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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어둑해진 밤. 아파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지친 듯 한숨을 내쉰 그녀는 현관 문 앞에 섰다.

“영신아.”

현관문을 열려던 순간,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걸음을 멈춘 영신이 뒤를 돌아보자, 언제부터 있었는지 어둠 속에서 장신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세련된 곱슬머리 아래로 드러난 시원스러운 눈매와 오똑한 코가 자리를 잘 잡고 있었다, 잘 뻗은 다리가 훈훈함을 더해 주고 있다.

“배 대리님……?”

남자는 영신이 다니는 회사 최고의 훈남, 배재경 대리였다.

영신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뭐라 말을 하려는 순간 재경의 큰 손이 영신의 허리를 강하게 감싸 쥐더니 거칠게 끌어안았다.

재경은 자신의 품에 안긴 영신을 내려다보았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당황한 영신은 눈만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싶더니, 곧 부드러운 입술이 영신의 도톰한 입술을 집어삼켰다.

“……!”

당황해서 제대로 반응 하지 못하는 영신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그의 혀는 영신을 마음껏 유린했다. 혀에 감기는 뜨거운 감촉에 영신은 다리의 힘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런 영신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그의 손이 영신의 허리를 타고 올라갔다. 거친 듯 다정하게.

능숙한 손놀림에 그대로 그에게 몸을 맡기고 싶었다. 붉게 달아오른 영신의 얼굴을 재경이 다정하게 바라봤다. 그리고 그의 큰 손이 영신의 뺨을 감쌌다.

재경은 고개를 숙여 영신의 귓가에 속삭였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만한 소리가 아니었다. 당황한 영신은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재경은 여전히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다.

‘이상하지만 왠지 익숙한 이 소리. 설마. 이거. 제발!’

계속해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점심시간을 이용해 책상 위에 엎드려 자고 있던 영신의 눈이 힘겹게 떠졌다.

지긋지긋한 업무용 책상과 신경질적으로 울리고 있는 전화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꿈이었구나. 그러면 그렇지.’

“휴, 그래도…… 좋았는데.”

영신은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끝없이 주어지는 업무 때문에 며칠 밤을 야근으로 지새웠는지 모르겠다.

하루 종일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피로를 이기지 못해 점심마저 포기하고 단잠을 자고 있던 영신이었다.

그런데 이런 황금 같은 점심시간에 업무 전화라니!

이런 개 같은 매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네, 영업팀 지영신입니다.”

-영신 씨, 빨리 와 봐.

“네.”

부장은 영신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구철민 부장이었다. 그는 개매너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이런 경험이 하도 많아서 이젠 욕도 나오지 않는다.

영신은 부장의 전화에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168cm에 80kg. 언뜻 보아도 다소 무거운 몸집을 가지고 있다. 27년째 다이어트 중이지만 살이 빠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세히 보면 귀여운 얼굴이지만 무거운 몸 탓에 연애를 해 본 경험은 없다.

‘또 무슨 일로 부르는 거지, 망할 놈의 부장.’

부장이라는 사람의 힘은 정말 대단하다. 전화 한 통으로 사람의 기분을 이렇게 초조하고도 더럽게 만들다니.

영신은 투덜거리며 바쁜 걸음으로 부장실로 향했다.

퍽.

부장을 욕하는 데 너무 심취한 나머지 앞을 제대로 보지 않고 걷던 영신은 맞은편에서 오던 사람과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부딪치고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딴 생각을 좀 하느라…….”

영신은 굽신거리며 떨어진 노트를 주워서 건네주었다. 노트를 건네받는 가늘고 긴 손가락. 여자 손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하얗고 예쁜 손. 영신이 몰래 훔쳐보다 못해 꿈에서까지 보았던 그 사람의 손이다.

“배재경 대리님, 아, 안녕하세요.”

“미안해요, 영신 씨. 제가 잘 보고 갔어야 했는데. 어디 다치진 않았어요?”

외모뿐만 아니라 말투에서도 풍겨지는 훈훈함.

재경은 영신을 내려다보며 다정하게 물었다. 영신의 심장이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무언가 말을 해야 하는데. 재경과 무슨 말이 되었든 더 나누고 싶은데.

“네, 네. 잘 계세요.”

절실한 마음과는 달리 입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인사가 튀어나왔다. 영신은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잘 계세요, 라니! 이런 멍청이! 등신!’

얼마나 보고 싶었던 사람인데! 꿈에서도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던 사람인데!

소중한 기회를 바보같이 날려 버린 자신이 이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신나게 자책하다 보니 어느새 부장실에 도착했다. 영신은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부장실에는 같은 부서의 여사원인 소란이 먼저 와 있었다.

“부장님, 죄송해요. 제가 실수했나 봐요.”

소란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영신의 옆에 있어서인지 그렇지 않아도 날씬한 소란의 몸매가 더 가녀리게 보였다.

“허허허, 괜찮아.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지. 신경 쓰지 마세요. 허허허허.”

영신은 기가 찼다. 저런 눈빛으로 저렇게 호탕하게 웃는 부장을 영신은 본 적이 없었다.

“역시 부장님 최고! 감사합니다.”

소란은 애교 섞인 멘트를 날리곤 영신의 옆을 지나쳐 부장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불난 집에 기름 붓듯이 영신을 보며 슬쩍 웃었다. 비웃는 듯한 웃음에 영신의 식욕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영신은 분한 마음을 억지로 삼키고 간신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부장에게 말했다.

“부장님, 부르셨어요?”

소란을 따뜻하게 바라보던 부장의 눈빛이 급격하게 차가워졌다. 그는 일단 한숨을 크게 내쉬고 시작했다.

“이봐, 영신 씨. 회의 자료 복사해 오라고 한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안 가져와?”

“죄송합니다……. 그런데요, 부장님…….”

“왜?”

평상시에는 군말하지 않던 영신이지만 방금 소란을 대하는 부장의 태도를 보니 참을 수가 없었다.

당신이 시킨 일만 해도 몇 개인지 아냐고! 복사하는 단순한 일 정도는 소란이를 시키라고! 눈을 부라리며 따지고 싶었다.

주먹을 쥐고 있는 영신의 팔이 바르르 떨렸다. 하지만 날카로운 얼음 파편같이 꽂히는 부장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몇 번이고 시도해 보았지만 본드를 붙인 듯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뭐? 할 말 있어?”

“……아닙니다.”

“나가 봐요. 바빠 죽겠는데 괜히 시간을 끌고 있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자리로 돌아온 영신은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괜히 모니터만 쳐다보고 씩씩거리고 있는데 김명진 과장이 다가왔다. 과장은 영신을 잠시 쳐다보더니 기분 나쁘게 실실 웃으며 말했다.

“이봐, 영신 씨. 점심 먹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배고파? 한가하게 앉아서 먹을 것만 생각하지 말고 가서 복사 용지나 좀 가져와.”

그렇지 않아도 부장 때문에 열 받아 죽겠는데!

이번엔 참을 수 없었다. 화가 난 영신이 뭐라고 한마디 하려 했지만, 과장은 그녀의 책상을 주먹으로 툭 두드리고는 지나가 버렸다.

영신의 옆자리인 소란은 모니터에 쇼핑몰을 켜 놓은 채 한가하게 휴대폰만 만지고 있다.

항상 휴대폰만 두드리는 소란도 있는데 왜 자신에게만 일을 시키는 걸까.

심지어 소란은 저보다 늦게 들어왔는데 왜 매번 자신이 단순한 허드렛일까지 전부 해야 하는지 생각할수록 분했다. 몇 년 동안 받아온 차별과 구박에 대한 서러움이 폭발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영신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차별이나 하는 이딴 회사가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먹고는 살 수 있겠지.

‘그래, 그만 두자. 오늘. 지금 당장.’

결심을 한 영신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쪽 소매로 볼에 흐르는 눈물을 쓱 닦았다. 미처 다 식히지 못한 영신의 두 볼은 여전히 빨갛다.

“소란 씨, 커피 마셨어? 커피나 한잔 할까?”

“호호호, 과장님 어쩌죠. 방금 마셨는데. 죄송해요~”

“에이, 한 잔 더 마시면 되지. 내가 맛있게 타 줄게.”

실실 웃으며 소란과 이야기 하던과장은 자리에 서 있는 영신을 발견했다. 붉게 달아오른 두 볼이 영신의 육중한 몸과 어울리는 것 같아서 피식 웃었다.

“오, 영신 씨. 탕비실 가서 뭐 먹으려고? 크크큭. 그럼 오는 길에 여기 커피 두 잔 부탁해.”

그 말이 영신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결국 그녀는 폭발했다.

“……과장님이 가서 직접 타 드세요.”

영신이 정색을 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영신의 모습을 처음 본 과장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곧 옆에 있는 소란을 의식하고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영신 씨 지금 뭐라고 했어?”

과장은 눈을 부릅뜨고 화난 얼굴로 영신을 향해 다가왔다.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과장님……, 아니 네가 커피 타서 쳐 먹으라고, 이 개자식아!”

사무실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영신에게 쏠렸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보니 자신이 저지른 일이 실감났다.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다. 영신은 주먹을 힘껏 쥐었다.

“지영신! 너 지금 뭐라고 한 거냐? 직장 상사한테 개자식? 너 미쳤냐?”

“그래, 미쳤다! 내가 뭘 먹든지 신경 쓸 시간에 커피는 너 손으로 타 먹어! 넌 손이 없냐? 네 멸치 같은 몸뚱아리에 멍청하게 달려 있는 그건, 손이 아니고 발이냐?”

주변에서 피식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린다. 무엇 때문에 웃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영신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사직서를 품에 가지고 다닌 지 1년이 넘었다. 지금 당장 사직서를 던져 버리고, 멍청한 얼굴로 서 있는 과장의 엉덩이를 발로 힘껏 차 주고 싶었지만 꾸욱 참았다.

누군가 그랬다. 사직서는 부장의 얼굴에 던지는 것이라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영신은 몸을 돌려 부장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