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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다시 쓰다 1권(4화)
2장 삼류무사(三流武士) 유소문을 만나다(3)
“아녀자를 희롱하는 것은 사내대장부가 할 짓이 못 되오!”
“어쭈! 도에서 손 안 떼? 너, 우리가 누군 줄이나 알아? 우리가 바로 섬서성에서는 우는 아이도 이름 듣고 그친다는 막가파(膜訶頗) 삼 형제야! 알아?”
당연히 알 리가 없다.
그러나 막가파 삼 형제라 불린 이들은 소위 섬서성 근처에서는 유명한 망나니들로 주민들은 아이들이 울면 개망나니 막가 삼 형제에게 시집보낸다고 으름장을 놓거나 이웃집과 싸움이 나면 제일 심한 욕으로 ‘에이, 막가 삼 형제 같은 아들 낳아라!’라고 할 정도로 그들은 유명(?)했다.
못된 짓만 골라 하는 그들이었지만 각자 지닌 무공 실력이 일류에 버금갈 정도로 높았기에 사람들 또한 그들을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었다. 여행객인 유소문은 당연히 그런 그들을 알 리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도를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병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의미라는 것을 안다면 도를 뽑고 덤벼도 좋다.”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검상을 가진 사내 옆으로 난쟁이 똥자루만 한 사내가 악역에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말을 멋들어지게 내뱉었다.
‘얼굴이랑 매치가 안 되는군!’
현칠은 사내의 얼굴과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속으로 웃음 지었고, 다른 사람들 역시 이 순간 같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난쟁이의 말에 흥분한 유소문은 도 자루를 잡은 손에 힘을 더욱 꽉 주었지만 실은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사실 유소문은 무림고수가 되기 위해 길을 떠난 지도 벌써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단 한 번도 아버지 외에 다른 사람과 싸워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십여 년이란 시간 동안 홀로 무예를 익혀 왔던 유소문로서는 처음 접하는 실전에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형님, 이 자식 떨고 있는데요. 크크!”
삼 형제 중에 가장 덩치가 크고 멍청하게 생긴 사내가 그런 유소문을 바라보며 비웃자, 유소문은 용기를 내어 떨리는 손에 힘을 주며 힘차게 도를 뽑아 들었다.
“풋!”
“푸하하하하하!”
그러나 막가파 삼 형제는 도를 뽑아 든 유소문을 바라보며 긴장하기는커녕 이제는 아예 배꼽이 빠져라 웃어 대기 시작했다.
‘헉! 저 도는?’
유소문이 힘차게 뽑아 든 도는 부러져 있었다. 아니, 사실은 부러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도였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도 끝이 부러진 것처럼 우습게 생긴 모양이었다. 구경하던 사람들도 갑작스런 상황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실소를 터트렸지만 현칠만은 경악한 듯,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저 도는 분명히……!’
그 순간 현칠의 머릿속에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현칠이 떠오른 생각을 애써 부정하며 자신을 탓하고 있을 때, 잘 익은 홍시처럼 붉어질 대로 붉어진 유소문은 막가 삼 형제를 무섭게 노려보며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이놈들! 내가 병기를 꺼냈으니 너희들도 어서 병기를 꺼내 들고 덤벼라!”
그러나 유소문의 성난 외침에도 사내들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 배꼽이야. 킥킥! 기다려, 좀 더 웃고! 하하, 미쳐! 내 배꼽 빠지겠네.”
발끈한 유소문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얼굴에 검상이 있는 사내를 향해 몸을 날리며 삼재도법(三才刀法)의 일초인 일수식(一手式)으로 찔러 들어갔다. 그러나 검상의 사내는 웃으면서도 횡으로 보법을 밟아 유소문의 일도를 가볍게 피하더니 주먹으로 그의 복부를 강타했다.
한낮 시정잡배의 주먹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위력이 복부를 파고들자, 단 한 방에 유소문은 손에 든 도조차 떨어뜨린 채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주먹 한방에 나가떨어진 유소문을 향해 뒤이어 막가파 삼 형제는 복날에 개 잡듯 유소문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어느새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유소문을 향해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막가파 삼형제는 그의 면상에 침을 뱉었다.
“퉤엑! 우리 막가파 삼 형제님에게 덤빈 죄는 죽음으로 갚아야 하지만, 오늘 너의 광대놀음이 즐거워 이 정도로 끝내는 걸 다행으로 알아라. 흐흐!”
난쟁이 똥자루 같은 사내는 이번에도 역시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대사를 마지막으로 남기고 더 이상 유소문에게는 볼일이 없는 듯 다른 형제들과 유유히 콧노래를 부르며 시장 한구석으로 사라져 갔다.
어느새 구경하던 구경꾼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처음 싸움의 원인이었던 소녀 역시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제 길가에 남아 있는 사람은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은 유소문과 현칠뿐이었다.
“…….”
유소문은 울고 있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그의 얼굴에서는 끝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분하고 억울했다. 동네 잡부 하나도 이길 수 없는 자신의 신세가 너무나도 서러웠다. 이러면서 무슨 무림고수를 꿈꾼단 말인가.
사실 막가파 삼 형제의 실력이 일류고수의 수준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유소문은 그들이 그저 동네에서 힘깨나 쓰는 무사로만 여겼기에 더욱 분한 마음이 컸다.
현칠은 그런 유소문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한참을 서럽게 울던 유소문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는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뼈마디의 비명으로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순간 누군가가 자신을 부축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힘겹게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현칠이 밝은 표정을 지으며 그가 일어날 수 있도록 잡아 주고 있었다. 유소문은 아무 말도 없었다. 현칠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는 듯 현칠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선 유소문은, 곧이어 자신의 힘으로 걸어가 근처에 있는 평상(平床)에 걸터앉았다.
약방 앞의 평상에 걸터앉은 유소문과 현칠 사이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이내 유소문이 먼저 그 침묵을 깨고 하늘 저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현 형에게 추한 모습을 보였군요.”
“추하다니요, 아닙니다. 전 아까 그들과 맞서 싸운 유 형의 용기에 오히려 박수를 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현칠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유소문은 현칠의 대답에도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이런 제가 무림고수가 되겠다니 너무나도 웃긴 일 아닙니까?”
유소문의 질문에 현칠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소문 또한 물음의 답을 원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저 허탈한 웃음만이 감돌 뿐이었다.
“이런 실력으로 언제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 드리고 언제 마을 사람들의 복수를 한단 말이냐. 흑흑!”
비통한 목소리로 울부짖는 유소문의 눈에서 다시금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나왔다.
한참을 서럽게 울어 대는 유소문을 그저 말없이 지켜보던 현칠은 그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갑작스런 현칠의 말에, 조금 진정이 되어 보이던 유소문의 표정이 놀란 듯 변하였으나, 이내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말씀은 고맙지만, 현 형이 도와준다고 쉽게 될 일이 아닙니다.”
사실 유소문은 현칠이 자신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냐는 생각을 했다. 산에서 산적을 만나 거지꼴로 돌아다니던 그가 갑자기 도와주겠다는 말을 꺼내니 못 믿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현칠은 말없이 주워 온 유소문의 도를 들어 보았다.
“좋은 도군요.”
“…….”
자신의 도를 좋은 도라 말하는 현칠을 보며 유소문은 순간 그가 자신을 놀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도(死刀)라……. 이만한 명도(名刀)는 흔한 게 아니죠.”
“아니, 그걸 어떻게!”
순간적으로 놀란 유소문의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졌다. 이 볼품없는 도의 이름은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밖에 모르고 있었기에 현칠의 입에서 도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순간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사도, 일명 지옥도는 유소문이 아버지에게 받은 유일한 유품이었다.
그의 아버지 유칠성이 그 도를 보며 매번 말하기를, 소싯적에 강호를 주유하다가 한 기인(技人)의 목숨을 구해 준 일이 있었는데 그때에 보답으로 받은 것이라고 했다.
그때 그 기인이 말하기를, 이 도의 이름은 지옥도이며 이 도 하나로도 능히 무림을 제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볼품없는 도를 볼 때마다 유소문은 그것이 아버지의 허풍 정도로 여기고 있었는데 오늘 이 도를 알아보는 이가 있으니 놀란 것이었다.
현칠은 놀란 토끼 눈을 한 유소문을 바라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그에게 도를 돌려주었다.
“사실 저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래(未來)를 볼 수 있다고나 할까요.”
“뭐라고요!”
현칠의 말에 유소문의 토끼처럼 커진 눈이 더욱 커졌다. 미래를 볼 수 있다니, 그것은 전설에서나 나오는 신안(神眼)의 능력이 아닌가. 그러나 현칠은 그런 유소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또한 만물의 능력을 약간 가지고 있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능력도 조금 가지고 있지요.”
“워,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라니!”
“고향에서는 저를 보고 만물사(萬物士) 현칠이라 불렀습니다.”
“만물사!”
그 순간 유소문은 머릿속에서 종이 울리는 듯한 환상을 느꼈다. 만물사라니, 감히 어느 누가 만물사란 별호를 쉽게 자신의 이름 앞에 붙일 수 있단 말인가! 만물사(萬物士)란 말 그대로 세상에 모든 것을 다스리는 사람이란 뜻이 아닌가.
정신이 잠시 현실과 떨어져 있던 유소문은 이내 크게 소리 내어 웃어 대더니 다친 부위가 쓰라린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고는 정색한 표정으로 현칠을 바라보았다.
“현 형, 농이 너무 심하시군요.”
유소문의 대답에도 현칠은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들고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잠시 후 손바닥에 뭐라 알 수 없는 말을 적은 현칠은 웃는 얼굴로 유소문을 바라보았다.
“저기 오는 여인이 하나 보이시지요?”
현칠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어느 주루의 기생인 듯한 화려한 옷차림의 아낙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잠시 후 저 여인이 오늘 입은 속옷의 색깔을 알아맞힐 수 있을 겁니다.”
뜬금없는 현칠의 말에 유소문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때, 어디선가 흘러온 강한 바람이 아낙의 치맛자락을 심하게 날렸다.
“크!”
“크!”
유소문과 현칠은 동시에 신음 소리를 내뱉었고, 유소문은 이미 붓기 시작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젠장! 노 팬티일 줄이야!’
현칠 또한 갑작스런 노 팬티의 출현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바람에 날린 그녀의 치마 밑은 아무런 속옷도 입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현칠은 이내 헛기침을 하며 유소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흠, 어떠신가요? 이제 믿음이 가시나요?”
“음, 음, 하나 이런 일은 우연일 수도…….”
유소문은 붉어진 표정으로 작게 대답했다. 현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번에는 지나가는 마차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제 곧 저 마차의 바퀴가 빠져 마차가 쓰러질 것입니다.”
현칠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4마리의 말이 모는 거대한 마차가 한 대 지나가고 있었다. 마차 옆에 새겨진 휘황찬란한 문양만을 보아도 그것이 이름 있는 장인이 만든 고가의 마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고급스런 마차의 바퀴가 설마 갑자기 빠지겠냐는 생각을 하며 유소문은 그저 가만히 마차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마차는 그들의 눈앞을 지나 일 장(丈) 정도는 무난히 잘 지나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차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마차의 한쪽 바퀴가 빠지며 넘어졌다.
다행히 마차에는 짐만 실려 있어 사람은 다치지 않았지만 두 눈을 뜨고 지켜보던 유소문에게는 실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쩍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모르는 유소문을 바라보던 현칠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절 믿으시겠습니까?”
“정, 정녕 저 일들을 당신이 했다는 것입니까?”
“저 정도는 가벼운 일이지요. 미래를 보는 일은 저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돌연 유소문은 현칠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갑작스런 유소문의 행동에 현칠은 흠칫했지만 유소문은 그의 손을 잡은 채로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현칠 대협, 제가 미처 이런 귀인(貴人)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디 미천한 저를 꾸짖어 주시고 저를 도와주십시오.”
유소문의 돌발적인 행동에 놀란 현칠은 얼른 그의 손을 잡고 일으키며 인자해 보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유 형이 저를 도왔으니 저 또한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현칠의 말 한마디에 유소문의 눈가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설마 그가 이 정도까지 감동하리라고 생각지 못했던 현칠로서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유소문이 막가파 삼 형제와 싸움 중에 꺼내 든 지옥도를 보고서야 현칠은 왜 유소문이 낯설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무협 소설을 좋아하던 현칠이 처음으로 써 보았던 무협 소설, 그 소설의 주인공이 바로 유소문이었다. 그때 주인공의 무기로 며칠을 고민하던 그가 이름 지은 것이 다름 아닌 사도였다.
그 당시 사도의 모습까지도 직접 스케치한 적이 있기에 그것을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유소문의 아버지 유칠성은 사이다를 좋아하던 그가 억지로 지은 이름이었고, 유소문이란 이름은 고등학교 때 앞자리에 앉아 있던 녀석의 이름에서 성만 바꾼 것으로 대충 지었던 것이 생각났다.
비록 처음 부분만 끼적거리다가 말았지만 현칠은 분명 그때 쓴 자신의 작품 안의 세계라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 이동과 공간 이동도 되는데 무협 소설 안이라고 못 들어가겠냐 하는 생각이 들자 처음의 놀람도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맘이 더 편해지는 것을 느끼는 현칠이었다.
사실 이곳이 자신이 만든 세계 안이라 생각하니 우쭐해지는 기분이 불안감 속에서도 솟아올랐다.
어쨌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 없이 자신이 유소문을 무림고수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일시적인 충동이 아니었다. 유소문을 위한 것이 아닌, 그제야 일상에서 느낄 수 없었던 무언가를 찾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