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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타이틀드(Untitled) 4화
1. Spring Semester (4)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네. 역시 형아뿐이야?”
“자꾸 개소리하네. 아픈 사람 구박할 만큼 막돼먹진 않아서 그런다, 왜.”
“재윤아.”
이건 아주 안 좋았다. 놈이 장난기가 빠진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를 때는 항상 뭔가 심각한 이유가 있었다. 처음에는 부모의 이혼 사실을 고했고, 그다음에는 입대 사실을 알렸다. 세 번째는 무엇일지 감도 안 왔다. 열 오른 팔이 내 허리를 감고 끌어당겼다.
“재윤아아.”
밀착된 상반신으로 전이되는 체온에 몸이 미약하게 굳었다. 그저 어리광일 뿐인가 싶어 손을 들어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약 기운이 퍼지는지 눈꺼풀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놈이 웅얼거렸다. 졸린데.
다음 순간 나는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얼어붙었다. 항히스타민제 탓인 게 분명했다. 항히스타민제 때문이어야만 했다. 내 뺨에 낯설기 짝이 없는 말캉하고 뜨뜻한 감촉이 느껴진 이유는.
***
닷새째 주승언을 보지 못했다. 공학관이 넓기는 해도 신입생이 아닌 이상 동선이 어느 정도는 겹치게 되어 있었으므로, 사실 보지 못했다기보다는 내가 피했다는 말이 옳았다.
그날 낯선 입술이 닿는 느낌에 얼어붙은 나를 두고 놈은 잠들어 버렸다. 멱살을 잡고 방금 그건 뭐였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잠들기 직전까지 계속 아파 보였다는 것 때문에 행동으로는 옮기지 못했다.
남자를 향한 내 적대적 결벽을 아는 놈이었다. 그래서 더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랐다. 공황에 빠졌다가 어느 순간 잠이 든 나를 두고 놈은 훌쩍 자취방을 떠났다. 닫힌 노트북 위에 붙은 메모지에는 ‘덕분에 완쾌. 간병비로 호텔식 한 번 더?’ 같은 재수 없는 소리만이 한 줄 쓰여 있었다.
생긴 것만큼이나 날렵한 필체의 글씨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답이 없는 고민에 빠졌다. 별생각 없이 한 장난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장난조차도 안 되는 의미 없는 행동일 수도 있는 것이고 말이다. 마음속 지면에 삽을 꽂아 넣고 실컷 땅굴을 파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딱 일주일 만의 조우였다. 동아리 회원들을 기다리며 소파에 방만하게 널브러져 유정현이 술 먹고 떨어뜨리는 바람에 약정도 한참 남았는데 액정이 깨졌다는 휴대폰을 구경하고 있었다.
“너는 진짜 술 좀 줄여야 돼.”
“하지만…. 난 알코올이 없으면 살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는걸!”
소름 끼치는 말투에 정색하고 인상을 찡그리며 대꾸했다.
“그럼 매번 폰 살 때마다 액정 깨 먹든가.”
“저주를 해라, 그냥.”
지루한 주고받기였다. 민하 형이든 하영 누나든 누구라도 와서 날 좀 즐겁게 만들어 줬으면……. 내 무료함의 원인을 부재중인 사람들에게 떠넘기는 도중에 동아리방의 문이 열렸다.
“승언이 형!”
이번에도 주승언 극성팬이 빨랐다. 안녕, 입 모양으로 인사한 놈이 안으로 들어왔다.
“너는 말이야, 형이 다 나았는지 확인도 안 하고. 나 상처받았다.”
볼이 콱 잡혔다. 아파! 얼굴을 찡그리는데 유정현이 호들갑을 떨었다.
“형 아팠어요?! 아니 웬일이래.”
“그냥 감기야.”
내가 대신 답했다.
“다 나았다고 포스트잇에 써 놓고 나갔길래 그런가 보다 했지.”
“인의도 모르는 놈.”
남한테 허락도 안 받고 뽀뽀한 양심 불량이 할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예전에 남자가 껴안았을 때만큼 소름 끼치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이 나로서도 충격이었다. 애정도나 익숙함의 차이일지도……. 하긴, 아빠가 면도 안 한 볼로 비벼 댈 때도 질색하긴 했어도 생리적인 거부 반응은 없었으니. 주승언도 나름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라고 내 안에서 정의 내린 지 오래였으므로 그 비슷한 것일 테다.
놈이 내 옆에 털썩 앉았다. 유정현은 누군가와 메시지로 대화하고 있었다. 화면을 슬쩍 들여다보자 민하 형이다.
“형 언제 온대?”
“서하 누나랑 편의점에서 먹을 거 사 온다는데. 금방 올 듯.”
얌전히 앉아서 휴대폰 모서리를 만지작대던 주승언이 갑자기 몸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숨을 들이마신 놈이 물었다.
“향수 뿌렸어?”
“뭔 소리야. 나 향수 안 쓰는 거 알잖아.”
“그랬나?”
다시 한번 목덜미에 코를 가까이 댄 놈의 숨결이 나를 간지럽혔다. 잘못하다간 이상한 소리로 웃음을 터뜨릴 것 같아서 표정을 갈무리하고 말했다.
“샴푸 냄새 아냐?”
“음…. 과일 향 같은데.”
“샴푸 맞네.”
엊그제 평소에 쓰던 종류가 다 나가서 어쩔 수 없이 1+1 행사 중인 과일 향 샴푸를 사 왔는데 그걸 또 귀신같이 알아챈다. 어느새 무허가 뽀뽀에 대한 추궁은 잊은 채 평소처럼 대화하고 있었다. 사실 이제 와서 일주일 전 이야기를 따지기도 뭐했다. 나는 역시 주승언한테 심각하게 무른 것 같았다. 호텔식은 두 번 뜯어야 계산이 맞지 않을까.
동아리 모임은 오늘도 별 소득 없이 끝났다. 방학에 참가할 공모전에 대한 짧은 브리핑 이후에는 중구난방으로 잡담이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민하 형은 이게 일종의 휴식이라고 했다.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놀기도 쉽지 않으니까. 술만 먹고 살 수도 없는 일이고.’ 유정현이 곧바로 반박했다. ‘술만 먹고도 살 수 있거든요!’, ‘그건 너나 그렇지 임마.’
주승언은 오늘따라 유독 말이 없었다. 휴대폰 진동음에 두어 번 화면을 확인하더니 관심 없다는 듯 아예 전원을 꺼 버린다. 곧 어깨로 무게감이 느껴졌다. 오늘 입은 건 네크라인이 좀 크게 파인 오버사이즈 티셔츠라 놈의 머리카락이 맨살에 닿았다. 간지러워서 몸을 움츠리는데도 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뭐야, 주승언 자?”
해정이랑 떠들던 하영 누나가 내 쪽으로 잠깐 고개를 돌렸다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저거 1학년 때 동아리 엠티 가서는 오만 까탈을 다 부리면서 잠도 안 자고 버티더니. 와, 민폐…. 내가 진심으로 어이없어하자 하영 누나가 낄낄 웃었다.
“쟤 너네 집 가서 잔다는 소리 처음 들었을 땐 뻥인 줄 알았다니까.”
“제 자취방 와서도 침대 아니면 못 잔다고 저 밀어 내요….”
“헐 재윤 오빠 불쌍해.”
해정이는 충격을 받은 듯했다. 본인 앞담이 오가는지도 모르고 잠든 주승언을 집주인을 침대에서 몰아내는 약탈자 정도로 여기는 얼굴이었다.
“그치, 나 불쌍하지.”
내 투덜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유정현이 반발했다.
“나의 영웅 승언이 형이 이렇게 까이다니. 안 되겠네. 형은 우리 집으로 모실게.”
“대신 부담해 줘서 고맙다.”
하영 누나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주승언 진심으로 짐짝 취급하는 건 재윤이밖에 없을 거 같아.”
“저 말고 한 명쯤은 더 있지 않을까요?”
진심을 가득 담아 한 소리였는데 이번엔 유정현까지 웃었다.
“너 승언이 형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는구나.”
영인이 형이 안경을 벗어 렌즈를 후후 불면서 말했다.
“저 형 2학년 때 교양 수업에서 번호 따인 것만 내가 아는 게 다섯 번이야, 다섯 번. 다 군대 간다고 거절했는데 그중에 두 명은 기다릴 수 있다고까지 했다.”
그건 몰랐다. 하긴 얼굴만 본다는 사람들은 세상에 많을 거고 주승언은 그네들의 입맛에 딱 맞을 외양의 소유자였다. 10년을 질리도록 본 나조차도 놈을 볼 때면 잘생겼다는 감상이 문득 드는데, 저 얼굴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면 금방 넘어갈 만도 했다.
“얼굴만 보기로는 쟤도 만만찮은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는데 민하 형이 나에게 물었다.
“너는 얼굴 안 봐?”
“음, 안 본다기보다는…. 취향이 있긴 하지만 별로 그게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에요….”
생김새는커녕 이름마저 가물가물한 과거의 여자 친구들을 떠올렸다. 사귄 이유는 각양각색이었다. 말이 많아서 같이 있으면 안 심심하다든가, 수학 문제집 해설을 보면서 헤매고 있는데 풀이를 도와줬다든가, 우연히 손을 잡았는데 그 손이 따뜻했다든가.
사실 정확한 이유는 잘 몰랐으며 스스로 진지하게 궁금해한 적도 없었다. 그래서 한때 내가 가장 곤란하게 여긴 것은 ‘나 왜 좋아해?’ 같은 종류의 질문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내가 상대에게 호감 어린 행동을 보이면 그들은 곧바로 나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기 때문에 사귀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거나 밀당이 길었다거나 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친구 놈들은 나한테 연애 상담을 하러 왔다가도 공감대 형성이 안 된다며 구박했다.
어쨌거나 연애사에 있어서만큼은 별다른 굴곡이 없었다. 극적인 사랑 이야기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가장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런 건 인간의 비현실적인 바람을 가장 완벽한 형태로 구현한 픽션일 뿐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나의 사정일 따름이고, 내가 상대의 외모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이 꽤나 놀라웠는지 민하 형이 눈썹을 삐딱하게 움직였으며 유정현은 잠시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에 잠기더니 제 나름대로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양손을 깍지 껴 잡고 소파에 기대 있던 하영 누나가 몸을 일으키더니 느닷없이 말을 꺼냈다.
“재윤아, 소개팅할래?”
“네?”
맥락 없는 제안이었다. 봄이라고 커플 생성에 관심들 많으시네……. 돌아가면서 저렇게까지 여러 번 권하는데 한 번 정도야 못 나가 줄 것도 없긴 했다. 나는 하영 누나를 꽤 좋아했고 어지간한 부탁이나 권유는 다 들어주고 싶었다. 잠시 고민하는 척을 하다 긍정의 답을 내놓았다.
“그래요. 한번 하죠, 뭐.”
웬일이냐는 표정의 유정현과 하영 누나를 보면서 픽 웃었다.
“근데, 저 되게 끈기 없어요. 만약 잘 안 돼도 누나가 달래 줄 수 있는 사람으로 해 주세요.”
“그럼, 그럼. 우리 재윤이 까칠한 거 다 받아 줄 애로 자알 물색해 올게.”
하영 누나는 곧바로 휴대폰을 켜고 작업에 들어갔다. 나는 남의 일인 양 멀거니 스크롤을 내리는 손가락을 쳐다보다가 내 어깨 위로 시선을 돌렸다. 놈은 여전히 색색 호흡을 내뱉으며 자고 있었다. 손에 쥔 휴대폰이 떨어지기 직전인 것 같아 조심스럽게 빼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을 사락사락 소리가 나도록 쓸어 주었다.
***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동아리 모임 이틀 후 누나가 나에게 메시지로 상대에게 내 번호를 알려 주었다고 했다. 그날 저녁 낯선 이름으로부터 인사가 날아왔다. 어색한 몇 마디를 주고받은 다음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양식이 좋다기에 유정현하고 몇 번 갔었던 가게를 떠올려 위치를 알려 줬다.
상대는 인문대 학생이라고 했다. 같은 학교지만 단과대학 건물은 공학관과는 꽤 먼 곳에 있었다. 만약 잘 안 돼도 내가 곤란해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영 누나한테도 곤란하지 않을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일요일에는 주승언이 점심을 먹자고 불러내서 해 질 무렵까지 같이 있다가 헤어졌다. 저녁은 대충 아침에 먹고 남은 샐러드에 커피로 때웠다.
상대와 만난 화요일 저녁은 의외로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다. 내가 낯을 가리는 편이라는 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걱정을 했는데, 상대 여자가 조용한 목소리로도 대화를 잘 끌어내서 생각보다 편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다음을 기약하는 물음에 얼떨결에 답해 버리기까지 했다. 메시지로 대화가 자주 오가는 편은 아니라 그렇게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야, 이재. 어때?”
“뭐가 어때.”
“잘돼 가냐고.”
동아리가 모이는 날도 아닌데 진행 상황이 어지간히 궁금했던 건지 유정현과 하영 누나가 나를 불러다 놓고 물었다.
“그냥, 뭐.”
“너는 진짜, 이런 때까지 시큰둥하냐.”
“일단 누나가 내 성격을 무지하게 고려해 줬다는 건 알겠어.”
순수한 감상을 내놓았다. 나름 진심이었다. 조금만 거슬려도 상황을 불문하고 짜증부터 튀어나오는 성격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원래라면 영화관 같은 곳은 잘 가지도 않는데, 영화를 보자는 말에 알았다고만 답했다. 사실 소개팅 상대하고 적당히 함께할 만한 일이 없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싸하게 포장을 하려거든 못 할 건 없었다.
“너는 어떤데, 재윤아.”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누군가를 진지하게 좋아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런 종류의 만남에서 좋다 나쁘다를 정하기가 힘들었다. ‘장점이 하나 보여서 그 사람과 사귄다’였지, ‘그 사람하고 사귀기 위해 장점을 찾는다’는 내 매뉴얼에 없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데에도 노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나는 거기에 내 모자란 체력과 시간을 쏟아 가며 영원히 지속되지도 않을 결과물을 찾아 헤매고 싶지 않았다.
“잘 모르겠는데요.”
예상보다도 더 맹탕 같은 반응에 누나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미안하긴 하지만, 내가 원래 이렇게 생겨 먹은 것을 어쩌랴.
“일단 한 번 더 만나기는 할 건데.”
“우리 재윤이, 공략하기 어려운 남자구나.”
별…. 사람을 게임 퀘스트 취급하는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별로 어려운 것 같지 않은데. 중고등학교 때 만났던 여학생들은 그렇게 대단한 인사들이 아니었다. 그중에 한 명은 공부를 잘해서 의대를 가기는 했지만. 나름 깔끔하게 헤어진 축이라 합격 소식을 전해 왔을 때는 진심으로 축하해 줬었다. 어쨌든 외모로 보나, 행실로 보나 평범한 애들이었다. 애초에 나도 특별할 것 없는 학생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끼리끼리 만난다’는 말을 몸소 실천하던 게 내 학창 시절이었다.
하영 누나와 헤어지고 유정현과 도서관으로 갔다. 공대 도서관은 거의 항상 여석이 여유로운 편이긴 하지만 퀴퀴한 냄새가 장난이 아니라 열람실에는 발도 못 들이고 라운지에 앉았다. 조용히 책을 뒤적여 가면서 노트북만 두들겼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유정현의 것이었다.
“어, 왜. 지금 밥 먹자고? 나 재윤이랑 있는데. 어디? 공학? 알겠어.”
“누군데. 최은성이냐?”
“응. 근데 서한나랑 있다네?”
최은성이 오채영하고 둘이서는 자주 놀아도 서한나와 독대하는 건 내 기억으로는 처음이었다. 별일이네, 하고 중얼거렸는데 유정현이 그걸 알아듣고 동의의 표현을 한마디 던졌다. 가방을 대충 챙겨 지하 식당으로 내려갔다.
재앙 같은 식단이었다. 이 나이 먹고 반찬 투정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맞벌이 집안 21년차 외동으로서 진짜 내가 발로 만들어도 이것보단 낫겠다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싼 맛에 먹는 거라고는 해도 이건 좀 아니다. 학식 메뉴가 시원찮은 날에는 교직원 식당에 가 보라는 민하 형의 조언에 학생이 왜 교직원 식당에 가냐고 반문하던 작년의 내가 떠올랐다.
경양식 돈까스를 시킨 서한나와 최은성의 선견지명을 부러워하며 밥을 절반쯤 비웠다. 반찬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나물 이름은 매번 외우려고 해도 잊어버린다. 많이 기억해 봐야 콩나물과 고사리나물이 전부였다. 유정현은 일찌감치 항복 선언을 하고 매점에서 콜라를 사 와서 마시고 있었다.
“근데 너네 둘이 있는 건 처음 본다? 채영이는?”
유정현이 물었다. 최은성이 걔 집 갔어, 한마디로 일갈했다. 금요일이라 기숙사가 아닌 집에 갔다는 말인 듯했다.
별다른 이야기 없이 자연스럽게 해산했다. 최은성은 서한나하고 조금 더 있다가 간다며 1층까지 따라 나왔다. 그러고 보니 최은성은 나 소개팅한 거 모르는구나.
지하철역 근처까지 걸으면서 유정현에게 소개팅 얘기 다른 데 흘리지 말라고 한마디 했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이유가 궁금한지 왜냐고 묻는다.
“잘 안 될 것 같으니까.”
나도 사실 말로 짚어서 설명하기는 힘들었다. 그냥 감이 그랬다. 최은성이 몰라야, 오채영도 모르고, 서한나도 모르고. 스물한 해를 살면서 제일 알 수 없는 것 두 가지 중의 하나가 바로 나였다. 나머지 하나는, 뻔하지만 주승언이었고. 그놈은 지금 뭐 하려나. 일요일 이후로 못 봤다는 것을 깨닫자 문득 궁금해졌다. 실험이며 뭐며 학기 중에는 여지없이 바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같은 학교를 가기로 결정했을 때는 막연하게 단과대도 같고, 전공도 비슷한 계열이고 하니 같이 시간을 보낼 일이 많을 줄 알았다. 대학을 전혀 모르는 고등학생이나 할 법한 상상이었다. 놈을 직접 보고 과거의 오해를 실토해야 한다면 지금 당장 목매달고 죽는 쪽을 고려할 만큼 쪽팔린 이야기다. 기온은 점점 올라가는데 여전히 서늘한 것 같은 자취방에 으슬으슬 떨리는 몸으로 들어섰다.
***
소개팅 상대와 약속한 날은 토요일이었다. 점심은 간단히 영화관 근처 가게에서 해결했다. 이번에는 여자가 식당을 알아 왔다. 평소에도 먹는 양이 적은 내가 습관적으로 깨작대는 것이 신경 쓰였는지 계속 내 그릇을 힐끔거리는 바람에 결국 원래 양이 적은 편이라고 해명을 해야 했다.
영화는 손익분기점을 막 넘겼다는 적당히 웃긴 로맨틱코미디였다. 주말의 대학가 영화관은 역시나 커플 일색이었다. 커피만 쭉쭉 빨면서 대충 줄거리를 머릿속에 입력해 뒀다. 러닝타임 내내 여자는 노린 장면에서 참지 않고 웃거나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몇 가지를 속삭여 왔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면서 반응했다. 정신이 산만한 와중에도 커피 맛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났다.
상영이 끝나고 영화관을 나와 야외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여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같이 영화 봐 줘서 고마워. 사실 언니가 너 이럴 거라고 미리 말해 줘서 반신반의했는데, 그래도 진짜 예고한 그대로일 줄은 몰랐네.”
하영 누나가 처음부터 아예 기대를 하지 말라고 언질을 했던 모양이다. 민망한 웃음을 흘렸다. 나와는 동갑이라고 했었다. 이 뒤에 또 일이 있다는 말에 지하철 출구 앞에서 인사를 하고 다시 벤치로 돌아가 앉았다. 무엇을 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야말로 시간 낭비였다. 다리를 뻗고 손을 뒤로 짚어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주승언이 보면 다리 긴 척하느라 애쓴다고 한마디 하겠지. 소개팅 상대와의 짧은 연락을 제외하고는 며칠 내내 잠잠했던 휴대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헐떡이는 숨소리가 섞인 첫마디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온다. 의심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설마 이상한 타이밍에 전화 받은 건 아니겠지…….
“어디야?”
-헬스.
희미하게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언제 끝나는데?”
-두 시간 넘어서 이제 씻고 나가려고.
오래도 한다. 저 쓸데없는 근육질의 원천은 오버트레이닝이었다.
“나 밥.”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안 봐도 표정이 눈앞에 그려졌다.
-아직 3신데?
“그럼 커피.”
네네, 곧 가겠습니다. 놈이 가벼운 목소리로 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짧은 통화에도 이상하게 심란하던 것이 차분해졌다. 자취방까지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케이크도 사 달라고 해야지.
주승언은 맨몸으로 올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차를 끌고 나타났다. 조수석에 올라타자 엑셀을 밟는다.
“우리 어디 가?”
“간병비.”
잠깐의 궁리 후 호텔 이야기임을 알아차렸다. 로비 안쪽의 브런치 카페테리아는 점심까지 식사류를 팔고 오후부터는 카페만 영업한다고 쓰여 있었다. 그날 아침에 먹었던 카푸치노가 떠올라 이번에도 똑같은 것으로 주문했다. 주승언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막 운동을 하고 나와서 덥다고 했다.
머그잔의 손잡이를 무의미하게 만지작대고 있자니 놈이 손을 뻗어 내 손등을 툭, 건드렸다. 반응 없이 내버려 두니 아예 내 손을 끌고 제 앞으로 당겨 가서 손톱부터 손등에 드러난 뼈대까지 하나하나 살핀다. 뭐 해, 하고 묻자 관찰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놈과 대략 두 시간가량을 넋 놓고 있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1. Spring Semester (4)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네. 역시 형아뿐이야?”
“자꾸 개소리하네. 아픈 사람 구박할 만큼 막돼먹진 않아서 그런다, 왜.”
“재윤아.”
이건 아주 안 좋았다. 놈이 장난기가 빠진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를 때는 항상 뭔가 심각한 이유가 있었다. 처음에는 부모의 이혼 사실을 고했고, 그다음에는 입대 사실을 알렸다. 세 번째는 무엇일지 감도 안 왔다. 열 오른 팔이 내 허리를 감고 끌어당겼다.
“재윤아아.”
밀착된 상반신으로 전이되는 체온에 몸이 미약하게 굳었다. 그저 어리광일 뿐인가 싶어 손을 들어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약 기운이 퍼지는지 눈꺼풀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놈이 웅얼거렸다. 졸린데.
다음 순간 나는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얼어붙었다. 항히스타민제 탓인 게 분명했다. 항히스타민제 때문이어야만 했다. 내 뺨에 낯설기 짝이 없는 말캉하고 뜨뜻한 감촉이 느껴진 이유는.
***
닷새째 주승언을 보지 못했다. 공학관이 넓기는 해도 신입생이 아닌 이상 동선이 어느 정도는 겹치게 되어 있었으므로, 사실 보지 못했다기보다는 내가 피했다는 말이 옳았다.
그날 낯선 입술이 닿는 느낌에 얼어붙은 나를 두고 놈은 잠들어 버렸다. 멱살을 잡고 방금 그건 뭐였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잠들기 직전까지 계속 아파 보였다는 것 때문에 행동으로는 옮기지 못했다.
남자를 향한 내 적대적 결벽을 아는 놈이었다. 그래서 더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랐다. 공황에 빠졌다가 어느 순간 잠이 든 나를 두고 놈은 훌쩍 자취방을 떠났다. 닫힌 노트북 위에 붙은 메모지에는 ‘덕분에 완쾌. 간병비로 호텔식 한 번 더?’ 같은 재수 없는 소리만이 한 줄 쓰여 있었다.
생긴 것만큼이나 날렵한 필체의 글씨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답이 없는 고민에 빠졌다. 별생각 없이 한 장난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장난조차도 안 되는 의미 없는 행동일 수도 있는 것이고 말이다. 마음속 지면에 삽을 꽂아 넣고 실컷 땅굴을 파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딱 일주일 만의 조우였다. 동아리 회원들을 기다리며 소파에 방만하게 널브러져 유정현이 술 먹고 떨어뜨리는 바람에 약정도 한참 남았는데 액정이 깨졌다는 휴대폰을 구경하고 있었다.
“너는 진짜 술 좀 줄여야 돼.”
“하지만…. 난 알코올이 없으면 살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는걸!”
소름 끼치는 말투에 정색하고 인상을 찡그리며 대꾸했다.
“그럼 매번 폰 살 때마다 액정 깨 먹든가.”
“저주를 해라, 그냥.”
지루한 주고받기였다. 민하 형이든 하영 누나든 누구라도 와서 날 좀 즐겁게 만들어 줬으면……. 내 무료함의 원인을 부재중인 사람들에게 떠넘기는 도중에 동아리방의 문이 열렸다.
“승언이 형!”
이번에도 주승언 극성팬이 빨랐다. 안녕, 입 모양으로 인사한 놈이 안으로 들어왔다.
“너는 말이야, 형이 다 나았는지 확인도 안 하고. 나 상처받았다.”
볼이 콱 잡혔다. 아파! 얼굴을 찡그리는데 유정현이 호들갑을 떨었다.
“형 아팠어요?! 아니 웬일이래.”
“그냥 감기야.”
내가 대신 답했다.
“다 나았다고 포스트잇에 써 놓고 나갔길래 그런가 보다 했지.”
“인의도 모르는 놈.”
남한테 허락도 안 받고 뽀뽀한 양심 불량이 할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예전에 남자가 껴안았을 때만큼 소름 끼치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이 나로서도 충격이었다. 애정도나 익숙함의 차이일지도……. 하긴, 아빠가 면도 안 한 볼로 비벼 댈 때도 질색하긴 했어도 생리적인 거부 반응은 없었으니. 주승언도 나름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라고 내 안에서 정의 내린 지 오래였으므로 그 비슷한 것일 테다.
놈이 내 옆에 털썩 앉았다. 유정현은 누군가와 메시지로 대화하고 있었다. 화면을 슬쩍 들여다보자 민하 형이다.
“형 언제 온대?”
“서하 누나랑 편의점에서 먹을 거 사 온다는데. 금방 올 듯.”
얌전히 앉아서 휴대폰 모서리를 만지작대던 주승언이 갑자기 몸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숨을 들이마신 놈이 물었다.
“향수 뿌렸어?”
“뭔 소리야. 나 향수 안 쓰는 거 알잖아.”
“그랬나?”
다시 한번 목덜미에 코를 가까이 댄 놈의 숨결이 나를 간지럽혔다. 잘못하다간 이상한 소리로 웃음을 터뜨릴 것 같아서 표정을 갈무리하고 말했다.
“샴푸 냄새 아냐?”
“음…. 과일 향 같은데.”
“샴푸 맞네.”
엊그제 평소에 쓰던 종류가 다 나가서 어쩔 수 없이 1+1 행사 중인 과일 향 샴푸를 사 왔는데 그걸 또 귀신같이 알아챈다. 어느새 무허가 뽀뽀에 대한 추궁은 잊은 채 평소처럼 대화하고 있었다. 사실 이제 와서 일주일 전 이야기를 따지기도 뭐했다. 나는 역시 주승언한테 심각하게 무른 것 같았다. 호텔식은 두 번 뜯어야 계산이 맞지 않을까.
동아리 모임은 오늘도 별 소득 없이 끝났다. 방학에 참가할 공모전에 대한 짧은 브리핑 이후에는 중구난방으로 잡담이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민하 형은 이게 일종의 휴식이라고 했다.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놀기도 쉽지 않으니까. 술만 먹고 살 수도 없는 일이고.’ 유정현이 곧바로 반박했다. ‘술만 먹고도 살 수 있거든요!’, ‘그건 너나 그렇지 임마.’
주승언은 오늘따라 유독 말이 없었다. 휴대폰 진동음에 두어 번 화면을 확인하더니 관심 없다는 듯 아예 전원을 꺼 버린다. 곧 어깨로 무게감이 느껴졌다. 오늘 입은 건 네크라인이 좀 크게 파인 오버사이즈 티셔츠라 놈의 머리카락이 맨살에 닿았다. 간지러워서 몸을 움츠리는데도 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뭐야, 주승언 자?”
해정이랑 떠들던 하영 누나가 내 쪽으로 잠깐 고개를 돌렸다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저거 1학년 때 동아리 엠티 가서는 오만 까탈을 다 부리면서 잠도 안 자고 버티더니. 와, 민폐…. 내가 진심으로 어이없어하자 하영 누나가 낄낄 웃었다.
“쟤 너네 집 가서 잔다는 소리 처음 들었을 땐 뻥인 줄 알았다니까.”
“제 자취방 와서도 침대 아니면 못 잔다고 저 밀어 내요….”
“헐 재윤 오빠 불쌍해.”
해정이는 충격을 받은 듯했다. 본인 앞담이 오가는지도 모르고 잠든 주승언을 집주인을 침대에서 몰아내는 약탈자 정도로 여기는 얼굴이었다.
“그치, 나 불쌍하지.”
내 투덜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유정현이 반발했다.
“나의 영웅 승언이 형이 이렇게 까이다니. 안 되겠네. 형은 우리 집으로 모실게.”
“대신 부담해 줘서 고맙다.”
하영 누나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주승언 진심으로 짐짝 취급하는 건 재윤이밖에 없을 거 같아.”
“저 말고 한 명쯤은 더 있지 않을까요?”
진심을 가득 담아 한 소리였는데 이번엔 유정현까지 웃었다.
“너 승언이 형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는구나.”
영인이 형이 안경을 벗어 렌즈를 후후 불면서 말했다.
“저 형 2학년 때 교양 수업에서 번호 따인 것만 내가 아는 게 다섯 번이야, 다섯 번. 다 군대 간다고 거절했는데 그중에 두 명은 기다릴 수 있다고까지 했다.”
그건 몰랐다. 하긴 얼굴만 본다는 사람들은 세상에 많을 거고 주승언은 그네들의 입맛에 딱 맞을 외양의 소유자였다. 10년을 질리도록 본 나조차도 놈을 볼 때면 잘생겼다는 감상이 문득 드는데, 저 얼굴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면 금방 넘어갈 만도 했다.
“얼굴만 보기로는 쟤도 만만찮은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는데 민하 형이 나에게 물었다.
“너는 얼굴 안 봐?”
“음, 안 본다기보다는…. 취향이 있긴 하지만 별로 그게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에요….”
생김새는커녕 이름마저 가물가물한 과거의 여자 친구들을 떠올렸다. 사귄 이유는 각양각색이었다. 말이 많아서 같이 있으면 안 심심하다든가, 수학 문제집 해설을 보면서 헤매고 있는데 풀이를 도와줬다든가, 우연히 손을 잡았는데 그 손이 따뜻했다든가.
사실 정확한 이유는 잘 몰랐으며 스스로 진지하게 궁금해한 적도 없었다. 그래서 한때 내가 가장 곤란하게 여긴 것은 ‘나 왜 좋아해?’ 같은 종류의 질문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내가 상대에게 호감 어린 행동을 보이면 그들은 곧바로 나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기 때문에 사귀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거나 밀당이 길었다거나 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친구 놈들은 나한테 연애 상담을 하러 왔다가도 공감대 형성이 안 된다며 구박했다.
어쨌거나 연애사에 있어서만큼은 별다른 굴곡이 없었다. 극적인 사랑 이야기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가장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런 건 인간의 비현실적인 바람을 가장 완벽한 형태로 구현한 픽션일 뿐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나의 사정일 따름이고, 내가 상대의 외모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이 꽤나 놀라웠는지 민하 형이 눈썹을 삐딱하게 움직였으며 유정현은 잠시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에 잠기더니 제 나름대로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양손을 깍지 껴 잡고 소파에 기대 있던 하영 누나가 몸을 일으키더니 느닷없이 말을 꺼냈다.
“재윤아, 소개팅할래?”
“네?”
맥락 없는 제안이었다. 봄이라고 커플 생성에 관심들 많으시네……. 돌아가면서 저렇게까지 여러 번 권하는데 한 번 정도야 못 나가 줄 것도 없긴 했다. 나는 하영 누나를 꽤 좋아했고 어지간한 부탁이나 권유는 다 들어주고 싶었다. 잠시 고민하는 척을 하다 긍정의 답을 내놓았다.
“그래요. 한번 하죠, 뭐.”
웬일이냐는 표정의 유정현과 하영 누나를 보면서 픽 웃었다.
“근데, 저 되게 끈기 없어요. 만약 잘 안 돼도 누나가 달래 줄 수 있는 사람으로 해 주세요.”
“그럼, 그럼. 우리 재윤이 까칠한 거 다 받아 줄 애로 자알 물색해 올게.”
하영 누나는 곧바로 휴대폰을 켜고 작업에 들어갔다. 나는 남의 일인 양 멀거니 스크롤을 내리는 손가락을 쳐다보다가 내 어깨 위로 시선을 돌렸다. 놈은 여전히 색색 호흡을 내뱉으며 자고 있었다. 손에 쥔 휴대폰이 떨어지기 직전인 것 같아 조심스럽게 빼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을 사락사락 소리가 나도록 쓸어 주었다.
***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동아리 모임 이틀 후 누나가 나에게 메시지로 상대에게 내 번호를 알려 주었다고 했다. 그날 저녁 낯선 이름으로부터 인사가 날아왔다. 어색한 몇 마디를 주고받은 다음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양식이 좋다기에 유정현하고 몇 번 갔었던 가게를 떠올려 위치를 알려 줬다.
상대는 인문대 학생이라고 했다. 같은 학교지만 단과대학 건물은 공학관과는 꽤 먼 곳에 있었다. 만약 잘 안 돼도 내가 곤란해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영 누나한테도 곤란하지 않을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일요일에는 주승언이 점심을 먹자고 불러내서 해 질 무렵까지 같이 있다가 헤어졌다. 저녁은 대충 아침에 먹고 남은 샐러드에 커피로 때웠다.
상대와 만난 화요일 저녁은 의외로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다. 내가 낯을 가리는 편이라는 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걱정을 했는데, 상대 여자가 조용한 목소리로도 대화를 잘 끌어내서 생각보다 편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다음을 기약하는 물음에 얼떨결에 답해 버리기까지 했다. 메시지로 대화가 자주 오가는 편은 아니라 그렇게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야, 이재. 어때?”
“뭐가 어때.”
“잘돼 가냐고.”
동아리가 모이는 날도 아닌데 진행 상황이 어지간히 궁금했던 건지 유정현과 하영 누나가 나를 불러다 놓고 물었다.
“그냥, 뭐.”
“너는 진짜, 이런 때까지 시큰둥하냐.”
“일단 누나가 내 성격을 무지하게 고려해 줬다는 건 알겠어.”
순수한 감상을 내놓았다. 나름 진심이었다. 조금만 거슬려도 상황을 불문하고 짜증부터 튀어나오는 성격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원래라면 영화관 같은 곳은 잘 가지도 않는데, 영화를 보자는 말에 알았다고만 답했다. 사실 소개팅 상대하고 적당히 함께할 만한 일이 없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싸하게 포장을 하려거든 못 할 건 없었다.
“너는 어떤데, 재윤아.”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누군가를 진지하게 좋아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런 종류의 만남에서 좋다 나쁘다를 정하기가 힘들었다. ‘장점이 하나 보여서 그 사람과 사귄다’였지, ‘그 사람하고 사귀기 위해 장점을 찾는다’는 내 매뉴얼에 없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데에도 노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나는 거기에 내 모자란 체력과 시간을 쏟아 가며 영원히 지속되지도 않을 결과물을 찾아 헤매고 싶지 않았다.
“잘 모르겠는데요.”
예상보다도 더 맹탕 같은 반응에 누나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미안하긴 하지만, 내가 원래 이렇게 생겨 먹은 것을 어쩌랴.
“일단 한 번 더 만나기는 할 건데.”
“우리 재윤이, 공략하기 어려운 남자구나.”
별…. 사람을 게임 퀘스트 취급하는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별로 어려운 것 같지 않은데. 중고등학교 때 만났던 여학생들은 그렇게 대단한 인사들이 아니었다. 그중에 한 명은 공부를 잘해서 의대를 가기는 했지만. 나름 깔끔하게 헤어진 축이라 합격 소식을 전해 왔을 때는 진심으로 축하해 줬었다. 어쨌든 외모로 보나, 행실로 보나 평범한 애들이었다. 애초에 나도 특별할 것 없는 학생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끼리끼리 만난다’는 말을 몸소 실천하던 게 내 학창 시절이었다.
하영 누나와 헤어지고 유정현과 도서관으로 갔다. 공대 도서관은 거의 항상 여석이 여유로운 편이긴 하지만 퀴퀴한 냄새가 장난이 아니라 열람실에는 발도 못 들이고 라운지에 앉았다. 조용히 책을 뒤적여 가면서 노트북만 두들겼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유정현의 것이었다.
“어, 왜. 지금 밥 먹자고? 나 재윤이랑 있는데. 어디? 공학? 알겠어.”
“누군데. 최은성이냐?”
“응. 근데 서한나랑 있다네?”
최은성이 오채영하고 둘이서는 자주 놀아도 서한나와 독대하는 건 내 기억으로는 처음이었다. 별일이네, 하고 중얼거렸는데 유정현이 그걸 알아듣고 동의의 표현을 한마디 던졌다. 가방을 대충 챙겨 지하 식당으로 내려갔다.
재앙 같은 식단이었다. 이 나이 먹고 반찬 투정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맞벌이 집안 21년차 외동으로서 진짜 내가 발로 만들어도 이것보단 낫겠다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싼 맛에 먹는 거라고는 해도 이건 좀 아니다. 학식 메뉴가 시원찮은 날에는 교직원 식당에 가 보라는 민하 형의 조언에 학생이 왜 교직원 식당에 가냐고 반문하던 작년의 내가 떠올랐다.
경양식 돈까스를 시킨 서한나와 최은성의 선견지명을 부러워하며 밥을 절반쯤 비웠다. 반찬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나물 이름은 매번 외우려고 해도 잊어버린다. 많이 기억해 봐야 콩나물과 고사리나물이 전부였다. 유정현은 일찌감치 항복 선언을 하고 매점에서 콜라를 사 와서 마시고 있었다.
“근데 너네 둘이 있는 건 처음 본다? 채영이는?”
유정현이 물었다. 최은성이 걔 집 갔어, 한마디로 일갈했다. 금요일이라 기숙사가 아닌 집에 갔다는 말인 듯했다.
별다른 이야기 없이 자연스럽게 해산했다. 최은성은 서한나하고 조금 더 있다가 간다며 1층까지 따라 나왔다. 그러고 보니 최은성은 나 소개팅한 거 모르는구나.
지하철역 근처까지 걸으면서 유정현에게 소개팅 얘기 다른 데 흘리지 말라고 한마디 했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이유가 궁금한지 왜냐고 묻는다.
“잘 안 될 것 같으니까.”
나도 사실 말로 짚어서 설명하기는 힘들었다. 그냥 감이 그랬다. 최은성이 몰라야, 오채영도 모르고, 서한나도 모르고. 스물한 해를 살면서 제일 알 수 없는 것 두 가지 중의 하나가 바로 나였다. 나머지 하나는, 뻔하지만 주승언이었고. 그놈은 지금 뭐 하려나. 일요일 이후로 못 봤다는 것을 깨닫자 문득 궁금해졌다. 실험이며 뭐며 학기 중에는 여지없이 바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같은 학교를 가기로 결정했을 때는 막연하게 단과대도 같고, 전공도 비슷한 계열이고 하니 같이 시간을 보낼 일이 많을 줄 알았다. 대학을 전혀 모르는 고등학생이나 할 법한 상상이었다. 놈을 직접 보고 과거의 오해를 실토해야 한다면 지금 당장 목매달고 죽는 쪽을 고려할 만큼 쪽팔린 이야기다. 기온은 점점 올라가는데 여전히 서늘한 것 같은 자취방에 으슬으슬 떨리는 몸으로 들어섰다.
***
소개팅 상대와 약속한 날은 토요일이었다. 점심은 간단히 영화관 근처 가게에서 해결했다. 이번에는 여자가 식당을 알아 왔다. 평소에도 먹는 양이 적은 내가 습관적으로 깨작대는 것이 신경 쓰였는지 계속 내 그릇을 힐끔거리는 바람에 결국 원래 양이 적은 편이라고 해명을 해야 했다.
영화는 손익분기점을 막 넘겼다는 적당히 웃긴 로맨틱코미디였다. 주말의 대학가 영화관은 역시나 커플 일색이었다. 커피만 쭉쭉 빨면서 대충 줄거리를 머릿속에 입력해 뒀다. 러닝타임 내내 여자는 노린 장면에서 참지 않고 웃거나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몇 가지를 속삭여 왔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면서 반응했다. 정신이 산만한 와중에도 커피 맛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났다.
상영이 끝나고 영화관을 나와 야외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여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같이 영화 봐 줘서 고마워. 사실 언니가 너 이럴 거라고 미리 말해 줘서 반신반의했는데, 그래도 진짜 예고한 그대로일 줄은 몰랐네.”
하영 누나가 처음부터 아예 기대를 하지 말라고 언질을 했던 모양이다. 민망한 웃음을 흘렸다. 나와는 동갑이라고 했었다. 이 뒤에 또 일이 있다는 말에 지하철 출구 앞에서 인사를 하고 다시 벤치로 돌아가 앉았다. 무엇을 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야말로 시간 낭비였다. 다리를 뻗고 손을 뒤로 짚어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주승언이 보면 다리 긴 척하느라 애쓴다고 한마디 하겠지. 소개팅 상대와의 짧은 연락을 제외하고는 며칠 내내 잠잠했던 휴대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헐떡이는 숨소리가 섞인 첫마디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온다. 의심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설마 이상한 타이밍에 전화 받은 건 아니겠지…….
“어디야?”
-헬스.
희미하게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언제 끝나는데?”
-두 시간 넘어서 이제 씻고 나가려고.
오래도 한다. 저 쓸데없는 근육질의 원천은 오버트레이닝이었다.
“나 밥.”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안 봐도 표정이 눈앞에 그려졌다.
-아직 3신데?
“그럼 커피.”
네네, 곧 가겠습니다. 놈이 가벼운 목소리로 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짧은 통화에도 이상하게 심란하던 것이 차분해졌다. 자취방까지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케이크도 사 달라고 해야지.
주승언은 맨몸으로 올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차를 끌고 나타났다. 조수석에 올라타자 엑셀을 밟는다.
“우리 어디 가?”
“간병비.”
잠깐의 궁리 후 호텔 이야기임을 알아차렸다. 로비 안쪽의 브런치 카페테리아는 점심까지 식사류를 팔고 오후부터는 카페만 영업한다고 쓰여 있었다. 그날 아침에 먹었던 카푸치노가 떠올라 이번에도 똑같은 것으로 주문했다. 주승언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막 운동을 하고 나와서 덥다고 했다.
머그잔의 손잡이를 무의미하게 만지작대고 있자니 놈이 손을 뻗어 내 손등을 툭, 건드렸다. 반응 없이 내버려 두니 아예 내 손을 끌고 제 앞으로 당겨 가서 손톱부터 손등에 드러난 뼈대까지 하나하나 살핀다. 뭐 해, 하고 묻자 관찰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놈과 대략 두 시간가량을 넋 놓고 있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