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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다시 쓰다 1권(6화)
3장 이무기를 때려잡고 기연(奇緣)을 얻다(2)
‘젠장, 말이 쉽지!’
유소문은 혼자 비겁하게 숨은 현칠을 속으로 욕하면서 다시 한 번 몸을 굴려 이무기의 공격을 피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또다시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유소문은 덮쳐 오는 이무기의 머리를 피해 몸을 빙그르 돌더니 이번에는 이무기의 몸통을 가격했다. 그러나 몸통 역시 쇳소리를 내며 유소문의 공격을 가볍게 튕겨 냈다.
“큭!”
지켜보고 있던 현칠은 이 난처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강철과도 같은 이무기의 몸에 상처 내기란 지금 상황에서 유소문이 무림고수가 되는 일보다 더 어려워 보였다.
그나마 이무기의 공격이 단순해 아직까지는 차분히 막아 내고 있지만 언제 단번에 먹혀 버릴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다급해진 현칠은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품 안의 한지는 젖어 쓸모가 없어졌기에 얼른 손바닥에 이무기가 죽는다고 썼지만 역시 생명에 관한 일이라서 그런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현칠은 다시 한 번 손바닥에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바위가 떨어져 이무기를 덮친다.
그 순간 동굴 안에 천장이 부르르 울리기 시작했다.
미약하게 몸이 떨릴 정도로 전해지던 그 느낌이 지나간 후, 천장에 달려 있던 거대한 종유석(鐘乳石) 하나가 이무기의 머리 위에서 흔들리면서 곧이어 거대한 굉음과 함께 떨어져 내렸다.
“소문아, 바위 떨어진다. 얼른 피해!”
현칠의 다급한 목소리에 유소문은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위를 한 번 쳐다보고는 이내 기겁을 하며 있는 힘껏 뒤로 신형을 날렸다.
몸을 날림과 동시에 거대한 종유석이 떨어지며 엄청난 굉음과 함께 파편을 사방으로 튕겼다.
종유석의 파편에 맞기는 했으나 간신히 몸을 피한 유소문은 종유석이 내려앉은 자리를 바라보았다.
둘레가 족히 삼 장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종유석이 이무기를 완전히 깔아뭉개 그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휴!”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안도의 한숨을 쉬던 유소문은 문득 떨어진 종유석이 들썩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설마…….”
스쳐 지나가는 불안감에 망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소문의 눈앞으로 이윽고 거대한 종유석은 순식간에 금이 가며 두 쪽으로 갈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아주 멀쩡한 모습의 이무기가 이번에는 조금 아팠는지 비명소리와도 같은 쇳소리를 내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던 유소문은 아차 하는 순간에 이무기의 꼬리에 허리를 잡혀 버렸고 조여 오는 강한 꼬리 힘에 눌려 그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악!”
이무기는 자신을 귀찮게 한 유소문을 괴롭히려는 듯 꼬리에 힘을 주었다가 다시 살짝 풀어 주는 행동을 반복하며 유소문에게 더욱 심한 고통을 주었다.
유소문은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절규했다.
고통 속에서 절규하는 유소문을 눈으로만 지켜보던 현칠은 이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현칠의 머릿속으로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
“지옥도를 사용해! 내가 가르쳐 준 것 있잖아!”
정신을 잃어 가던 유소문은 귓가로 들려오는 현칠의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단전의 기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외공에만 중시하던 아버지에게 막무가내로 배운 유소문이지만 아버지가 구해 준 삼류 무공서 중에서 내공심법인 토납법(土納法)을 익혀 십 년간 매일 수련했었다. 물론 개나 소나 다 할 수 있는 삼류의 토납법이었지만 십 년간 꾸준히 수련한 유소문의 단전에는 조금이지만 약간의 내공이 쌓여 있었다.
현칠이 가르쳐 준 지옥도의 사용법은 간단했다. 바로 단전의 기를 끌어내서 도에 주입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소문은 이러한 지옥도의 사용법을 현칠에게 듣고 알게 된 후에 단 한 번도 지옥도에 기를 전해 보질 못했다.
내공에 관한 한은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이 오로지 책을 읽고 독학으로 알게 되었던 터라 어떻게 해야 모은 기를 움직일 수 있는지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무기는 발버둥 치던 유소문에게 더 이상 흥미를 못 느꼈는지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한 입에 삼켜 버리려는 듯 유소문을 향해 덮쳐들었다.
그 순간 유소문의 오른손에 들린 지옥도에서 쳐다보는 이의 눈이 아릴 정도로 강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서걱!
어느새 이무기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인해 유소문의 옷은 붉게 물들고 있었다.
현칠은 볼 수 있었다.
이무기의 커다란 아가리가 유소문을 덮치려던 순간, 지옥도에서 강한 빛이 뿜어지며 그 모양이 변하더니 강철과도 같은 이무기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리는 것을.
비겁하게 혼자 바위 뒤에 숨어 있던 현칠은 부끄럽지도 않은지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나와서는 쓰러져 있는 유소문의 상태를 살폈다.
유소문은 고통으로 인해 힘이 빠졌는지 가쁜 숨과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잠시 그의 몸을 살펴본 현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의 왼팔은 이미 심하게 부러져 모양이 기이하게 틀어져 있었고 갈비뼈는 부러져 폐를 관통해서 숨을 쉴 때마다 고통이 밀려왔다.
‘제길! 이제 어떡해야 하지?’
현칠은 죽어 가는 유소문을 바라보며 그를 살려 내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다.
그러자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잘 생각나지 않던 이 무협 소설에 관한 일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생각나기 시작했다.
몸으로 겪어 봐야 안다는 말처럼 현칠은 자신이 직접 겪을수록 생생해지는 기분이었다.
‘맞다! 이무기의 피[血]! 그걸 먹였었어!’
현칠은 아직도 꿈틀거리는 이무기의 잘린 목 부위로 성큼 다가서서는 손으로 후벼 살점을 뜯어냈다.
역겨움에 구토가 나올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으며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점을 가지고 유소문의 입에 대고 쥐어짰다.
유소문은 고통에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현칠은 그의 목을 젖혀 입속으로 흘러 들어간 피를 삼킬 수 있도록 만들었다.
피를 마시게 하고 일다경쯤 지나자 그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기이하게 틀어져 있던 유소문의 왼쪽 팔이 뼈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원상태로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더니 폐를 관통했던 갈비뼈들도 서서히 빠져나와 도로 제자리를 찾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장면이었다.
그런 유소문의 변화를 바라보며 현칠은 놀라워하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정말 내가 생각해 낸 방법이지만 유치하군.”
잠시 현칠은 자신이 처음 쓴 무협 소설이 이리도 유치했나 하는 생각에 실소를 흘렸다. 그렇게 다시 반 시진이 더 지나고 나서야 유소문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린 유소문은 멀쩡한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른 채 놀라워했다.
현칠이 이무기가 어떻게 죽었는지, 또 이무기의 피를 먹여 몸이 순식간에 완쾌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자 유소문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이무기의 피에 그런 효험이 있었군.”
자신의 몸을 이곳저곳 만져 보며 놀라워하던 유소문은 문득 땅에 떨어져 있는 지옥도를 집어 들었다.
죽기 직전의 느낌을 생각하며 단전의 기를 모아 보았다.
처음 단전의 기를 끌어내기 위해 그리도 노력할 때는 안 되더니 죽음의 순간 본능적으로 이끌린 기의 흐름을 기억하며 유소문은 서서히 지옥도의 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손에 들린 지옥도에서 아까와도 같은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그 형태가 변해 버렸다.
투박하던 도의 날은 마치 이슬이라도 머금은 듯한 영롱한 빛을 내뿜으며 푸른 냉기가 돛을 정도의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었고, 반 토막으로 부러져 보이던 도 끝은 마치 도끼가 휘어지듯 활모양을 그리며 길게 뻗은 도신을 자랑하고 있었다.
유소문과 현칠은 그런 지옥도의 모습에 자신들도 모르게 감탄을 자아냈다. 정녕 지옥의 사신이 들고 있을 듯한 모습으로 변해 버린 지옥도를 바라보던 유소문이 변형된 그 예기에 넋을 잃고 옆에 있는 바위를 내리치자 놀랍게도 마치 무가 잘리듯이 바위가 반듯하게 잘려 나갔다.
“대단한데!”
지옥도의 날카로운 예기에 다시 한 번 감탄한 현칠이 감탄성을 지르자 유소문 자신도 놀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이내 힘이 드는지 도에 주입하던 기를 거두자 지옥도는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휴! 이거, 기력 소모가 장난이 아니군.”
지옥도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기가 필요한 듯 잠깐의 사용에도 유소문은 무척 피곤함을 느꼈다. 또한 아직 기의 조절이 어설픈 유소문이었기에 장시간 지속시킨다는 것은 그에게는 무리한 요구였다.
“아직 네 몸 안에 내공이 없어서 그래. 이무기의 내단을 취하면 별문제는 없을 거야.”
종전까지의 긴장감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현칠은 입가에 흡족한 미소까지 머금으며 이무기의 시체로 다가갔다. 그러자 유소문 또한 내단이란 말에 내심 기대감을 가지며 그에게 다가섰다.
뜨거운 피가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이무기의 시신에 다가선 유소문은 현칠의 요구에 따라 지옥도의 다시금 기를 주입했다.
강철보다 두꺼운 이무기의 가죽도 지옥도의 예리한 칼날에는 무용지물로 유소문이 다시 한 번 지옥도에 기를 주입하여 잘라 내자 강철과도 같은 이무기의 가죽은 너무나도 손쉽게 갈라졌다.
비릿한 피 냄새에 코를 막으며 한 손으로 뒤적뒤적 이무기의 몸을 헤치던 현칠이 곧이어 무언가를 발견한 듯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그의 손에는 어른 주먹만 한 크기의 내단이 들려 있었다.
“이게 바로 영물의 내단이야. 이걸 먹으면 모르긴 몰라도 일 갑자 이상의 내공이 생길걸!”
“이, 일 갑자라! 허허! 드디어 얻게 된 것인가!”
유소문은 현칠이 들고 있는 내단을 바라보며 감격에 눈물겨웠다. 드디어 아버지의 소원과 복수를 하기 위한 첫발을 내디딜 수 있는 순간이 온 것이다.
이윽고 현칠은 지옥도를 빌려 내단을 정확히 반으로 가르더니 그 한쪽을 유소문에게 건네주었다.
반으로 갈려진 내단을 잠시 바라보던 유소문은 방금 전의 감동은 사라졌는지 멍한 표정을 지으며 현칠을 바라보았다.
“혹시, 자네도 먹을 겐가?”
“응? 당연한 거 아냐?”
현칠이 유소문의 물음에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유소문은 약간은 멋쩍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웃어 보이고는 어색한 손놀림으로 건네주는 반쪽의 내단을 받아 잠시 바라보다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내단을 집어삼켰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알아두었던 내단 복용 후의 절차대로 즉시 운기조식에 들어가 몸에서 끓어오르는 내기를 다스리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영물 중의 영물로 분류되는 이무기는 양기보다는 음기가 강한 영물이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동굴 안에서 수백 년을 살아 온 이무기는 그 안에 있는 강한 음기를 먹으며 살아가기에 내단은 지독하게도 강한 음기를 띠었다. 그것을 몸 안에서 중화하기 위해서는 강한 양기를 내뿜는 영약을 같이 복용하거나 아니면 양기를 내뿜는 심법을 구사해야만 했다.
유소문은 그 두 번째 방법인 양기를 내뿜는 심법을 알고 있었다.
태천양의공(太天凉意共)은 무림에 널리 알려진 강한 양기를 내뿜는 극양의 심법으로 무공심법이라기보다는 건강을 위한 기체조의 일부라고 할 수 있었다. 유소문이 가부좌를 틀고 태천양의공을 시전하자 그의 몸에서 수증기 같은 연기가 오공을 통해 피어올랐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소문의 표정은 붉어졌다 푸르러짐을 수없이 반복하며 약 한 시진가량 계속하더니 감았던 눈을 서서히 뜨기 시작했다.
눈을 뜨는 순간 그의 눈에서 영롱한 빛이 떠오르더니 차차 그 빛이 사라졌다.
“어, 어때?”
현칠의 물음에 유소문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의 몸 안에서는 힘이 넘쳐 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몸이 가볍다는 것을 느낀 유소문은 곧이어 자리에서 일어나 무심한 손동작으로 장을 뻗어 옆에 있는 바위를 가격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바위에 일 촌가량의 깊이로 손자국이 찍히는 게 아닌가.
“우와!”
현칠은 그 위력에 감탄했고 유소문 또한 엄청난 장의 위력에 놀라더니 이내 두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드디어 고, 고수가 되었다! 흑흑!”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유소문을 바라보며 현칠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봐, 내단 하나 얻은 것 가지고 너무 좋아하지 마. 고수가 되려면 아직도 멀었다구. 무림고수가 되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아?”
벅찬 가슴에 찬물을 붓는 그의 말에 마음을 추스른 유소문은 눈물을 닦으며 웃는 얼굴로 현칠을 바라보았다.
“고맙네. 이게 다 자네 덕분일세!”
유소문은 현칠의 손을 잡으며 지금까지의 고생을 모두 한 번에 날려 버린 듯 진심으로 감사해 하고 있었다.
“아직 이 정도로 고마워하면 안 돼. 분명 이곳에는 또 다른 기연이 있어. 그것을 찾아야 돼.”
“또 다른 기연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유소문은 궁금증을 느끼며 물어보았지만 현칠은 대답 대신 손수건을 꺼내 손에 들고 있던 나머지 내단을 곱게 싸서 품 안에 넣었다.
“자네, 그거 안 먹을 건가?”
“난 내공심법을 몰라. 지금 먹어 봐야 그냥 몸에 좋은 보양식이 되거나 재수 없으면 죽을 수도 있는데 이걸 지금 먹을 수는 없지.”
현칠 역시 당장이라도 만년필을 이용하여 내단을 먹어도 무사하다고 적은 후 복용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생명에 관한 일은 들어주지 않으니만큼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실험해 보고 싶지는 않았다.
내단에 관해 자신이 설정한 방법이 이럴 때 이렇게 후회될 줄은 몰랐다. 차라리 아무나 먹어도 내공이 증진하도록 설정할 것을, 하고 후회하던 현칠은 말을 끊고 화제를 돌리며 무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분명 내가 여기 어디에 또 다른 기연을 준비했던 것 같은데…….”
“…….”
혼자 중얼거리는 현칠을 바라보며 유소문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던 현칠은 갑자기 무릎을 치며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