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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다시 쓰다 1권(12화)
4장 무림서열록(武林序列錄)(6)
사실 무림서열록이라는 것은 비무에 대한 핑계일 뿐, 진정한 목표는 유소문의 실력 점검과 실전을 통해 무공을 높이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실력이 무림 백대고수 중에서도 상위에 든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의 무공 실력은 더 이상 전진이 없었다.
그 문제로 고민하던 유소문과 현칠은 이렇다 할 뚜렷한 해결책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한 끝에 현칠은 조심스럽게 유소문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무림 백대고수들과의 대결은 너의 실력 향상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으니 이제는 천하도검(天下刀劍) 십삼 위에게 도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천하도검 십삼 위라니! 그 생각은 아직 이른 게 아닐까?”
유소문은 천하도검 십삼 위라는 말에 놀라며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하도검 십삼 위란 도(刀)와 검(劍)을 사용하는 무림 최고의 고수 열세 명을 뜻하는 말이었다.
현재 무림에는 맨 위로 일천, 이황, 삼왕, 무존의 7명의 초고수가 있었고 그 밑으로 천하도검 십삼 위의 절정고수들이 존재했으며 그 밑으로 무림 백대고수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말이 쉬워 백대고수며 천하도검 십삼 위지, 수만 명의 무림인 중 최상위 고수로서 그들은 정말 특별한 존재들이었다.
더욱이 그 위에 있는 7인의 초고수의 능력은 가히 인간의 경지를 초월했다는 존재들이었다.
그런 천하도검 십삼 위와의 비무라니, 자신의 기량으로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는 유소문이었다.
“싸움이라는 것은 우선 붙어 봐야 아는 거야. 혹시 알아, 너의 무공이 이미 천하도검 십삼 위와 맞먹을지? 뭐, 물론 개미 똥구멍만 한 확률이지만 너에게는 지옥도도 있으니 여차하면 지옥도를 사용하면 될 테니까 해 볼 만할 거야.”
현칠의 말에 유소문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5년간의 수련을 마치고 나왔을 당시에는 지옥도만 손에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다고 느꼈던 그였지만 얼마 전 흑미륵 손불이에게 허망하게 당한 이후 자신의 실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유소문이었다.
그런 그에게 지금 천하도검 십삼 위와의 비무는 선뜻 응낙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강한 자들과 싸워 보고 싶은 마음 또한 간절했다. 더구나 손불이가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지금 상황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구룡도법을 완성해야만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날 밤새 고민하던 유소문은 결국 강해져야 한다는 일념하에 천하도검 십삼 위와의 비무를 결정하고는 그 첫 번째 상대로 호남의 화염신마(火炎神魔) 염기영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패력도왕 팽형규님을 만날 수가 없다니요?”
“죄송합니다만 둘째 도련님께서는 어제부로 폐관수련에 들어가셨습니다.”
악독해의 배가 출항할 수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다음 날 하북행 배를 타고 온 나윤정과 독고은니는 지금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하북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하북 팽가로 달려왔건만 하루 차이로 만날 수 없게 되다니, 이 무슨 짓궂은 하늘의 장난이란 말인가.
그러자 나윤정은 하북 팽가의 가주인 건곤신협 팽북성이라도 만나고자 청했지만…….
“가주님께서도 무림맹에 일이 있으셔서 출타하신 지 삼 일이나 지났습니다.”
집사의 말에 마지막 희망마저도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팽형규를 데려가지 못한다면 자신의 가문에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잘 아는 나윤정으로서는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전서구를 미리 못 받으신 것도 아닐 텐데, 왜 갑자기 폐관수련에 들어가신 거죠? 혹시 어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하루라는 시간이 너무나도 안타깝게 느껴지는 독고은니는 그 이유를 물어보았지만 집사는 머뭇거리며 말하기를 꺼려 했다.
“저…… 그것이…….”
집사의 행동에 무슨 일인가 있었음을 눈치 챈 독고은니가 집사를 보채며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자 집사는 말을 해야 되나 말해야 되나 잠시 고민하다가 어제 일은 하북 팽가 식솔들이 다 보았으니 말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어제 비무신마가 이곳에 찾아왔었습니다.”
“비무신마!”
비무신마라는 이름에 나윤정과 독고은니는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 또한 요즘 강호를 떠들썩하게 하는 비무신마의 이야기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그 다음 말은 안 해도 상황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왜 하필이면 그 비무신마가 어제 나타나서 일이 이렇게 되었는가라는 생각이 들자 괜히 아무 상관없는 비무신마마저도 그들의 입에서 욕을 들어먹어야만 했다.
이제 가문의 생사를 건 결투가 보름 앞으로 다가온 지금, 돌아가는 시간만도 보름이 걸리는 이 상황에서 다른 누군가를 찾아 나서기란 힘든 일이었다.
독고은니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허탈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나윤정을 가볍게 건드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 오라버니가 아주 강한 상대를 찾아오실 테니까. 오라버니를 믿자.”
독고은니의 오빠인 독고제갈 역시 가문의 대사자(代使者) 결투를 준비하기 위해 이미 다른 곳으로 고수를 찾아 떠난 상태였다.
이들이 팽형규를 꼭 데려가야만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윤정의 가문인 나씨세가(儺氏世家)는 강서 지현강 근처에 자리 잡은 문파로 무공보다는 기관진식에 능통하고 식솔 인구가 50명 정도의 이류(二類) 문파였다.
같은 지현강에 있는 독고은니의 독고세가(毒高世家)는 독(毒)을 사용하는 문파로서 독검이라는 특이한 검법을 사용하지만, 사천당가의 세력에 눌려 역시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 나씨세가와 독고세가는 같은 지역에 위치하고 또한 이류 문파라는 멍에 때문에 선대부터 우정을 돈독히 쌓으며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보름 전 강서의 시골인 지현강에 있는 사파의 문파 중 하나인 당귀문(黨鬼門)이 자파 고수 이백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찾아왔다. 그 이유인즉 강서 지역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문파는 필요가 없으니 대사자 결투를 이용하여 하나의 문파로 흡수하자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나씨세가의 가주인 나백천과 독고세가의 가주 독고현은 터무니없는 말이라며 무시했지만 사파 고수 이백 명을 거느린 그들의 압력을 견딜 수가 없었다. 더 이상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한 나백천은 무림맹에 한 통의 밀서를 보냈으나 무림맹은 강서 변두리 지역에 위치한 이류 문파들의 싸움에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어쩔 수 없이 반 강제적으로 대사자 결투를 승낙한 나백천과 독고현은 무림의 고수를 초빙하기 위해 각각 자신들의 자식들을 강호로 보낸 것이었다. 일류 문파의 경우 대부분의 문파 싸움은 가주가 직접 나서거나 전면전을 벌이는 것이 당연했으나 이류나 삼류의 문파들은 다른 이들을 초빙하여 대사자 결투를 벌이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만큼 무림에는 수백 개에 달하는 이류 문파들이 있었기에 무림맹은 일일이 그들을 도울 수는 없는 실정이었다. 이제 벌써 결투 날짜가 보름 안으로 다가온 이 마당에 믿고 있던 팽형규를 데려갈 수 없게 되자 나윤정과 독고은니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빈손으로 돌아가야 될 상황에 처한 나윤정과 독고은니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다시 항구로 몸을 돌렸다.
그러다 우연하게도 항구로 들어서는 유소문과 현칠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제 그들이 양보만 했어도 하루 먼저 도착하여 팽형규를 데려갈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자, 나윤정은 울컥하는 기분이 들며 성난 기분에 다짜고짜 검을 빼 들고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이야얍! 이 나쁜 놈들아!”
갑작스런 나윤정의 고함소리에 놀란 유소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나윤정이 검을 들고 자신을 공격해 오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유소문은 서둘러 오른손에 기를 모아 날아오는 나윤정의 일검을 손으로 잡아 버렸다.
그러자 오히려 더욱 놀라는 쪽은 나윤정이었다. 자신의 일격을, 그것도 맨손으로 받아 내다니, 비리비리한 약골로 보였던 유소문이 무림고수라는 사실에 충격을 먹은 것이었다. 나윤정은 힘을 주어 그의 손에 잡힌 검을 빼내려고 애써 보아도 검은 그의 손아귀에서 꿈적도 하지 않았다.
유소문은 갑자기 자신을 공격한 나윤정을 성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길 가는 사람을 뒤에서 기습을 하다니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유소문의 외침에도 나윤정은 미안한 마음보다는 분한 마음에 유소문을 째려보더니 서서히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이 아닌가.
갑작스런 그녀의 울음에 당황한 유소문은 손에 잡고 있던 검을 놓고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저기…… 소저,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울음은 좀…….”
여자의 눈물에 약한 것이 남자라고 유소문 또한 나윤정의 울음에 아무런 이유 없이 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너희들만 아니었어도, 너희들만 아니었어도……. 흑!”
유소문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혼자 중얼거리는 나윤정을 영문도 모른 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따라온 독고은니는 미안한 표정으로 서둘러 유소문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독고은니를 바라보며 유소문은 정색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람을 뒤에서 검으로 찔러 놓고는 악의가 없었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저 아이가 잠시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때마침 먼저 앞서 가고 있던 현칠이 어느새 다가와 고개를 숙인 채 울고 있는 나윤정을 발견하고는 마침 잘 만났다는 듯 성난 목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니, 이 여자가 미. 쳤. 나? 왜 길 가는 사람에게 칼질이야, 칼질은!”
그러자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윤정이 현칠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노려보고는 붉어진 눈으로 검을 꽉 움켜잡았다.
“그래, 나 미쳤다! 너 오늘 내 칼에 한번 죽어 봐라!”
“으아악! 왜 이래? 진짜 미쳤나!”
나윤정은 정말 정신이라도 나간 듯 눈을 부라리며 현칠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런 갑작스런 나윤정의 행동에 기겁한 현칠은 그녀의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너 왜 이래? 진정 좀 해!”
뒤에서 독고은니가 잡아끌자 나윤정은 분한 듯 몸을 떨더니 이내 검을 땅에 떨어뜨리고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천하의 나윤정이 이런 약한 모습을 보이자 독고은니는 가슴이 아려 왔다. 자신 역시도 지금에 이 상황을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언제나 나윤정을 챙겨 주는 언니 같은 사람이 바로 독고은니였기에 자신마저 약해질 수는 없었다.
울고 있는 나윤정을 감싸 안은 독고은니는 그녀를 부드럽게 달래 주었다. 유소문은 잠시 아무런 말없이 그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고 현칠은 그녀의 행동에 놀란 듯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잠시 후 조금 진정이 된 듯한 나윤정의 모습에 독고은니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지켜보던 유소문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미안한 마음을 대신했다.
“이제 그럼 무슨 일로 그러셨는지 제게 말씀 좀 해 주시겠습니까?”
정색하던 표정은 사라지고 이제는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의 유소문이 물어보자 독고은니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들려주어야만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독고은니의 가느다란 입이 열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우선은 저의 이름은 독고은니라 하며 강서 지현강에 위치한 독고세가의 사람이지요. 그리고 저 아이는 같은 지역 나씨세가의 아이인 나윤정이라 합니다. 그 일의 시작은 한 달 전부터였습니다.”
독고은니는 한 달 전에 일어난 자신의 가문과 나씨세가에 일어난 일들, 그리고 팽형규를 데려가기 위해 왔다가 못 데려간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실 독고은니 역시 어딘가에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 이야기가 터져 나오자, 간단히 설명한다는 것이 그만 구구절절 애절함이 섞인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유소문은 팽형규가 자신과의 비무로 폐관수련에 들어가게 되어 데려가지 못한다는 부분에서 속으로는 뜨끔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날 때쯤 유소문은 마음속으로 미안함에 어쩔 줄을 몰랐고, 같이 듣고 있던 현칠 역시 약간 미안한 감정이 생겨났다.
어제의 일은 현칠의 오기에서 시작된 장난 비슷한 일이었는데 그 일로 인해 이들이 이렇게 슬퍼하고 절망할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이었다.
독고은니의 이야기를 다 들은 유소문은 짧게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정말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어제 일로 그렇게 피해를 보실 줄이야 미처 몰랐습니다.”
“아닙니다. 소협께서도 바쁘신 일이 있어 그런 것일 텐데, 저희가 오늘 크나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기품이 흐르는 독고은니의 말과 행동에 유소문은 그녀에게 정감이 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유소문은 마음속으로 망설여졌다. 독고은니의 사연에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은 사람 좋은 유소문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잠시 후 뭔가를 생각하던 유소문은 결심을 굳힌 듯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가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
“으아악! 자, 잠깐!”
갑작스런 유소문의 말에 어리둥절해 하는 독고은니를 뒤로하고 현칠은 다짜고짜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아니, 우리가 돕긴 누굴 도와?”
“이번 일은 우리 책임도 크잖아. 우리가 도와드리자고.”
유소문의 행동에 현칠은 답답한 듯 손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아니, 우리 할 일도 바쁜데 언제 남을 돕는단 말야!”
그러나 유소문은 현칠의 그런 행동에 더욱 반발하듯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현칠은 온갖 말로 유소문을 달래고 협박하며 도울 이유가 없다고 자세하게 설명했지만, 유소문은 이미 그녀들을 도와주기로 굳게 마음먹고 있었다.
“도와주자, 현칠. 사실 너의 잘못으로 일이 이렇게 된 것 아니냐?”
이제는 오히려 현칠을 비난하는 유소문의 말에 현칠은 황당한 기분이 들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유소문의 마음이 확고하다는 것을 느낀 현칠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잠시 나윤정과 독고은니를 바라보았다.
그녀들은 달랐다. 특히 지금 나윤정의 모습은 자신이 알고 있는 언제나 당당한 백윤정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라 보였다. 그녀들이 아무리 원수 같은 녀석들의 분신이지만 그들이 친구들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기에 현칠 역시 한 번쯤은 도와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던 독고은니의 표정이 이내 밝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