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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다시 쓰다 1권(13화)
4장 무림서열록(武林序列錄)(7)
사실 독고은니는 방금 전 나윤정의 검을 맨손으로 잡아낸 유소문의 실력을 알아보고 연신 마음속으로는 그가 도와줬으면 하는 생각에 이야기를 꺼낸 면도 있었다.
독고은니 또한 무림문파의 딸로서 일류고수에 속하는 나윤정의 검을 맨손으로 받아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윤정의 검을 맨손으로 잡은 유소문은 설사 하북 팽가의 백대고수 팽형규보다는 못하더라도 독고세가나 나씨세가의 사람들보다는 높은 경지일 거라고 생각한 그녀였다.
그제야 조금 안정이 된 나윤정도 아까의 일이 멋쩍은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유소문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녀 역시도 자신의 일검을 맨손으로 잡아 낸 사람을 단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기에 내심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쳇! 죽일 것처럼 달려들 때는 언제고.”
현칠의 핀잔에 나윤정의 얼굴이 붉어지며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애써 웃음 지으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유소문이 입을 열었다.
“하하! 아닙니다. 제가 소저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렇게라도 화를 풀지 않았으면 화병에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하하!”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해 대는 유소문을 바라보며 현칠은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희들을 도와주신다니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서로가 어려울 때 다 돕고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래도 이런 일에 선뜻 도와주시겠다고 나서 주시니 저희가 정말 감사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독고은니는 진정으로 유소문에게서 고마움을 느꼈다. 생판 모르는 남의 일을, 그것도 자신을 죽일 듯이 공격한 사람의 집안을 위해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유소문의 행동은 지금 그녀의 눈에 정말 남자다운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물론 유소문은 자신이 팽형규를 쓰러뜨렸기에 미안한 마음도 있고 해서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었지만 그녀들은 아직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대협의 성함도 여쭈어 보지 않았군요?”
그제야 상대방의 이름도 모르는 실례를 저질렀다고 생각한 독고은니가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는 유소문이라고 합니다.”
“유소문 대협이셨군요.”
“대협이라니, 저 같은 시골 촌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호칭이군요.”
유소문은 대협이라는 호칭이 낯간지러운 듯 겸손의 말을 건넸지만 독고은니는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제가 견문이 없어 대협을 알아보지 못한 점을 이해해 주시고, 대협의 별호를 알려 주실 수 있으신지요.”
“저는 강호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별호가 없습니다.”
“네? 아직 별호가 없으시다고요?”
유소문의 대답에 독고은니는 실망한 듯한 기색을 애써 감추려고 했으나 유소문은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으니 별호라는 것은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시골 마을의 삼류무사들도 하나씩 가지는 별호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실력이 삼류에도 못 미친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류 문파라고는 하지만 역시 무림문파의 식솔이며 일류고수의 실력을 갖춘 독고은니나 나윤정 역시 독선화(毒善花) 독고은니, 빙백봉(氷白峯) 나윤정이란 별호를 가지고 있었다.
혹시나 유소문이 알려진 무림고수이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독고은니로서는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유소문의 실력을 보아 그가 실력이 없어 별호가 없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으나 내심으로 그녀가 알아보지 못한 무림고수이기를 은근히 기대했기에 실망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 독고은니의 마음을 아는지 유소문은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하!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래봬도 약간의 재주는 있어 필시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독고은니는 자신의 마음이 드러났다는 생각에 무안한 미소를 짓고는 시선을 돌려 곁에 있는 현칠을 바라보며 이름을 물어보았다.
“현칠.”
쌀쌀맞은 목소리로 답변하는 현칠에게 독고은니 또한 더 이상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독고은니와 나윤정은 꿩 대신 닭이라는 심정으로 사문의 사활을 건 대사자 결투를 위해 유소문과 현칠을 데리고 지현강으로 향하게 되었다.
5장 만물사(萬物士) 현칠(1)
하북을 떠난 지 열이틀 만에 현칠과 나윤정 일행은 강서에 위치한 지현강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맑은 강이 흐르는 서동촌이란 마을은 강서의 변두리에 위치하고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는 순박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시골 마을길을 따라 쭉 달리다 보니 그리 크지는 않지만 오랜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 장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유 소협, 저곳이 바로 나씨세가예요.”
강서까지 함께 오는 동안 유소문과 많이 친해진 독고은니는 소문의 거듭된 부탁으로 이제는 대협이라는 칭호 대신 소협이란 칭호로 그를 부르고 있었다.
“장원이 아주 멋지군요!”
독고은니가 가리키는 장원을 바라본 유소문은 한 문파의 장원이라고 하기에는 그리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장원이었지만 예의상 멋지다는 인사를 건넬 수밖에 없었다.
“고맙습니다, 유 소협.”
나윤정 역시 그의 말이 예의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러나.
“멋지기는, 내 눈에는 시골 마을의 부잣집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구만.”
불쑥 말 중간에 끼어들어 초를 치는 현칠의 행동에 나윤정의 고운 이마가 순간 꿈틀거렸지만 보름 동안 보아 온 현칠의 행동으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나윤정이었다.
보름 동안 같이 지내면서 친해진 독고은니와 유소문의 사이와는 달리 나윤정과 현칠은 서로를 개 쳐다보듯이, 혹은 닭 쳐다보듯이 아예 서로가 서로를 무시하고 있었다.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유소문과 독고은니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 둘의 관계는 절대 좋아질 수 없다고 여기고 말았다.
어느새 나씨세가의 정문 앞에 도착한 나윤정은 정문을 지키고 있는 세가의 한 청년에게 자신이 돌아온 것을 집안에 알리도록 전했다. 일행들이 정원으로 들어서자 곧이어 문사 같은 인상의 한 중년 사내가 뛰어나와 그들을 반겼다.
그의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나씨세가의 집사라고 생각했던 유소문과 현칠은 그가 다름 아닌 나씨세가의 가주인 기문정천(技門頂天) 나백천이란 사실에 의외라는 듯 약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나백천의 풍모와 인상은 한 무림세가의 가주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여려 보였다.
“오, 윤정아! 네가 돌아왔구나.”
나백천은 한 달 만에 만나는 외동딸 윤정이 돌아오자 기쁜 마음에 그녀의 손을 잡으며 반가워했다.
“아버님, 그동안 별고 없으셨는지요.”
“나야 뭐 별일이야 없었다만, 네가 나가서 고생을 했겠구나.”
한 달 동안 당귀문의 점점 더해 가는 횡포에 견디기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오랜만에 돌아온 딸에게 그런 내색을 하고 싶지 않은 나백천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저씨, 저도 왔어요.”
“오, 그래! 은니도 무사히 잘 다녀왔구나.”
그제야 독고은니와 나머지 일행을 돌아본 나백천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정중히 그들에게 포권을 하며 인사를 건넸다.
“이거 제가 무례를 저질렀군요. 제가 바로 나씨세가의 가주인 나백천입니다.”
정중한 나백천의 인사에 현칠과 유소문 또한 포권을 취하며 읍을 했다.
“유소문이라고 합니다.”
“현칠이라고 합니다.”
유소문과 현칠이 자신들을 소개하자 나백천은 뭔가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윤정이 떠나기 전에는 호북 유가의 유귀만이나 산서 만씨 일가의 만장만, 혹은 하북 팽가의 팽형규 중 한 명과 같이 올 줄 알고 있던 그로서는 이름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유소문과 현칠을 바라보며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백천의 생각을 알아챘는지 나윤정은 그동안의 일들을 그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잠시 후 나윤정의 이야기를 들은 나백천의 얼굴이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어 버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제 이틀 후면 가문의 사활을 건 결투가 벌어지는데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어중이떠중이를 대사자로 내보내려고 데려왔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문이 멸문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혼란스러워하는 나백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칠은 멋쩍어진 분위기에 너무도 어울리지 않게 자신의 배를 만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 배고프다.”
현칠의 단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자 현칠은 너스레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어깨를 살짝 들어 보였다.
“배고픈 걸 어떡하라고.”
참다못한 나윤정이 한마디 하려는 찰나에 어느 정도 사태를 의식한 나백천이 씁쓸할 표정을 지으며 현칠 일행을 안으로 초대했다. 유소문과 현칠을 따로 접대하라고 시종에서 부탁한 후 나백천은 더는 그들에게 말도 걸지 않은 채 독고은니와 나윤정을 데리고 사랑채로 넘어갔다.
나백천과 단 한마디의 인사 후 헤어진 유소문과 현칠은 따로 간단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주어진 숙소로 돌아와 몸을 쉬었다.
숙소로 돌아온 현칠은 아까부터 뭔가 그렇게 불만인지 연신 입을 삐죽거리고 있었다.
“쳇! 이거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기껏 이런 이류 문파를 도와주러 여기까지 왔더니만 완전 찬밥 신세네.”
현칠의 투덜거림에 유소문은 그저 빙긋이 웃어 보이며 그런 현칠을 달래 주었다.
“도와주기로 하고 왔으면 그냥 도와주면 되는 거지, 뭘 바란 것 자체가 예의에 어긋난 걸세.”
그러나 현칠은 유소문의 말에도 나씨세가의 사람들에게 여간 불만이 많은 것이 아니었다. 기껏 그 먼 하북에서 여기까지 도와주러 왔으면 가주가 맨발로 뛰어나와 반겨 줘도 모자랄 판에 자신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나백천의 행동이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지금 사랑채에서는 나씨세가의 사람들과 독고세가의 사람들이 모여 모레 있을 대사자 결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서, 정작 결투에 나서기 위해 이곳으로 온 자신들은 부르지도 않는 사실에 현칠은 더욱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소문아, 너 모레 확 져 버려라? 응?”
“그게 무슨 소린가?”
“나 참! 이런 대접을 받고는 이기고 싶지도 않다. 이참에 멸문하게 확 져 버려.”
“잠이나 자자.”
현칠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유소문은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조용히 자리를 깔고 잠을 청했다.
현칠 역시 이제는 상대도 해 주지 않는 유소문을 향해 잠시 투덜거리다가 이내 상대할 사람이 없어지자 그 역시 먼 길의 여정을 풀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한편 지금 나씨세가의 사랑채 분위기는 그야말로 싸늘했다. 그곳에는 독고세가의 가주인 독고현과 그의 딸 독고은니, 그리고 장남인 독고제갈과 이번 비무를 위해 데려온 천태문(天太門)의 노광권이 모여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나씨세가의 가주 나백천과 나윤정이 앉아 있었다. 뭔가 한참을 이야기하던 독고현은 기가 막히는지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답답해 했다.
“아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면서 저런 이름도 들어 본 적 없는 어중이떠중이들을 데려오다니요!”
독고현의 말에 나백천 역시 할 말이 없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은근슬쩍 독고은니가 조용히 독고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유 소협은 아직 강호에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실력 하나…….”
“갈! 은니, 너는 조용히 해라. 감히 네가 뭘 잘했다고 이리도 주둥아리는 놀리는 게냐!”
성난 독고현의 호통에 은니는 하던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허허! 아우님, 진정하시게나. 그런다고 이 일이 잘 풀리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형님은 지금 이 상황에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이건 저와 형님 가문의 사활이 걸린 일입니다!”
평소에는 나백천의 말을 존중하던 독고현이었지만 이번 일에 있어서는 그 역시 너무 화가 나 있기에 참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정하고 이제 방법을 구해 봐야 하지 않겠나. 윤정이 말을 들어 보니 그도 윤정이의 검을 맨손으로 잡을 정도의 고수라고 하지 않나.”
나윤정의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백천이기에 유소문이 그저 평범한 사내는 아닐 것이라고 여기긴 했다. 그러나 들어올 때부터 방 안에서 거드름을 피우고 있던 천태문의 붕권일수(鵬拳一手) 노광권은 같잖다는 듯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치며 그의 말에 불쑥 끼어들었다.
“아녀자의 검을 손으로 잡아낸 것이 뭔 대수라고 무림고수라 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노광권의 말에 나윤정은 속으로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참아야만 했다. 그러자 노광권은 더욱 기가 산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어차피 모레 있을 대사자 결투는 연륜전(連輪戰)으로 진행하는 만큼 제가 당귀문의 대사자들을 모두 쓰러뜨리면 되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당당하게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는 노광권은 광서에 위치하고 있는 천태문의 신진 고수로서 평소 심성이 그리 곱지 않다고 소문이 나 있었지만 그의 무공 실력은 무림 백대고수에 속할 정도로 고강했다.
다만 정파의 인물이면서도 약삭빠른 구석이 있어 강자 앞에서는 약하고 약한 자 앞에서는 한없이 강한 소인배 같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현 상황에 독고세가와 나씨세가에서는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노광권밖에 없었다.
밤이 늦도록 다른 해결책을 찾아보려 했지만 더 이상 해결책의 실마리도 찾을 수 없자 그들은 노광권의 실력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날이 밝자 아침 식사를 마친 유소문과 현칠은 나백천이 부른다는 하인의 전갈에 사랑채로 건너갔다. 결투를 하루 남긴 오늘, 나백천은 오히려 어제와 다르게 차분해져 있었다.
나백천은 사랑채로 들어서는 유소문과 현칠을 인자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먼저 어제 일에 대해 사과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