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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다시 쓰다 1권(2화)
1장 나는 무협 작가다(2)
“여보세요?”
“일어났냐?”
“너, 왜 전화했어?”
“뭐? 왜 전화하긴, 임마! 어제 술 많이 먹어서 잘 들어갔나 하고 그냥 한 거지.”
“…….”
“야, 야, 왜 그래?”
“아냐. 나 지금 바쁘다. 끊어! 이따 통화해.”
귓전으로 인수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냥 전화를 끊어 버렸다. 설마 이게 사실인가, 아니면 또 한 번의 우연인가? 난 다시 수첩에 새로운 것을 적었다.
―난 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제자리에서 열심히 점프를 해 보았지만 절대 내 몸은 하늘을 날지 못했다. 순간 피식하고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참나!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어이없게도 난 방금 미친 짓을 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믿으려고 하다니……. 의자에 몸을 기대면서도 내 입에서는 허망한 웃음이 계속 흘러나왔다.
그러다 문득 뭔가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쪽지!”
나무상자 속에 만년필과 같이 들어 있던 쪽지에 분명 뭐라고 적혀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난 얼른 의자에서 일어나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메모지를 주웠다.
1. Things to do with life can’t be realized.
2. Human emotions can’t be changed by force.
첫째, 생명에 관한 것은 이루어질 수 없다. 둘째, 사람의 감정에 관한 것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리고…….
3. Something that is impossible to be happened is possible only under the certain conditions.
“불가능한 것은 조건하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 순간 내 머리는 태어나서 최고로 빨리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때 이렇게만 돌아갔더라면 아마 서울대에 갔을 텐데 하는 우스운 생각이 그 와중에도 스쳐 지나가다니.
생각을 정리한 나는 다시 만년필을 집어 들고 수첩에 조심스럽게 적어 내려갔다.
―내 마이너스 통장에 회선 착오로 일억 원이 들어왔다.
길게 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만년필을 책상 위에 내려놓은 나는 인터넷으로 은행 통장의 잔고를 확인했다.
XX은행
예금주: 현칠
계좌번호: 113743―132―XXX―XX
현재 잔액: 100,000,000원
이럴 수가! 진짜다. 이건 대박이다.
나는 기쁨에 겨워 소리치고 싶은 것을 정말 간신히 참고 소리 없이 웃으며 방 안을 뛰어다녔다. 확실하다. 이것은 내가 바라는 건 뭐든지 들어주는 만년필이 틀림없었다.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멋쟁이!
그러나 난 곧 진정하기로 했다. 이럴 때일수록 진정해야 한다. 복권 당첨자들 중에 패가망신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난 그들처럼 어리석게 굴면 안 된다.
이 만년필만 있으면 난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될 수도 있고, 한 나라의 왕이 될 수도 있다. 여자? 김태휘뿐이냐, 송혜고, 전지언, 문궁연 등등 예쁜 연예인들을 줄줄이 사탕으로 거느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진정하자! 진정하자, 현칠아!’
가볍게 심호흡 한 번 하고, 후욱!
‘그래, 이제야 좀 진정이 되는군. 그렇다면 이제 무슨 소원을 빌어 볼까? 여자? 돈? 명예? 그러나 그런 건 언제라도 가질 수 있어. 보다 색다르면서 정말 원하는 건……. 음……. 그래, 그거야!’
그 순간 내가 지금 가장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곧이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나는 수첩에 이렇게 적어 내려갔다.
―지겨운 일상에서의 탈출.
이윽고 서서히 내 몸 안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며 따뜻한 기분과 함께 내 몸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모험은 시작되었다.
그것이 나에게 전해진 것은 어쩌면 저주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짊어져야 할 숙명.
이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전해져 오던 이야기이자, 앞으로도 벌어질 이야기이다.
―김상수 화백(畵伯)의 서랍장 낡은 일기에서 발췌―
2장 삼류무사(三流武士) 유소문을 만나다(1)
섬서성의 위치한 오악산(五惡山). 다섯 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가 모여 하나의 산을 이룬 오악산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산길이 험하고 숲이 울창하여 한번 길을 잃으면 아무리 산을 많이 타 본 사냥꾼이라도 쉽게 돌아나갈 수 없을 정도로 방향을 잃기 십상이었다.
그런 험한 오악산의 산기슭 중턱에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얼핏 보면 미동도 없는 것이 이미 죽은 듯했으나, 잠시 후 그 사람은 가쁜 숨을 내리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죽겠군! 이놈의 산은 어찌 된 게 가도 가도 끝이 없냐? 이곳을 헤매고 다닌 지도 벌써 열흘째인데……. 힘들어 죽겠군, 젠장! 내가 왜 팔자에도 없는 이런 고생이람?”
처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사람은 그동안 제법 험한 꼴을 당한 듯, 그 차림새만으로도 그가 겪은 고생을 알 수 있었다.
때를 타서인지 본래의 색을 잃어버린 낡은 츄리닝을 입고 덥수룩한 머리와 듬성듬성 자란 수염의 이 사내는, 열흘 전 느닷없이 자신의 집에서 사라진 현칠이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친척의 유품이라고 전해 받은 만년필이 소원을 들어주는 신기한 만년필이라는 것을 알게 된 현칠은, 지겨운 일상을 벗어나고자 무턱대고 지겨운 일상에서의 탈출이라는 소원을 빌어 보았다.
일 년 내내 따뜻한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푸른 바다가 펼쳐진 동쪽의 휴양지를 생각하며 빌었던 소원과는 다르게 오지의 산속에 떨어졌을 때에도 처음에는 그저 신기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고생의 시작일 줄은 정말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던 현칠이었다.
“제기랄, 저주받은 만년필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이라니!”
주머니에서 꺼낸 낡은 만년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이곳에 뭔가 자신의 허전함을 충족시킬 것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아마존의 숲 속을 탐험하듯 조심스레 시작했던 그의 발걸음에 짜증이 일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국 한참 후에야 그가 내린 결론은 이곳은 일상보다도 더욱 자신을 지루하게 만드는 그저 평범한 숲이라는 것이었다.
밀려오는 지루함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그는 다시 돌아가기 위해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자!
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그의 몸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이다. 처음 이곳으로 넘어올 때의 빛도, 그리고 몸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도 없었다.
해가 저물어 마지막 황금물결을 만들 때까지, 만년필에 매달렸던 현칠은, 어느새 찾아온 황혼의 그림자를 보며, 산속에서 무작정 날을 샐 수는 없다는 생각에 만년필은 포기하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작정 산 아래를 향해 내려가는 동안 서서히 날이 저물어 밤이 되자 문득 두려운 감정이 그의 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확보되지 않은 시야 속에서 산길을 내려가다 보면 길을 잃을 수도, 발을 헛디뎌 벼랑으로 구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내려가는 것을 멈춘 현칠은 주변의 커다란 나무 밑에 자리를 잡았다. 음습한 분위기에 잠시 숨을 죽이고 있던 현칠은, 어두운 적막을 뚫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늑대 울음소리에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서…… 설마 요즘 산중에 늑대가 있겠어? 어디서 개가 짖는 거겠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자신을 달래 보던 현칠은, 애써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웃어 보이고는 서둘러 나무 밑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그런데 자리를 잡고 눕자마자 점심때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현칠의 뱃속에서 배고픔의 신호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첩첩산중에서, 그것도 어둠 속에서 먹을거리를 구하기란 불가능하다 싶어 그냥 참아 내기 위해 눈을 감았지만 도저히 뱃속의 거지들은 그 상황을 용서하려 하지 않았다.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현칠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만년필을 꺼내 손바닥에 ‘음식을 원한다’라고 적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음식이 나타난 것이다. 물론 나타난 재료(?)와 싸워 이길 수 있다면 그것은 충분히 음식이 될 수 있었다.
그가 음식을 원한다고 적자마자 높게 자란 수풀을 헤치고 다가온 그것은 다름 아닌 흉흉한 안광을 빛내는 한 마리의 늑대였다.
입가의 침을 흘리며 붉게 충혈된 두 눈은 자신이 한참을 굶었다는 것을 당당히 밝히고 있었다.
현칠은 놀랄 새도 없이 본능에 따라 똥구멍이 타도록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운 좋게 늑대의 밥이 되지 않고 도망칠 수 있었던 현칠이지만 이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고 그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몸의 열기가 곧 산바람에 식어 버리자 이제는 배고픔 대신, 견딜 수 없는 지독한 추위가 몰려 왔다.
몸을 비비며 추위를 떨쳐 보려 애쓰던 현칠은 다시 한 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떨리는 손을 붙잡으며 만년필로 적어 보았다.
―따뜻해지면 좋겠다.
잠시 후, 별만 총총하던 밤하늘에 서서히 검은 구름이 몰리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산 주위로 벼락이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수천 그루에 달하는 나무들 중에 기적처럼 그가 기대고 있던 나무 위로 벼락이 떨어졌다.
벼락 한 방에 족히 100년은 넘어 보이는 거대한 소나무가 반으로 갈라지더니 불꽃을 일으키며 타기 시작했고, 그 불길은 순식간에 번져 나가 산을 불바다로 만들 것만 같았다.
다행히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잠시 후 먹구름과 함께 강한 빗줄기가 쏟아지며 불길을 잡을 수 있었기에 망정이었지 하마터면 따뜻함을 느끼려고 하다가 타 죽을 뻔한 현칠이었다.
첫날의 고생을 시작으로 그 후 열흘 동안 현칠은 팔자에도 없는 생고생을 겪어 가며 만년필의 사용법을 조금씩 알아 나갔다.
불가능한 일은 안 이루어지지만 가끔은 이루어지는 것도 있다는 것. 그리고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소원은 우연처럼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이다.
“아무리 내려가도 끝이 없구나. 이제는 내려가는 건지 올라가는 건지 구분도 못하겠네. 휴!”
현칠은 심한 배고픔과 피곤함에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열흘 동안의 산행으로 제대로 된 식사조차 할 수 없었던 현칠은, 지금 이 순간 가장 원하는 것은 동남아의 휴양지도 아닌 그저 따뜻한 밥 한 그릇이었다.
배고픔도 참을 겸 산중턱에서 잠시 쉬고 있던 현칠은 꺼내 든 만년필을 바라보다가 문득 뭔가가 생각이 난 듯, 바보같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런! 멍청하게 그 생각을 못하다니.”
상기된 표정으로 이미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손바닥에 뭔가를 적으려고 하던 현칠은 잠시 동작을 멈췄다.
“가만! 이거 또 함부로 썼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신중하게 쓰자.”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현칠은 잠시 후 손에 한 자 한 자 차분히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산을 내려가는 길을 찾고, 착한 사람을 만나 도움을 받는다.
손바닥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인 현칠은 다시 기운을 차리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대략 서너 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눈앞으로 드디어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열흘이란 시간 동안 산을 헤맨 자신의 바보스러움을 탓하며 웃는 얼굴로 뛰쳐나온 현칠은 기쁨에 환성을 질렀다.
이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집들이 나올 것이고, 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그의 입가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때 길 반대쪽에서 무언가가 다가오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분명 사람이었다.
열흘 만에 사람을 발견한 그는, 기쁜 마음에 그가 누구든 간에 무작정 그에게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
“만세! 사람이다, 사람이야!”
길을 걸어가던 유소문은 거지꼴의 청년이 느닷없이 자신을 끌어안고 반가워하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누구신지 모르지만 길을 가는 사람에게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점잖은 목소리로 청년을 타이른 유소문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잠시 그를 살펴보았다. 키는 약 6척 정도에 난생처음 보는 모양의 옷을 입고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 같은 차림을 한 청년의 얼굴은 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워져 있었다.
“아! 중국인이신가 보죠?”
거지꼴의 청년이 자신의 고향인 양주 사투리로 유창하게 물어보자 유소문의 얼굴에 약간은 놀란 표정이 일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삿갓에 가려 있어 청년은 그의 표정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중국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송나라 사람이오. 그리고 혹시 양주에서 오셨소? 양주 사투리를 아주 잘 쓰시는군요.”
“웩! 지, 지금…… 소, 송나라라고 하셨나요?”
소스라치게 놀라는 청년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인 유소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거지 청년, 아니 현칠은 그 순간 벼락을 맞은 듯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 안에서 송나라라 함은 몇백 년도 전, 그것도 까마득한 옛날, 중국의 송 왕조밖에 없었으니까 말이다.
“호, 혹시…… 저랑 장난치시거나, 뭐 영화 촬영 중이거나 그런 건 아니죠?”
“……?”
별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듯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유소문의 행동에 현칠은 현기증에 몸을 휘청거리며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이곳으로 공간 이동만이 아닌 시간 이동도 함께했다는 소리가 아닌가.
만약에 다른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알고 있는 좋은 정신병원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하겠지만 이것은 자신이 겪고 있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충격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칠을 바라보며 실성한 사람으로 오인한 유소문은 더 이상 상대해 봐야 좋을 게 없겠다는 생각에 그를 피해 옆으로 몸을 돌렸다.
“실례가 아니라면 저는 이만 가던 길을 마저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현칠은 잠시 유소문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삿갓을 쓰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로 보아 이십대 중반 정도는 된 듯싶었고, 하얀 도포를 차려입고 왼쪽 허리에는 붉은 수가 달려 있는 도(刀)를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대의 무인(武人)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