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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꿈속의 남자



온통 검은 세상은 갑작스런 빛과 함께 훅, 사라졌다.

남자의 끈적이는 눈빛은 순식간에 분위기를 압도했다. 빨려 들어갈 듯 강렬히 저를 바라보는 시선은 절대 피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며, 도드라진 힘줄이 단단히 박힌 팔뚝을 잡았다.

[아…….]

제 손으로 감히 감당할 수 없는 단단한 팔뚝에 그녀는 이성의 끈을 놓은 지 오래였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수컷의 향이 진하게 풍겼다. 남자의 짙은 눈썹이 본능에 꿈틀거렸다.

[흣……. 아……. 거긴…… 아!]

꾹 참으려 했으나 젖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세계를 거칠게, 때론 부드러이 파고드는 집요한 손길에 그녀의 몸은 불덩이마냥 훅 달아올랐다.

남자는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며, 이내 픽 입꼬리를 올렸다. 적당히 두툼한 입술이 섹시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남자의 입술을 훔쳤다. 할 수밖에 없는 행동이었다.

[하아…….]

온몸이 흥분으로 젖은 그녀는 반쯤 풀린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농염한 신음이 터져 나오자,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보드라운 속살을 훑듯 쓰다듬었다.

[이런 거 원한 거 아니었습니까?]

그녀가 깜짝 놀라 원망스런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짓궂은 장난이 뜨거웠다. 그녀의 눈길에도 아랑곳 않고 남자는 손가락으로 장난을 쳐 댔다.

[아, 아……. 제발!]

그녀는 이 순간을 갈망했다. 이 황홀한 쾌락은 도저히 멈춰지지가 않았다. 장난을 멈춰 달라고, 그녀는 소리치고 있었다.

남자는 그녀의 욕망에 젖어 잔뜩 풀린 얼굴을 감상했다.

곧, 남자가 단추를 하나둘 풀고 와이셔츠를 벗자 탄탄한 상체가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목덜미에 쪽, 입을 맞추며 그녀가 더더욱 안달 나게 만들었다. 남자는 매우 짓궂었다.

[하아……. 제발이요. 제발.]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으면 했다. 신음 섞인 목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렸다.

남자는 보기 좋게 그녀를 놀리듯 웃었다.

[……기다려.]

미간이 팍 좁혀졌다. 행여 그 말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걸까. 남자는 입술로 그녀의 입을 거칠게 틀어막았다.

서로의 신음이 섞이며 절정에 다다른 그때였다.

또다시 검은 세상이, 두 사람을 덮쳤다.

“……꺄아아아악!”

해라는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테이블에 놓인 소주 뚜껑이 툭 떨어진다.

“미쳤어, 진짜……. 또야?”

퀭해진 눈가를 대충 비비며 해라가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였다. 이건 말도 안 된다.

또 그 꿈이다. 해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에 풀썩 드러눕자, 천장엔 둥둥.

아까의 꿈이 떠올랐다.

[……이런 거 원했습니까?]

다부지고 탄탄한 몸과 떡 벌어진 어깨와 상체, 날렵하고도 단단한 턱선까지. 또 짙은 눈썹은 어찌나 남자답던지, 저를 바라보는 눈빛은 훅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내가 원했다고?”

비록 꿈이었지만, 모든 게 생생했다. 오죽했으면 남자의 미간에 끼이고 싶다 생각했을까.

“말도 안 돼.”

해라는 손을 쭉 내밀었다. 남자의 넓은 등을 쓸어내리고, 팔뚝을 잡았던 온기가 그대로였다. 마치 실제처럼 생생했는데, 꿈이라니. 해라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건 미쳤다, 미친 짓이다. 이딴 빌어먹을 상황이 꿈으로 나타나다니. 말도 안 된다. 게다가 이 빌어먹을 꿈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미칠 것 같았다.

「쭌♥300일」

이 꿈의 시작은, 정확히 전 남자 친구 강민준과 헤어지고 난 후부터였다.



***



꿈에 먹혀들어 가고 있는 걸까. 그 꿈을 꾸고 난 뒤부터 해라는 종종 잠을 설쳤다. 작사가이자 소설가인 해라는 집필 활동만큼이나 잠을 중요시했다.

‘우리, 헤어지자.’

그녀는 전 연인인 민준과 사귄 지 300일을 맞이했을 때 어이없는 이별 통보를 당했다. 이유는 해라에게 질려서, 더 명확한 이유는 자기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새로운 연인과의 바람이었다.

민준은 실수이자 일탈이라 말했다. 단 한 번의 일탈이, 사랑이 되냐?

‘미친놈. 뭐, 스물두 살? 야. 걔 아직 대학생이야.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야, 꺼져. 내가 너 찬 거야. 알았어?!’

확, 사고라도 나라. 해라는 그렇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난 지금, 해라에게 민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 남친에게 갖는 구질구질한 미련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날 이후로 시작된 빌어먹을 꿈 덕분에 민준이 들어찰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단지 헤어졌을 뿐인데. 기다렸다는 듯, 기이한 ‘꿈’이 시작되었다. 칼에 찔리거나 무언가에 계속해서 죽는 꿈이 아닌, 낯선 남자가 나타나는 꿈이라.

그러나 해라는 꿈을 꾼다는 것 자체가 힘들었고, 짜증이 났다. 원인 모를 꿈을 꾸지 않기 위해 잠을 자지 않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렇게 살다간 아마 제명에 못 살고 죽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친구 연정의 도움으로 찾아간 기이한 분위기의 무당집.

그곳에선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액운이 잔뜩 꼈네, 잔뜩 꼈어.”

“……액운이요?”

“애인하고 헤어졌다 했지? 꼈어, 그놈 때문에 액운이 잔뜩 낀 거야.”

꿈을 꾸기 시작한 뒤로, 종종 이상한 일이 생겼다. 코피가 난다거나 한여름인데도 몸이 으슬으슬 춥다거나. 물론 마감 탓에 체력 관리를 못 한 것도 있었지만, 해라는 꽤 건강했다.

“왜 하필 제가 그놈 때문에 액운이 껴야 하는데요, 왜……?”

“그야 그건 나도 모르지. 아가씨도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넌 헤어지고 나서도 내 속을 썩이냐? 민준의 액운이 해라에게 옮겨 간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해라는 머리가 아팠다.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일을 어쩌면 좋냐.

썩을, 빌어먹을! 진짜 찾아가서 머리 다 뽑아 버려? 욕이 절로 나왔다.

해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용하디용한 무당의 눈을 간절히 바라보았다.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니. 액운이라니요. 지금 한창 창창할 때인데 액운 끼면, 뭐 죽기라도 해요?”

해라가 따지듯 무당에게 물었다. 무당이 가지고 있는 기운이 워낙 세 압도당할 것 같지만, 그녀는 지금 어디에서 우악스럽게 소리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만큼 답답했고, 간절했다. 붉게 칠한 무당의 입술 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정작 한숨 쉬고 싶은 사람은 나라구요. 해라가 하려던 말을 꾹 참았다.

“……기운이 약해.”

“뭐, 뭐……. 기운이요?”

무당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이어 말했다.

“액운을 없애지 않으면, 아마 힘들 거야. 아가씨 운도 없는 거지.”

“하아. 진짜 안 그래도 요즘 꿈 때문에 뒤숭숭한데 액운까지.”

해라가 답답함에 머리를 헝클였다. 순간, 무당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꿈? 무슨 꿈?”

해라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사실 꿈 때문에 찾아온 거긴 한데, 시작도 전에 다짜고짜 액운이 끼었다 하시니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고. 뭐, 그런?”

“무슨 꿈인데?”

“어‥‥‥ 음.”

사실대로 털어놓기에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꿈속에서 남자랑 한다는데, 이상하게 볼 게 당연했다. 해라는 무당의 시선을 피하며 애써 심드렁히 대답했다.

“그냥 제가 모르는 사람이 계속 꿈에 나와요.”

모르는 사람? 무당의 눈이 가늘다 못해 매섭게 떠졌다. 해라는 무당에게서 절로 느껴지는 위압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꿈. 천생이구만.”

“……예?”

처, 천생이요? 해라가 되물었다.

“꿈 말이야. 천운이라고.”

이름 모를 남자랑 섹스하는 꿈이요? 해라가 실소를 터트렸다.

“그게 말이 돼요? 그딴 꿈이 왜…….”

그러거나 말거나 투덜대는 해라의 말을 뭉텅 끊고, 무당이 말했다.

“남자 있지?”

“아니요, 없는데요.”

“남자 있잖아.”

“아니요, 없다니까요.”

“아니, 꿈속에.”

“…….”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꿈을 꾸고 있다는 이야기만 했지, 남자가 있다곤 말한 적이 없었다.

해라는 그제야 이 무당은 진짜라는 걸 알았다. 입술이 바짝 말라 왔다.

“……네, 꿈에 남자가 나와요. 혹시 뭔 연관 있는 거예요?”

무당이 주름 진 눈가로 해라를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역시 천생이야, 천생. 꿈속 남자를 만나야 해. 그래야 네 액운도 없어지지.”

“……네? 그 남자를 만나라고요?”

참으로 얼토당토않은 일이다. 연고지도 모르는 남자를 어떻게 찾아요. 해라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무당은 진지했다.

“아가씨 운에 안 보여.”

“…….”

“죽는 거밖에 없어. 액운에 죽음이 꼈어, 죽음이.”

쿵, 뒤이어 들린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녀는 죽음을 말했다.

“3개월이야. 생명 줄이 안 보여. 그 액운이 잔뜩 껴서.”

강민준, 개자식. 이 나쁜 놈.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아니, 이건 너무 갑자기잖아요?”

요즘 무당님은 시한부 선고도 대신 해 주시나요? 해라는 모든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액운이 생명 줄을 막아, 기껏해야 3개월 살 수 있다는 말. 그럼 3개월 후엔 죽는다는 말이잖아? ……내가 왜 그래야 해? 내가 대체 뭔 죄를 지었기에.

무당이 뜸을 들이다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 남자를 만나 꿈속에서 했던 걸 그대로 해야 해. 그게 아니라면 진심으로 사랑하거나.”

“…….”

“명심해. 천생이야, 천생.”

그리고 그 말은, 어쩌면 지금 해라에게 죽음보다도 더 어려운 말이었다. 나비효과는 잔인했다. 그녀는 남자를 만나지 않으면 3개월 후에 죽는다. 평범한 줄 알았던, 단지 연인과 헤어진 후 나타난 아주 특이한 후유증인 줄 알았던 꿈은, 죽음으로부터의 경고였다. 그리고 일종의 도움 신호.

해라는 다급히 무당을 잡으며 말했다.

“잠시만요! 이, 일단 알겠어요. 근데 그럼…… 그 꿈속 남자를 만나면요? 그러니까, 사랑에 빠진다고 쳐요. 그럼 그다음은요?”

그녀는 지금 이 순간 1분 1초가 간절했다. 갑작스런 시한부 판정에 당황으로 눈물이 쏙 들어가 나오지도 않았다. 무당집에 불어오는 바람은 잔잔했다. 마치 시작을 알리듯.

“날 찾아와.”

무당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이유 모를 섬뜩함과 함께 마치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때, 무당의 주위에 바람이 불더니 아주 작은 나비 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시작이었다.

“난 어디에나 있을 테니까.”

마법이라면, 마법.

예측 불가한 운명의 시작.

모든 건 꿈으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