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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자취를 더듬은 적 없다
3화
아비가일은 깜빡 정신을 놓으면 당장에 질식할 것만 같아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알렉은 피가 묻어난 손끝을 무심하게 응시하더니, 헤메스를 끌어냈던 무리를 돌아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사람들을 훑던 그가 곧 몸을 움직였다. 그러고선 일말의 고민도 없이 맨 앞에 있는 여자 하나의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알렉은 고개를 돌려 아비가일의 검은 눈동자를 주시하며 질문했다.
“그거 아나?”
“…….”
“내게는 너희의 그 술이 거의 통하지 않아.”
“…….”
“명색이 헤레이스의 수호 기사가 아닌가. 북마녀의 술에 당해 뒈져 버리면 곤란하지 않겠어.”
알렉은 대답 없이 얼어붙은 아비가일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질질 끌려오는 여자의 머리채를 탁 놓았다. 여자의 머리가 곧장 바닥으로 추락했다. 꽤 아팠을 법한데도 여자는 신음 하나 내지 않은 채, 바닥에 손을 짚고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도 당당했다. 아비가일은 동요 없이 그런 여자를 응시했다. 여자는 아비가일과 눈을 마주하며, 깨끗하게 떨어지는 웃음을 지었다. 명료한 목소리가 났다.
“나는.”
말한 것은 여자였다. 알렉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여자는 아비가일을 보며 웃었다.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내리깔렸다.
“네가 자랑스럽다.”
찰나 아비가일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등지고 선 알렉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아사헬에 영원한 영광을.”
말을 마친 여자가 턱을 한 번 움직였다. 여자의 핏발 선 눈이 일순 홉떠지더니, 다물린 입 새로 핏줄기 두 개가 주룩 흘러나왔다. 턱을 타고 흐르는 피의 양이 점점 많아졌다. 상체가 기울고 쿵, 몸이 고꾸라졌다.
알렉이 불쾌한 얼굴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비가일은 눈을 길게 한 번 감았다가 떴다. 눈꺼풀이 파르르 미약하게 떨렸다. 이 모든 것이 꿈같았다. 어쩌면 정말 꿈일지도 모른다. 살갗을 가시처럼 찔러 대는 공기와 구역질이 날 정도로 비릿한 피 냄새를 제외하곤, 이 모든 상황들이 지나치게 비상식적이었다. 그녀의 이성 한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여자가 그녀에게 한 말도 그러했다. 그리고 아비가일의 어깨에 지워진 죽음과 상속의 무게.
―아사헬에 영원한 영광을.
여자는 죽음으로 자신의 삶을 아비가일에게 상속했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아사헬의 술사 이비스가, 자신의 딸에게 한 최초이자 최후의 칭찬이었다.
동요 없는 낯과 달리 아비가일의 정신은 수면 밑에서 자맥질하고 있었다. 자랑스럽다고? 무엇이 자랑스럽다는 것일까. 아비의 팔다리가 성의 없는 칼질에 난도질되는 것을 눈앞에 두고서도 왕녀의 행방을 말하지 않은 것? 네 팔다리를 끊어 내겠단 협박을 듣고서도 왕녀의 행방을 말하지 않은 것? 어미가 머리채를 잡혀 끌려 나오는 것을 보면서도 태연히 서 있었던 것?
그것들은 애초에 당연한 일이었다.
아비가일은 다시 그러한 상황이 온다 해도 같은 대답을 하고 같은 행동을 할 터였다. 또 그녀가 이비스였어도 지당히 그리하였을 것이다. 그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헤메스가 잘못된 거였다. 그는 그래선 안 되는 거였다. 우리가 서로 익히 알던 것을, 그걸 깨뜨리면 안 되는 거였다.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이비스가 옳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제 자신조차 무엇을 혼란해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아.
당신 내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그것뿐이었나.
약간의 소란에 아비가일의 정신이 문득 깨어났다. 아비가일은 뻣뻣해진 고개를 돌려 소란의 근원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경악했다.
“불길에 휩싸인 왕녀께서 살아 돌아오셨군.”
조롱 가득한 알렉의 말은 아비가일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비가일은 딛고 선 땅이 푹 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머리가 하얗게 비고 눈앞이 깜깜해져 왔다. 그녀는 앞으로의 상황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을 가정해 본 바 없다. 아니, 물론, 이런 상황이 온다면 마땅히 목숨을 내놓으리라 늘 생각하고 단언해 왔지만. 이렇게 완벽히 패배뿐일 싸움일 거라고는― 정말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당장 떠올릴 수 있는 앞으로의 상황이라곤 죄다 패배, 패배, 그리고 패배뿐.
암담함뿐인 가정을 거듭하던 아비가일은 기어코 이비스처럼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에 이르렀다. 잔뜩 굳어 끌려오는 사비나의 모습이 제 지나친 불안에서 비롯된 환상 같았다. 노암을 타고 도망가신 게 아니었나. 중간에 문제가 있었나. 뭐 때문에. 무엇 때문에. 도망치다 잡히신 건가. 어떻게 잡히신 건가. 왜, 왜.
왜 잡히셨어요.
감히 지녀서는 안 될 원망이 아비가일의 속을 좀먹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이 상황이 끔찍해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끝은 암담하기만 했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얻는 것 하나 없이 하등 쓸모없는 발버둥일지라도 해야 했다. 해야만 했다. 선택지는 없었다. 왜냐면 이건. 이건 본능 같은…….
투둑. 눈물 한 방울이 아비가일의 뺨을 가로질렀다.
“……왕녀를 살려 줘.”
“내가 왜?”
알렉이 비웃으며 물었다. 아비가일이 눈을 몇 번 깜박이자 그에 맞추어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우는 모습이 꽤 취향인데. 알렉은 잠시 생각했다.
“간청한다. 무엇이든 할 테니까 제발.”
“그럼 네 팔다리랑 맞바꿀까.”
“원하는 대로.”
알렉은 고민한 기색도 없이 바로 튀어나온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팔다리가 잘려 나가는 것쯤은 정말 감내해 낼 것 같았다. 재미없게. 알렉은 아비가일을 유심히 관찰하며 고민하다가, 생각났다는 듯 아, 소리 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발치 근처에 놓인 왕녀의 머리채를 집었다. 보라색 머리칼이 손아귀에 조잡하게 쥐어 잡히고 잘린 머리통이 따라 들렸다.
왕녀 벤느에셀의 머리였다. 알렉은 한 번 웃고서, 쥔 것을 아비가일에게 던졌다. 고귀한 왕녀의 머리는 아비가일의 다리에 맞고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다. 아비가일은 차마 아래를 내려다볼 수가 없어 정면만을 응시했다. 그녀의 턱이 덜그럭덜그럭 떨렸다. 알렉이 입을 열었다.
“밟아 봐.”
아비가일은 멍청한 낯을 하고 멀거니 알렉을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한없이 고요하기만 해서 순간 제가 환청을 들었나 싶었다. 그러나 부질없는 희망에 불과한 착각을 산산이 깨부수듯, 다시 한 번 알렉의 목소리가 그녀의 고막을 긁었다.
“밟아 봐, 그거.”
“…….”
“못하겠나?”
“……아.”
속으로 신음한다는 것을 그만 소리를 입혀 버렸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그게 입 밖으로 나왔다는 것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양 뺨이 마를 새 없이 빠르게 젖었다. 잠시 잊었던, 본능적인 두려움과 공포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알렉은 그게 마음에 들었다. 채 다 성숙하지 못한 아사헬의 개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는 것은 알렉에게 늘 도사리고 있던 기이한 욕망을 자극하기도 했거니와, 그 이유가 자신에서 비롯됐다는 건 뜻 모를 희열감을 주었다. 게다가 저 술사가 검은 머리를 갖고 있는 것은 꽤 흥미를 끌었다. 그는 여자가 부디 끝까지 개새끼로서의 소명을 다하길 바랐다. 재미없게 죽어 버리는 대신.
좀 더 시간을 두고 대답이든 선택이든 할 것이라 생각했던 알렉의 예상과는 다르게, 아비가일은 금세 결단을 내렸다. 그녀에게 억겁 같은 시간이었을 뿐 실상은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았다.
아비가일은 제 뺨을 거칠게 벅벅 문질렀다. 손길이 가시고 드러난 눈은 기이하게도 또렷했다. 눈물 자국이 조금 남아 붉은 기가 도는 얼굴을 하고서, 아사헬의 술사는 왕녀의 머리를 밟았다. 마치 보란 듯이 꾹 밟았다. 그러다가 잠시 휘청하는 바람에 벤느에셀의 머리가 데구르르 굴러갔다.
좌중은 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아비가일은 눈앞에 집중하기로 했다. 당장 닥친 현실만을 마주하기로 했다. 지금부터 제게 목줄을 매어 묶을 곳은 왕족이 아니라 아사헬 그 자체다. 죽은 이에게까지 바칠 만큼 남은 것이 그녀에겐 없었다. 적요한 침묵 속에 아비가일의 메마른 목소리가 툭 내던져졌다.
“……되었소.”
“재미없군.”
알렉이 쯧 혀를 내찼다. 좀 더 벌벌 떨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마지못해 선택하는 걸 원했는데. 너무 쉬웠다. 이 술사는 실상 그가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짚어 내지 못했다. 알렉은 어쩐지 흥미가 식어 아비가일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아비가일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순간 뇌리를 치는 깨달음에, 그녀는 이를 꽉 사리물며 눈을 내리깔았다.
저 남자에게 있어 이 모든 것들은 그저 그런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 한순간의 흥미. 찰나의 호기심. 모가지를 바닥에다 내리눌러 옴짝달싹 못 하게 하고서 어디까지 버티나 지켜보고, 지루해지면 곧장 비틀어 버릴 터였다. 그러니 남자를 지루하게 만들어선 안 됐다. 그래선 안 되는 거였는데.
아비가일은 다시 눈물을 쥐어짰다. 저 저열한 새끼는 철저히 개로 자란 아사헬의 술사가 제 손아귀에서 겁에 질려 놀아나는 꼴을 보고 싶은 거였다. 원초적인 정복욕과 이유 모를 욕망의 해소 따위를 요하는 거였다. 그런 거라면, 기꺼이 그렇게 해 줄 의사가 있었다. 아비가일이 눈물 몇 방울을 두둑 떨어뜨리며 급히 입을 열었다.
“제가……!”
“됐어.”
입매가 짧게 경련했다. 아비가일은 그가 이다음에 무슨 일을 할지 몰라 한없이 불안했다. 그리고 자책했다. 자존심과 체념 따위를 보여선 안 되는 거였는데. 좀 더 기민하게 굴었어야 했는데 멍청했다.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아비가일은 불안한 시선으로 알렉과 사비나를 번갈아 보았다. 사비나는 울지도 못하고 하얗게 질려 굳어 있었다. 저 남자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그저, 단순한 흥미 때문에 죽이지도 않고 데려왔나.
알렉은 무료한 얼굴로 술사들을 둘러보았다. 유명하신 북마녀의 술사들이 궁금해 기껏 산 채로 사로잡아 봤는데, 크게 별것도 없었다.
“모조리 자진해. 방법이야 어쨌든.”
“…….”
“아니면 너희의 하나 남은 왕녀는 죽는다.”
말을 마치고서 알렉이 짧게 웃었다. 그리고 아비가일에게는 자비로운 낯으로 말했다.
“넌 거기 서 있어. 가만히. 잘 봐.”
귀를 의심할 만치 대단히 고매한 목소리였다.
아비가일은 그만 달려들어 남자의 목을 조를 뻔했다. 참을 수 없는 살기가 아비가일의 머리 위로 쏟아져 발끝까지 삼켜 들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강렬했고 미개했다. 남자의 목을 조르고 칼로 배를 헤집어 놓고 싶어서 손이 벌벌 떨렸다. 머리를 짓밟아 으깨 버리고 싶다. 저 웃는 입가를 찢어 버리고 싶다. 아비가일은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억지로 쑤셔 넣었다. 이 순간, 그녀는 무력함이라는 게 무엇인지 절감했다.
3화
아비가일은 깜빡 정신을 놓으면 당장에 질식할 것만 같아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알렉은 피가 묻어난 손끝을 무심하게 응시하더니, 헤메스를 끌어냈던 무리를 돌아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사람들을 훑던 그가 곧 몸을 움직였다. 그러고선 일말의 고민도 없이 맨 앞에 있는 여자 하나의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알렉은 고개를 돌려 아비가일의 검은 눈동자를 주시하며 질문했다.
“그거 아나?”
“…….”
“내게는 너희의 그 술이 거의 통하지 않아.”
“…….”
“명색이 헤레이스의 수호 기사가 아닌가. 북마녀의 술에 당해 뒈져 버리면 곤란하지 않겠어.”
알렉은 대답 없이 얼어붙은 아비가일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질질 끌려오는 여자의 머리채를 탁 놓았다. 여자의 머리가 곧장 바닥으로 추락했다. 꽤 아팠을 법한데도 여자는 신음 하나 내지 않은 채, 바닥에 손을 짚고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도 당당했다. 아비가일은 동요 없이 그런 여자를 응시했다. 여자는 아비가일과 눈을 마주하며, 깨끗하게 떨어지는 웃음을 지었다. 명료한 목소리가 났다.
“나는.”
말한 것은 여자였다. 알렉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여자는 아비가일을 보며 웃었다.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내리깔렸다.
“네가 자랑스럽다.”
찰나 아비가일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등지고 선 알렉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아사헬에 영원한 영광을.”
말을 마친 여자가 턱을 한 번 움직였다. 여자의 핏발 선 눈이 일순 홉떠지더니, 다물린 입 새로 핏줄기 두 개가 주룩 흘러나왔다. 턱을 타고 흐르는 피의 양이 점점 많아졌다. 상체가 기울고 쿵, 몸이 고꾸라졌다.
알렉이 불쾌한 얼굴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비가일은 눈을 길게 한 번 감았다가 떴다. 눈꺼풀이 파르르 미약하게 떨렸다. 이 모든 것이 꿈같았다. 어쩌면 정말 꿈일지도 모른다. 살갗을 가시처럼 찔러 대는 공기와 구역질이 날 정도로 비릿한 피 냄새를 제외하곤, 이 모든 상황들이 지나치게 비상식적이었다. 그녀의 이성 한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여자가 그녀에게 한 말도 그러했다. 그리고 아비가일의 어깨에 지워진 죽음과 상속의 무게.
―아사헬에 영원한 영광을.
여자는 죽음으로 자신의 삶을 아비가일에게 상속했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아사헬의 술사 이비스가, 자신의 딸에게 한 최초이자 최후의 칭찬이었다.
동요 없는 낯과 달리 아비가일의 정신은 수면 밑에서 자맥질하고 있었다. 자랑스럽다고? 무엇이 자랑스럽다는 것일까. 아비의 팔다리가 성의 없는 칼질에 난도질되는 것을 눈앞에 두고서도 왕녀의 행방을 말하지 않은 것? 네 팔다리를 끊어 내겠단 협박을 듣고서도 왕녀의 행방을 말하지 않은 것? 어미가 머리채를 잡혀 끌려 나오는 것을 보면서도 태연히 서 있었던 것?
그것들은 애초에 당연한 일이었다.
아비가일은 다시 그러한 상황이 온다 해도 같은 대답을 하고 같은 행동을 할 터였다. 또 그녀가 이비스였어도 지당히 그리하였을 것이다. 그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헤메스가 잘못된 거였다. 그는 그래선 안 되는 거였다. 우리가 서로 익히 알던 것을, 그걸 깨뜨리면 안 되는 거였다.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이비스가 옳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제 자신조차 무엇을 혼란해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아.
당신 내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그것뿐이었나.
약간의 소란에 아비가일의 정신이 문득 깨어났다. 아비가일은 뻣뻣해진 고개를 돌려 소란의 근원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경악했다.
“불길에 휩싸인 왕녀께서 살아 돌아오셨군.”
조롱 가득한 알렉의 말은 아비가일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비가일은 딛고 선 땅이 푹 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머리가 하얗게 비고 눈앞이 깜깜해져 왔다. 그녀는 앞으로의 상황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을 가정해 본 바 없다. 아니, 물론, 이런 상황이 온다면 마땅히 목숨을 내놓으리라 늘 생각하고 단언해 왔지만. 이렇게 완벽히 패배뿐일 싸움일 거라고는― 정말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당장 떠올릴 수 있는 앞으로의 상황이라곤 죄다 패배, 패배, 그리고 패배뿐.
암담함뿐인 가정을 거듭하던 아비가일은 기어코 이비스처럼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에 이르렀다. 잔뜩 굳어 끌려오는 사비나의 모습이 제 지나친 불안에서 비롯된 환상 같았다. 노암을 타고 도망가신 게 아니었나. 중간에 문제가 있었나. 뭐 때문에. 무엇 때문에. 도망치다 잡히신 건가. 어떻게 잡히신 건가. 왜, 왜.
왜 잡히셨어요.
감히 지녀서는 안 될 원망이 아비가일의 속을 좀먹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이 상황이 끔찍해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끝은 암담하기만 했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얻는 것 하나 없이 하등 쓸모없는 발버둥일지라도 해야 했다. 해야만 했다. 선택지는 없었다. 왜냐면 이건. 이건 본능 같은…….
투둑. 눈물 한 방울이 아비가일의 뺨을 가로질렀다.
“……왕녀를 살려 줘.”
“내가 왜?”
알렉이 비웃으며 물었다. 아비가일이 눈을 몇 번 깜박이자 그에 맞추어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우는 모습이 꽤 취향인데. 알렉은 잠시 생각했다.
“간청한다. 무엇이든 할 테니까 제발.”
“그럼 네 팔다리랑 맞바꿀까.”
“원하는 대로.”
알렉은 고민한 기색도 없이 바로 튀어나온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팔다리가 잘려 나가는 것쯤은 정말 감내해 낼 것 같았다. 재미없게. 알렉은 아비가일을 유심히 관찰하며 고민하다가, 생각났다는 듯 아, 소리 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발치 근처에 놓인 왕녀의 머리채를 집었다. 보라색 머리칼이 손아귀에 조잡하게 쥐어 잡히고 잘린 머리통이 따라 들렸다.
왕녀 벤느에셀의 머리였다. 알렉은 한 번 웃고서, 쥔 것을 아비가일에게 던졌다. 고귀한 왕녀의 머리는 아비가일의 다리에 맞고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다. 아비가일은 차마 아래를 내려다볼 수가 없어 정면만을 응시했다. 그녀의 턱이 덜그럭덜그럭 떨렸다. 알렉이 입을 열었다.
“밟아 봐.”
아비가일은 멍청한 낯을 하고 멀거니 알렉을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한없이 고요하기만 해서 순간 제가 환청을 들었나 싶었다. 그러나 부질없는 희망에 불과한 착각을 산산이 깨부수듯, 다시 한 번 알렉의 목소리가 그녀의 고막을 긁었다.
“밟아 봐, 그거.”
“…….”
“못하겠나?”
“……아.”
속으로 신음한다는 것을 그만 소리를 입혀 버렸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그게 입 밖으로 나왔다는 것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양 뺨이 마를 새 없이 빠르게 젖었다. 잠시 잊었던, 본능적인 두려움과 공포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알렉은 그게 마음에 들었다. 채 다 성숙하지 못한 아사헬의 개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는 것은 알렉에게 늘 도사리고 있던 기이한 욕망을 자극하기도 했거니와, 그 이유가 자신에서 비롯됐다는 건 뜻 모를 희열감을 주었다. 게다가 저 술사가 검은 머리를 갖고 있는 것은 꽤 흥미를 끌었다. 그는 여자가 부디 끝까지 개새끼로서의 소명을 다하길 바랐다. 재미없게 죽어 버리는 대신.
좀 더 시간을 두고 대답이든 선택이든 할 것이라 생각했던 알렉의 예상과는 다르게, 아비가일은 금세 결단을 내렸다. 그녀에게 억겁 같은 시간이었을 뿐 실상은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았다.
아비가일은 제 뺨을 거칠게 벅벅 문질렀다. 손길이 가시고 드러난 눈은 기이하게도 또렷했다. 눈물 자국이 조금 남아 붉은 기가 도는 얼굴을 하고서, 아사헬의 술사는 왕녀의 머리를 밟았다. 마치 보란 듯이 꾹 밟았다. 그러다가 잠시 휘청하는 바람에 벤느에셀의 머리가 데구르르 굴러갔다.
좌중은 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아비가일은 눈앞에 집중하기로 했다. 당장 닥친 현실만을 마주하기로 했다. 지금부터 제게 목줄을 매어 묶을 곳은 왕족이 아니라 아사헬 그 자체다. 죽은 이에게까지 바칠 만큼 남은 것이 그녀에겐 없었다. 적요한 침묵 속에 아비가일의 메마른 목소리가 툭 내던져졌다.
“……되었소.”
“재미없군.”
알렉이 쯧 혀를 내찼다. 좀 더 벌벌 떨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마지못해 선택하는 걸 원했는데. 너무 쉬웠다. 이 술사는 실상 그가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짚어 내지 못했다. 알렉은 어쩐지 흥미가 식어 아비가일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아비가일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순간 뇌리를 치는 깨달음에, 그녀는 이를 꽉 사리물며 눈을 내리깔았다.
저 남자에게 있어 이 모든 것들은 그저 그런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 한순간의 흥미. 찰나의 호기심. 모가지를 바닥에다 내리눌러 옴짝달싹 못 하게 하고서 어디까지 버티나 지켜보고, 지루해지면 곧장 비틀어 버릴 터였다. 그러니 남자를 지루하게 만들어선 안 됐다. 그래선 안 되는 거였는데.
아비가일은 다시 눈물을 쥐어짰다. 저 저열한 새끼는 철저히 개로 자란 아사헬의 술사가 제 손아귀에서 겁에 질려 놀아나는 꼴을 보고 싶은 거였다. 원초적인 정복욕과 이유 모를 욕망의 해소 따위를 요하는 거였다. 그런 거라면, 기꺼이 그렇게 해 줄 의사가 있었다. 아비가일이 눈물 몇 방울을 두둑 떨어뜨리며 급히 입을 열었다.
“제가……!”
“됐어.”
입매가 짧게 경련했다. 아비가일은 그가 이다음에 무슨 일을 할지 몰라 한없이 불안했다. 그리고 자책했다. 자존심과 체념 따위를 보여선 안 되는 거였는데. 좀 더 기민하게 굴었어야 했는데 멍청했다.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아비가일은 불안한 시선으로 알렉과 사비나를 번갈아 보았다. 사비나는 울지도 못하고 하얗게 질려 굳어 있었다. 저 남자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그저, 단순한 흥미 때문에 죽이지도 않고 데려왔나.
알렉은 무료한 얼굴로 술사들을 둘러보았다. 유명하신 북마녀의 술사들이 궁금해 기껏 산 채로 사로잡아 봤는데, 크게 별것도 없었다.
“모조리 자진해. 방법이야 어쨌든.”
“…….”
“아니면 너희의 하나 남은 왕녀는 죽는다.”
말을 마치고서 알렉이 짧게 웃었다. 그리고 아비가일에게는 자비로운 낯으로 말했다.
“넌 거기 서 있어. 가만히. 잘 봐.”
귀를 의심할 만치 대단히 고매한 목소리였다.
아비가일은 그만 달려들어 남자의 목을 조를 뻔했다. 참을 수 없는 살기가 아비가일의 머리 위로 쏟아져 발끝까지 삼켜 들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강렬했고 미개했다. 남자의 목을 조르고 칼로 배를 헤집어 놓고 싶어서 손이 벌벌 떨렸다. 머리를 짓밟아 으깨 버리고 싶다. 저 웃는 입가를 찢어 버리고 싶다. 아비가일은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억지로 쑤셔 넣었다. 이 순간, 그녀는 무력함이라는 게 무엇인지 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