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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나 때문에 미안하게 됐네요.”

남자가 아무 말 없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슈트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낸다.

당연히 자기 얼굴 닦으려나 보다, 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그가 작은 턱을 잡고서 그녀의 얼굴과 입가를 꼼꼼히 닦기 시작했다.

쿵, 심장이 울리면서 다시 말문이 막혔다.

“이제 좀 나아졌나?”

그 다정한 목소리를 들은 순간 가슴 안의 뭔가가 뚝, 하고 끊어졌다.

핑, 눈물이 돌면서 어찌 방어할 사이도 없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자신의 반응에 소이는 당황했다.

돌연 남자의 손길이 멈췄고 소이는 입술을 깨물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걸을 수 있겠어? 아, 그냥 내 손을 잡아.”

당연히 눈물을 봤으니 무슨 말이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무 말이 없는 남자다.

아니면 빗물과 섞여 제대로 보지 못한 걸까?

그가 다른 말 없이 소이를 부축하며 모퉁이를 돌아 검은 세단으로 향했다.

그동안 몇 번이나 다리가 풀리기를 반복하자 나중에는 그가 아예 그녀를 안다시피 하며 걸었다. 그렇게 마침내 차의 뒷좌석에 올라탔을 때는 두 사람 모두 물에 빠진 생쥐처럼 흠뻑 젖은 상태였다.



* * *



차가 출발한 지 고작 5분도 지나지 않아 소이는 그대로 잠에 빠졌다.

차체의 가벼운 진동에 따라 가죽 시트에 기댄 작은 머리가 계속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계속 신경에 쓰이니 문제였다.

제어드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나마 슈트 안쪽이라 와이셔츠는 좀 덜 젖은 상태였다.

깊은 잠에 빠진 여자는 그의 손길에도 별 저항이 없었다.

제어드의 시선이 잠든 여자의 얼굴 위에 한참을 머물렀다.

그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눈가에 어린 것은 분명 빗물이 아닌 눈물이었다.

여성 휴게실 앞에서 만났을 때도 물기가 어려 있었다.

그리고 아까 밖에서도 분명…….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고작 남자에 차여 이렇게 눈물까지 흘리는 건가? 그 정도로 사랑해서?

이성을 잃고 절망에 빠져 술에 취할 정도면 대체 얼마나 그 남자를 사랑한다는 거지?

왜 하필 이 여자의 사생활이 이렇게 궁금해지는지 모르겠다.

한편으론 꽤 쿨해 보이는 여자가 그 정도로 사랑에 연연한다는 것이 어딘가 언발런스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술 취한 여자를 상대로 그런 궁금증을 풀어볼 수도 없었다.

차가 왼쪽으로 커브를 틀자 몸이 살짝 기울어지면서 소이가 작은 신음을 흘렸다.

아직도 속이 거북한 것 같았다.

하긴 그렇게 마시고 토하기까지 했으니 정상일 리 없었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아마도 숙취로 지독하게 고생할 게 뻔했다.

스쳐 지나가는 도시의 네온사인 불빛에 섬세한 윤곽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가지런한 눈매, 부채꼴 모양의 완만한 긴 속눈썹, 가는 선의 오뚝한 코와 도톰한 핑크빛 입술, 티끌 하나 없는 희고 맑은 피부.

다만 축축이 젖은 검은 머리칼이 얼굴 주변에 달라붙어 있어 많이 지쳐 보였다.

무엇보다 깊게 파인 목선 아래 여성적인 곡선을 그리는 상체는…….

제어드는 유난히 시선을 끄는 붉은 입술에 이어 규칙적인 호흡으로 가볍게 들썩이는 가슴 계곡을 보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분홍빛 혀끝이 살짝 내비치고 모양 좋은 언덕은 그의 손안에 꽉 들어찰 만큼 적당한 크기였다.

무의식중에 손을 들어, 가는 목선을 어루만진 순간 아찔한 열기에 화들짝 놀랐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제어드는 깊은숨을 들이켜며 그대로 손을 잡아빼 주먹을 꼭 쥐었다.

고작 30분 전에 만난 여자였다. 그것도 술에 취해 낯선 남자의 품에 안겨 태평스럽게 잠까지 든 한심한 여자이기도 했다.

그런 여자를 상대로 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아까 이 여자를 집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한 것은 진심이었다.

음흉한 늑대들이 들끓는 위험한 소굴에서 그녀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 그 자신이 느끼는 것도 그 남자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잠든 여자를 보며 혼자 흥분한 꼴이라니.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말캉한 여체가 미칠 만큼 유혹적으로 다가온다.

낯선 여자를 향해 이런 형태의 강렬한 감정을 품어본 것은 처음이라 더 당황스러웠다.

그동안 너무 오래 여자를 멀리한 탓인가?

이유가 무엇이든 이제 이 여자를 정리할 때였다.

제어드는 다시 숨을 고르면서 소이의 가는 팔을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더 깊이 잠들기 전에 어떻게든 그녀의 집 주소라도 물어봐야 했다.

“이봐, 집이 어디지?”

“…….”

“소이, 들리나? 집이 어디냐니까?”

그녀가 힘겹게 실눈을 뜨더니 불만 섞인 눈빛을 던졌다.

어여쁜 까만 눈동자와 마주하자 쿵, 심장이 울리며 가슴 근육이 멋대로 수축했다.

“약속했잖아요.”

“무슨 약속?”

“나와 하룻밤을 보내기로.”

‘하룻밤’이라는 말에 이렇게 당황해보기도 처음이었다.

왜 하필 그 순간 이 여자와 침대 위에서 뜨겁게 얽히는 모습이 상상되는 것인지, 다리 안쪽이 아플 만큼 당기면서 뭉치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미쳤다. 그래, 완전히 정신이 나갔는지도 모르겠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대체 내가 언제…….”

“집에 가지 않을 거야. 날 절대 집으로 보내면 안 돼. 그러겠다고 약속해요, 네?”

독백처럼 흘러나오는 가냘픈 속삭임이 묘한 여운을 남긴다.

어떻게 들으면 간절한 애원이 담긴 것도 같았다.

뭐야, 진심으로 집에 가길 원치 않는 건가?

제어드는 미간을 찌푸린 채 다시 여자를 보았다.

그 이상의 말을 기대했지만, 여자는 가르랑거리는 신음만 내뱉을 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니, 그것만으로 부족했는지 아예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그의 품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헉, 심장이 바싹 조여들면서 전신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흠뻑 젖은 와이셔츠에 짓눌린 물컹한 감촉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참기 힘들 정도로 밀려오는 오싹하고도 강한 충동에 놀란 것은 그 자신이었다.

잔뜩 미간을 구긴 채 어떻게든 숨을 고르면서 제어드는 이 순간의 욕망을 억눌러야 했다.

정말 완전히 정신이 나간 건가?

아니면 이 여자에 한눈에 홀리기라도 한 건가?

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왜 점점 미쳐가는 거야?

그러게 애초부터 왜 남의 일에 상관한 건데?

그것도 모자라 낯선, 그것도 술 취한 여자를 차에 태운 건 또 어떻고?

이런 모습을 가족들이 본다면 뭐라 할 거 같지? 정말 어이없어 말도 안 나온다.

마치 어리석은 자신을 비웃듯 이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사실 제어드는 냉정하면서도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타입이었다. 장남으로서, 언젠가 아이언 사를 이끌어갈 후계자로서, 어깨에 놓인 책임의 무게를 통감하면서 다른 이들보다는 조금 일씩 냉정한 현실에 눈을 뜬 탓인지도 모르겠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되 웬만해선 신세를 지거나 남 일에 상관하지 않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일정한 선을 그으며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했다.

특별히 여자들과의 관계에서는 더욱.

그런 냉정한 제어드를 보고 손아래 동생, 제이런과 리즈가 한결같은 목소리로 그렇게 차갑게 굴지 말고 조금만 다정하게 행동하면 어떻겠냐며, 불만 아닌 불만을 터트리기도 한다.

그렇기에 더욱, 오늘 밤 그의 행동이 얼마나 정도에서 벗어난 것인지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낯선 여자에게 그 스스로 직접 다가가는 것도 놀라운데 술 취한 여자에게 이 정도 친절을 베풀고, 누구보다 자존심 강한 그가 하찮은 바람둥이 취급까지 받으면서 끝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또다시 쓴 미소가 흘러나왔다.

아직도 운전기사 리치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평소 냉철한 상사로 소문난 제어드가 제 몸도 가누지 못하고 흐느적거리는 여자를 거의 안다시피 걸어 나오는 것도 모자라 손수 구토하는 여자를 돕고 비에 흠뻑 젖은 여자를 안고 차에 태우더니 차가운 물로 입까지 헹구어주는 친절을 베풀다니.

그렇다고 그런 자신의 행동에 그 어떤 정당성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그는 이런 행동한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순간 그 상태로 이 여자를 내버려 둘 수 없었다는 것.

그래, 그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그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변명이었다.

그래서? 이제 이 여자를 어쩔 건데?

곯아떨어진 여자를 태우고 또 어딜 가겠다는 거지?

그녀가 말한 대로 술 취한 여자와 하룻밤의 유희를 즐길 생각은 절대 없었다.

마치 그런 그의 고심을 알아챈 듯 백미러를 통해 리치와 시선이 마주쳤다. 젊은 남자는 다음 목적지를 묻듯 조심스러운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제어드는 다시 한번 잠든 소이를 바라본 후 깊은숨을 들이켜고는 지금까지 가족조차 초대하지 않았던 그만의 은신처로 가라고 지시했다.



* * *



“가방 이리 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다니까. 금요일인데 늦어서 미안하군. 여러모로 수고 많았어, 리치. 들어가 봐요.”

“하지만…….”

리치는 상사에게 여성용 가죽 가방을 건네면서도 여전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이대로 그냥 가도 되는지, 아니면 상사를 따라 그의 집까지 올라가 마지막까지 도와야 하는지 결정이 서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차에서 내린 제어드는 그의 도움을 일절 거절한 채 잠든 여자를 손수 안고는 넓은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어왔다. 리치가 한 일이라곤 고작 여자의 가방을 들고 상사의 뒤를 따른 것이 전부였다.

비에 흠뻑 젖은 데다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동양 여자를 안고 있는 제어드 아이언의 모습이라니, 감히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띵, 하는 신호음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은색의 심플한 내부가 드러났다.

리치는 은색 문이 다시 닫힐 때까지 그렇게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 *



“젠장, 가만히 좀 있으라니까!”

계속 이리저리 꼼지락거리는 여자를 안은 채 균형 잡기가 쉽지 않았다.

이제 여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까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한정민! 이 치사한 자식…… 어, 어떻게 오빠가 나한테 그래? 어떻게 네가 나한테 그러냐고! 미워, 한정민!…… 정말 미워…… 밉다고! 난 이제 어쩌라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한정민? 이름인가?

무슨 뜻인지 의미는 이해할 수 없다 해도 그것이 한국어이고 누군가를 원망하는 듯한 여운만은 분명히 전해졌다.

그 문제의 남자가 한정민인가?

찌릿. 뭔가 낯선 감각이 가슴 안쪽을 쿡쿡 찌르며 건드렸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소이의 독백은 잠잠해졌다.

제어드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여자의 몸을 다시 바로 안았다.

아무리 마른 체형이라 해도 성인 여성을, 그것도 술에 취해 몸도 못 가누고 축 처진 여자를 안고 있자 금세 에너지가 바닥나면서 온몸이 비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살짝 고개를 돌리자 반투명 금속 표면에 비친 두 사람의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절로 매끈한 미간이 모여들었다.

여자를 안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낯설다.

리치의 도움마저 거절한 채 사서 고생을 하는 자신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차라리 근처 아무 호텔에 내려주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이젠 이곳까지 데려온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이었는지조차 제대로 판단이 서지 않는다.

대체 이 여자가 뭐라고, 다른 곳도 아닌 그만의 은신처에…….

소이가 다시 꼼지락거리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할 새가 없었다.

그는 다시 그녀를 바로 안고서 어서 빨리 엘리베이터가 맨 꼭대기 층에 도착하기만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