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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다시 쓰다 1권(5화)
3장 이무기를 때려잡고 기연(奇緣)을 얻다(1)
서주(西州)에 위치한 용화산은 8개의 봉우리가 마치 용이 승천하는 모습처럼 생겼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용화산의 봉우리에는 용(龍)이 되어 승천하기 위한 이무기들이 수련과 참선을 하기 위해 머물다가 가는 곳이라는 전설도 더불어 전해지고 있었다. 용이 살던 곳이라 하여 사람들이 신성하게 생각하기에 함부로 산을 오르는 이가 없었고, 산 주변에 맹수들이 많아 설사 오르더라도 횡액을 당하기 십상이었다.
현칠과 유소문은 지금 용화산의 봉우리 중에 사룡봉(蛇龍峰)이라 불리는 봉우리를 올라가고 있었다. 어느새 그들이 만난 지도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유소문을 무림고수로 키워 준다는 말로 이어진 그들의 인연은, 이곳이 자신이 예전에 썼던 무협 소설 안이라는 것을 현칠이 알게 된 후부터의 일이었다. 사실 유소문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말과는 달리 현칠은 새로운 세계에 도취되어 있었다. 지루한 일상에서의 탈출, 무협세상을 꿈꾸며 글로 표현하던 글쟁이가 직접 그런 세상으로 나왔다는 것은 그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들었다. 물론 유소문의 호의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낯선 환경 속에서 자신 역시 그에게 의지하고 싶어하는 마음도 숨어 있었다. 혼자보다는 둘이 낫다는 생각으로 시작된 그들의 동행은, 유소문이 자신이 썼던 무협 소설의 주인공임을 알게 되고 그를 어떻게 무림고수로 만들어야 되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예전에 썼던 무협 소설의 줄거리가 어떻게 되나 생각해 내려 했지만 장난식으로 끄적였던 일들이라 정확한 사건들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며칠 동안 머리를 싸매고 생각한 끝에 몸이 허약한 주인공을 위해 내공(內功)의 기연을 얻도록 한 설정을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만년필을 이용하여 ‘내공 기연을 얻다’라고 적었지만 역시 너무 쉽게 바란 탓인지 아무런 변화도 생겨나지 않았다.
그러다 여러 가지 생각 끝에 기연을 얻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일명 ‘돌 던지기’였다.
이 방법은 만년필을 이용하여 ‘돌을 던지면 내공 기연을 얻을 수 있는 방향을 알려 달라’고 적은 후 찾아가는, 극히 단순한 노가다의 극치를 달리는 무식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런 노가다의 일환으로 한 달을 헤맨 끝에 드디어 도달한 곳이 바로 이곳 용화산이었다.
그 동안의 고생으로 유소문과 현칠의 모습은 폐인이 되어 있었다. 유소문의 하얀 도포는 처음의 색이 바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고, 덥수룩한 수염과 산발이 된 머리는 이들이 얼마나 고생했는가를 여실히 알려 주고 있었다.
“헉헉! 이보게, 현칠! 얼마나 가야 되는 겐가?”
유소문은 차오르는 숨을 헐떡이며 앞서 가는 현칠을 향해 투정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헉, 헉! 말 시키지 마! 거의 다 왔어. 헉, 헉!”
현칠 역시 숨이 턱까지 차오르며 힘든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룡봉은 용화산의 여덟 개 봉우리 중 가장 높고 길이 험했다.
벌써 하루를 꼬박 새고 반나절을 더 올라가고 있지만 그들은 아직도 사룡봉 정상에 다다르지 못하고 있었다.
“헉헉! 더 이상은 못 가겠네. 잠시만 쉬어 가세.”
꽤 힘이 들었는지 유소문은 숨을 헐떡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자 현칠 역시 더는 버티기 힘들었는지 말없이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산바람에 잠시 땀을 식힌 유소문은 이내 인상을 찡그리며 현칠을 바라보았다.
“자네, 이번에는 확실한 건가?”
서로의 연배가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부터 어느새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평어를 쓰게 된 유소문은 의심쩍은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는 사람 말도 못 믿냐? 이번에는 확실하다니까 그러네. 자꾸 같은 말 좀 반복하게 하지 마. 입 아파.”
그의 말이 짜증난다는 듯 현칠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그러나 유소문은 한 달 동안 현칠의 말만 믿고 고생한 걸 생각하면 과연 이번에는 정말 확실한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분명 이 산꼭대기에는 너의 내공을 증진시켜 줄 기연이 있으니까, 나만 믿어!”
“하지만 분명 자네는 지룡산(地龍山)을 넘을 때도 확실하다고 했지만 꼭대기까지 올랐다가 그냥 내려오지 않았었는가.”
유소문은 지난번 지룡산에서 편한 길을 놔두고 괜히 돌멩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산을 올랐다가 반대편으로 내려온 쓰라린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냥 길을 따라 돌아갔으면 반나절이면 갈 곳을 산을 타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이틀에 걸쳐 올라갔다가 허무하게 내려온 적이 있었다.
“이봐, 누구는 이 고생이 좋아서 하는 줄 알아?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일이야. 괜히 말로 힘 빼지 말고 얼른 올라가자.”
더 이상 유소문의 짜증이 듣기 싫은지 현칠은 자리에서 일어나 앞장서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유소문은 미심쩍은 마음을 가지면서도 어쩔 수 없이 현칠의 뒤를 따라 걸었다.
사룡봉의 꼭대기는 그로부터 반나절을 더 걸어 올라간 후에야 도달할 수 있었다.
정상에는 화산이 폭발하여 생긴 듯한 거대한 분화구가 자리 잡고 있었다.
현칠은 분화구에 조심스레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깊은 어둠 때문에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품 안에서 작게 잘라 묶어 놓은 한지를 꺼내 그곳에다 뭐라 적더니 돌멩이를 들어 땅에 떨어뜨렸다.
분명 가볍게 떨어뜨렸는데도 그 돌멩이는 땅에 튀기더니 떨어뜨린 힘에 비해 강하게 굴러 거대한 분화구 안으로 쏙 하고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분명 이 안에 내공의 기연이 있는 게 확실해!”
한지를 다시 품 안에 쑤셔 넣은 현칠은 자신 있다는 표정으로 유소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유소문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어 대는 현칠과는 다르게, 아미를 찡그리며 울상을 짓고 있었다. 어렵게 산 정상까지 올라와서는 다시 깊이를 알 수 없는 분화구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니 자신도 모르게 절로 인상이 구겨지는 유소문이었다. 그런 유소문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칠은 화섭자(火攝子)를 꺼내 들고 준비해 온 횃불에 불을 붙였다.
“가자!”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 있는 현칠은 유소문을 재촉하듯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힘겨워하는 유소문과는 달리, 현칠은 현재 이런 모험을 즐기고 있었다.
자신이 살던 세계에서 매일 이런 모험을 꿈꾸며 글로만 쓰던 현칠로서는 막상 그런 일들이 현실로 다가오자 몸은 힘들어도 즐겁기만 했다.
물론 아직까지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안전한 곳을 찾아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분화구 안의 길은 매우 험하고 어두워서 횃불 하나에 의존하며 들어가는 현칠과 유소문은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잠시 잠깐의 방심이 끝을 알 수 없는 절벽 아래로 이어진다는 사실에 등골이 서늘하기까지 했다. 한 시진쯤 걸어 내려갔을 무렵, 앞서 가던 현칠이 어둠 속에 그만 발을 헛딛고 말았다.
“으악!”
“조심하게!”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현칠의 손을 간신히 붙잡은 유소문이 안도의 한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버티고 있던 바닥이 내려앉아 버렸다. 잡고 있던 유소문마저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둘은 끝을 알 수 없는 절벽 밑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으아아아악!”
얼마나 지났을까, 먼저 눈을 뜬 사람은 유소문이었다. 기괴하게 튀어나온 거대한 바위 위로 떨어진 유소문과 현칠은 그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지만 그리 높지 않은 높이였는지 다행히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으며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현칠을 찾은 유소문은 가벼운 손놀림으로 그를 깨웠다.
“정신 차리게, 현칠! 이보게.”
“으으으음.”
유소문의 손길에 정신을 차린 현칠은 떨어질 때의 충격 때문인지 바로 일어서지 못했다.
“아이고, 등짝이야! 허리 부러진 거 아냐, 이거?”
등으로 밀려오는 고통에 잠시 엄살을 떨던 현칠은, 실제로는 별 이상이 없는지 서서히 고통이 가라앉자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현칠은 다시금 화섭자를 꺼내 들었다. 그제야 주변이 밝아지며 자신들이 절벽에 튀어나온 바위 위에 운 좋게 떨어져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까딱하면 황천으로 갈 뻔했군.”
현칠의 말에 유소문 역시 동의하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을 살펴보기 위해 손을 돌려 다른 곳을 비춰 보던 현칠은 무언가를 발견한 듯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고, 곧이어 유소문 또한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곳에 동굴이?”
뜻밖에도 그들이 내려선 바위 옆으로는 제법 커 보이는 동굴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절벽 중앙에 표류된 현칠과 유소문은 우선 빠져나갈 방법을 찾기 위해 동굴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동굴 안은 입구보다도 두 배는 더 커 사람 세 명이 나란히 서서 다녀도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넓었다.
동굴로 들어선 현칠과 유소문은 그 크기에 놀랐고 동굴의 외벽을 보고는 다시 한 번 놀람의 감탄사를 터트렸다.
“이거 도대체 뭐지?”
감탄 섞인 유소문의 물음에 현칠 역시 궁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동굴의 외벽은 마치 유리로 만들어진 듯 반질반질하면서 화섭자의 불빛을 반사시켰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만져 보니 그것은 분명 돌덩이였다.
“돌인 것 같은데 뭔가에 의해 매끄럽게 다듬어졌군.”
순간 유소문과 현칠은 이 특이한 동굴 안에 분명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평범하지 않은 동굴 안을 더 조사하기로 마음먹은 그들은 곧이어 안으로 천천히 들어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들어가던 중 앞서 가던 유소문이 갑자기 걸음을 멈춰 서자 현칠 역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잠깐! 뭔가 번뜩인 것 같은데?”
휘이익!
유소문의 말과 동시에 동굴 안쪽에서 한 줄기 강한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그 바람이 얼마나 셌는지 물에 넣어도 잘 꺼지지 않는다는 화섭자가 단번에 꺼져 버리고 그 충격에 유소문과 현칠은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자빠지고 말았다.
“아악! 갑자기 동굴 안에서 웬 바람이야?”
“조심하게. 안에 뭔가가 있는 것 같네!”
유소문의 외침에 현칠은 움직이려던 것을 멈추고 어둠 속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그들의 앞쪽에 살아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현칠은 재빨리 품 안에서 다른 화섭자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앞쪽을 향해 힘껏 던졌다.
“으악! 대체 저게 뭐야?”
“뱀?”
화섭자의 불꽃이 환하게 타오르며 반질반질한 동굴 벽에 불빛이 반사되자 어둠 속에서 혀를 날름거리며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거대한 뱀의 형상이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청동의 갑옷과도 같은 단단한 비늘이 온몸을 반들거리며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를 가진 뱀은 얼핏 보아도 크기가 삼 장(丈)은 되어 보일 정도로 거대했다.
“젠장! 도망쳐!”
“으아아악!”
유소문과 현칠은 뱀의 모습에 기겁하며 동굴 밖을 향해 무작정 달려 나갔다. 그러나 그 거대한 뱀은 자신의 거처를 침입한 존재들을 순순히 보내지 않으려는 듯 벽을 타고 스르륵 움직이더니 어느새 유소문과 현칠 앞의 입구를 막아서 버렸다.
“젠장! 기연이라는 게 만년설삼(萬年雪蔘)도 아니고 옥천하수(玉天下水)도 아니고 이무기였다니, 이 빌어먹을 만년필아!”
현칠은 이 순간에도 이런 상황을 만든 만년필에게 저주를 퍼부었지만 사실 그리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입구를 가로막은 이무기는 그 무시무시한 이빨을 들이밀며 가까이에 있는 유소문에게 덮쳐들었다. 그러자 유소문은 재빨리 허리춤에서 지옥도를 꺼내 들고 간신히 이무기의 이빨을 쳐낼 수가 있었다.
“나이스!”
현칠은 단 한 번의 공격에 먹혀 버릴 거라 생각한 유소문이 이무기의 공격을 막아 내자 환호성을 질렀다. 사실 유소문은 그리 약한 편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아버지에게 15년간 무예를 익힌 유소문의 실력은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실전 경험이 전무한 유소문은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막가파 삼 형제의 실력이 유소문보다는 월등히 높았기에 섬서에서는 그리도 허무하게 얻어맞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소문이 막가 삼형제에게 단 한 방에 뻗어 버린 것만을 보았던 현칠은 그가 이번 공격을 막아낸 것을 그저 운이 좋았다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이무기는 공격이 막히자 재빨리 목을 움츠렸다가 이내 입을 쫙 벌리고는 다시 유소문을 덮쳐들었다. 몸을 돌려 이무기의 공격을 간신히 피한 유소문은 곧바로 현칠의 뒤로 몸을 날렸다.
“으악! 내 뒤로 피하면 어떡해!”
유소문이 뒤로 피해 버리자 이무기의 눈은 현칠에게 향했다.
본능적으로 가까이에 있는 적을 공격하는 것인지 그 큰 아가리로 현칠을 공격해 들어왔다.
기겁하며 있는 힘을 다해 뒤로 몸을 날린 현칠은 뒤돌아볼 새도 없이 동굴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윽고 현칠의 눈에 동굴 안쪽으로 이무기가 있던 자리에 사람 하나가 들어설 수 있을 정도의 커다란 구멍이 하나 나 있는 것이 들어왔다.
그들은 다른 생각은 할 겨를도 없이 바로 목 뒤까지 다가온 이무기의 이빨을 피해 구멍 안으로 몸을 날렸다.
생각 외로 길게 이어진 통로를 미끄러져 나온 유소문과 현칠은 통로 끝이 물웅덩이로 이어져 있어 아무런 충격 없이 떨어질 수 있었다. 유소문과 현칠은 오로지 이무기를 피해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급하게 물웅덩이를 헤치고 나왔다.
하지만 그 구멍은 이무기가 물을 마시기 위해 다니던 통로였던 만큼 곧 뒤따라온 이무기가 물웅덩이를 빠른 속도로 벗어나더니 또다시 뒤로 처진 유소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둠 속에서 본능적으로 다시 한 번 가까스로 이무기의 공격을 막아 낸 유소문은 갑자기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는지 이번에는 지옥도로 이무기를 내리쳤다.
팅!
“뭐야?”
이무기의 얼굴에 지옥도가 부딪치자 마치 쇠를 때린 것과 같은 소리가 울리며 도가 튕겨 나왔다.
이무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재차 유소문을 향해 공격해 들어왔고, 유소문은 지옥도로 다시 한 번 이무기의 이빨을 막아내고는 몸을 옆으로 굴려 피했다.
“너도 공격해! 공격하란 말야!”
어느새 멀리 떨어진 바위 사이로 몸을 숨기고 고개만 내민 현칠은 주변을 밝히기 위해 몸 안에 있는 화섭자를 모두 꺼내 들고는 동굴 주변으로 던져 놓으며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