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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다시 쓰다 1권(9화)
4장 무림서열록(武林序列錄)(3)
―천풍검법(天風劍法) 오의 삼류검(三流劍).
남궁도인의 기합성과 함께 벌써부터 그의 절초인 삼류검이 그의 손에서 터져 나왔다. 그러자 하나의 검이 마치 3개로 변화한 듯한 형상을 이루며 유소문의 상단, 중단, 하단을 동시에 공격해 들어왔다. 삼류검은 남궁도인을 지금의 이 자리까지 올려놓게 한 천풍검법의 절초였다. 그러나 유소문은 재빨리 지옥도를 머리 위로 치켜들더니 남궁도인의 삼류검을 단 한 번의 내리침으로 모조리 튕겨 냈다.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삼류검이 모조리 튕겨 나가자 크게 당황한 남궁도인의 목줄기에는 어느새 지옥도의 날카로운 날이 다가와 있었다.
그것은 단 이 초로 끝나 버린 허망한 승부였다.
“이럴 수가……! 믿을 수가 없군! 내, 내가…… 졌네!”
남궁도인과 유소문의 비무는 남궁도인이 무림 백대고수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정도로 허무하게 승부가 나 버렸다. 그러나 유소문과 남궁도인의 실력 차가 컸다는 소리는 아니다. 다만 남궁도인은 자신의 절기인 삼류검을 너무나도 믿었기에 이렇게 단번에 막힐 줄을 몰랐다가 어이없는 패배를 당한 것이었다. 유소문은 그런 남궁도인을 묵묵히 바라보다 지옥도를 도집에 끼워 넣었다.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궁도인을 바라보며 유소문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비무첩에 적혀 있는 대로 내가 당신에게 세 가지 조건을 내걸겠소. 인정하시오?”
충격에 빠져 있던 남궁도인은 유소문의 말에 정신이 돌아온 듯 그를 바라보았다.
“좋다. 약속은 약속이니 말해 보게나.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는 들어줄 테니.”
남궁도인은 비무첩에 적혀 있던 내용인 비무의 승자가 상대에게 세 가지 조건을 내걸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하며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첫 번째는 오늘 있었던 나와의 비무는 3년 동안 입 밖에 내지 말라는 것이오.”
첫 번째 조건이 의외로 간단하다는 생각에 남궁도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사실은 말하고 다니라고 해도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고서야 부끄러워서 말할 수도 없었다.
혹시라도 그가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을 말하면 어쩌나 고민하고 있던 남궁도인으로서는 오히려 좋은 조건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오늘 비무로써 당신은 새로 쓰이는 정사무림서열록(正邪武林序列錄)에 서열 84위로 등록하는 바이며 이 서열은 3년 안에 재대결로써 조정할 수가 있고 3년 후에 정확한 서열을 알 수 있을 것이오.”
그 순간 남궁도인은 뒤통수를 강하게 때리는 듯한 충격에 잠시 할 말을 잊을 수밖에 없었다. 무림서열록이라니, 그리고 자신이 84위라니, 그렇다면 무림서열록이라는 것은 비무신마가 작성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정말 남이 들으면 철없는 청년의 말로 웃어넘길 수도 있겠지만 그는 달랐다.
“세 번째 조건은 3년 후 내가 당신을 다시 찾아갈 때 알려드리리다.”
패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피눈물을 흘리며 받아들일 수밖에. 남궁도인에게서 약속을 받아 낸 유소문과 현칠은 그런 남궁도인의 쓸쓸한 모습을 뒤로한 채 신형을 날려 먼저 자리를 피했다.
“좋아, 잘했어! 이걸로 무림서열록에 한 명이 추가되었군. 어디 보자, 벌써 육십칠 명이나 등록되었는걸. 이 년 동안 참 많이도 싸웠군. 흐흐!”
기림성 서쪽 입구로 자리를 옮긴 현칠은 유소문에게 푸른 청포와 머리끈을 건네주며 뭐가 좋은지 싱글거리며 웃어 댔다. 유소문은 말없이 무복을 벗고는 받아 든 푸른 청포를 두르고 산발된 머리를 정리하여 묶자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이 드러났다.
“다음은 어디지?”
유소문의 물음에 현칠은 품에서 공책 한 권을 꺼내더니 잠시 뒤적거리고는 대답했다.
“음, 다음은 하북에 있는 하북 팽가(河北彭家)의 둘째 아들 패력도왕(覇力刀王) 팽형규란 놈인데, 이제 나이 삼십에 벌써 하북 팽가 가주의 실력을 넘어섰다고 하더군.”
“하북이면 뱃길로 가는 게 빠르겠군.”
“우선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배편을 알아보지, 뭐.”
유소문과 현칠이 사룡봉에서 기연을 얻은 후 산속에 들어가 오 년의 수련을 마치고 강호에 나온 지도 벌써 이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강호에 나오면서 무림고수가 되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 유소문은 비무신마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전국을 돌며 비무를 하고 있었다.
그동안 유소문은 강호에서는 비무신마란 명성으로 별호를 떨쳤고 현칠 역시 무엇이든 소원을 들어주는 만물사로 유명해져 있었다.
유소문의 경우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무림고수들에게 비무를 청하기에 유명해졌지만 현칠은 정말 뜻밖의 이유로 유명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년 전 강호에 나와 유소문의 첫 비무 상대였던 은하십협(銀昰十俠) 구원준을 상대할 때, 현칠은 기다리기 지루하여 객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던 중 현칠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한 농부가 집에서 키우던 소를 잃어버려 근심하고 있자 현칠이 지나가는 말로 ‘이제 소를 찾게 될 것이오’라고 말했는데, 잠시 후 객점으로 정말 잃어버린 소가 당당히 들어오는 게 아닌가. 그때 놀란 객점 사람들을 바라보며 만취한 현칠은 자신은 무슨 소원이든 들어줄 수 있는 만물사라고 떠벌리며 사람들의 소원을 마구 들어주었다.
물론 그중에 안 이루어진 일들이 훨씬 많았지만 소원을 이룬 사람들은 그의 일을 떠벌리며 다녔고,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나가 전국에서 그를 만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처음에는 그런 귀찮은 일에 짜증내던 현칠이었지만 어느새 이제는 능숙한 상인의 모습으로 변모하여 이 일을 이용해 돈을 모으고 있었다.
귀찮은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현칠이었기에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다녀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했지만 그 정도는 벌어들이는 수입에 비하면 별거 아니었다. 그리고 곧 그 정체를 숨길 필요도 없을 테니 말이다.
기림성으로 돌아온 유소문과 현칠은 시장 골목에 위치한 청운객점(淸雲客店)이란 낡은 간판의 객점에 들어가 여장을 풀었다. 겉보기에 허름해 보이던 외부와는 달리 그 안은 무척이나 깨끗하면서도 넓었다.
그러나 허름한 간판 때문인지 해가 저물어 가는데도 객점 안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산발한 머리를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은 유소문은 조금 전 중앙 광장의 기인과 동일 인물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단정하게 변모해 있었다. 반면 현칠은 자색의 머리 색깔을 감추기 위해 검은색의 삿갓을 눌러쓰고 있었다.
객점에 자리를 잡은 유소문과 현칠은 점소이를 통해 간단한 소면과 양고기 구이, 그리고 죽엽청 한 병을 시키고는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객점에 들어서는 두 명의 여인이 현칠의 눈에 들어왔다.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두 여인은 이런 허름한 객점(물론 밖에서 보았을 때)에 어울리지 않는 절색의 미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중 주황색 경장 차림의 여인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그 자태가 매우 뛰어났고 다른 여인 또한 매우 훌륭한 미색을 띠고는 있었지만 주황색 경장 차림의 여인과는 반대되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주황색 경장 차림의 여인에게서는 차가운 듯한 아름다움이 뿜어져 나온다면 다른 여인은 모든 이를 수용할 것 같은 화사함이 갖추어져 있었다.
두 여인은 무림인인 듯 가느다란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다. 아름다운 두 여인의 등장에 객점 안에 있는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들에게 집중되었다.
“헉! 백윤정? 배은희?”
현칠은 객점으로 들어서는 두 여인의 얼굴을 보더니 자신의 얼굴이 삿갓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도 잊은 채 황급히 고개를 숙여 그들을 피했다.
그러나 두 여인은 그런 현칠의 행동에 관심도 없는 듯 자리를 잡고 점소이에게 음식을 주문했다.
갑작스런 현칠의 행동에 의아해진 유소문은 그런 현칠을 바라보며 물어보았다.
“자네, 왜 그러는가?”
유소문의 질문에 현칠은 황급히 손을 들어 유소문의 입을 막았다.
“쉿! 조용히 하게.”
현칠은 한 손으로 유소문의 입을 막은 뒤 조심스럽게 두 여인이 앉은 자리를 살펴보고는 그녀들이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멀뚱히 자신의 행동을 바라보는 유소문의 입을 막았던 손을 치우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누군가? 아는 사람들인가?”
유소문은 방금 들어온 여인들을 바라보며 현칠에게 물어보았다.
“아니, 알기는. 그냥 내가 아는 사람들과 닮아서 그래.”
“싱겁긴. 자네가 이렇게 놀랄 정도면 분명 그 사람들은 자네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겠군.”
‘좋은 감정 정도가 아니라 웬수다, 웬수!’
현칠은 다시 한 번 여인들을 조심스럽게 힐끔 쳐다보고는 이렇게 자신을 놀라게 한 그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현칠이 이렇게 생각만으로 몸서리를 칠 정도의 사람들이란 바로 백윤정과 배은희란 이름의 두 여자들로 현칠이 현실 세계에 있을 때 알고 지낸, 소위 불알친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 사귄 친구들이다. 그러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같이 다니면서 현칠은 그들이 진정 자신의 친구라는 사실이 저주스러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백윤정은 칠공주파 서열 일위의 싸움꾼으로 남자보다 더한 개망나니였으며 칠공주파 서열 이위가 바로 배은희였다.
예쁘장한 얼굴에 면도날을 씹으며 종횡무진 학원가를 휩쓸던 이들에게 15년간 친구라는 명목으로 온갖 구타와 핍박을 받아온 현칠이었다. 그런 그들과 똑같이 생긴 인물들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현칠을 놀라게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왜 쟤네들이 여기 있지? 말도 안 돼! 이건 주최 측의 농간이야!’
그들을 이곳에 나타나게 한 주최 측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도 모른 채 현칠은 그들을 나타나게 한 하늘을 저주했다. 그러나 이내 현칠은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이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내가 쓴 무협 소설의 설정 안인데 그들이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지. 만약 말이 된다면 그건 설마…… 설마…… 그건가? 아아악!’
그제야 현칠은 고등학교 시절 자신이 쓰던 이 무협 세계에 그들을 모티브로 한 인물을 등장시켰던 적이 있음을 기억해 냈다. 자신이 무협 소설을 쓴다고 했을 무렵 윤정과 은희는 그거 재미있겠다면서 자신들도 등장시켜 달라는 반 강제적인 부탁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들어줄 수밖에 없던 그였다.
‘맞아! 생각이 난다, 젠장! 그때 내가 구타에 못 이겨 억지로 그들을 등장시켰던 적이 있었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마 저 두 여인은 윤정과 은희를 모티브로 만든 소설 속의 인물들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오히려 자신이 이렇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곳 세계와 이곳 세계는 엄연히 다른 세상이니까 말이다. 현칠의 얼굴에 그제야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나?”
유소문의 목소리에 현칠은 바보 같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네. 하하! 이거 음식이 왜 이리 안 나와, 배고파 죽겠는데! 이봐, 음식 빨리 갖고 와!”
현칠은 유소문의 질문에 더 이상 그 일은 생각하기도 싫은 듯 얼버무리며 넘어가더니 애꿎은 점소이만 재촉했다.
한편 유소문과 현칠을 유심히 바라보던, 아니 정확히는 유소문을 바라보던 독고은니는 유소문의 빼어난 얼굴에 절로 감탄사를 터트렸다.
“윤정아, 저기 저쪽에 앉아 있는 사람 봐. 너무 잘생겼다!”
그러자 나윤정은 그런 독고은니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고운 이마를 찌푸렸다.
“너는 지금 가문의 중대한 일을 수행하러 가면서 그런 말이 입에서 나와?”
나윤정의 말에 갑자기 머쓱해진 독고은니는 당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애써 웃어 보였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저쪽도 검을 차고 있기에 혹시 무림인 같아서 물어본 거야. 정말 다른 뜻은 없어.”
애써 변명하는 독고은니의 말에 그제야 나윤정은 가볍게 고개를 돌려 유소문을 바라보았다.
정말 독고은니의 말처럼 유소문의 얼굴은 마치 조각같이 멋지게 생겼다.
그러나 나윤정의 입에선 전혀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흥, 약해 빠지게 생겼군! 비리비리해서는…….”
나윤정은 유소문을 바라보고는 연약해 보이는 그의 모습이 싫은지 금세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원상태로 돌려놓았다.
어려서부터 남자를 자신의 발아래라고 생각해 온 나윤정으로서는 ‘자신보다 강한 남자가 아니면 그건 남자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었다.
그런 무심한 표정의 나윤정을 바라보며 머쓱해진 독고은니는 화제를 돌리려는 듯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어쨌든 이제 이곳 기림에서 배를 타고 하루만 가면 하북에 도착할 수 있으니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다.”
“하지만 하북팽가의 팽형규님이 우리를 도와줄지는 아직 모르잖아. 이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근심스러운 나윤정의 말에 독고은니는 걱정 없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 팽형규님은 나와 안면이 좀 있는 사이라 우리 사정을 이야기하면 꼭 들어주실 거야.”
“정말 그럴까?”
“걱정하지 말래도. 모든 일이 잘될 거야.”
독고은니의 말에 약간이나마 위안을 받은 듯 나윤정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그러나 가문의 사활이 걸린 중대한 문제이기에 불안감을 완전히 없애 버릴 수는 없는 그녀였다.
저녁 식사를 마친 현칠은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러나 현칠은 아까의 일이 마음에 계속 걸리는 듯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애써 마음속으로 현실과 상관없는 사람들이라고 달래 보아도 자신이 만든 등장인물을 이런 곳에서 만난다는 사실이 그를 찜찜하게 만들었다.
“내가 그들을 설정하고 그 다음에 어떻게 했더라? 분명 좋은 감정이 있을 리 없으니 소설 안에서 오래 등장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텐데?”
현칠은 그 다음 상황을 떠올려 보려 애썼지만 너무나도 오래된 일이라서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협 세계로 들어와 7년을 살아가면서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이 세계로 들어옴으로 인해 처음에 구상했던 스토리가 약간씩 달라졌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처음 설정했던 유소문이란 주인공은 어찌 보면 좀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이자 처음부터 막강한 실력을 가지게 되는 초절정의 고수가 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