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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다시 쓰다 1권(3화)
2장 삼류무사(三流武士) 유소문을 만나다(2)


“저, 잠시만요.”
“제게 무슨 볼일이 남아 있습니까?”
또다시 앞을 가로막는 청년의 행동에 약간은 불쾌감을 느낀 유소문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하고 부드러웠다.
“사, 사실은 그러니까 그게…… 전 타, 타국에서 온 여행자인데 며칠 전 산적을 만나 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저런! 타국에서 오신 분이군요. 양주 말을 잘하셔서 양주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나저나 산적을 만났다니 그거 참 안되셨군요. 몸은 성하신 것 같아 보이니 불행 중 다행입니다.”
그나마 말이 통한다는 사실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어쭙잖은 거짓말을 늘여 놓은 현칠은 상대가 자신의 말에 관심을 기울이자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무협 소설을 쓰기 시작한 현칠은 중국이란 나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대학 진학 시 중어중문과를 선택하게 되었고 대학교 시절 잘 알고 지낸 중국인 친구가 양주 사람이라서 그 또한 양주 말을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가지고 있던 돈도 다 빼앗기고 열흘을 산속에서 헤매다가 이렇게 사람 얼굴을 보니 반갑다는 기분에 그만 실례인 줄 알면서도 무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저런! 첩첩산중에서 열흘이나 헤매셨다니 고생을 많이 하셨겠군요.”
지금이 송나라 시대라는 사내의 말이 거짓말이건 진실이건, 어딘지조차 알 수 없는 곳에 떨어져 열흘 만에 처음 만난 이 사람이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기에 현칠은 이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 밑도 끝도 없는 거짓말을 술술 풀어내었다.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없는 시점에서, ‘나는 소원을 들어주는 만년필을 가지고 순간이동을 하였소’라고 말한다면 분명 미친놈 취급 받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현칠은 살기 위해 거짓말을 내뱉으면서도 자기 자신의 그런 모습에 속으로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거 완전 대종상 감인데?’
사실 현칠에게는 엉뚱한 면이 있었다. 그러니 남들은 돈이 안 되어서 꺼리는 작가, 그것도 삼류 무협 작가의 길을 가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남들은 그런 그의 엉뚱함을 싫어하기도 했지만 그의 마음이 순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친구들은 그의 그런 점을 더욱 좋아했다.
“고생이야 말로 설명할 수가 없죠. 정말 수도 없이 죽을 뻔했습니다. 그리고 벌써 밥을 구경한 지도 며칠이 되었는지도 모르겠구요.”
이 부분은 사실이기도 하기에 그는 더욱 처량하고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피폐해질 때로 피폐해진 모습과 측은한 표정의 현칠은, 정말 마음약한 사람이라면 그냥 두고 갈 수 없을 정도로 애처로워 보였다.
유소문은 그런 현칠의 모습에 측은한 동정심이 생겼다. 때마침 멀지 않은 거리에 마을이 있어 밥 한 끼 먹여 줄 요량으로 동행을 청하자 옳다꾸나 생각한 현칠은 그의 말에 얼른 승낙했다.
그렇게 유소문의 선행으로 동행하게 된 둘은 길을 따라 한식경쯤 걸어가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도착한 마을의 모습에 현칠의 눈살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시골 중에서도 깡촌이 이럴까.
마치 자신의 무협 소설에나 나올 법한 허름한 마을 모습을 바라보며 현칠은 정말 이곳이 그의 말대로 송나라 시대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마을 입구에 자리 잡은 객점으로 들어선 그들은 자리를 잡고 소면 두 그릇과 죽엽청 한 병을 시켰다.
점소이는 현칠의 거지꼴을 보며 내쫓을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손님은 왕이다. 그리고 거지가 손님이다. 그러므로 거지는 왕이다’라는 간단한 공식을 대입하여 아무 일 없이 그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밥이 아닌 면에 약간은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열흘 동안 열매만으로 버텨 온 현칠에게는 진수성찬이나 다름이 없었다. 더욱이 먼저 나온 죽엽청을 보며 평소 주당인 그는 입맛을 다셔 댔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유소문은 잔을 내밀며 술을 따라 주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는 경황이 없어 통성명도 하지 못했군요. 전 양주에 사는 유소문이라 합니다.”
“저는 현칠이라고 합니다.”
“그래, 현 형은 어느 나라에서 오셨습니까?”
유소문의 물음에 술을 쭉 한 잔 마신 현칠은 가벼운 신음 소리를 내며 간만에 느껴 보는 술맛을 음미하는 듯 눈을 찡그려 보이고는 그의 말에 대답했다.
“제가 온 곳은…… 조선이란 곳입니다.”
“조선이라? 그런 나라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유소문의 행동에 순간 현칠은 찔끔하며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다, 다른 말로는 고려라고도 하지요.”
“아! 고려라면 내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무협 작가인데 송나라 시대의 조선이라니, 문득 자신의 무지함에 욕지거리가 나올 뻔한 현칠이었다.
물론 지금은 별 볼일 없는 현칠이지만 그래도 중학교 때 IQ 148이상만이 가입할 수 있다는 MENSA에 등록할 정도로 머리가 좋다는 소리를 들었던 현칠로서는 자신의 무지함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음식이 나오자 유소문은 식사를 하기 위해 쓰고 있던 삿갓을 벗었다. 그러자 드러나는 그의 모습에 현칠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으며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을 때는 몰랐으나 그는 절세의 미남자였던 것이다. 부리부리한 두 눈에 짙은 눈썹, 오뚝한 콧날과 가지런한 입술을 가진 그의 얼굴은 마치 무협 소설에 나오는 미청년 주인공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전체적으로 유약해 보일 정도로 선이 가늘다는 것인데, 그것은 여자에게 동정심을 유발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라고 생각하는 현칠에게는 더없이 완벽한 얼굴이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으면서 서로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가자 현칠은 별다른 뜻 없이 그에게 여행길에 오른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밝게 웃던 유소문의 표정이 이내 어두워졌다.
“유 형, 제가 뭐 실수한 거라도 있는지요?”
“아닙니다. 다만…….”
말끝을 흐린 유소문은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곧이어 한숨을 크게 쉬고는 말을 이었다.
“기연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순간 기연이라는 단어에 현칠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유소문은 말없이 술잔을 들더니 길게 들이마시고는 술기운인지, 아니면 현칠이 마음에 들어서인지 몰라도 서슴없이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양주 기현에 있는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유소문은 그리 넉넉하지도, 그렇다고 못 살지도 않는 중인의 집안에서 자라났다. 그의 아버지 유칠성은 마을에서 알아주는 장사이며 무술인이었다. 물론 실력은 삼류였지만 조그만 양주의 시골 마을에서는 그래도 알아주는 편에 속했다.
유칠성은 아들이 태어나자 자신이 그토록 열망하던 무림고수로 키우기 위해 어릴 적부터 단련을 시켜 왔지만 선천적으로 약한 몸을 타고난 유소문은 무(武)에 재능이 없었다.
그런 아들을 바라보며 좌절했던 유칠성은 아들이 무에는 약하지만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어릴 적부터 수많은 무공 비급들을 가져다주었다.
머리 하나는 좋게 태어난 유소문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구해다 주는 무공 비급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암기했지만, 머리는 아는데 몸이 따르질 않으니 그 무공들은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유칠성은 낙심하지 않았다.
그는 언젠가 아들이 무협전기(武俠傳記)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기연을 얻어 무림고수가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물론 유칠성이 가져다준 비급들은 시장에 떠도는 삼류 무공서들이었지만 ‘기본이 강한 자가 강하다’란 우물 안 개구리 심리를 가지고 있던 유칠성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그렇게 무공 비급과 수많은 무협전기를 읽고 외워 온 시간이 어언 십오 년, 유소문의 나이가 스물두 살이 되었을 때 이 시골 마을에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그 당시 무림은 무림맹(武林盟)과 사파(邪派)의 전쟁이 끊이지 않고 벌어지고 있었다. 피를 부르며 끝나지 않는 두 파의 전쟁 중에 양주에 있던 사파 중 하나인 흑사문(黑死門)의 비밀 분타가 무림맹에 발각되어 습격을 받고 도주하다 기현 마을에 숨어들어 온 일이 있었다.
사파의 무리들은 마을 사람들이 밀고할 것이 두려워 얼마 되지 않는 기현리의 주민들을 죽여 살인멸구(殺人滅口)하고 떠났다.
때마침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옆 마을에 가 있던 유소문은 화를 면할 수 있었지만,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빠져 한참을 방황하다가 아버지의 바람과 마을 사람들의 복수를 위해 무림고수가 되자고 결심하고 여행을 떠나 수행자가 됐다는 것이 그의 주된 이야기였다.
유소문은 이야기를 끝내고 그때의 일들이 떠오르자 복받쳐 오는 감정을 참을 수 없었는지 현칠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무협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들을 주구장창 늘어놓고 사라진 유소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 현칠은 그저 멍한 표정이외에 행동은 취할 수가 없었다.
머쓱해진 표정으로 남은 술을 마셔 버린 현칠은, 미리 잡아 놓은 방으로 들어가 열흘 만에 개운하게 몸을 씻고 편안한 잠자리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분명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이고 들어 본 이야기인데…….’
현칠은 자리에 누워 유소문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무협 작가로서 그가 읽은 무협 소설만도 수천 권에 달하니 이런 흔해 빠진 이야기야 그 많은 것 중 하나일 뿐이리라 여기고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나저나 정말 이곳이 송나라라면 나는 이제 어떡한다?’
유소문 이외에 다른 사람들의 차림만을 보아도 이곳이 평범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한 현칠은 앞으로의 일들이 막막하기만 했다.
다시 한 번 주머니 속의 만년필을 꺼내 손바닥에 써 보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곳으로 넘어오게 되었으니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에이, 까짓것! 설마 죽기야 하겠어?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는 거야!”
생각하기가 귀찮은 현칠은 간만에 찾아온 편안함을 누리기 위해 머리까지 이불을 덮어 올렸다.
열흘 만에 제대로 된 곳에서의 잠자리여서인지 현칠은 눕자마자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잠이 들었고, 그렇게 밤은 깊어져 갔다.

***

중원(中原)의 아침은 서울의 아침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상쾌했다.
물론 현칠이 살던 시대의 중국은 서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정도로 공해가 심했지만 이 시대의 아침은 무척이나 상쾌했다.
잠을 푹 잔 덕분인지 아니면 상쾌한 기분 탓인지 현칠은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간단하게 아침까지 해결한 현칠과 유소문은 아침 일찍 객점을 나섰다.
유소문은 어젯밤 술기운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하는지 오늘은 어제와 다르게 약간은 무게감이 있어 보였다.
“현 형, 이제 헤어질 시간이군요.”
“어제는 정말로 고마웠습니다. 유 형이 아니었으면 전 아마 길에서 굶어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하하! 저야 뭐 별로 해 드린 것도 없는데요. 서로 돕고 사는 거죠. 이거 얼마 안 되지만 개봉부까지 가는 여비에 보태도록 하십시오.”
개봉부에 있는 관아까지 가는 데 여비로 쓰라며 은자 5냥을 덥석 쥐어 주는 유소문의 마음 씀씀이에 현칠은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생판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먹여 주고 재워 준 것도 모자라 돈까지 쥐어 주는 사람을 그가 살던 시대에서는 찾아보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멋쩍어 하는 현칠을 바라보며 유소문은 그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만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현칠은 잠시 고마움에 보답해 줄 것이 없나 생각해 보았다. 자신에게는 무엇이든(?) 들어주는 만년필이 있지만 잘못 사용하면 부작용이 심하다는 단점이 있어 은인 같은 그에게 함부로 쓸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곳이 진짜 송나라 시대라면 이제 자신은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적응하기 위해 며칠만이라도 이 마음 좋아 보이는 유소문에게 동행을 청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마땅한 핑계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시 고민하고 있는 순간 여인의 비명 소리가 길 한복판에서 울려 퍼졌다.
“까악! 왜 이러세요!”
비명 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열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가 우락부락하게 생긴 장한(將漢) 세 명에게 둘러싸인 채 추행을 당하고 있었다.
소녀는 겁을 먹었는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소녀를 둘러싼 사내들은 무림인인 듯 모두 허리춤에 검(劍)을 차고 있었다.
길가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 사내들의 행동에 간섭하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과 눈길이 마주칠까 봐 조심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야, 이 계집애가! 우리들이랑 놀자니까 왜 이래?”
“흑, 제발 이러지 마세요.”
사내들은 대낮부터 술에 취했는지 소녀의 치마를 들치고 가슴을 만지는 등의 추태를 부리며 뭐가 좋은지 자기들끼리 희희낙락하며 웃고 있었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유소문은 그런 그들의 행동에 붉어진 얼굴로 재빨리 사내들에게 다가갔다.
“대체 아침부터 이게 무슨 짓들이오!”
유소문의 외침에 지나다니던 사람들은 그제야 관심을 보이며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생각에 그들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내들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 치며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유소문을 바라보았다.
“이거 또 어디서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샌님이 나오셨구만, 흐흐흐!”
오른쪽 이마부터 왼쪽 볼까지 얇은 검상(劍傷)이 그어져 있어 악인치고 제법 멋들어지게 생긴 사내가 유소문을 비웃자, 사내의 일행들은 다시금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웃어 댔다.
분노로 붉어졌던 얼굴이 조롱으로 인해 더욱 붉어진 유소문은 도 자루에 손을 가져가며 사내들을 향해 다시 한 번 크게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