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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다시 쓰다 1권(10화)
4장 무림서열록(武林序列錄)(4)


그러나 현칠이 이곳에 오면서 처음 만나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도록 소원을 빈 탓인지 유소문의 성격이 착하게 변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어찌된 영문인지 기연을 얻고 초절정의 고수가 되어 있어야 할 유소문이 괜히 산속에 박혀 5년이란 세월 동안 수련에만 힘썼다는 점도 그러했다.
그렇기에 지금 시점에서 뜻하지 않은 윤정과 은희와의 만남이 어떻게 바뀔지는 그로서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모르는 척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현칠이었지만 말이다.
고민에 고민을 하던 현칠은 아파 오는 머리를 식힐 겸 이곳에서 틈틈이 익힌 비파(琵琶)를 들고 객점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미 지붕 위에는 다른 사람이 먼저 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우연히도 그곳에 있는 사람은 그가 걱정 아닌 걱정을 하고 있던 나윤정이었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약간은 슬픈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윤정의 모습이 달빛에 비치자 실로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현칠은 잠시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쳇, 계집애! 생긴 건 정말 반반한데 말야.’
현칠은 순간 그런 윤정의 모습이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마구 흔들어 대며 방금 떠올린 생각을 애써 부정했다.
‘아냐! 저 여우같은 계집애의 모습에 속은 게 한두 번이냐! 정신 차리자, 정신!’
고교 시절 윤정의 아름다운 모습에 수많은 남성들이 그녀에게 고백했다가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려야만 했던가. 남자 알기를 우습게 아는 그녀로서는 자신보다 못한 남자는 남자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아직까지 시집도 못 가고 혼자 청승 떨며 살고 있지.’
잠시 과거를 회상하던 현칠은 다시 눈앞에 서 있는 그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나윤정을 바라보았다.
청아함과 귀품이 흐르는 그녀의 모습은 그가 아는 윤정과는 너무나도 달라 보였다. 혹시 자신이 그녀를 무협 소설의 인물로 설정했을 때 성격을 달리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한 현칠이었지만, 그런 것까지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슬퍼 보이는 나윤정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던 현칠의 마음속에 뭔가 알 수 없는 연민의 감정이 일더니 갑자기 넋이 나간 듯 비파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들려오는 비파 소리에 놀란 나윤정은 곧 비파를 켜고 있는 현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삶은 힘들다고 하지만
항상 힘든 것은 아니죠. 가끔 좋은 일도 있잖아요.

웃어요, 웃어 봐요
모든 일 잊고서
웃어요, 웃어 봐요
좋은 게 좋은 거죠.

외롭다고 생각 말아요. 혼자 살다 혼자 가는 거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이 그게 바로 인생이래요.

사랑하고 미워했던 모든 일들이 다시 돌아올 수 없지만
그냥 그렇게 왔다가 그냥 이렇게 떠나는 거죠.

웃어요, 웃어 봐요.
그게 바로 인생이래요.
―오석준의 ‘웃어요’

현칠은 비파로 자신이 살던 세계의 흘러간 유행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그의 아름다운 비파 소리와 노랫소리가 달 밝은 밤하늘에 울려 퍼지자 같은 객점에 머무르는 듯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려왔다.
“야, 이, 어떤 미친 새끼가 오밤중에 지랄이야, 지랄은! 퍼뜩 잠이나 쳐 자라!”
그 말 한마디에 순간 머쓱해진 현칠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자 가만히 그의 노래를 듣고 있던 나윤정이 그의 옆으로 사뿐히 걸어왔다.
“미친놈!”
현칠의 기대와는 달리 비릿한 조소가 섞인 말을 던지고는 그대로 곁을 지나쳐 내려가는 나윤정을 바라보며 현칠은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으아아악! 이런, 씨팔! 정말 내가 미친놈이네. 내가 저 계집애에게 대체 뭘 바라고 이런 거지!”
현칠은 끓어오르는 분노의 화를 삭이지 못하고 잠시나마 착각에 빠져 있던 자신을 원망하고 저주했다. 그러면서 다시는 저런 여자와는 상종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에 또 다짐을 거듭하는 현칠이었다.

유소문은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잠시 기림성의 중앙 광장에 나와 보았다. 늦은 시간 조용한 객점 주위와는 달리 아직 중앙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지나다니고 있었다.
자신이 돈을 벌던 자리까지 돌아온 유소문은 솜 장갑과 장비를 찾으려고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이미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진작 챙겨 둘걸!’
장사 밑천을 잃어버린 아쉬움에 어쩔 수 없이 빈손으로 객점으로 돌아오던 유소문은 문득 누군가가 자신을 미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히 중앙 광장을 지나 인적이 드문 어느 골목길로 들어서자 그의 눈빛이 번쩍거렸다.
“이제 그만 모습을 보이시지요.”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살핀 유소문의 외침에 담장의 그림자에서 한 인영이 마치 검은 연기가 피어나듯이 걸어 나왔다.
그림자에서 몸을 내보인 사람은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이는 노인으로 시뻘건 피와 같은 붉은 장포 차림에 두 눈에서는 시퍼런 안광을 발산하고 있었다.
“킥킥킥! 네가 비무신마라는 애송이냐?”
붉은 장포의 노인은 괴기스러울 만큼 음산한 목소리로 유소문에게 물었다.
유소문 역시 노인이 정체를 숨기지 않고 기를 흘려 자신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그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그러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네가 먼저 내 질문에 대답한다면 알려 주마. 네가 비무신마가 맞느냐?”
노인의 재촉하는 물음에 유소문은 잠시 대답을 생각하고는 곧 입을 열었다.
“제가 비무신마입니다.”
“생각보다 제법 잘생겼구나. 킥킥!”
“이제 노인장의 정체를 밝혀 주시지요.”
노인은 자신 앞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유소문을 바라보며 약간은 건방지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본좌는 황교(煌敎)에 몸을 담고 있는 흑미륵(黑彌勒) 손불이라 한다.”
노인의 정체가 밝혀지자, 태연해 하던 유소문마저 크게 놀라며 그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흑미륵 손불이라니!”
흑미륵 손불이, 그가 누구인가? ‘만통무림족보’에 따르면 50년 전 갑작스럽게 등장하여 무림을 피로 물들였던 황교(煌敎)의 우상호법으로서, 그의 별호인 흑미륵이라는 말처럼 미륵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잔인하고 심성이 괴팍하여 그 당시 그의 손에 수많은 무림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50년 전 황교는 교주인 황교신마(煌敎神馬) 진영진과 좌상호법 화익수(火翼手) 금수로, 우상호법 흑미륵 손불이와 함께 중원무림을 피로 물들여 갔었다.
당시 황교는 정과 사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적으로 간주하여 앞을 가로막는 문파는 모두 멸문시켜 버렸다. 무림맹과 마천맹은 잠시 휴전을 선언하고 손을 잡아 황교에 대항해야 할 만큼 황교의 세력은 거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리 소문도 없이 황교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황교가 갑자기 잠적한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렇게 무림 역사에 남을 만큼 처절했던 싸움은 허무하게 끝이 나 버렸다. 그런데 50년이나 지난 지금 황교의 인물, 그것도 우상호법 흑미륵 손불이가 등장했으니 유소문은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고명하신 노선배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유소문은 손불이를 향해 먼저 선배에 대한 예의로 두 손 모아 포권을 취해 보였다. 눈앞에 있는 노인이 정녕 손불이라면 그의 나이는 이미 100세를 훌쩍 넘긴 거마인 것이다.
그러자 흑미륵 손불이는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이렇게 고명하신 선배님께서 저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신지요?”
“별일은 아니다. 다만 혼원혈마(魂原血馬) 마세훈을 기억하느냐?”
손불이의 물음에 유소문은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혼원혈마 마세훈은 광동과 광서 일대에서 유명한 사파의 인물로서 사파무림 백대고수에 들어 있는 자였다. 또한 마세훈은 자신의 절기 탈명영혼칠(脫命英魂七)을 이용하여 그 일대 처녀와 부녀자들을 현혹하고 수백 명을 욕보인 희대의 색마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무공이 사파 백대고수에서도 상위를 차지할 정도로 고강한 만큼 함부로 그를 건드리는 자들이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유소문이 그런 마세훈에게 비무첩을 보내고 그와의 승부에서 그의 양팔을 잘라 버렸다.
사실 유소문은 마세훈의 양팔을 잘라 버릴 생각까지는 없었으나 혼원혈마 마세훈의 무공 실력이 그의 생각보다 대단했다. 단순히 조금 강한 색마로만 생각했던 유소문은 그의 엄청난 무공 실력에 여차하면 당할 상황에까지 놓이게 되었다. 자신의 필살 절기인 구룡도법(九龍刀法)은 아직 그의 심득이 부족하여 사용의 제한이 있던 유소문은 어쩔 수 없이 사도(死刀), 일명 지옥도의 힘을 사용하여 마세훈의 양팔을 잘라 버리고 이길 수 있었다.
“그 혼원혈마 마세훈이 사실은 광서 지방을 담당하는 우리 황교의 비밀 분타주였거든.”
이어지는 손불이의 말에 유소문은 커다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50년 전에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황교의 무리가 아직도 전국에 비밀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 또한 놀랄 일이었지만 혼원혈마 같은 무림고수가 단지 한 지방의 분타주라는 소리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는 유소문이었다.
“우리 황교에는 피는 피로써 갚는다는 말이 있지. 네가 그의 양팔을 잘랐다면 나도 네 양팔을 잘라 갈 테니 순순히 팔을 내놓아라.”
손불이의 말에 유소문은 냉소를 흘려보냈다.
“저의 팔을 가져가고 싶다면 그만큼의 실력으로 가져가시면 됩니다.”
“건방진 놈, 두 팔이 아닌 목을 내놓고 싶은 것이냐!”
“그것 또한 실력이 되신다면 가능합니다.”
“흥!”
손불이는 더 이상의 말은 귀찮다는 듯 허리에 감겨 있던 채찍을 꺼내 들고 가볍게 손을 튕기자 채찍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유소문을 덮쳐들었다.
무척이나 빠른 채찍 공격에 유소문은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가까스로 그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손불이가 재차 손을 가볍게 튕겨 연속적으로 공격해 들어가자 이번에는 피하면서 스쳤는지 유소문의 오른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살짝 스친 상처인데도 마치 날카로운 예기에 베인 듯 금세 피가 흥건히 배어 나왔다.
유소문은 곧바로 지옥도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손불이의 눈에 잠시 번뜩이는 광채가 떠올랐지만 유소문은 그것을 알아채지는 못했다.
‘호! 저게 바로 그것인가?’
손불이의 눈에 나타난 광채는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다시 한 번 손을 튕겨 채찍을 날렸다. 유소문은 그 와중에도 빠른 채찍 공격을 해 오는 그의 손목을 바라보며 지옥도로 튕겨 내었다.
사방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채찍 공격을 막아 내며 유소문은 어느새 손불이의 앞까지 다가가 크게 한일자를 그리며 지옥도를 휘둘렀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손불이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재빨리 뒤로 돌자 이미 멀찍이 떨어진 손불이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느리군, 느려. 킥킥!”
마치 상대를 조롱하는 듯한 말투의 손불이를 바라보며 유소문의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다.
‘강하다!’
상대가 강하다는 생각에 유소문은 지체 없이 지옥도에 기를 주입시켰다. 그러자 지옥도에서 강한 빛이 번쩍이더니 모양이 변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손불이의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확실하다. 저건 사도(死刀)가 분명하군. 드디어 교주의 신물을 찾았군. 크크크!’
지옥도가 변하는 것을 보며 기쁨의 표정으로 변한 손불이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던 유소문은 이내 그런 생각은 떨쳐 버리고 상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도천위룡 이식 용 베기.
순간, 유소문의 도에서 한 줄기의 광풍이 일어나더니 거대한 바람소리와 함께 손불이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이번 공격은 만만치 않은 듯 손불이 역시 정색을 하며 뒤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완전히 피했다고 생각한 손불이는 이내 가느다란 신음 소리를 흘리며 어느새 잘려 버린 자신의 채찍을 바라보았다.
“만년한철(萬年寒鐵)로 만들어진 나의 비류(泌流)를 잘라 내다니! 과연 사도의 예기는 날카롭기가 그지없구나!”
손불이는 지옥도의 날카로운 예기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 도를 알고 계십니까?”
갑작스레 지옥도의 이름이 손불이의 입에서 나오자, 유소문은 목숨이 오고 가는 격전 중에서도 궁금한 듯 그에게 물어보았다.
“알고 있느냐고? 킥킥! 당연히 알고 있지. 그러나 그 이유를 말해 줄 필요는 없는 것 같군.”
손불이의 말투에 유소문은 다시 한 번 인상을 찌푸리고는 말없이 한 줄기의 광풍을 날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손불이 역시 몸을 날려 피하지 않고 장을 뻗어 밀려오는 광풍의 기운을 받아쳤다.
두 개의 기운이 충돌하자 거대한 광음과 함께 골목길을 이루는 담벼락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고 유소문은 그 충격으로 뒤로 일 장 이상을 날아가 땅에 처박혔다. 어느새 쓰러져 있는 유소문의 앞으로 다가온 손불이는 이제 한 수만 더 뻗으면 그의 목숨을 빼앗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생각 외로 다음 공격을 취하지 않았고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웃더니 유소문을 향해 알 수 없는 말을 전했다.
“킥킥! 약하군. 너 같은 놈에게는 과분한 도이지만 잠시만 보관하고 있어라. 오늘은 인사라고 생각하고. 흐흐!”
사실 마세훈에게 들은 정보를 확인하고자 온 손불이는 그의 정보가 틀림없다는 것을 알고는 더 이상 유소문을 공격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충격에 튕겨 나간 유소문을 무형의 기운으로 받쳐 주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유소문을 뒤로하고 손불이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