과 함께 흘리는 말에 어쩐지 가슴 언저리가 간지러워졌다.
“찐한 연애하고 싶다며. 그거 하러 가자고.”
“네? 제가 어, 언제요!”
“기억 안 나? 그럼 내가 하고 싶은 걸로 해.”
“네? 지금 무슨…….”
“내가 너랑 찐한 연애가 하고 싶다고.”
“그, 그게 무슨…… 도, 도련님!”
쾅.
화장실 문이 매정하게 닫혔다.
도균은 방금 막 힘든 일을 끝낸 사람처럼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홀로 남은 그는 앞으로도 이런 고난이 몇 차례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막연한 불안감에 몸을 떨어야 했다.
쏴아아.
그리고 마침 욕실 안에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침실 옆에 딸린 드레스 룸에서 옷을 갈아입던 도균은 그 소리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흠칫 놀라고야 말았다. 그리고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심장 한참 아래, 배꼽 아래 그 부분도 벼락에서 무사하지 못했다.
“젠장. 완전히 돌았군.”
도균은 세인의 것과 다른 의미에서의 선행학습이 자신에게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군 복무하던 2년보다 더 고된 인내와 자제력이 필요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짐작한 그의 미간에 깊은 골짜기가 새겨지고 있었다.

“근데 정말 어떻게 제가 도련님 방에 있었어요?”
“내가 업고 들어왔으니까.”
“별채에 데려다 놓으셨어야죠!”
“아버님이 현관 앞에서 몽둥이 들고 서 계시더라고.”
“……목숨을 빚졌네요, 도련님.”
첩보활동 중인 스파이마냥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차고로 살금살금 걸음을 옮기는 세인이 속닥였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그녀는 도균이 경호를 ‘아버님’이라고 칭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혼자 스파이 놀이에 여념이 없었다.
“왜 그래? 무슨 죄지었어?”
“그럼 다 큰 여자가 다 큰 남자 방에서 널브러져 잔 게 동네방네 자랑할 일인가요?”
“아깐 남자 여자 아니라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 집 식구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한다고요. 가뜩이나 어제……! 후, 남들 눈에 띄어서 좋을 것 없으니 도련님도 좀 숙이세요. 키는 쓸데없이 왜 그렇게 커가지고…….”
“그게 더 눈에 띄어. 수상하다고, 엄청.”
언제 찾아냈는지 도균의 머플러로 얼굴을 칭칭 감싸 눈만 내놓은 그녀는 그가 스마트키로 멀리서 차 문을 열자마자 쏜살같이 그의 옆을 떠나 차 안으로 숨어들었다.
“뭐하는 거야?”
“뭐하세요, 얼른 타세요.”
“왜 네가 운전석에 타?”
“걱정 마세요. 이래 봬도 저 면허 한 방에 땄다고요. 장롱이긴 하지만…….”
벌써 차 안을 뒤져 어디 있었는지 모를 선글라스까지 찾아 낀 세인이 멀뚱히 서 있는 도균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대체 얘는 정체가 뭐야. 도균은 가끔 자신이 이런 괴상한 여자에게 청혼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게 아니라…….”
“아, 진짜. 알았어요, 알았어.”
드디어 좀 말이 통하겠구나 싶었다. 그녀가 차 앞을 빙 돌아 조수석 문을 열며 그에게 손짓하기 전까지는.
“타세요. 꼭 도련님 티를 내신다니까.”
가능하기만 하다면 도균은 세인의 머릿속을 해부라도 해 보고 싶은 심정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의 뇌구조가 보통에서 벗어나 있을 것이라는 데 도균은 자신의 전 재산을 걸 수도 있었다. 그는 뻐근해지는 뒷목을 잡으며 차를 돌아 세인의 옆에 섰다.
“내가 아까 뭐라고 그랬지?”
“네엥? 아까요? 아까 언제요?”
“찐한 연애하러 가자고 했잖아. 잊었어?”
“아, 네. 근데요?”
설마 지금까지 남자랑 손 한 번 못 잡아 본 거 아니야? 뭐 이렇게 천진난만해? 소풍 가?
“보통 이런 경우에는 넌 가만히 기다렸다가 내가 조수석 문을 열어 주면…….”
“잠깐!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요?”
도균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의 입을 막은 세인의 손을 황당한 듯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남자의 것과는 다른 말랑거리는 손바닥의 감촉이……. 젠장, 지금 이런 상황에서조차 느끼는 내가 싫다.
도균이 짜증스럽게 세인의 손을 자신에게서 떼어 냈다.
“소리는 무슨 소리가 들린…….”
“민세인, 이노무 계집애. 들어오기만 해, 아주 그냥 다리몽둥이를……!”
“히익! 얼른 타요, 얼른!”
경호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퍼렇게 질린 세인이 막무가내로 그를 조수석에 밀어 넣었다. 그는 거의 종이인형이 구겨지듯이 차 안에 강제로 타게 되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그가 잠깐 얼이 빠져 있던 사이, 다람쥐처럼 쪼르르 운전석에 탄 세인이 그대로 차를 출발시켰다. 그의 차가 총알처럼 차고에서 튀어 나갔다.
“속도 좀!”
그리고 그 뒤로 2시간 동안의 상황은 그야말로…… 눈물과 비명과 경악과 위기와, 위기와, 위기와, 위기가 난무하는 전쟁이었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할 수가 없다.
“제발 여기서 빠져. 빠지라고! 빠……! 지나쳤잖아!”
“갓길에라도 세워 봐, 제발…….”
“휴게소! 휴게소! 휴……!”
“아냐! 지금 뭘 누른 거야! 꺼! 끄라고!”
두 사람은 그렇게 얼마 후 서해 어딘가에서 주체할 수 없는 침묵을 끌어안은 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실전에 좀 약한 타입이라……. 하하하! 이게 얼마 만의 바다야! 하하하! 파도 소리 조, 좋네요. 그, 그렇죠?”
“…….”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앞으로 다신 운전 따위 하지 않을게요.”
그녀가 눈물로 아롱거리는 눈동자를 강아지마냥 처량하게 뜨고는 바라보자 도균은 한탄스러웠던 마음이 봄눈 녹듯 사르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와는 다른 의미로 그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나 언제부터 이렇게 쉬운 남자였지.’
그가 이런 문제로 고심하는 것을 모르고 세인은 어떻게든 그의 기분을 풀기 위해 있는 애교 없는 애교 다 끌어모아 그에게 아양을 떨고 있었다. 영혼의 꼬리가 용서를 구하며 살랑거렸다.
“도련님,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네? 석고대죄라도 할까요? 아직 봄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날씨라 바다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잘못하면 심장마비로 급사할 위험이 있긴 하겠지만, 도련님께서 용서만 해 주신다면야 저 바다에 뛰어들어 기꺼이 한 마리 물개인들 못 되겠어요? 들어갈까요? 네? 저 지금 들어갑니다!”
“그건 사과가 아니라 협박이야.”
“어쨌든 먹힌다는 게 중요하죠.”
“누구 총각귀신 만들 일 있어? 관둬.”
세인이 달리기 자세로 시야를 어지럽히는 걸 참지 못하고 도균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쥐었다. 세인이 멋쩍은 듯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배는, 안 고파?”
“어휴, 아니에요. 주제에 배까지 고프면 저 정말 민폐…….”
꼬르륵.
“……고프대요. 네, 제 몸은 참 정직해요. 저 그냥 민폐 캐릭터 하겠습니다.”
“큭큭.”
도균이 한 손으로 옆구리를 짚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파도소리에 그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어우러졌다. 세인은 뺨이 느닷없이 달아오르는 열감에 마른침을 삼키며 웃고 있는 도균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부드럽게 휜 눈매와 눈가에 접힌 잔주름이 참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 매력적이라기보다는 마력적이다.
“그래, 뭐 먹고 싶어?”
간신히 웃음을 멈춘 그가 물었다. 세인은 삼키던 침이 목에 턱 걸려 숨을 멈추었다. 공기가 모자라니 원래도 발그스름했던 얼굴이 금방 불타는 고구마가 되었다. 도균이 말을 못 하고 밭은 숨만 내쉬는 세인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녀가 그에게 했던 그대로다.
“열 있어?”
어제의 그도, 지금의 나처럼 이렇게…… 떨렸을까?
“바람이 아직 찬데 너무 오래 나와 있었나.”
이렇게, 아찔했을까?
“우선 차에 들어…….”
“개, 개불이요!”
세인을 차로 이끌던 도균이 ‘뭐?’ 하고 황당한 듯 되물었다. 다급한 마음에 아무 말이나 내뱉은 자신의 혀를 깨물어 버리고 싶은 처참한 기분으로 세인이 말을 이었다.
“개불이요. 해삼이랑 멍게랑, 그리고 또…… 아, 암튼 그런 게 심각하게 당겨요.”
“이름이 뭐 그래?”
“이름이 왜요? 어? 설마 한 번도 안 드셔 보셨어요?”
도균이 찜찜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인은 놀라움에 좀 전까지 마음속을 울긋불긋 물들이던 온갖 상념을 잊고 서둘러 도균을 근처의 음식점으로 이끌었다. 마지못해 따라오는 도균을 보는 것이 왜 이렇게 신이 나는지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며 세인은 참을 수 없는 웃음을 연신 터뜨렸다.

“이걸 먹겠다고. 이게, 먹는 거란 말이지.”
“아, 진짜. 믿어 봐요. 맛있다니까?”
원래의 생김새도 괴상했지만 손질해 놓으니 더 괴상망측한 것을 세인이 먹으라며 들이밀자 도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얼굴을 찡그려 보였다.
그는 이쯤에서 세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관두기로 했다. 우아하게 칼질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분식이라도 됐으면 이렇게까지 당혹스럽진 않았을 텐데. 전 세계를 통틀어 첫 데이트에 이런 걸 먹자고 드는 여자는 민세인 딱 하나일 것이다.
“난 됐다.”
“진짜요? 진짜 안 먹어요? 정말?”
“몇 번을 물어. 정말 됐다고.”
“흠. 예상은 했지만 역시 입맛이 어리시네요.”
뭐? 개불인지 나불인지 모를 것을 참기름에 콕 찍어 맛있게 씹어 삼키는 세인을 보며 도균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어려?”
“네. 그 나이 먹도록 이런 것도 안 먹어 보고 뭐 하셨어요? 여기 이모한테 햄이나 소시지 반찬 있는지 여쭤 볼까요?”
“작작해. 정신이 미성숙한 너한테 들을 소린 아니니까. 버리고 가 버리기 전에 그거나 마저 먹어.”
“정신이 덜 자라다니. 저 은근히 무르익은 여자예요! 스물넷이면 알 거 다 아는 나이거든요?”
알 거 다 아는 나이라. 도균은 세인의 심드렁한 말투에 급격하게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무시하며 무심한 투로 물었다.
“이를테면 어떤?”
열심히 젓가락을 움직이던 세인이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도균은 죽을 때까지 도전해 볼 수 없을 것 같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게 왜 개불인지 아세요?”
왜지? 의뭉스러운 그녀의 미소가 음흉하다 느껴질 때쯤, 도균은 본능적으로 속이 타들어 가는 걸 느끼며 물컵을 집어 들었다.
“개의 불알같이 생겨서요.”
읍. 큭. 하마터면 마시던 물을 그대로 세인의 얼굴에 뿜을 뻔했다.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면했지만 식도로 넘어갔어야 할 물이 기도로 탈선하는 바람에 마구 터져 나오는 기침을 참지 못했다.
“몰랐죠? 그래서 개불이래요. 개의 불알, 줄여서 개불. 근데 괜찮으세요? 피 토하시겠어요.”
그 문제의 개불을 던지고 맞은편 자리에서 그의 옆으로 건너온 세인이 작은 손으로 도균의 등을 두드렸다. 그럼에도 도균은 충격에서 쉬이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개의, 개의…….
“나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네?”
“데이트라는 게 원래 이런 식인가?”
“몰라요. 저도 제대로 해 본 적이……. 근데 도련님도 데이트 같은 거 해 보신 적 없나 봐요?”
그럴 리가. 다만 이런 게 정말 데이트라면 자신이 이전에 경험한 모든 이성과의 만남은 데이트가 아니라는 얘기가 되니 지금 좀 혼란스럽기는 하다.
“나갈까요? 찬바람 좀 쐬는 게 좋겠어요.”
세인이 아직 다 비우지 못한 개불 접시를 보며 안타까운 얼굴로 그렇게 물어왔을 때 도균은 기회를 놓칠세라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더는 저것을 냠냠거리며 맛있게 먹는 세인을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먹은 것도 없는 그에게 돈을 내게 할 수는 없다며 만류하는 세인을 반강제로 가게 밖으로 쫓아내고 계산을 마친 도균도 작고 허름한 횟집에서 후다닥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