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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다시 쓰다 1권(7화)
3장 이무기를 때려잡고 기연(奇緣)을 얻다(3)


“그래, 맞아! 분명 내가 여기 어딘가에 전대 무림고수들의 무공 비급을 숨겨 놨었어. 맞아. 하하!”
“뭐? 무림고수의 무공 비급이라니?”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한 유소문이 재촉하듯 물었다.
“분명 여기에 전대 무림고수의 비급이 있을 거라고.”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알아?”
“쯧쯧! 내가 누군지 벌써 잊은 거야? 난 만물사라 불리는 현칠이라니까, 푸하하하하!”
현칠의 대답에 잠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던 유소문은 그제야 그가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한 달 동안 알고 지내면서 혹시 엉터리는 아닐까, 자신이 속은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지내던 유소문이기에 잠시 그의 능력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무, 무림고수의 비급이라면 상승의 무예를 얻을 수 있단 소리가 아닌가?”
“당근 빠따지!”
“갑자기 당근 뭐?”
유소문은 가끔씩 현칠이 내뱉는 말들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현칠은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손을 한 번 휘젓더니 만년필을 꺼내 손에 적기 시작했다.
―돌멩이를 던지면 이곳에 숨겨 놓은 또 다른 기연이 있는 방향을 알려 달라.
현칠이 돌멩이를 주워 떨어뜨리자 바닥을 튕긴 돌멩이는 떨어뜨린 힘에 반동하여 힘차게 튀어 올라 어느 한쪽 벽에 부딪쳤다.
현칠과 유소문은 돌멩이가 부딪친 벽에 다가가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별다른 게 없었다. 잠시 후 손을 더듬으며 벽을 살피던 유소문이 튀어나온 돌덩이를 건드리자 갑자기 벽이 네모난 문 모양으로 열리며 그 안에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비밀 문이었군.”
의외로 쉽게 찾은 현칠과 유소문은 조심스럽게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또 하나의 거대한 동굴로 천장은 약 수십 장이 될 정도로 높았고 주위는 야명주(夜明珠)가 사방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저, 저것들은 혹시 야명주가 아닌가?”
유소문은 말로만 듣던 밝게 빛나는 구슬을 진기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겨우 야명주 따위에 정신 팔리다니, 나 참! 이곳에는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기연이 있다니까!”
현칠의 핀잔에도 유소문은 마냥 신기한 듯 벽에 박힌 야명주를 넋 나간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문득 동굴 중앙에 있는 뭔가를 발견했다.
거대한 동굴의 중앙에는 두 개의 인골이 가지런히 정좌한 자세로 놓여 있었다. 하나는 푸른 청포를 입고 있는 인골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와 반대되는 붉은 장포를 입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두 인골은 흐트러짐 하나 없이 보존되어 있었다. 유소문이 먼저 그곳으로 다가서려 하자 현칠은 재빨리 그의 옷자락을 잡아 말렸다.
“고인의 시신 앞에서 삼배지체(三拜地體)를 해야지.”
“그렇군. 이거, 내가 자네 아니었으면 실수할 뻔했군.”
유소문은 현칠의 지적에 머쓱해 하며 고인의 시신 앞에 정중하게 삼배를 올렸다. 그러나 정작 삼배를 시킨 현칠은 가만히 서서 그런 유소문의 행동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 여기 뭐라 적혀 있는데?”
‘흐흐,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군.’
유소문은 정중하게 삼배를 올린 후에야 땅바닥에 써 있는 글씨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나와 인연이 되어 찾아온 후인(後人)이여, 그대가 노부들을 무시하고 시신에 손을 대었으면 기관진식이 발동하여 죽었을 것이나 예(例)를 갖추었다면 이 글귀를 발견하여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글 옆에 있는 장치를 눌러 기관을 해제하라.

현칠은 자신의 작품에 언제나 등장하는 뻔한 레퍼토리가 이때부터 시작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쓴웃음을 지었고 유소문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글씨 옆에 튀어나온 장치를 눌렀다.
그러자 동굴 벽 안에서 쇠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기관진식이 해제되는 듯했다.
두 노인의 시신 앞에는 각각 한 권의 책과 쇠로 조각된 패가 놓여 있었다. 유소문이 먼저 푸른 청포를 입은 시신 앞에 놓여 있는 책을 집어 들자 오랜 세월 동안 수북이 쌓인 먼지가 날리며 기침이 흘러나왔다. 가벼운 기침 후 유소문은 그 첫 장을 열고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노부의 이름은 천칠갑(天柒甲)이라 하며 사람들은 날 보고 천무대제(天武大帝)라 불렀다. 우선은 나와 인연이 닿은 후인에게 반가움을 전한다.

첫 문장을 읽은 유소문은 대단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무대제 천칠갑이 누구인가!
‘만통무림족보’에 따르면 천무대제 천칠갑은 이백여 년 전 홀연히 나타나 그 시절 어지러운 정파를 통합하여 지금의 무림맹을 세운 초대 맹주였다. 그의 사문이나 내력은 알려진 바가 없지만 그가 사용하던 무공인 도천위룡(刀天位龍) 도법은 지금도 전설의 삼대 도법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유소문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금 책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노부는 어지러운 정파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매일 밤낮을 정을 위해 싸웠고 결국에는 정파를 하나로 통합하여 무림맹을 세울 수가 있었네. 노부가 초대 맹주가 될 당시에는 사파에서도 그 무리가 연합하여 마천맹(魔天盟)을 결성했고, 그 후 무림맹과 마천맹 사이에서는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났네. 하여 노부는 그들을 단죄하는 것이 곧 정(正)이라 생각하고 매일 도에 피를 묻혀야만 했다네. 그렇게 의미 없는 정(正)과 사(邪)의 전쟁이 계속되자 결국 노부는 사파의 우두머리 격인 마옥존자(魔玉尊子) 독기련(毒技鍊)과 최후의 승부를 내기 위해 이곳 사룡봉에 올라 백 일 밤낮을 싸웠으나 승부를 볼 수 없었네.

‘그렇다면 옆에 있는 시신이 혹시 마옥존자 독기련이란 말인가?’
마옥존자 독기련, 그 역시 ‘만통무림족보’에 따르면 이백 년 전 사파의 중심인 마교의 교주로, 무림맹에 맞서 마천맹을 만든 초대 마천맹 맹주였다.
유소문은 잠시 옆에 놓인 시신을 한번 바라보고 다시 책을 읽어 내려갔다.

노부와 독기련은 백 일 동안 싸우면서 서로 정과 사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무의미한 싸움은 그만두기로 했다네. 어느새 벗이 된 독기련과 나는 더 이상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이곳 사룡봉에 은거하여 오직 무공 수련에만 정진하였네. 그리고 마침내는 심득을 얻어 말년에 구룡도법(九龍刀法)을 완성할 수가 있었다네. 나의 사문은 일인전승만을 하기에 아직까지 제자를 두지 못한 나는 속세의 인연을 끊고자 하였으나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은 법이라 나의 심득이 이대로 묻히는 것이 안타까워 이렇게 구룡도법과 본신 무예인 도천위룡(刀天位龍), 그리고 우리 가문의 내공심법인 위룡신공(位龍神功)을 남기네. 그리고 여기 함께 남기는 패는 무림맹주를 뜻하는 무정패(武正牌)이니 나중에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네. 인연이 되어 나의 전승을 받은 후인이여, 그대는 부디 무림의 정의를 위해서 힘을 쓰기 바라네.

이렇게 끝난 서문 뒤에는 구룡도법과 도천위룡, 그리고 위룡신공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끝까지 읽은 유소문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복받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느닷없이 천무대제 천칠갑의 시신에 스승의 예(禮)인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리기 시작했다. 아홉 번의 절을 마친 유소문은 시신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저 유소문은 천무대제 천칠갑님을 스승으로 삼아 그분의 유지를 받들어 무림의 정의를 위해 힘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
퍽!
“아얏!”
현칠은 혼자 감동에 늪지대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유소문의 뒤통수를 힘차게 한 대 갈겼다.
“혼자 꼴값하고 있네.”
“이게 무슨 짓이야!”
멋지게 혼자 폼을 잡고 있던 유소문은 갑작스런 현칠의 행동에 아파 오는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현칠을 째려보았다.
“그냥 아니꼬워서 그런다.”
“…….”
현칠의 답변에 유소문은 황당해 하며 뭐라 말을 하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이거 완전히 억지로 설정했었구만.’
비급을 들고 감격해 하는 유소문을 뒤로하고 현칠은 자신이 안배한 어설픈 설정에 고개를 저으며 다른 시신 앞의 책을 집어 들었다.

본좌가 바로 마옥존자(魔玉尊子) 독기련(毒技鍊)이다. 이 글을 읽는 너는 천하제일의 마인(魔人)이 될 수 있는 기연을 얻은 것이니 이 글을 읽는 즉시 오체복지하며 나를 받들어라.

“…….”
“미친놈!”
현칠은 여기까지 읽자 짜증스러운 듯 책을 아무렇게나 땅바닥에 던져 버렸다. 벅차오르는 감동에 빠져 있던 유소문은 그런 현칠의 행동에 놀라며 그가 던진 책을 마치 귀한 보물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아니, 이 귀한 것을……. 무슨 짓이야?!”
따지듯이 물어보는 유소문의 말투에 귀찮다는 듯 현칠은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한마디 했다.
“그 책은 버려. 노망난 늙은이가 쓴 책인가 봐.”
유소문은 현칠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책장을 넘겨 글을 읽어 내려갔다.

본좌가 바로 마옥존자(魔玉尊子) 독기련(毒技鍊)이다. 이 글을 읽는 너는 천하제일의 마인(魔人)이 될 수 있는 기연을 얻은 것이니 이 글을 읽는 즉시 오체복지하며 나를 받들어라. 본좌는 천 년의 역사를 가진 마교(魔敎)의 역사상 가장 강한 강자이자 마천맹의 초대 맹주이다. 마(魔)가 바로 정의이며 본좌는 마를 널리 세상에 펼치고자 무림맹의 천무대제(天武大帝) 천칠갑과 이곳 사룡봉에서……(중략)……말년에 본좌가 탈마(脫魔)의 경지에 이르러 창안한 마공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마력체(魔力體)이다. 여기에 내 본신 무공인 기각권(奇刻拳)과 내공심법인 초마기공(超魔氣功)을 함께 남기며 마교의 교주를 뜻하는 마령패(魔令牌)를 남기니 기연을 얻은 자, 천하제일의 마인이 되어 정을 구하라.

끝까지 책을 읽은 유소문은 아까와는 반대로 허탈해지는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 시신은 그가 추측한 대로 마옥존자 독기련이었다. 책의 내용 또한 방금 전에 읽은 천칠갑의 내용이랑 비슷했다.
정과 사를 대표하는 최고의 무인들이 남긴 비급들이 지금 자신의 손에 한 권도 아닌 두 권이나 들려 있었다. 그 책들은 정과 사로 구분되는 무공이지만 정의를 추구한다는 데서는 같은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유소문은 망설임 없이 조용히 독기련의 무공 비급을 내려놓았다. 아무리 정의를 추구하는 무공이라 할지라도 자신은 솔직한 심정으로 마교의 무공은 좀 꺼림칙했던 것이다.
유소문이 읽은 무협전기의 주인공은 언제나 정파의 인물들이었고, 더구나 자신이 복수해야 할 무리가 바로 사파가 아니었던가.
미련 없이 독기련의 비급를 땅에 내려놓던 유소문은 문득 비급 뒤편에 쓰여 있는 글씨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만물도필?”
의아한 표정을 짓는 유소문의 곁으로 어느새 다가온 현칠은 책자 뒤편에 적혀 있는 만물도필이란 네 글자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빼앗듯이 그의 손에 비급을 낚아챘다.
만물도필(萬物道筆).
‘만물도필, 모든 것은 붓으로 거느리다라는 뜻이 아닌가. 설마, 내가 지닌 만년필을 말하는 것인가?’
독기련의 비급 뒤편에 쓰여 있는 글의 뜻을 생각하던 현칠은 만년필과 석연치 않은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곰곰이 살펴보던 현칠은 나중에 생각하자는 생각으로 처음에 버린다는 말과는 다르게 독기련의 책자를 품안으로 갈무리했다.
영문도 모른 채 잠시 현칠의 행동을 지켜보던 유소문이 입을 열려던 찰나 현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는 얼굴로 먼저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내공도 얻고 상승 무공 비급도 얻었으니 무림고수가 되기 위한 준비는 끝난 것 같군.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지.”
“무림고수가 되기 위한 다음 단계라? 그게 무엇인가?”
“아이고, 답답한 양반아! 뭐긴 뭐야, 수련을 해야지! 수련 없이 무림고수 되는 사람 봤어? 봤어? 못 봤지?”
“그거야…… 못 봤지.”
“그러니까 이제 이곳을 빠져나가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수련이나 열심히 하면 되는 거지 별다른 게 있겠나.”
“음, 그렇군. 그렇다면 무림고수가 되기 위한 무공을 수련할 수 있는 좋은 장소를 찾아 그곳으로 가야겠구만.”
“당근이지!”
“……?”
현칠은 그때까지만 해도 이 모든 것이 잠깐의 유희라고만 생각했다. 지금은 돌아갈 수 없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다시 자신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굳게 믿고 있어 지금의 상황을 그리 나쁘지 않게, 아니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7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4장 무림서열록(武林序列錄)(1)


안휘성 황산(黃山)에 위치한 기림성은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기림성은 호북과 강서를 이어 주는 상인들의 교류 장소로써 매일 수백 명의 상인들이 드나드는 거대한 상인도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기림성의 중앙 광장은 떠도는 타지 상인들과 중계업자들, 그리고 물품을 구입하려는 구매자들로 북적거렸고 오늘은 다른 날보다도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놀랍게도 그 많은 사람들은 한 줄로 줄을 서서 무언가를 위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줄을 따라 눈을 돌리다 보면 처음 줄의 시작이 구석진 광장 모퉁이에 마련된 천막이라는 점이었다.
사람 두세 명이 들어가면 꽉 찰 것 같은 볼품없는 조그마한 천막 옆에는 대나무로 만든 낡은 깃발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 깃발은 광오하게도 만물사(萬物士)라 적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