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무림, 다시 쓰다 1권(25화)
7장 일양왕(一攘王) 금훈(6)
“킥킥! 삼왕이라 칭송받는 인물 중 하나인 일양왕 금훈의 꼴이 말이 아니구나, 킥킥!”
붉은 장포를 차려 입은 노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금훈은 그에 대한 경계심이 더욱 커졌다.
“나를 알면서도 내 앞에 당당히 나서다니 배짱 한번 두둑하구나.”
금훈은 그의 명성에 걸맞게 심한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무림의 밤에 긴말은 필요 없는 법! 이곳에서 삼왕 중의 한 명을 죽일 수 있다면 우리로서는 크나큰 기회라고 할 수 있지. 네가 나서겠느냐?”
노인은 독특한 목소리로 흑의인에게 물어보자 옆에 있던 흑의인은 말없이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섰다.
금훈은 이들이 자신을 노리는 적이라는 것을 알고는 서둘러 공격 자세를 취해 보였다. 그러나 일순 흑의인의 몸이 사라졌다고 느꼈다. 어느새 그가 뽑아 든 검에는 한 줄기의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럴 수가! 내 생전…… 이런 쾌검은…… 보지도…… 못했는데…….”
허망하게도 흑의인의 검에 묻은 피는 금훈의 가슴을 꿰뚫으면서 묻은 피였다.
아무리 심한 내상을 입고 있었다고는 하나 그는 염연한 무림 삼왕 중 한 명이거늘, 단 한 수에 그의 가슴을 꿰뚫어 버린 흑의인의 검은 정녕 빛처럼 빨랐다.
서서히 무릎을 꿇으며 쓰러지는 금훈의 모습을 바라본 흑의인은 아무 말 없이 검에 묻은 피를 닦아 내고 조용히 다시 노인 뒤로 물러났다.
“꼬맹이를 보러 왔다가 이런 횡재를 하게 될 줄이야. 어쨌든 그들이 귀면갑도 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킥킥!”
너무도 허망하게 죽어 버린 금훈을 뒤로하고 노인과 흑의인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숲은 또다시 고요함에 물들었다.
과연 무엇이 진짜라는 말인가!
내가 본 것이 진짜인가, 내 머릿속에 떠오는 생각이 진짜인가.
그러나 어느 것이 진짜이든 운명이 바뀔 수는 없다.
―김상수 화백(畵伯)의 서랍장 낡은 일기에서 발췌―
8장 만통선사(萬通仙士) 유백서, 그는 누구인가? (1)(1)
유소문과 현칠이 무사히 돌아오자 그들의 안부를 걱정하고 있던 독고은니와 나윤정은 그들의 무사한 모습에 안도감을 취할 수 있었다.
그중에 독고은니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유소문의 품 안으로 파고들자, 곁에서 지켜보던 나윤정과 현칠은 무안함마저 느껴야만 했다.
“아예 방을 잡지 그러냐?”
현칠의 놀림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유소문은 품 안에 파고드는 독고은니를 말리려고 했지만 오히려 독고은니는 서러운 듯 더욱 거세게 눈물을 흘리며 그의 품 안에 안겼다. 그렇게 한 편의 신파극이 끝난 후, 그들에게 금훈과의 이야기를 간략히 설명한 유소문과 현칠은 서둘러 일행에게 짐을 챙기라고 명했다.
아침에 금훈을 만나면 오히려 상황이 나빠질 수도 있다고 판단한 현칠이 차라리 그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하자, 그들은 서둘러 짐을 챙겨야만 했다.
금훈이 이미 죽어 버렸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일행은 그렇게 해서 한밤중에 조용히 도망가듯 객점을 빠져나와 말을 타고 다시 만통선사 유백서를 만나기 위해 청해로 향했다.
사천에서 야반도주한 일행은 열흘 만에 드디어 청해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원래는 보름이나 더 걸릴 거리를 열흘로 단축시킬 정도의 강행군으로 인해 그들의 몸과 마음은 이미 많이 지쳐 있었다.
청해에서도 하루라도 빨리 만통선사를 찾아야 하는 이들로서는 피곤하지만 도착하자마자 다시 길을 나서야 했다.
“자, 이제 청해에 도착했으니까 어떻게 해야 돼?”
나윤정의 재촉에 현칠은 다시 한 번 품 안에서 공책과 만년필을 꺼내 거기에다 뭐라 적고는 돌멩이를 땅바닥에 던졌다.
여느 때처럼 돌멩이는 그들이 가야 하는 방향을 향해 쪼르르 굴렀다.
“우선은 무작정 저리로 가 보는 거야.”
잠시 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자 지금까지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일행이었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대체 어떻게 찾는다는 거야?”
돌멩이가 가리킨 방향은 청해의 시장으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왁자지껄 오가며 시장 바닥을 메우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곳에서 만통선사를 찾는다는 것은 실로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와도 같은 일이었다.
암담해 하는 일행을 뒤로하고 현칠은 시장 바닥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좋은 수를 생각하기 위해 그가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갑자기 나윤정이 비명을 지르듯 큰소리를 질렀다.
“찾았다!”
그녀의 말에 일행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고 이윽고 그녀의 시선을 따라 시장 한복판에 버젓이 ‘만통선사입니다.’라고 쓰여 있는 깃발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야? 정말 만통선사란 말인가?”
유소문은 절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만통선사가 버젓이, 그것도 시장 한복판에서 저런 깃발을 세워 둘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물론 다른 일행들 역시 유소문과 같은 생각이었다.
“우선은 가 보자.”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깃발만을 바라보던 일행들은 곧 현칠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그의 뒤를 따라 깃발이 놓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깃발이 꽂혀 있는 시장 한복판에는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 삿갓을 쓴 사내 하나가 있었다.
삿갓을 써서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대략 3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젊은이였으며, 특이하게도 그의 오른 소매는 흘러오는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외팔이 젊은이 앞에 도달한 일행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있을 때, 현칠이 불쑥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댁이 만통선사슈?”
남이 들으면 마치 시비를 거는 듯한 현칠의 물음에 삿갓을 쓴 젊은이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일행들을 살펴보았다.
“저를 따라오시죠.”
외팔이는 마치 그들이 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양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말없이 시장의 한 골목길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현칠 일행은 외팔이의 뒤를 따라 한 가옥으로 들어갔다.
낡은 집이었지만 의외로 튼튼하게 보이는 담장이 높게 세워져 있었고, 그 안에는 조그마한 정원에 물을 주고 있는 청아한 얼굴의 노인이 있었다.
외팔이는 노인 앞에 다가서자 공손히 읍을 하며 그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시고 왔습니다.”
그러자 청아한 인상의 노인은 뒤따라온 현칠 일행을 바라보며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서 오시오.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노인은 마치 현칠 일행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다는 듯 그들을 향해 팔을 벌리며 환영해 주었다.
“존장께서는 저희가 올 것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까?”
유소문이 그의 앞으로 다가서며 공손히 물어보았다. 그러자 노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늘쯤이면 유 소협과 그의 일행 분들이 오실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노인의 말에 현칠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올 것을 알았다는 노인의 말에 바로 그가 만통선사 유백서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 일행은 그에 대한 말이 과연 헛소문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존장께서 그 고명하신 만통선사 유백서님이시겠군요.”
유소문의 물음에 이번에도 노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습니다. 속세의 사람들은 저를 보고 만통선사라 부르지요.”
“그렇다면 저희가 무슨 일로 이곳에 온 것인지도 알고 계시다는 말씀이십니까?”
“물론입니다. 그러나 손님들을 밖에 세워 두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요. 우선 안으로 들어가 차라도 한 잔 하며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십시다.”
노인, 아니 만통선사 유백서는 얼굴에 핀 웃음을 잃지 않으며 일행들을 안으로 들였다.
안으로 들어서는 현칠과 눈이 마주친 유백서는 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에게 지어 보였다.
‘분명 어디서 본 얼굴인데?’
현칠은 만통선사 유백서란 인물이 낯설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분명 언젠가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깔끔하게 정돈된 안채에 들어선 일행은 잠시 후 외팔이 젊은이가 내온 차를 마시며 유백서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래, 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유백서는 이미 그들이 무슨 이유로 찾아왔는지를 알면서도 예의상 다시 한 번 물어보았다.
“저희 세가를 멸문시킨 집단의 정체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긴말은 필요 없다는 듯 품 안에서 혈(血)이라 적힌 종이를 꺼내 그에게 내민 나윤정은 절의에 찬 눈빛을 빛내며 물어보았다.
그러자 유백서 역시 얼굴의 웃음기를 서서히 지우며 나윤정의 물음에 정중하게 대답을 해 주었다.
“음, 이 혈(血)이란 단어를 얘기하기에 앞서, 혹시 마교의 무리 중 혁린세가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유백서의 물음에 현칠을 제외한 일행 모두는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교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비밀 문파로 알려진 혁린세가는 30년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존재를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30년 전 삼제사왕(三帝四王)의 일인으로 불리는 혁린세가의 가주 지옥마제(地獄魔帝) 마혈랑에 의해 그들의 존재가 무림에 알려지게 되었다.
30년 전 홀연 단신으로 무림에 출두한 지옥마제 마혈랑은 이미 정파에서 이황의 위치에 속해 있던 신수일협(神手一俠) 장무용과 일대일의 비무를 통해 삼 일 밤을 싸우고 그 승부를 가리지 못함으로써 그의 명성이 장무용에 버금갈 정도로 드높아졌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혁린세가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있다는 것만이 알려져 있지 그 문파의 위치며 규모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혁린세가란 본시 구 마교에서 수백 년 전 흘러나온 문파입니다. 현재도 그들의 위치를 숨기고 그 세력을 키워 나가고 있으며 그들의 앞으로의 목표는…… 그 혈이라고 쓰인 종이는 바로 그 혁린세가의 문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백서의 말에 이번에는 유소문이 놀라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런 거대한 비밀 세력이 왜 하필이면 조그마한 나씨세가와 독고세가를 멸했단 말입니까?”
유소문은 순간 자신이 말해 놓고도 조그마한 문파라 했던 게 미안한지 나윤정과 독고은니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녀들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이 궁금해 하는 이유도 그것이었기에 더욱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그것은…….”
잠시 말에 뜸을 들이던 유백서는 잠시 일행의 얼굴을 둘러본 후 입을 열어 말을 이어 나갔다.
“지금 현칠 소협이 가지고 계신 귀면갑 때문입니다. 뭐, 물론 귀면갑(鬼面鉀) 하나로는 별로 쓸모가 없지만 유 소협이 가진 사도(死刀)와 사령천왕지(使靈千王持)가 함께 모이면 그것은 바로 천부굴(天富堀)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지도와 열쇠가 되니까요. 전설에 따르면 천부굴(天富堀) 안에는 이 세상을 모두 살 수 있을 정도의 금은보화가 가득하고 또한 사람들이 꿈에도 원하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영약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천부굴을 찾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물건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사도, 귀면갑, 사령천왕지입니다. 지금 유 소협이 가지고 있던 사도는 원래 황교의 교주가 가지고 있던 그의 신물이었고, 귀면갑 역시 혁린세가에 전해지던 보물이었으며, 사령천왕지라는 것은 무엇이든 열 수 있는 열쇠로서 천마신교의 교주 천마가 가지고 있습니다.”
유백서가 들려주는 새로운 사실에 일행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가문의 보물로만 알고 있고 그 쓰임을 알지 못했던 귀면갑에 이런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는 줄 몰랐던 나윤정 또한 놀랐고, 유소문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옥도가 이 일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유백서의 말에 유소문은 자신의 지옥도를 한 번 들여다보았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유일한 유품이 사실은 황교의 교주가 쓰던 무기였다는 말에 그제야 왜 황교의 손불이가 자신을 찾아왔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 그렇다면 혁린세가의 사람들이 귀면갑을 얻기 위해 우리 가문의 모든 사람들을 죽인 거란 말씀이신가요?”
단지 보물을 찾기 위한 열쇠라는 것 하나로 인해 자신의 가문이 멸문했다는 사실에 나윤정은 억울한 마음이 들어 금방이라도 눈에서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자신과의 맹세를 기억하는 나윤정은 그렇게 쉽게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다.
나윤정의 물음에 만통선사 유백서는 그저 묵묵히 고개만을 끄덕일 뿐이었다.
“겨우 그깟 보물 때문에……. 흑흑!”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지켜보던 독고은니의 뺨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씨세가가 가지고 있는 보물로 인해 덩달아 멸문했다는 사실이 억울했다. 나씨세가를 돕다 죽은 게 억울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녀 역시 한낱 보물 때문에 모든 식구들이 죽어 갔다는 생각에 허탈하고 분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잠시 그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고 독고은니가 어느 정도 진정하는 모습을 보이자 다시금 유소문이 입을 열어 유백서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런 보물들이 모두 마교와 연관이 있다면 천부굴은 필시…….”
“마교의 누군가가 세운 곳이겠지요.”
유소문이 뭔가를 유추한 듯 입을 열고 말을 하다 말끝을 흐리자 그에 대한 대답을 유백서가 대신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그런 걸 자세히도 알고 있지?”
돌연 가만히 듣고 있던 현칠이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유백서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만통선사 유백서는 자신을 노려보는 현칠을 향해 빙그레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저는 그것뿐만이 아니라 현칠 소협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현칠 소협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말이죠.”
그 순간 현칠의 마음속에서 크나큰 충격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그 역시 지금은 유소문과 함께 생활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해 이러고 있을 뿐 한시라도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잊은 적이 없는 현칠이었다.
방금 전 유백서의 말은 분명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이곳의 세계로 넘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현칠은 이내 더욱더 싸늘한 냉기를 뿜으며 잠시 일행들에게 자리를 피해 달라고 청했다.
영문도 모른 채 거의 반 강제적인 현칠의 행동으로 일행은 밖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둘만 남은 안채에는 싸늘한 공기만이 감돌았다.
가만히 유백서를 노려보던 현칠의 입이 조용히 열렸다.
“넌 대체 누구냐?”
2권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