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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다시 쓰다 1권(8화)
4장 무림서열록(武林序列錄)(2)


지금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인 악독해(惡毒害)는 기림성의 항구를 통해 강서와 고려에 무역업을 주도하는 삼송상회(三松商會)의 기림지부 지부장이다. 이십 년째 삼송상회에 몸담고 있는 악독해는 천민 출신이지만 온갖 비열한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출세한 자로, 이곳 기림에서 그의 세력을 무시하고는 장사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벌써 3년 전의 이야기다. 3년 전 이곳 기림에 신진 세력으로 등장한 대웅상회(大熊商會)가 지부를 들이면서 사사건건 삼송상회의 지부와 마찰을 빚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험난한 바닷길을 뚫고 고려에 자기를 구입하러 갔다가 이미 싹쓸이해 간 대웅상회에 밀려 헛걸음만 하고 돌아온 적도 있었다. 또한 대웅상회는 유능한 삼송상회의 인부들을 꼬드겨 높은 임금을 주고 빼돌리는가 하면 기림지부의 지부장 악독해에 대한 나쁜 소문을 퍼뜨려 기린 지점의 매출액을 떨어뜨리고 자신은 삼송 감찰원들에게 조사를 받는 수모도 겪게 했다.
그런 악독해는 지금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나 있었다. 내일은 일 년에 두 번 있는, 고려로 가는 뱃길을 타는 날이다. 그런데 버젓이 삼송상회가 출항하는 것을 알면서도 대웅상회에서 동시에 출발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본래는 서로 상단끼리 무역에 있어 뱃길을 달리하여 그 시기를 번갈아 가는 것이 정석이거늘, 이번에는 대웅상회에서 이같이 나오며 악독해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는 거지? 흐흐! 그러나 이 악독해를 건드린 것이 얼마나 땅을 치며 후회할 일인지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 주마!”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홀로 자신만의 세계의 빠져 있던 악독해는 잠시 후 천막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쫑긋거렸다.
“다음!”
자신의 차례가 돌아온 것을 깨달은 악독해는 음흉한 미소를 지우고 다시금 노련한 상인의 얼굴로 돌아와 천막을 열고 들어갔다. 천막 안에는 하나의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탁자의 맞은편에는 특이하게도 자색의 머리 색깔을 한 이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청년 하나가 앉아 있었다. 청년은 악독해를 바라보지도 않고 극히 사무적인 말투로 물어 왔다.
“그래, 소원이 뭐요?”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려 보이는 청년의 시건방진 말투에 순간 악독해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눈썹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당신이 요즘 소문이 자자한 만물사요?”
악독해의 물음에 자색 머리의 청년은 돌연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심하게 인상을 찡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야, 이 사람아! 나같이 바쁜 사람에게 뭐? 당신이 만물사요? 밖에 걸린 깃발 못 봤어? 그따위 질문이나 하려고 온 거면 나가! 당장 나가!”
갑작스런 청년의 행동에 순간 놀란 악독해는 이내 청년의 불같은 성질에 당황하지 않고 오랜 상인의 기질을 발휘하며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허허! 이거 제가 실례를 했군요. 고귀하신 만물사님에게 엉뚱한 질문을 한 점, 깊이 사죄드립니다.”
역시 산전수전 다 겪은 악독해의 말재간이 먹혔는지, 자색 머리의 청년은 자신을 치켜세우는 악독해의 말 한마디에 밀려오는 짜증을 잠시 누르는 듯했다.
‘음! 소문에 의하면 만물사의 성격이 지랄 같다고 하더니 그게 허언은 아니었구나.’
악독해의 속마음이야 이 싸가지 없는 어린놈의 새끼를 그냥 무시하고 한방 날려 버리고 싶었지만 자신의 상단 생활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에 참아야만 했다.
“그래? 어쨌든 소원이 뭐요? 빨리 말하쇼.”
청년은 짜증난다는 듯한 표정으로 손을 휘저으며 대답을 재촉했다. 악독해는 오랜 상인 생활의 경험으로 쓸데없는 이야기만 하다 보면 오히려 그의 화를 더 살 수 있겠다는 판단 하에 용건만 간단하게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내일 고려로 출항하는 대웅상회의 배를 출발 못하도록 해 주십시오.”
“은자 100냥!”
“네? 무슨……?”
“의뢰비로 은자 100냥!”
그 순간 악독해는 하마터면 손을 뻗어 이 싸가지 없는 청년의 귀싸대기를 날릴 뻔했다. 의뢰비로 은자 100냥이라니, 은자 100냥이면 평범한 세 식구가 일 년은 먹고살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은자 100냥이라니, 그런 터무니없는 금액을…….”
“싫어? 그럼 다음!”
자색 머리의 청년은 더 물어보지도 않고 다음 사람을 불렀다. 그러자 당황한 악독해는 순간 머릿속으로 빠른 계산을 해 보았다.
‘한 번 상단으로 고려를 다녀오면 남는 이윤이 금화 20냥이니, 어차피 은자 100냥으로 대웅 상단을 막을 수 있다면 싼 편이지.’
계산을 마친 악독해는 청년을 당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좋소! 은자 100냥에…….”
“은자 200냥.”
“헉! 무슨, 그사이에 200냥이라니 이런 법이 어디 있소?”
“아저씨, 난 두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시간을 무지 아끼지. 아저씨가 내 시간을 빼앗는 만큼 가격은 더 올라가요. 아시겠어요?”
악독해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청년의 뱃속에 기어 다니는 능구렁이를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돈이 더 올라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은자 200냥에 동의했다. 그러자 청년은 탁자 위에 놓인 공책에 알아볼 수 없는 글씨로 뭐라 적어 내려갔다.
“이제 끝났으니 가 보쇼!”
“끝이오?”
“…….”
“내일 대웅상회는 고려로 출항 못할 거니 그만 가 보쇼.”
너무나도 간단하게 소원을 성취하게 되자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던 악독해는 더 이상 뭐라 말할 수가 없어 서둘러 천막을 빠져나왔다. 악독해가 천막을 나가자 자색 머리의 청년은 밖을 향해 잠시 휴식이라고 외치고는 앉아 있던 의자에 뒤로 몸을 기댔다.
“휴,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기다리면서 돈이나 약간 벌려고 했더니 이거 벌써 반나절이나 영업하게 만드네. 성질나는데 확 소문이 대신 내가 패 버려?”
자색 머리의 청년은 지겨운 듯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이내 기지개를 한 번 펴고 다시 사무적인 목소리로 천막 밖을 향해 소리쳤다.
“다음!”

***

기림성의 중앙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교류하기에 실로 다양한 물품들이 많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항구와 가까운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많은 상점들이 외국에서 들어오는 물품들을 팔고 있었다.
중앙 광장을 둘러싼 수많은 상점에는 시시각각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중에는 길거리에서 노래를 하거나 차력을 선보임으로써 사람들의 주머니를 열게 하는 기인들도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중앙 광장에 머리를 산발하고 하얀 무복을 입은 한 젊은이가 서 있었다.
산발로 얼굴이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얼굴이나 목소리로 봐서는 이십대 중반 정도 되어 보였다. 곧이어 머리를 산발한 청년은 중앙 광장의 한복판에서 행인들을 향해 크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자, 형님, 누이, 아저씨, 아줌마, 모여 봐! 일터에서 상관 눈치에 짜증난 아저씨들, 이곳에서 풀어 봐! 밤에 밤일 시원찮은 서방 땜에 속상한 아줌마, 이곳에 와서 풀어 봐! 공부하기 짜증나는 형님, 누이, 이곳에서 날려 봐! 맞아 주는 인간 허수아비! 오늘도 이곳에서 동전 두 닢으로 여러분들의 화를 날려 드리려고 이렇게 왔습니다. 화는 참으면 병이 됩니다. 참지 마시고 여러분의 화를 시원하게 저에게 날려 버리십시오!”
청년의 넉살 좋은 외침에 지나가던 행인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신기한 구경거리를 찾은 듯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산발 머리의 청년은 몰려드는 사람들을 상대로 솜뭉치로 만든 장갑을 끼고 자신을 때리면 신나게 맞아 준다며 단돈 동전 두 닢으로 그들을 유혹했다.
여기저기서 한번 해 보라는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잠시 후 한 삐쩍 마른 몰골의 서생 같은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저…… 정말 맞아 주기만 하는 건가요?”
“네, 손님! 단돈 동전 두 닢이면 제가 신나게 맞아 드립니다.”
“그럼 좋아요. 여기 두 닢이요.”
서생 차림의 사내가 건네주는 돈을 받은 산발 머리의 청년은 솜으로 만든 장갑을 서생의 손에 끼워 주었다.
서생은 처음에는 가볍게 청년을 공격하더니 이내 신이 나는지 무자비하게 청년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산발 머리의 청년은 손으로 방어하면서도 거의 대부분 서생의 주먹을 그대로 받아 주었다.
한참을 공격하던 서생은 숨이 차는지 씩씩거리며 장갑을 벗고는 웃는 얼굴로 맞아 준 청년에게 고맙다는 말을 마치고 사라졌다.
그러자 일상의 화(火)가 쌓여 있던 사람들은 너도 나도 먼저 하려고 달려들었다. 상관에게 깨진 아저씨, 친구에게 곗돈 떼먹힌 아줌마, 서당에서 애들에게 깨진 선생까지 신나게 화를 풀었다. 그렇게 한창 돈벌이를 하며 맞고 있던 청년은 곗돈 떼인 아줌마의 주먹을 맞아 주고는 다음 사람을 찾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푸른 청포 차림에 오색으로 줄이 된 화려한 옷을 입고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단아한 눈빛의 중년 남자가 청년 앞으로 다가왔다.
“남궁세가(南宮世家)의 가주 천풍지검(天風地劍) 남궁도인(南宮道人)이다!”
주변에서 누군가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소리치자 주변에 몰려 있던 사람들은 이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남궁세가가 어디인가! 중원을 이끄는 오대세가(五大世家)의 하나로서, 남휘성 일대에 군림하고 있는 검술(劍術)과 권법(拳法)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무림 가문이었다. 거기에 현 가주인 천풍지검 남궁도인은 무림 백대고수에 들 정도로 막강한 무림고수였다. 그런 대단한 사람이 이런 보잘것없는 볼거리에 등장하자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궁도인은 그런 주변의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는 듯 산발 머리의 청년만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기품이 담긴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가 비무신마(比武神魔)인가?”
“……그렇습니다.”
산발 머리의 청년이 잠시 뜸을 들이고 대답하자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사람들은 또 한 번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남궁도인의 입에서 나온 비무신마(比武神魔)가 누구인가? 비무신마는 약 이 년 전 무림에 느닷없이 출현하여 강호의 세계에 발을 들인 이였다.
그가 속한 사문과 그가 쓰는 무공이며 일체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지만, 무명의 청년이 지난 이 년 사이에 크게 유명해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행하는 비무첩에 대한 일들 때문이었다. 비무신마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무림의 이름난 고수들을 찾아 정과 사의 구분 없이 비무를 청했다.
그리고 그 비무의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와 비무를 한 모든 이들이 그 후 폐관수련을 하거나 입을 함구하는 걸로 봐서 사람들은 결과를 유추할 수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 무림 백대고수인 남궁도인과 비무신마가 만났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뿐, 바로 비무를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남궁도인은 소란스러운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비무신마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곳은 너무 소란스럽군.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떻겠나?”
“좋습니다. 절 따라오시죠.”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비무신마의 신형이 빠른 속도로 눈앞에서 사라지고 남궁도인의 신형 또한 그를 따라 사라졌다. 중앙 광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사라진 두 사람의 행방에 어리둥절하며 이 아까운 광경을 못 보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중앙 광장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때, 다른 한쪽 구석에 위치한 천막 안에서도 만물사라 불리는 자색 머리의 청년이 ‘오늘 영업 그만!’이라는 말과 함께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사라진 만물사의 모습에 마냥 허탈한 표정만을 지어야 했다.

기림성의 서쪽 벽 너머 갈대숲에 세 명의 인영이 모여 있었다. 마주 보고 있는 고상한 옷차림의 중년 노인은 다름 아닌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도인이었고 그와 대치하고 있는 산발 머리의 청년은 비무신마 유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이 펼칠 비무를 재미난 구경거리인 양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고 있는 자색 머리의 청년이 바로 만물사 현칠이었다.
남궁도인은 잠시 현칠을 바라보며 비무신마 유소문에게 물어보았다.
“저자는 누구인가?”
“우리 비무의 증인입니다.”
“음!”
남궁도인은 낮은 신음성을 흘리고는 알았다는 듯 더 이상 현칠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그러고는 품 안에서 검은색으로 된 비무첩을 꺼내 유소문 앞으로 집어 던졌다.
“자네의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네. 언젠가는 나에게도 찾아올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비무첩을 받으니 자네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나더군.”
“저에 대해 알고 싶으시다면 먼저 저를 이기셔야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광오하군.”
“그렇게 생각하셔도 좋습니다만, 말은 겨루어 본 후에 하셔도 될 것 같군요.”
“좋네. 어디, 소문이 무성한 비무신마의 실력을 구경해 보세나.”
남궁도인은 허리춤에 찬 애검을 꺼내 들고는 눈에서 흉흉한 기운을 뿜어내며 유소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유소문은 그런 남궁도인의 매서운 기도를 묵묵히 받아들이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옥도를 꺼내 들고 자세를 취해 보였다.
‘적어도 내 밑은 아니라는 소리군!’
남궁도인은 자신이 뿜어내는 암경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유소문을 바라보며 긴장감을 더했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전력을 다할 생각으로 단전의 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선배로서 삼 초를 양보해야겠지만 이번 비무에서는 그러지 못하는 점 이해하게.”
“상관없습니다.”
건방진 듯 무덤덤한 유소문의 목소리에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오른 남궁도인은 무림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위치도 생각하지 않은 채 유소문을 향해 먼저 신형을 날렸다.
―천풍검법(天風劍法) 일식 천풍검(天風劍).
이윽고 남궁도인의 몸이 마치 한 마리의 제비처럼 날아오르더니 그의 검에서 한 줄기 광풍이 뿜어지듯 시퍼런 살기를 뿜어내며 유소문을 향해 덮쳐 갔다.
유소문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풍을 무시할 수 없어 자신 역시 몸을 솟구쳐 지옥도를 치켜들며 마주 찔러 들어갔다.
공중에서 검과 도가 맞부딪치자 거대한 충격으로 남궁도인은 땅에 착지하고 다섯 발자국이나 뒤로 물러난 반면 유소문은 그 자리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뿐히 내려섰다.
남궁도인은 자신이 새파란 젊은이에게 밀려났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지, 아니면 인정할 수 없는지 더욱 시퍼런 안광을 내뿜으며 재차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