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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다시 쓰다 1권



무림, 다시 쓰다 1권(1화)
1장 나는 무협 작가다(1)


작가 서문


첫발을 내딛는 어린아이의 심정이 이러할까? 가슴이 두근거리고 아련히 젖어 오는 마음 한구석이 마치 시집을 앞둔 처녀의 마음처럼 방망이질 친다.
유난히 상상이 많고 꿈을 꾸는 것을 한 가지 복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는 글들을 바라보며 내가 바라보던 재미가 읽는 독자 모두에게 전달이 된다면 더 이상의 말은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긴 서두는 싫어한다. 내가 그러니 남들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의 오류일 수도 있으나, 이것이 끝이 아닐 거란 생각에 맘속 소중한 말들은 미래를 위해 아껴두고 싶다.
남들처럼 내 글을 통해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단 한 가지, 공감할 수 있는 재미와 나의 상상을 같이 나눌 수 있다는 기쁨을 전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이준휘 배상



1장 나는 무협 작가다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미치겠네!”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울려 대는 핸드폰을 손에 들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편집부 이 과장
오늘만도 수십 번, 이 빌어먹을 핸드폰에 찍힌 이름이다.
“제발, 그만 좀 전화해라!”
마감일을 넘긴 지 벌써 두 주가 지났다. 그로부터 매일 걸려 오는 마감에 대한 압박감, 답답하다.
오늘도 안 받으면 아마 이 과장은 당장이라도 집으로 찾아올지 모른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한다.
그러나,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다짜고짜 들려오는 이 과장의 고함소리.
“현 작가!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뭐야!”
여자의 비명소리와도 같은 울림에 귀가 찡하고 아른거렸다.
“죄송합니다. 집필 중이라서 핸드폰에 신경을 못 썼어요.”
물론 거짓말이다. 그러나 사회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거짓말이라고나 할까.
“그래? 그럼 원고는?”
“내일쯤이면 완성될 것 같습니다만.”
“아니, 이 사람아! 내일, 내일 한 게 벌써 한 달이 지났어!”
‘정확히는 15일밖에 되지 않았잖아.’
“에이, 이 과장님은! 이제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뭐! 보름밖에? 아니, 현 작가! 한두 번 글 써 봐? 보름이면 우리 출판사가 얼마나 타격을 받는지 알면서 그런 소리가 나와, 나오긴!”
“죄송합니다.”
“요즘 왜 그래? 뭔 일이라도 있어? 슬럼프에라도 빠진 거야?”
이 과장의 물음에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슬럼프인가?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이 과장도 어느새 많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뭐, 작가들이야 아이디어 짜느라고 머리가 터지겠지. 그 심정 이해해. 그래도 이 사람아, 우리도 좀 살려 달라고.”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을 되풀이하며 이번 주 안에 마감 분을 보내기로 약속하고 겨우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지겨워!”
밀려오는 짜증에 책상 위 담배를 집어 들었다.
후∼
길게 내뿜는 담배 한 모금에 내가 빠져 있는 상실감이 날아가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것 역시 어디까지나 허황된 망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빌어먹을! 나 싫다고 떠난 년이 뭐가 좋다고 나도 이 지랄이냐…….”
얼마 전 7년간 사귄 여자친구와 결별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기 시작하여 제대까지 기다려 주고서는 이제 와 배신할 줄이야…….
하긴 결혼은 현실이지. 글이나 쓸 줄 아는 이런 보잘것없는 남자에게 누가 시집오고 싶겠냐.
‘젠장!’
밀린 원고보다는 술이나 한잔해야겠다는 생각에 핸드폰을 집어 들고 인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녀석도 얼마 전부터 나와 같이 실연의 아픔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친숙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냐?”
“찜질방 갔다가 만화책 빌려서 집에 가는 길이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만화책이냐? 술이나 한잔하자. 나와.”
“술? 네가 쏘는 거냐?”
“젠장! 내가 돈이 어디 있어? 부르주아인 네가 쏴라!”
“이 녀석, 매번 술 마시고 싶을 때만 전화하는 놈이!”
“잔말 말고 8시까지 거기 포장마차로 나와라.”
그와 자주 가는 포장마차에서 그날 우리는 술을 먹는지, 술이 우리를 먹는지 모를 만큼 취해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을 저주했다. 그리고 사랑했다.
한마디로 취했다.

***

딩동! 딩동!
딩동! 딩동!
“새벽부터 누구야!”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어느새 날은 밝아 있었고 머리는 숙취 때문에 지끈거리며 아파 왔다.
“으, 머리야! 벌써 날이 밝았네. 몇 시나 됐지?”
침대 옆에 놓인 탁상시계는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얼마나 잔 것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과음을 한 듯싶었다. 어지러운 머리에 손을 얹고 냉장고 문을 열어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셨다. 바싹 마른 목을 타고 물이 내려가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딩동! 딩동!
“아, 알았어요! 나가요, 나가! 그만 좀 눌러 대쇼.”
계속 울려 대는 초인종 소리에 아픈 머리가 더욱 지끈거렸다.
“누구세요?”
“현칠 씨 댁 맞습니까?”
내 귀로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현칠, 이 촌스러운 이름이 바로 내 이름이었다.
삼대 독자이신 아버지께서 나를 낳으시며 꼭 일곱 명의 아들을 낳겠다는 각오로 지은 이름이 현칠이었다. 차라리 첫째니 현일이라고 지으면 그나마 나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버지의 뜻은 너무나도 확고하셨나 보다. 결국은 나도 사대 독자가 되었지만 말이다.
“그런데요, 누구시죠?”
사내는 말없이 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건네주었다.
국제 변호사 박명일.
“국제 변호사? 변호사가 저희 집에 무슨 일로?”
“실례지만 들어가서 말씀을 드려도 될까요?”
말쑥한 정장 차림의 사내를 잠시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고는 문을 열어 집으로 맞아들였다.
“그래, 무슨 일로 오셨죠?”
“혹시 김상수 씨를 아십니까?”
“김상수요?”
내가 아는 인물들 중에서 김상수란 이름을 생각해 내려 했지만 그런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모르겠는데요.”
“어머니 성함이 김현경 씨 맞으시죠?”
“네, 맞는데요.”
“김상수 씨는 어머님의 이종사촌 작은아버님이십니다. 외국에서는 옹드레 김으로 유명하신 화가신데 혹시 어머님께 들어 보신 적은 없으신가요?”
그러고 보니 엄마가 살아생전에 말하길 친척 중에 유명한 화가가 한 명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는 것도 같네요. 근데 무슨 일이신지?”
“그분께서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네? 아, 예.”
솔직히 무덤덤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친척이라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머니의 이종 어쩌구 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옆집에 사는 밍키(옆집에서 키우는 개)가 작년에 죽었을 때보다도 더 무덤덤할 수밖에 없었다.
“그분께서 돌아가시면서 현칠 씨 앞으로 유품을 남기셨습니다.”
“저에게요?”
“네. 김 화백께서는 살아생전에 많은 부를 축적하셨지만 가족이나 친척이 한 분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분이 바로 현칠 씨죠.”
순간 나의 머릿속으로는 유산이란 두 글자가 떠올랐다. 그 순간이 얼마나 됐겠느냐마는 그때 나는 이미 포르쉐에 늘씬한 미녀를 옆에 태우고 독일의 아우토반을 달리고 있었다.
“꿀꺽! 그러니까 그 뭐시냐, 부자 할아버지가 저에게 유산을 남겼다는 말씀이신가요?”
“김 화백님의 모든 유산은 유언장에 따라 불우한 사람들과 장학 재단에 모두 넘기셨습니다.”
나의 포르쉐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럼 뭘 주려고 오신 겁니까?”
“바로 이겁니다.”
욕심을 부렸던 탓인가. 변호사가 넘겨주는 조그마한 나무 상자를 받아 들며 나도 모르게 인상이 구겨졌다.
“이게 뭐죠?”
“그건 저도 알 수 없습니다. 그 안의 내용물은 당사자만 확인할 수 있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럼 이 서류에 사인을 좀 해 주시겠습니까?”
건네는 서류에 사인을 하자 변호사는 형식적인 인사를 끝으로 더 이상 첨부의 말도 없이 나가 버렸다.
그가 돌아가고 난 내 손에 들려 있는 상자를 살펴보았다.
오래된 듯한 나무 상자의 자물쇠는 은으로 봉인되어 도장 같은 것이 찍혀 있었다. 아마 누군가가 미리 열어 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 같았다.
나는 책상 서랍에서 라이터를 하나 꺼내 은박 봉인을 녹인 후,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조심스레 나무 상자를 열었다.
그러나 그런 나의 소망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는지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 안에는 오래된 듯 보이는 만년필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장난하나?”
낡은 만년필을 집어 들고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금으로 된 만년필도 아니었고 그리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출판사 같은 데 가면 가끔 기념품으로 하나씩 주는 그저 그런 싸구려 만년필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혹시 상자 안에 다른 것은 없나 들여다보다가 작은 메모지를 하나 발견했다.

1. Things to do with life can’t be realized.
(생명에 관한 것은 이루어질 수 없다)
2. Human emotions can’t be changed by force.
(사람의 감정에 관한 것은 이루어질 수 없다)
3. Something that is impossible to be happened is possible only under the certain conditions.
(불가능한 것은 조건하에서만 이룰 수가 있다)

메모장의 쓰여 있는 것은 딸랑 세 줄, 그것이 전부였다. 허탈했다.
“이게 뭐야? 젠장!”
만년필을 아무렇게나 책상 위에 내팽개치고 몸을 던져 침대에 고꾸라졌다.
“아침부터 재수가 없군.”
한숨 더 잘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현 작가, 나 이 과장인데 그냥 글 잘 쓰고 있나 전화해 봤어. 어제 한 약속, 이번에는 꼭 지켜야 되네. 자네만 믿네!”
지독한 사람이다.
이번 일이 끝나면 여기와 다시는 일을 안 한다는 다짐을 하며 피곤한 몸을 이끌고 책상에 앉았다. 그러나 막상 책상에 앉았지만 특별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때, 문득 헤어진 여자친구 생각이 떠오르며 울컥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나를 버리고 부잣집 남자를 찾아간 그녀…….
그래, 난 더 좋은 여자 만나 결혼하고 성공해서 나중에 네가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하고 이를 갈며 다짐했다.
그녀를 떠올리자 강한 투지가 솟구쳤다.
해이해진 마음을 추스르자는 생각에 펜을 들고 앞으로 바라는 일들을 적어 보았다.
“근데 내가 바라는 게 뭐지?”
젠장! 나 작가 맞아? 바보 같은 내 머리를 한 대 쥐어박자 어제 먹은 술기운이 올라오는 듯했다.
하긴 소원이 별거 있나, 아무거나 적으면 되는 거지.
―탤런트 김태휘랑 뽀뽀하기.
“……내가 아직 술이 덜 깼구나, 덜 깼어. 이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나 적어 놓다니.”
가볍게 실소를 터트리며 방금 쓴 종이를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아!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됐지? 내 자신의 모습에 한탄하며 다시금 펜을 잡았지만 막상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뭐가 있을까……. 음, 으, 으악! 이런 바보 멍텅구리 같은 놈! 하고 싶은 것 쓰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한심한 중생아!”
그때였다.
딩동! 딩동!
“짜증나게 아침(?)부터 누가 이렇게 자꾸 오는 거야! 누구세요?”
나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며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그 순간, 무언가 따뜻한 것이 내 입술에 와 닿았다.
“읍!”
여자였다. 긴 생머리를 한 여자의 입술이 내 입술에 맞닿았다.
일명 뽀뽀! 나는 갑작스런 상황에 놀랐고 그녀의 입술이 떨어진 후 다시 한 번 더 크게 놀랐다.
“기, 김, 김태휘?”
‘이럴 수가! 오 마이 갓! 하느님, 정녕 이것이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않게 하소서. 아멘!’
믿을 수가 없었다. 내 눈앞의 여인은 분명 내가 좋아하는 탤런트 김태휘였다. 그녀는 나를 보며 뭔가 큰 실수를 저지른 듯 빨개지는 얼굴을 감추며 연신 고개를 숙여 댔다.
“죄송해요. 집을 잘못 찾았나 봐요.”
그녀가 급히 돌아서서 가고 난 뒤에도 한동안 난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 이미 내 영혼은 육체를 떠나 구름 위를 노닐고 있었다.
“꿈이 아니다!”
한참 후에야 현실 세계로 돌아온 나는 아직도 남아 있는 입술의 온기를 느끼며 후다닥 책상으로 달려갔다.
“내가 소원을 쓰자 그것이 바로 현실로 이루어졌어. 우연인가? 아니면…….”
책상 위에 놓인 낡은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 잘 몰랐지만 소원을 쓸 때 유품으로 받은 그 만년필을 집어 글을 썼었다.
나는 곧 무작정 수첩에 한 문장을 썼다.
―인수에게 전화가 온다.
글을 쓰기가 무섭게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놀랍게도 인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