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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와 나
1화
# 프롤로그 – 그 날
‘입어, 보루야. 네가 입어야지.’
보루는 이모의 설득이 듣기 싫어 뻣뻣한 상복을 꾸깃꾸깃 움켜쥐고 무작정 바깥으로 나왔다.
안다, 입어야 한다는 것을.
무책임하게 죽은 아빠가 아니라, 벌써 네 번째 울다가 혼절하고 있는 엄마 곁에 있으려면 상복을 입어야겠지.
그녀는 그러나 아빠의 영정 사진을 마주하고 난 뒤, 그 작심마저 우르르 무너지는 기분을 느끼고는 그 길로 뛰어나온 것이다.
싫어, 아빠.
미워, 아빠가.
달캉!
뜨거운 열기가 가시질 않아 본능적으로 찾은 건물의 옥상. 잿빛 구름 아래 파랗게 물들기 시작한 도시의 저녁이 내려다보였다. 캄캄해지는 것이 보고 싶어졌다.
무언가 기대하는 듯이, 자신을 보는 눈 없이 자유롭고 싶어졌다. 스위치를 누른 것처럼 어서 어둠이 와서 차라리 눈을 감고 마음껏 혼자이고 싶어졌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하아…….”
이거야? 이거였어, 아빠? 아빠도 다 싫어진 거야? 차라리 암흑 속에 숨고 싶었어?
그래서 그렇게 잔인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 너무 간절하게 숨고 싶어서 그런 무서운 용기가 났을까? 그랬을까……?
보루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매섭게 부는 저 아래 단단하고 드넓은 도로에 눈을 주며 천천히 움직였다. 높은 난간 위로 오르는 것도 느릿느릿, 그러나 조심스럽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다리를 펴서 그 위에 곧추섰을 때에도, 강한 바람이 불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치워 내는 순간까지도 아찔하게 높은 곳에 선 것을 온전히 실감하지 못했다.
어떤 기분이었을까. 무엇이 저 아래로 몸을 버릴 수 있게 했을까.
“뭐가, 이래…….”
시발, 하고 웅얼거리는 낮은 음성이 들린 건 그때였다. 사방에서 공격하듯 불어닥치던 바람이 거짓말처럼 한순간 잔잔해졌을 때를 비집고 들린 남자의 목소리 덕분에 이 공간에 그녀 혼자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가 있는 난간 저 끝에 똑같이 아슬아슬하게 선 새카만 패딩점퍼와 새카만 야구모자. 블랙진에 검은 운동화. 모두 새카매서 시리게 빛나는 피부 위 붉게 다물린 입술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뭐가, 시발 이러냐고…….”
다시 한번 웅얼웅얼 뱉은 말끝에는 울음이 달렸다. 꺽꺽 어렵게 뱉는 소리와 부풀어 꺼지며 들썩여지는 가슴께가 자꾸만 그 남자를 위험하게 흔들리게 했다.
보루는 그 참담한 우짖음을 눈으로 보자마자, 어제오늘 죽을힘을 다해 참았던 울음이 핑그르르 고여 드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코끝이 따끔하게 매워지고는 순식간이었다.
툭툭 봇물 터진 눈물이 뜨겁게 볼을 타고 흐르고 나서야, 그 다음에 자신이 선 이 자리가 아빠가 어제 새벽 섰던 자리였겠구나, 무섭게 서러워지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해하고 싶지 않던 그 막막한 눈앞이 똑같이 그려지고. 외롭고 무서웠을 그 심정을 헤아리자, 어쩐지 다시 한번 더 미워지는 것이다.
나한테 오지. 날 한 번 더 안았어야지. 그랬으면 그 높은 데서 떨어질 용기 대신, 살게 할 용기를 나눠 줄 수 있었을 텐데.
아빠, 내가 무언가 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바람이 짓쳐 올린 새카만 상복의 저고리 고름이 서러웠다. 춤을 추는 듯 연신 곡선을 그리지만, 전혀 아름답지 않은 그 선들이 자꾸만 어지러웠다. 어지러워 욕지기가 났다.
보루는 그래서 손에 든 상복으로 젖은 얼굴을 훔치고 툭, 쥔 것들을 저 새카만 아래로 던져 버렸다.
“안 입을 거야, 아빠. 나, 안 입어! 싫어! 안 해!”
다시는 아빠도 부를 일 없어. 이걸로 끝이야. 나한테는 이제 엄마만 있는 거니까. 그렇게 살아가라고 그런 선택을 한 거잖아, 아빠도!
그래, 엄마만 있는 거야. 엄마 곁에 남아, 엄마 딸로만 살게. 다 잊어 줄게.
그리고 보루는 눈을 질끈 감아 남은 물기를 짜서 버리듯 흘렸다. 이게 내가 아빠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이야.
그녀는 올라섰던 것처럼 천천히 난간에서 내려왔다. 후들후들 떨리는 몸이 무서움 때문이었는지, 추위 때문이었는지.
덜덜 진동하는 손을 숨기듯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마치 처음 호흡하는 사람처럼 헉헉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저 위에서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과 마주쳤다.
아니, 돌려진 고개가 그녀를 향했기에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모자 챙 안에 가려진 눈은 아직도 울고 있는가 보다.
아직 남은 미련이 있는지, 남자의 턱에서 툭하고 눈물 줄기가 떨어지는 것을 본 보루는 그 슬픔을 공감해 주지 못하고 혐오가 솟구치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멍청이.”
함부로 포기하는 그 연약함이 구역질 나.
“뭐?”
흡, 눈물을 삼킨 목소리가 그녀의 말에 놀란 듯이 되물었다.
뭐가 그렇게 쉬워? 그래, 차라리 죽는 게 쉬운 약해 빠진 영혼이라면 살지 마.
“싫어, 정말.”
이제 남자의 하얗게 떨리던 턱이 굳는 것이 보였다. 드디어 눈물도 멈춘 모양이다.
“그렇게 울어도 절대 이해받을 수 없어. 그렇게 서러워해도 절대 동정표 받을 수 없는 거야. 지금 하려는 짓은, 절대!”
그것도 몰라, 아빠는? 어떻게 몰라, 아빠는?
“그냥 죄 짓는 거야. 살아서 저지른 죄보다 더 큰 죄야. 다시는 용서받을 수 없는 무서운 죄야. 그 벌을 남은 사람들이 나누는 거잖아. 무책임해. 잔인해. 싫어!”
보루는 이제 눈 안에 남은 눈물이 더는 없다는 것에 안정이 찾아왔다. 이제는 어느 순간에도 오늘을 떠올려 울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 편안했다.
남자가 저 위에서 물었다.
“잔인해?”
“어.”
“용서 받을 수 없어?”
“어.”
절대로 이해 받을 수 없어. 보루는 눈앞의 낯모를 남자가 아빠인 것처럼, 커다랗게 내쏘았다.
“그러니까 꺼져! 사라져 버려!”
죽어 버리든, 다시 태어나든 내 앞에서는 당장 없어져 버리라고. 알고 싶지 않아, 차라리 죽음을 꿈꾸는 그 멍청한 심정 따위.
***
기적은 탕, 하고 닫히는 문소리와 함께 급작스러운 오한을 느끼기 시작했다.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절대. 이해받을 수도, 슬퍼해 줄 수도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다지도 지독한 선택을 했을까.
눈물이 지나간 자리가 시리고, 따가웠다. 그리고 바람이 고약하게 흔드는 몸에 힘이 들어갔다. 생생한 진통을 느끼며 감각들이 곤두세워졌다.
그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끔찍한 그 위에서 내려섰다. 발아래 밟히는 바닥의 단단함이 생경했다.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이 난간 위는 똑같은 돌이었는데도 허방을 짚고 선 것처럼 푹신했었는데.
‘죄 짓는 거야.’
몰랐다. 아버지는 죄를 지었던 것이었다. 장례를 따로 치루지 말자던 고모의 말씀이 절대 서운하고 미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죄 지은 사람의 죽음을 애달파 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자식이어서 슬픈 마음도 접어야 한다. 그것이 아버지가 지은 죄를 갚는 길일 것이었다.
기적은 차갑게 언 손바닥으로 눈가와 두 볼을 한번에 쓸어 지우듯 문질렀다. 그 차가운 손길이 다시 한번 그를 정신 차리게 했다.
살아서 해야 할 일들이 있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을 떠올리며 천천히 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상복을 버리고 독한 말을 쏟던 그 여린 여자애가 섰었던 자리에 잠깐 멈추었다. 그 여자애가 그랬듯이 가슴 앞에 팔짱을 단단히 끼워 스스로를 안았다.
떨리는 오한도 밀어내며 기적은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살아서 할 일들이 남았으니까, 일단은 살아야겠다.
# 만나면 찝찝한 여자
해가 지고도 한산해지지 않자, 기적은 비교적 사람이 적은 공원 끝 쪽으로 닿기 위해 달리던 속도를 올렸다. 이미 한 시간 가까이 조깅을 했던 뒤라서 뜨거운 호흡이 목구멍과 가슴을 태우며 점차로 한계치를 알려 왔다.
타닥타닥 땅바닥을 짓치는 박자들에만 집중하고 내뱉는 호흡의 열기만 가늠하는 동안, 머릿속이 가벼워지고 더불어 고통이 지나간 몸도 붕 뜨는 듯이 가벼워졌다.
그가 오랫동안 이 달리기에 중독된 이유, 러닝 하이.
손끝에서부터 머리끝, 발끝까지 저릿저릿 달콤한 기운이 퍼지는 극한의 기분.
기적은 조명도 거의 닿지 않는 공원 가장자리에 거의 다다르자 점차 속력을 줄였다. 그러면서도 좀 더 달리고 싶은 욕심이 피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미련을 버리기 위해 억지로 휴대폰 음악 앱을 끄고 수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별일 없었지?”
- 어떻게 없어, 손이 모자란데! 지금 한 달째 빵집이 아니라 불난 호떡집처럼 비상인데!
통화 연결음을 맨 마지막까지 듣게 하는 한계를 경험시킨 끝에야 삐딱하게 전화를 받는 수한이다. 수한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에 여태 편안했던 기적의 눈도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그래서? 뭔 일 있었단 말야? 예약 받은 케이크는?”
- ……세 개 다 문제없이 나갔어요.
“그리고.”
- 아, 그리고 뭐! 빤하지 뭐! 애들은 엉덩이 붙일 시간 없이 구르고, 나는 빼족해져서 애들 잡도리하고! 그러지 말고, 형이 다시 들어와요. 나도 더는 혼자 독박 쓰는 거 못하겠어. 오늘도 진짜 간신히, 간신히 했다구요. 나 지금 두 달째 휴무 없었던 건 알고 있어? 나도 확 그냥 째 버려!?
그와 <기적의 빵집>을 시작하면서부터 같이 합을 맞췄던 누구보다 우직한 수한의 최종 통고.
베이커리가 갑자기 규모가 커지고 그에 따른 다른 업무가 많아진 기적은 아예 제빵에서 손을 떼고 그의 아래였던 수한에게 제빵 주방을 맡겼었다.
그러나 덩치가 커지는 것에 발맞춰 일이 너무 많아진 주방에는 일의 강도를 이기지 못하고 자꾸만 뛰쳐나가는 인원들이 생겨났고, 새로운 인원을 채워 놓아도 얼마 안 가 같은 이유로 다른 인원이 이탈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다 보니 주방은 언제나 인원 충원이 시급했다.
사장인 기적은 무엇 하나 완벽하게 해낼 여유도 없이, 그저 사람 찾아내는 것에만 매달려 있는 처지였다.
이번에는 정말 이상하리만치 마땅한 적임자를 물색할 수 없었다.
거의 한 달 넘게 비상 체제로 주방을 이끌어 가고 있는 수한에게 미안해서라도 정말 다시 그가 투입되어야 할지도 모를 지경.
“……며칠 내가 지하 맡을게. 넌 당분간 쉬었다가 나와.”
- 형! 며칠 놀게 해 달라는 말이 아니잖아요. 오늘도 사람 못 구한 거지, 그쵸? 또 어디서 언제 도망갈지 모르는, 날라리 신삥 데려다 놓지 말고 그냥 형이 돌아와. 나 혼자 진짜 못한다고!
“……말 안 들으면, 영영 나오지 말라고 할 거다. 쉬어라.”
기적은 다급하게 ‘형!’ 하고 부르는 수한의 목소리는 못 들은 척 매정하게 끊어 버렸다.
빵 굽는 일이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경영과 제빵 주방, 두 가지 일을 모두 소화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 현실적 무게감 때문에 부담인 것이다.
잘해내고 싶으니까. 정말 실패하고 싶지 않다, 그는. 실패가 끔찍하게 싫다, 그는.
1화
# 프롤로그 – 그 날
‘입어, 보루야. 네가 입어야지.’
보루는 이모의 설득이 듣기 싫어 뻣뻣한 상복을 꾸깃꾸깃 움켜쥐고 무작정 바깥으로 나왔다.
안다, 입어야 한다는 것을.
무책임하게 죽은 아빠가 아니라, 벌써 네 번째 울다가 혼절하고 있는 엄마 곁에 있으려면 상복을 입어야겠지.
그녀는 그러나 아빠의 영정 사진을 마주하고 난 뒤, 그 작심마저 우르르 무너지는 기분을 느끼고는 그 길로 뛰어나온 것이다.
싫어, 아빠.
미워, 아빠가.
달캉!
뜨거운 열기가 가시질 않아 본능적으로 찾은 건물의 옥상. 잿빛 구름 아래 파랗게 물들기 시작한 도시의 저녁이 내려다보였다. 캄캄해지는 것이 보고 싶어졌다.
무언가 기대하는 듯이, 자신을 보는 눈 없이 자유롭고 싶어졌다. 스위치를 누른 것처럼 어서 어둠이 와서 차라리 눈을 감고 마음껏 혼자이고 싶어졌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하아…….”
이거야? 이거였어, 아빠? 아빠도 다 싫어진 거야? 차라리 암흑 속에 숨고 싶었어?
그래서 그렇게 잔인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 너무 간절하게 숨고 싶어서 그런 무서운 용기가 났을까? 그랬을까……?
보루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매섭게 부는 저 아래 단단하고 드넓은 도로에 눈을 주며 천천히 움직였다. 높은 난간 위로 오르는 것도 느릿느릿, 그러나 조심스럽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다리를 펴서 그 위에 곧추섰을 때에도, 강한 바람이 불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치워 내는 순간까지도 아찔하게 높은 곳에 선 것을 온전히 실감하지 못했다.
어떤 기분이었을까. 무엇이 저 아래로 몸을 버릴 수 있게 했을까.
“뭐가, 이래…….”
시발, 하고 웅얼거리는 낮은 음성이 들린 건 그때였다. 사방에서 공격하듯 불어닥치던 바람이 거짓말처럼 한순간 잔잔해졌을 때를 비집고 들린 남자의 목소리 덕분에 이 공간에 그녀 혼자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가 있는 난간 저 끝에 똑같이 아슬아슬하게 선 새카만 패딩점퍼와 새카만 야구모자. 블랙진에 검은 운동화. 모두 새카매서 시리게 빛나는 피부 위 붉게 다물린 입술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뭐가, 시발 이러냐고…….”
다시 한번 웅얼웅얼 뱉은 말끝에는 울음이 달렸다. 꺽꺽 어렵게 뱉는 소리와 부풀어 꺼지며 들썩여지는 가슴께가 자꾸만 그 남자를 위험하게 흔들리게 했다.
보루는 그 참담한 우짖음을 눈으로 보자마자, 어제오늘 죽을힘을 다해 참았던 울음이 핑그르르 고여 드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코끝이 따끔하게 매워지고는 순식간이었다.
툭툭 봇물 터진 눈물이 뜨겁게 볼을 타고 흐르고 나서야, 그 다음에 자신이 선 이 자리가 아빠가 어제 새벽 섰던 자리였겠구나, 무섭게 서러워지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해하고 싶지 않던 그 막막한 눈앞이 똑같이 그려지고. 외롭고 무서웠을 그 심정을 헤아리자, 어쩐지 다시 한번 더 미워지는 것이다.
나한테 오지. 날 한 번 더 안았어야지. 그랬으면 그 높은 데서 떨어질 용기 대신, 살게 할 용기를 나눠 줄 수 있었을 텐데.
아빠, 내가 무언가 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바람이 짓쳐 올린 새카만 상복의 저고리 고름이 서러웠다. 춤을 추는 듯 연신 곡선을 그리지만, 전혀 아름답지 않은 그 선들이 자꾸만 어지러웠다. 어지러워 욕지기가 났다.
보루는 그래서 손에 든 상복으로 젖은 얼굴을 훔치고 툭, 쥔 것들을 저 새카만 아래로 던져 버렸다.
“안 입을 거야, 아빠. 나, 안 입어! 싫어! 안 해!”
다시는 아빠도 부를 일 없어. 이걸로 끝이야. 나한테는 이제 엄마만 있는 거니까. 그렇게 살아가라고 그런 선택을 한 거잖아, 아빠도!
그래, 엄마만 있는 거야. 엄마 곁에 남아, 엄마 딸로만 살게. 다 잊어 줄게.
그리고 보루는 눈을 질끈 감아 남은 물기를 짜서 버리듯 흘렸다. 이게 내가 아빠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이야.
그녀는 올라섰던 것처럼 천천히 난간에서 내려왔다. 후들후들 떨리는 몸이 무서움 때문이었는지, 추위 때문이었는지.
덜덜 진동하는 손을 숨기듯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마치 처음 호흡하는 사람처럼 헉헉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저 위에서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과 마주쳤다.
아니, 돌려진 고개가 그녀를 향했기에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모자 챙 안에 가려진 눈은 아직도 울고 있는가 보다.
아직 남은 미련이 있는지, 남자의 턱에서 툭하고 눈물 줄기가 떨어지는 것을 본 보루는 그 슬픔을 공감해 주지 못하고 혐오가 솟구치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멍청이.”
함부로 포기하는 그 연약함이 구역질 나.
“뭐?”
흡, 눈물을 삼킨 목소리가 그녀의 말에 놀란 듯이 되물었다.
뭐가 그렇게 쉬워? 그래, 차라리 죽는 게 쉬운 약해 빠진 영혼이라면 살지 마.
“싫어, 정말.”
이제 남자의 하얗게 떨리던 턱이 굳는 것이 보였다. 드디어 눈물도 멈춘 모양이다.
“그렇게 울어도 절대 이해받을 수 없어. 그렇게 서러워해도 절대 동정표 받을 수 없는 거야. 지금 하려는 짓은, 절대!”
그것도 몰라, 아빠는? 어떻게 몰라, 아빠는?
“그냥 죄 짓는 거야. 살아서 저지른 죄보다 더 큰 죄야. 다시는 용서받을 수 없는 무서운 죄야. 그 벌을 남은 사람들이 나누는 거잖아. 무책임해. 잔인해. 싫어!”
보루는 이제 눈 안에 남은 눈물이 더는 없다는 것에 안정이 찾아왔다. 이제는 어느 순간에도 오늘을 떠올려 울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 편안했다.
남자가 저 위에서 물었다.
“잔인해?”
“어.”
“용서 받을 수 없어?”
“어.”
절대로 이해 받을 수 없어. 보루는 눈앞의 낯모를 남자가 아빠인 것처럼, 커다랗게 내쏘았다.
“그러니까 꺼져! 사라져 버려!”
죽어 버리든, 다시 태어나든 내 앞에서는 당장 없어져 버리라고. 알고 싶지 않아, 차라리 죽음을 꿈꾸는 그 멍청한 심정 따위.
***
기적은 탕, 하고 닫히는 문소리와 함께 급작스러운 오한을 느끼기 시작했다.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절대. 이해받을 수도, 슬퍼해 줄 수도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다지도 지독한 선택을 했을까.
눈물이 지나간 자리가 시리고, 따가웠다. 그리고 바람이 고약하게 흔드는 몸에 힘이 들어갔다. 생생한 진통을 느끼며 감각들이 곤두세워졌다.
그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끔찍한 그 위에서 내려섰다. 발아래 밟히는 바닥의 단단함이 생경했다.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이 난간 위는 똑같은 돌이었는데도 허방을 짚고 선 것처럼 푹신했었는데.
‘죄 짓는 거야.’
몰랐다. 아버지는 죄를 지었던 것이었다. 장례를 따로 치루지 말자던 고모의 말씀이 절대 서운하고 미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죄 지은 사람의 죽음을 애달파 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자식이어서 슬픈 마음도 접어야 한다. 그것이 아버지가 지은 죄를 갚는 길일 것이었다.
기적은 차갑게 언 손바닥으로 눈가와 두 볼을 한번에 쓸어 지우듯 문질렀다. 그 차가운 손길이 다시 한번 그를 정신 차리게 했다.
살아서 해야 할 일들이 있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을 떠올리며 천천히 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상복을 버리고 독한 말을 쏟던 그 여린 여자애가 섰었던 자리에 잠깐 멈추었다. 그 여자애가 그랬듯이 가슴 앞에 팔짱을 단단히 끼워 스스로를 안았다.
떨리는 오한도 밀어내며 기적은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살아서 할 일들이 남았으니까, 일단은 살아야겠다.
# 만나면 찝찝한 여자
해가 지고도 한산해지지 않자, 기적은 비교적 사람이 적은 공원 끝 쪽으로 닿기 위해 달리던 속도를 올렸다. 이미 한 시간 가까이 조깅을 했던 뒤라서 뜨거운 호흡이 목구멍과 가슴을 태우며 점차로 한계치를 알려 왔다.
타닥타닥 땅바닥을 짓치는 박자들에만 집중하고 내뱉는 호흡의 열기만 가늠하는 동안, 머릿속이 가벼워지고 더불어 고통이 지나간 몸도 붕 뜨는 듯이 가벼워졌다.
그가 오랫동안 이 달리기에 중독된 이유, 러닝 하이.
손끝에서부터 머리끝, 발끝까지 저릿저릿 달콤한 기운이 퍼지는 극한의 기분.
기적은 조명도 거의 닿지 않는 공원 가장자리에 거의 다다르자 점차 속력을 줄였다. 그러면서도 좀 더 달리고 싶은 욕심이 피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미련을 버리기 위해 억지로 휴대폰 음악 앱을 끄고 수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별일 없었지?”
- 어떻게 없어, 손이 모자란데! 지금 한 달째 빵집이 아니라 불난 호떡집처럼 비상인데!
통화 연결음을 맨 마지막까지 듣게 하는 한계를 경험시킨 끝에야 삐딱하게 전화를 받는 수한이다. 수한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에 여태 편안했던 기적의 눈도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그래서? 뭔 일 있었단 말야? 예약 받은 케이크는?”
- ……세 개 다 문제없이 나갔어요.
“그리고.”
- 아, 그리고 뭐! 빤하지 뭐! 애들은 엉덩이 붙일 시간 없이 구르고, 나는 빼족해져서 애들 잡도리하고! 그러지 말고, 형이 다시 들어와요. 나도 더는 혼자 독박 쓰는 거 못하겠어. 오늘도 진짜 간신히, 간신히 했다구요. 나 지금 두 달째 휴무 없었던 건 알고 있어? 나도 확 그냥 째 버려!?
그와 <기적의 빵집>을 시작하면서부터 같이 합을 맞췄던 누구보다 우직한 수한의 최종 통고.
베이커리가 갑자기 규모가 커지고 그에 따른 다른 업무가 많아진 기적은 아예 제빵에서 손을 떼고 그의 아래였던 수한에게 제빵 주방을 맡겼었다.
그러나 덩치가 커지는 것에 발맞춰 일이 너무 많아진 주방에는 일의 강도를 이기지 못하고 자꾸만 뛰쳐나가는 인원들이 생겨났고, 새로운 인원을 채워 놓아도 얼마 안 가 같은 이유로 다른 인원이 이탈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다 보니 주방은 언제나 인원 충원이 시급했다.
사장인 기적은 무엇 하나 완벽하게 해낼 여유도 없이, 그저 사람 찾아내는 것에만 매달려 있는 처지였다.
이번에는 정말 이상하리만치 마땅한 적임자를 물색할 수 없었다.
거의 한 달 넘게 비상 체제로 주방을 이끌어 가고 있는 수한에게 미안해서라도 정말 다시 그가 투입되어야 할지도 모를 지경.
“……며칠 내가 지하 맡을게. 넌 당분간 쉬었다가 나와.”
- 형! 며칠 놀게 해 달라는 말이 아니잖아요. 오늘도 사람 못 구한 거지, 그쵸? 또 어디서 언제 도망갈지 모르는, 날라리 신삥 데려다 놓지 말고 그냥 형이 돌아와. 나 혼자 진짜 못한다고!
“……말 안 들으면, 영영 나오지 말라고 할 거다. 쉬어라.”
기적은 다급하게 ‘형!’ 하고 부르는 수한의 목소리는 못 들은 척 매정하게 끊어 버렸다.
빵 굽는 일이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경영과 제빵 주방, 두 가지 일을 모두 소화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 현실적 무게감 때문에 부담인 것이다.
잘해내고 싶으니까. 정말 실패하고 싶지 않다, 그는. 실패가 끔찍하게 싫다,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