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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다시 쓰다 1권(11화)
4장 무림서열록(武林序列錄)(5)


손불이가 사라지자 골목길 주위로 굉음을 들은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몸에 묻은 먼지를 털며 일어난 유소문도 귀찮은 것을 피하기 위해 경신법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청운객점으로 향하는 유소문은 돌아오는 내내 손불이의 알 수 없는 말들과 의도를 생각해 보았다.
분명 지옥도를 알고 있었고 자신을 찾은 이유도 마세훈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지옥도 때문이라는 것을 그의 말을 통해 알 수 있었으나, 지옥도가 목적이었다면 자신을 단숨에 제압할 정도의 고수가 자신을 죽이지도 않고 지옥도를 가져가지도 않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나저나 역시 세상은 넓구나.”
유소문은 자신을 단 한 방에 보내 버린 손불이를 떠올리며 역시 진정한 고수가 되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에 약간은 허탈감마저 느껴졌다.

조금 전의 사건을 이야기하기 위해 현칠의 방으로 향한 유소문은 방문을 연 순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안 자고 뭐 하는 겐가?”
자고 있을 거란 유소문의 생각과는 달리 현칠은 뭔가를 열심히 공책에 적고 있었다.
갑작스런 유소문의 등장에 잠시 움찔하던 현칠은 별거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현칠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선 유소문은 그가 쓰고 있는 공책을 유심히 바라보았으나 뭐라 쓰여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미 7년을 그와 같이 지내면서 그가 무엇인가를 바랄 때면 그렇게 공책에 적는다는 것을 유소문은 알고 있었다.
―윤정이 자다가 침상에서 떨어져 코피가 난다.
윤정이 자다가 수많은 모기에게 헌혈한다.
윤정이 먹은 저녁밥이 체해 밤새 설사한다.
윤정이 똥 누다.
…….
공책에 쓰여 있는 내용을 다시 한 번 쭉 훑어본 현칠은 만족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웃으면서 공책을 덮었다.
“아니, 별거 아냐. 근데 밤중에 무슨 일이야?”
현칠의 질문에 유소문은 이내 궁금함을 접고 방금 전에 일어난 일들을 아주 자세히 그에게 말해 주었다. 유소문의 이야기를 심각하게 들은 현칠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옥도를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이라? 음…….”
“뭔가 좀 알겠어?”
유소문의 물음에 현칠 역시 짐작되는 바가 없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나 또한 다른 사람이 지옥도를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는데…….”
현칠에게서 뭔가를 기대했던 유소문은 이내 낙심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지옥도가 목표였다면 나를 죽이고 가져가지 않은 이유가 뭐지?”
심각한 고민에 빠진 듯한 유소문을 바라보며 현칠은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재수 좋게 살았으면 다행이지 뭐가 문제야? 그 자식이 오늘은 들고 가기 귀찮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지옥도에 대해서 잘 아는 자 같은데, 뭐 사실 지옥도가 보통 도냐? 천하에서도 드문 신병(神兵)이지!”
현칠의 말도 안 되는 대답에 유소문은 인상을 찌푸리다가 잠시 지옥도를 바라보았다. 정말 자신이 생각해도 이것은 무림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도였다.
기를 주입시키면 아무리 삼류무사라 하더라도 쇠도 가볍게 자를 수 있게 해 주니 말이다. 그러면서도 손불이가 찾아온 이유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하던 유소문은 다시금 손불이가 지옥도를 빼앗아 가기 위해 다시 찾아온다면 그때는 과연 그를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어서 빨리 구룡도법을 완성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현칠 또한 애써 웃음을 보였지만 마음속으로는 나름대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자신이 이름 지은 지옥도를 또 다른 사람이 알고 있다니, 그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고 황교라는 이름 또한 생소했다.
아직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알려 주지 않은 현칠이었기에 방금 전에는 그냥 엉뚱한 소리로 넘겼지만 이것은 어찌 보면 커다란 사건이었다.
사실 현칠이 쓴 무협 소설의 이야기 전개는 이미 끝나고 없었다. 인물 설정만 대충 하고는 제대로 썼던 글도 아니었기에 기억도 잘 나지 않았던 것이지만, 이제 이 무림의 세계는 현칠의 생각을 벗어나 한 치 앞도 알 수 없게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음 날, 하북으로 향하는 배편을 알아보기 위해 기림성에 위치한 항구를 찾아 나선 유소문과 현칠은 때마침 항구로 향하던 나윤정 일행과 마주치게 되었다.
어젯밤 한숨도 못 잔 듯 무척 수척한 모습의 나윤정을 바라보며 현칠은 입가에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먼저 항구에 도착한 유소문과 현칠은 다행히 하루에 한 번 하북으로 출항하는 배의 마지막 표를 구할 수 있었다.
현칠 일행보다 뒤늦게 도착한 나윤정과 독고은니는 선원에게서 현칠 일행이 사간 표가 마지막이었다는 말을 듣고 어쩔 수 없이 급한 마음에 현칠 일행에게 다가와 표를 양보해 주기를 바랐다.
“실례합니다만, 저희가 급한 일이 있어 오늘 꼭 하북으로 가야 하는데 표를 좀 양보해 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유소문에게 다가온 독고은니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잠시 독고은니를 바라본 유소문은 하루쯤 늦어져도 별문제 될 일이 없을 것 같아 선뜩 승낙하려는 순간, 옆에 있던 현칠이 갑자기 끼어들며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시다면 저희는 상관이 없…….”
“안 됩니다. 저희도 무척 급한 일로 오늘 가 봐야 하거든요.”
완강히 거부하는 현칠을 난처한 표정으로 한번 바라본 독고은니는 애써 입가에 웃음을 띠며 현칠에게 다시 한 번 양해를 구했다.
“저희가 오늘 안 가면 안 되는 일이 있어서, 값은 두 배로 쳐 드릴 테니 저희에게…….”
“이 사람이! 거, 안 된다니까 자꾸 왜 이러시나?”
현칠의 완강한 반대에 영문을 알지 못하는 유소문은 그의 귀에 대고 낮게 중얼거렸다.
“뭐 어때? 하루쯤 늦춰진다고 해서 대수로울 것 없잖아.”
“싫어. 난 쟤네들이 싫다!”
현칠의 간단한 대답에 유소문은 어젯밤 일(현칠이 닮은 사람이라고 싫어한 일)을 생각하며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현칠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어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자 애가 탄 독고은니가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자 옆에 있던 나윤정이 인상을 찌푸리며 현칠에게 말을 걸었다.
“어제 지붕 위에서의 일 때문이라면 제가 사과드릴 테니 표를 양보해 주시죠.”
현칠을 모르는 척 바라보고 있던 나윤정이 상황이 급한 만큼 먼저 사과의 뜻을 전했다.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나윤정의 입에서 사과의 의미가 담긴 말이 나오다니,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이 광경을 봤다면 아마도 크게 놀랄 일이었다. 그만큼 그들에게 오늘 하북행 배표는 중요했다. 그러나 현칠은 절대 자신의 뜻을 굽힐 수 없다는 듯 태도가 완강하기만 했다.
“어제 일은 내가 미. 친. 놈. 이라서 그런 거고요, 오늘 일은 그거랑은 절. 대. 상관없이 우리도 바빠요.”
미친놈이란 단어와 절대라는 단어에 더욱 힘주어 말한 현칠은 속으로 그들이 애가 타는 모습에 흐뭇해 하고 있었다.
현칠의 비꼬는 말투에 나윤정도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버럭 소리쳤다.
“어제 일은 내가 미안하다고 했는데 웬 남정네의 속이 그렇게 좁단 말입니까? 저희는 오늘 꼭 가야만 하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아니, 이 여자가 어디서 큰소리야! 누구는 큰소리 못 쳐서 안 하는 줄 아나! 우리도 오늘 꼭 가야 한다니까 왜 아침부터 시비야, 시비는!”
현칠 또한 지지 않으려는 듯 더욱 큰소리로 맞받아쳤다. 그들의 목소리가 격해지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들에게 쏠렸다. 그러나 둘은 그런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서로를 바라보며 으르렁대고 있었다. 그들의 기세가 높아지자 영문도 모르는 유소문과 독고은니가 서로를 말리고 있을 때, 마침 고급 비단옷을 차려 입은 한 중년의 남성이 그들 사이로 걸어와 말을 걸었다.
“무슨 일로 이렇게 아침부터 목소리를 높이며 싸우고들 계십니까?”
느닷없이 나타난 중년인은 당장이라도 한판 붙을 것만 같은 나윤정과 현칠 사이에 끼어들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중년인은 바로 삼송 상단의 기림지부 지부장인 악독해였다.
본래 남의 일에 끼어들기를 좋아하는 그는 아침부터 아리따운 아가씨가 둘이나 항구에 나타나서 말싸움을 벌이자 무슨 일인가 싶어 얼른 그들 사이에 끼어든 것이다. 독고은니는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악독해에게 자신들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저런! 그런 일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침 저희 상단의 배가 오늘 출발하여 하북에 들렀다가 고려로 들어가니 저희 배를 타고 가시면 됩니다.”
뜻밖의 말에 독고은니와 나윤정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거듭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러다가 나윤정은 뭔가 분해 하는 현칠을 바라보며 비웃듯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는 마치 현칠이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악독해를 향해 말했다.
“속 좁은 누구와는 다르게 자상하시군요. 역시 속 좁은 남자는 쓸모가 없지요.”
자신을 비꼬는 말투에 현칠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들의 애가 타는 모습을 은근히 즐기고 있던 현칠은 갑자기 나타나 초를 치는 악독해에게 당연히 그 화가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악독해는 나윤정과 독고은니를 데리고 상단의 배에 오르려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뿌득! 삼. 송. 삼. 회. 라고 하셨나요?”
삿갓 쓴 청년의 물음에 악독해는 어디선가 그를 본 것 같다는 듯한 생각을 하며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만 뭐가 잘못됐습니까?”
“뿌득! 아닙니다. 그럼!”
삿갓에 가려 혈압이 올라 빨개진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현칠은 몸을 돌려 유소문을 데리고 하북행 배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자신의 품속에서 공책과 만년필을 꺼내더니 뭐라 적기 시작했다.
―오늘 고려로 출발하는 삼송상회의 배는 출발하지 못한다.
그렇게 공책에 쓰고 나서야 현칠은 그제야 올라갔던 혈압을 낮출 수가 있었다. 앞으로 닥쳐올 상황을 모르는 악독해는 두 명의 미인을 자신의 배에 태울 수 있다는 사실에 즐거워하며 두 여인을 데리고 얼른 배에 올라탔다.
상단의 배는 무역을 위해 떠나는 배인 만큼 그 크기가 거대하고 튼튼해 보였다. 갑판에서 분주히 출항 준비를 하는 선원들을 재촉하며 은근히 자신을 높여 보인 악독해는 싸늘한 미모의 나윤정보다 독고은니가 마음에 드는지 그녀를 데리고 배의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문득 그의 시선이 옆에 정박되어 출항 준비를 하고 있는 대웅상회의 배를 바라보고는 인상이 심하게 구겨졌다. 그러나 이내 그의 입가에 미소가 서리며 음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흐흐! 그래, 준비나 열심히 해라. 어차피 너희들은 출항도 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흐흐!”
악독해는 어제 거금을 주고 부탁한 만물사를 믿어 대웅상회가 출항할 수 없으리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만큼 만물사의 소문은 확실했고 그렇기에 돈에 대해 짠돌이인 그가 그만큼의 거금을 주고 부탁을 한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조금 전 삿갓 쓴 청년의 말투가 어제 만난 만물사의 말투와 비슷하다고 느꼈지만 이내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뭐, 그가 만물사건 아니건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그렇게 생각을 떨쳐 버린 악독해는 출항 준비를 마친 선원들을 바라보며 갑판으로 올랐다. 그때 갑자기 대웅상회의 배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젠장! 선주에 물이 찼다. 배 어딘가에 구멍이 난 것 같아!”
“어서어서 실었던 물건부터 도로 빼내!”
갑작스럽게 배에 구멍이 난 대웅상회의 갑판에서는 여기저기서 실었던 짐들을 다시 빼느라 소란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런 대웅상회의 모습을 지켜보던 악독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듯 크게 소리 내며 웃어 보았다.
“하하하하! 저 꼴 좀 보라지. 하하하!”
거금을 주고 부탁한 소원이 이루어지자 악독해는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갑자기 그의 눈앞으로 대웅상회의 거대한 돛대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기겁한 악독해는 토끼처럼 놀란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몸을 피해 갑판을 구를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바닥에 구멍이 뚫려 물이 차오른 대웅상회의 배가 기울어지면서 바로 옆에 정박하고 있던 삼송상회의 배 옆면을 그대로 돛으로 박아 구멍을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던 악독해는 대웅상회의 배와 같이 서서히 기울어져 가는 자신의 배를 바라보며 미친 듯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건 아냐! 으아아아악!”
악독해의 비명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이미 항구와 멀어져 가는 하북행 배에 있는 현칠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그러자 현칠의 입가에 사악하기 짝이 없는 미소가 그려졌다.

***

꼬박 하루 동안 배를 타고 하북에 도착한 유소문과 현칠은 그리 어렵지 않게 하북 팽가를 찾을 수 있었다.
오대세가 중 하나인 하북 팽가의 사람들은 두뇌가 총명하지는 않지만 근골(筋骨)이 훌륭한 자손들이 많이 태어나는 가문으로 도법(刀法)에 능하며 장법(掌法)에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이번 비무 상대인 패력도왕 팽형규는 그의 별호처럼 강맹한 힘의 도법을 구사하는 인물로서, 나이 삼십에 그의 무위는 이미 하북 팽가의 가주이자 아버지인 건곤신협(乾坤神俠) 팽북성을 뛰어넘었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중원의 신진 고수라 불리는 칠용사미(七龍四美)의 일인으로 활동했었다.
그러나 그 역시 유소문과의 비무에서는 삼십여 합 만에 정사무림서열록 34위에 등록될 수밖에 없었다.
팽형규의 성명절기인 건곤연환탈백도(乾坤連環奪魄刀)는 그 힘이 강맹하고 능히 무림 백대고수에 낄 만했지만 유소문의 도천위룡(刀天位龍)을 상대하기에는 아직 모자란 감이 있었다. 또 한 번의 비무가 끝난 후 근처 마을의 객점에 짐을 푼 유소문과 현칠은 다음 상대를 정하기 위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