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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체 크로키 수업이 한창 진행 중인 서울의 한 대학교 실습실.
이젤 앞에 앉은 미대생 수십 명의 시선이 중앙으로 향해 있었다.
3분에 한 번꼴로 바뀌는 남자 누드모델의 과감한 포즈를 놓칠세라 미대생들의 눈과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실습실엔 모델이 직접 준비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재즈의 선율 위로 슥삭슥삭 연필 소리가 덧입혀졌다.
오늘 김 교수의 부탁으로 인체 크로키 실습 진행을 맡은 준경은 다음 모델을 준비하기 위해 휴게실로 향했다.
여학생들이 실습실을 빠져나가는 준경의 뒷모습을 흘끔거렸다. 학교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준경을 만나기 위해 오늘 이 수업에 참여한 여학생들이 많은 터였다.
“다들 집중 못 해!”
김 교수의 따끔한 불호령에 혼쭐이 나고서야 학생들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작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 * *
수업이 모두 끝난 후 실습실을 정리하던 준경의 뒤로 누군가 다가왔다.
“서준우가 누구야?”
오늘 첫 번째 타자로 크로키 장에 섰던 모델 황유진이었다. 그녀가 휴게실에 놓고 간 준경의 핸드폰을 건넸다.
“전화 계속 오던데?”
준경이 핸드폰을 받으며 액정에 뜬 발신인 ‘서준우’를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전화를 받기는커녕 바지 주머니 속에 넣어 버렸다.
“왜 안 받아?”
“시끄럽고. 아직까지 집에 안 가고 뭐 해?”
“너 기다렸지. 이거 주려고.”
유진이 대뜸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준경이 받지 않고 빤히 쳐다보자 안 되겠는지 직접 상자에서 넥타이를 꺼내 준경의 목에 매 줬다.
“너 지금 뭐 하냐?”
“가만히 좀 있어 봐. 자, 됐다.”
파란 넥타이를 한 준경의 모습을 보고 유진이 엄지를 척 내밀었다.
“역시 잘 어울리네. 이거 내 작별 선물이야. 요새 취업 시즌이잖아. 제대로 된 넥타이 하나쯤은 있어야지.”
“이런 걸 나한테 왜 주는데?”
“나 내일모레 파리로 떠나. 모델 에이전시에서 연락 왔거든. 이게 다 니가 만들어 준 포트폴리오 덕분이야. 물론 내가 돈을 많이 주긴 했지만. 친구라고 좀 깎아 줄 줄 알았더니. 에라이 인정머리 없는 놈.”
“욕이야 칭찬이야?”
“둘 다지, 인마.”
털털한 성격의 유진이 코를 찡긋거렸다. 그녀는 준경에게 고마운 것이 많았다. 누드모델을 하면서 몰카, 성추행 별별 안 좋은 일들을 다 겪어 봤는데, 이 학교에서는 단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다. 그건 다 서준경 덕분이었다. 서준경 무서워서 후배들이 아예 핸드폰도 안 가져온다. 그러니 김 교수가 맨날 서준경만 찾지.
“암튼 그동안 고마웠어.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내가 쏠게.”
“알바 가야 해.”
“으휴. 너도 참 딱하다. 김 교수 시다에, 미술 학원 강사, 와인 바, 공사장, 어머니 간병까지. 대체 몸이 몇 개야?”
“사돈 남 말 하네.”
등록금이 없어 1학년 1학기 만에 휴학한 이력을 가진 유진은 사실 준경의 대학 동기였다. 그렇다. 바로 이 대학.
“난 돈이 없어서 휴학한 게 아니라, 적성에 안 맞아서 그만둔 거라고 몇 번을 말하니.”
유진이 앞치마를 벗는 준경을 흘끔 보다가 그의 커다란 손에 시선을 고정했다. 수려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손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몸 좀 살살 굴려. 그러다 너 골병 나. 어머니보다 먼저 죽으면 안 되잖아.”
“집에 가라.”
준경이 무뚝뚝하게 말하며 마저 미술 도구를 정리했다.
“아, 맞다. 니가 저번에 알아봐 달라고 한 거. 윤승원.”
준경이 고개를 돌리자, 유진은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햇빛에 비친 그의 얼굴을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 바라봤다.
여학생들이 왜 그 집중 잘되는 인체 크로키 실습 앞에서도 준경의 얼굴 보느라 김 교수한테 매번 혼나는지 알 것 같았다. 그게 꼭 잘생긴 얼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묘한 매혹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야, 황유진. 윤승원 뭐.”
“어? 어어.”
유진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윤승원 말이야, 차진모 회장 손녀랑 연인 사이였대.”
“차진모? 선진그룹?”
“어. 대박이지? 더 대박은 지금은 헤어졌는데 윤승원이 못 잊고 질척거리고 있는 중이래.”
“근데 그게 뭐. 그래서 어쩌라고.”
“윤승원한테 복수하고 싶으면 그 여잘 공략해 보라고. 어차피 의료 소송은 물 건너갔다며. 증언하기로 한 인턴이 갑자기 말 바꾸고. 그나저나 윤승원 그 새끼는 어떻게 술 처먹고 수술실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열받아.”
“근데, 넌 나에 대해 뭘 이렇게 많이 알아?”
“내가 니 애인이랑 의자매잖아.”
“누가 내 애인인데?”
“야, 소영이가 들으면 섭섭하겠다. 암튼 법으로 못 이기면 윤승원 그 새끼한테 복수라도 하자. 그 새끼가 공들이고 있는 여자를 뺏어 버리자고.”
“됐고. 넌 가서 짐이나 싸.”
“되긴 뭐가 돼. 내가 파리 가기 전에 윤승원 전 여친이랑 너 다리라도 놔 주고 갈게. 이래 봬도 내가 인맥 쩔잖아.”
유진이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뭔가 검색하더니 준경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어떤 여자의 SNS였다.
“좀 봐 봐. 이 여자야. 이름은 차지해.”
“…….”
“되게 순진하게 생겼지? 한번 꼬셔 보라니까. 너 정도면 쉽게 넘어뜨릴 수 있을걸.”
딱 봐도 명품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곱게 차려입은 여자의 사진을 본 준경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여자가 나 같은 거 쳐다나 볼 것 같아? 헛소리 그만하고 치워.”
“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번 해 봐. 솔직히 그날 윤승원 술 처먹는 거 본 사람이 있어도 누가 증언을 해 주겠어. 돈으로 다 매수당할 텐데. 근데 이 여자는 돈으로 매수당했을 리도 없잖아. 그리고 윤승원을 제일 잘 알 거고.”
“…….”
“그럼 차지해가 뭘 알고 있는 건 없는지 확인이라도 해 보는 건 어때? 서준경. 병상에 누워 계신 어머니를 생각해.”
순간 준경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산소 호흡기에 목숨을 의지한 채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어머니가 떠오른 것이다.
‘윤승원 선생 술 먹고 수술실 들어갔대.’
인턴들이 비상구에서 떠들던 말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윤승원…….”
준경이 다시 유진이 내민 핸드폰을 응시했다. 차지해라는 여자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보는 준경의 눈빛이 싸늘히 굳어졌다.
현재로서는 얼굴도 한번 본 적 없는 차지해라는 여자가 준경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 * *
“윤승원 이 새끼는 왜 자꾸 전화하고 지랄이야!”
지해가 핸드폰 전원을 꺼 버리며 씩씩거렸다. 그러곤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으, 졸려 죽겠네.”
마침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표 비서가 못 본 척하며 헛기침을 했다.
뒤늦게 사람이 들어온 것을 알아차린 지해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보자, 표 비서가 잽싸게 태블릿 PC를 켜고 오늘의 일정을 브리핑했다.
“11시 대회의실에서 대한건설 CF 연장 관련 회의 있으시고요, 1시에 임원진들과 점심 식사 있으십니다.”
“취소해 주세요.”
“네? 둘 중 무얼…….”
“당연히 둘 다죠.”
“이사님, 차인형 전무님께서 대한건설 회의랑 점심 식사에 임원분들 꼭 참석하라고 지시하셨는데요.”
“차인형 전무가요?”
“네. 그럼 참석하시는 걸로 알고…….”
“취소해 주세요.”
갑자기 무슨 재밌는 일이라도 있는지 지해가 싱긋 웃었다.
표 비서가 당황한 얼굴로 서 있자, 지해가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잠을 못 잤더니 머리가 너무 아파서요. 오늘은 집에 가서 좀 쉬고 싶은데…….”
이마를 짚으며 아픈 시늉을 해도 표 비서가 꼼짝을 않자 지해가 표정을 풀고 손을 내렸다.
“솔직히 회의도 그렇고, 점심 식사 자리에서도 난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니까…….”
지해가 혼잣말인 것처럼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를 표 비서가 쳐다봤다.
그녀의 눈빛이 꽤 쓸쓸해 보였다.
오늘따라 왜 저러시지?
이번엔 절대 속지 말자며 표 비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손가락은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오전에 있는 일정을 전부 삭제한 표 비서가 체념한 듯 물었다.
“저녁 일정은 어떻게 할까요?”
“물론…… 취소해 주세요.”
“회장님께서 직접 이사님께 지시한 일정인데 정말 취소할까요?”
“무슨 일정인데요?”
지해가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배시시 웃자, 표 비서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저번 주 회의 시간에 꾸벅꾸벅 졸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일류식품에서 주최하는 신제품 출시 행사인데요. 아주 중요한 자리예요. 저희 회사 지금 일류식품이랑 재계약 앞두고 있잖아요.”
일류식품이라…….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몇 번 툭툭 치던 지해가 입을 열었다.
“재계약은 당연한 수순이잖아요. 일류식품이랑 벌써 10년째인데. 그리고 일류식품 쪽에 박 사장님 대학교 동문인가 있다면서요. 완전 죽마고우라던데.”
“학연보단 혈연이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일류식품 조만간 진성그룹이랑 사돈 맺는대요. 그래서 오늘 행사에 진성기획 서준우 상무도 참석한다는 소리가 있어요.”
“네? 방금 누구라고 했어요?”
지해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곤 놀란 얼굴로 물었다.
“서준우요? 서준우라고 했어요?”
“네. 근데 이사님, 오늘 정말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역시 행사 참석은 무리겠죠? 그럼 쉬세요.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오늘따라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는 지해를 피해 표 비서가 도망가려던 그때.
“잠깐만요!”
지해가 우렁찬 목소리로 표 비서를 붙잡았다.
표 비서가 놀라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자 그녀가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일류식품 행사가 몇 시죠?”
“가시려고요?”
“네. 가야죠. 방금 가야 할 이유가 생겼어요.”
지해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순간, 바람피우다 걸린 주제에 그 뻔뻔한 낯짝을 들이밀며 다음 주 주말에 있을 동창회까지만이라도 헤어짐을 유예해 달라고 말하던 윤승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헤어지고도 그 새끼가 나에게 계속 전화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동. 창. 회. 파. 트. 너.
“이 개자식! 절대 용서 못 해.”
온순하던 지해의 얼굴이 전투적으로 변했다.
* * *
‘일류식품 신제품 출시 기념행사’라는 문구가 대문짝만 하게 적힌 입간판 앞에 누군가 초조한 기색으로 서 있었다. 표 비서였다. 그는 행사장 앞을 서성이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왜 안 오시는 거야?”
결국 로비까지 나온 표 비서가 연신 밖을 살폈다.
설마 안 오는 건 아니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행사장에서 따로 만나자는 그녀의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다.
급하게 어딜 들렀다가 온다며 행사 시간에 맞춰서 꼭 도착할 거라던 상사의 말을 믿은 제 잘못이 컸다.
그녀는 처음부터 이 행사에 참석할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닐까?
뒤늦게 그녀에게 속았다는 생각에 표 비서가 원통해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오 마이 갓. 미…….”
미친 거 아니야?
표 비서가 입을 틀어막았다. 하마터면 속마음을 내뱉을 뻔했다.
“표 비서님. 많이 기다렸죠? 옷 좀 갈아입고 오느라고 늦었어요. 어서 들어가요.”
“저, 저기 근데 이사님 의상이…….”
청룡영화제인 줄.
표 비서가 지해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으려다가 먼 산을 쳐다봤다.
그녀는 가슴 라인과 어깨 라인이 강조된 화이트 미니드레스 차림이었다. 시선을 둘 곳이 없었다.
“제 의상이 왜요? 이상해요? 아…….”
지해가 뒤늦게 표 비서의 빨개진 귀를 보더니, 얼른 들고 있던 블랙 재킷을 어깨에 걸쳤다.
“이제 됐죠?”
“되긴 뭐가 돼요. 의상이 너무 과하세요. 들어가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오늘 참석하신 분들 연령층도 엄청 높고, 이러고 들어가면 완전 확 튀는데.”
“그럼 좋은 거 아닌가? 회장님이 꼭 참석하라고 했다면서요. 눈도장 제대로 찍겠네.”
지해가 방실방실 웃으며 행사장으로 향했다. 그런 지해의 뒤를 따르며 표 비서가 죽을상을 했다.
“표 비서님.”
갑자기 행사장 입구에서 지해가 걸음을 멈췄다. 그 바람에 열심히 뒤를 따라가던 표 비서가 화들짝 놀라 제자리에 멈춰 섰다.
“또 왜요? 왜?”
지해가 표 비서를 빤히 쳐다봤다.
“갑자기 무섭게 왜 그렇게 보세요?”
“나 오늘 어때요?”
“뭐, 뭐가 어떠냐는…….”
“예쁘냐구요.”
“네?”
거울을 꺼내 제 얼굴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지해를 표 비서가 이상하게 쳐다봤다.
옷을 저렇게 입더니 머리가 어떻게 됐나? 원래도 이상했지만 오늘은 더 이상하네.
“맞다. 제가 알아보라고 한 건 알아봤어요?”
“아, 그분.”
“네. 그분이요.”
립스틱까지 꺼내 화장을 수정하고 있는 지해를 향해 표 비서가 말했다.
“서준우 상무는 벌써 왔죠. 2번 테이블에 파란 넥타이 하신 분이에요.”
“파란 넥타이…….”
타이트한 원피스가 영 불편했는지, 그녀는 옷매무새를 매만지며 눈으론 행사장 안 파란 넥타이를 찾느라 바빴다.
“찾았다.”
멀리 파란 넥타이를 한 남자를 발견한 지해의 얼굴이 별안간 환해졌다.
“그럼 여기서 이만 표 비서님은 퇴근하세요. 제 차도 좀 가져가시고요.”
“이사님은요?”
“저는 오늘 타고 갈 차가 생길 것 같아서요.”
“혹시 그 차가 우리 경쟁 회사 서준우 상무 차는 아니겠죠?”
“그럼 전 이만!”
속내를 들켜 버린 지해가 멋쩍게 웃더니 얼른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왜 저러시는 거지?”
무슨 일인지 오늘따라 회사 일에 전투력이 넘치는 상사 때문에 표 비서는 어리둥절했다.
* * *
한편 홀 입구에 들어선 지해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어? 파란 넥타이 어디 갔지? 분명 저기 있었는데.”
두리번거리며 바쁘게 움직이던 지해의 레이더망에 한 남자가 걸려들었다.
흰 셔츠에 파란 넥타이.
남자는 키가 크고 얼굴이 작아 비율이 좋았다. 거리가 너무 멀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뒤통수만 봐도 잘생겼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인체 크로키 수업이 한창 진행 중인 서울의 한 대학교 실습실.
이젤 앞에 앉은 미대생 수십 명의 시선이 중앙으로 향해 있었다.
3분에 한 번꼴로 바뀌는 남자 누드모델의 과감한 포즈를 놓칠세라 미대생들의 눈과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실습실엔 모델이 직접 준비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재즈의 선율 위로 슥삭슥삭 연필 소리가 덧입혀졌다.
오늘 김 교수의 부탁으로 인체 크로키 실습 진행을 맡은 준경은 다음 모델을 준비하기 위해 휴게실로 향했다.
여학생들이 실습실을 빠져나가는 준경의 뒷모습을 흘끔거렸다. 학교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준경을 만나기 위해 오늘 이 수업에 참여한 여학생들이 많은 터였다.
“다들 집중 못 해!”
김 교수의 따끔한 불호령에 혼쭐이 나고서야 학생들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작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 * *
수업이 모두 끝난 후 실습실을 정리하던 준경의 뒤로 누군가 다가왔다.
“서준우가 누구야?”
오늘 첫 번째 타자로 크로키 장에 섰던 모델 황유진이었다. 그녀가 휴게실에 놓고 간 준경의 핸드폰을 건넸다.
“전화 계속 오던데?”
준경이 핸드폰을 받으며 액정에 뜬 발신인 ‘서준우’를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전화를 받기는커녕 바지 주머니 속에 넣어 버렸다.
“왜 안 받아?”
“시끄럽고. 아직까지 집에 안 가고 뭐 해?”
“너 기다렸지. 이거 주려고.”
유진이 대뜸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준경이 받지 않고 빤히 쳐다보자 안 되겠는지 직접 상자에서 넥타이를 꺼내 준경의 목에 매 줬다.
“너 지금 뭐 하냐?”
“가만히 좀 있어 봐. 자, 됐다.”
파란 넥타이를 한 준경의 모습을 보고 유진이 엄지를 척 내밀었다.
“역시 잘 어울리네. 이거 내 작별 선물이야. 요새 취업 시즌이잖아. 제대로 된 넥타이 하나쯤은 있어야지.”
“이런 걸 나한테 왜 주는데?”
“나 내일모레 파리로 떠나. 모델 에이전시에서 연락 왔거든. 이게 다 니가 만들어 준 포트폴리오 덕분이야. 물론 내가 돈을 많이 주긴 했지만. 친구라고 좀 깎아 줄 줄 알았더니. 에라이 인정머리 없는 놈.”
“욕이야 칭찬이야?”
“둘 다지, 인마.”
털털한 성격의 유진이 코를 찡긋거렸다. 그녀는 준경에게 고마운 것이 많았다. 누드모델을 하면서 몰카, 성추행 별별 안 좋은 일들을 다 겪어 봤는데, 이 학교에서는 단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다. 그건 다 서준경 덕분이었다. 서준경 무서워서 후배들이 아예 핸드폰도 안 가져온다. 그러니 김 교수가 맨날 서준경만 찾지.
“암튼 그동안 고마웠어.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내가 쏠게.”
“알바 가야 해.”
“으휴. 너도 참 딱하다. 김 교수 시다에, 미술 학원 강사, 와인 바, 공사장, 어머니 간병까지. 대체 몸이 몇 개야?”
“사돈 남 말 하네.”
등록금이 없어 1학년 1학기 만에 휴학한 이력을 가진 유진은 사실 준경의 대학 동기였다. 그렇다. 바로 이 대학.
“난 돈이 없어서 휴학한 게 아니라, 적성에 안 맞아서 그만둔 거라고 몇 번을 말하니.”
유진이 앞치마를 벗는 준경을 흘끔 보다가 그의 커다란 손에 시선을 고정했다. 수려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손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몸 좀 살살 굴려. 그러다 너 골병 나. 어머니보다 먼저 죽으면 안 되잖아.”
“집에 가라.”
준경이 무뚝뚝하게 말하며 마저 미술 도구를 정리했다.
“아, 맞다. 니가 저번에 알아봐 달라고 한 거. 윤승원.”
준경이 고개를 돌리자, 유진은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햇빛에 비친 그의 얼굴을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 바라봤다.
여학생들이 왜 그 집중 잘되는 인체 크로키 실습 앞에서도 준경의 얼굴 보느라 김 교수한테 매번 혼나는지 알 것 같았다. 그게 꼭 잘생긴 얼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묘한 매혹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야, 황유진. 윤승원 뭐.”
“어? 어어.”
유진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윤승원 말이야, 차진모 회장 손녀랑 연인 사이였대.”
“차진모? 선진그룹?”
“어. 대박이지? 더 대박은 지금은 헤어졌는데 윤승원이 못 잊고 질척거리고 있는 중이래.”
“근데 그게 뭐. 그래서 어쩌라고.”
“윤승원한테 복수하고 싶으면 그 여잘 공략해 보라고. 어차피 의료 소송은 물 건너갔다며. 증언하기로 한 인턴이 갑자기 말 바꾸고. 그나저나 윤승원 그 새끼는 어떻게 술 처먹고 수술실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열받아.”
“근데, 넌 나에 대해 뭘 이렇게 많이 알아?”
“내가 니 애인이랑 의자매잖아.”
“누가 내 애인인데?”
“야, 소영이가 들으면 섭섭하겠다. 암튼 법으로 못 이기면 윤승원 그 새끼한테 복수라도 하자. 그 새끼가 공들이고 있는 여자를 뺏어 버리자고.”
“됐고. 넌 가서 짐이나 싸.”
“되긴 뭐가 돼. 내가 파리 가기 전에 윤승원 전 여친이랑 너 다리라도 놔 주고 갈게. 이래 봬도 내가 인맥 쩔잖아.”
유진이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뭔가 검색하더니 준경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어떤 여자의 SNS였다.
“좀 봐 봐. 이 여자야. 이름은 차지해.”
“…….”
“되게 순진하게 생겼지? 한번 꼬셔 보라니까. 너 정도면 쉽게 넘어뜨릴 수 있을걸.”
딱 봐도 명품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곱게 차려입은 여자의 사진을 본 준경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여자가 나 같은 거 쳐다나 볼 것 같아? 헛소리 그만하고 치워.”
“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번 해 봐. 솔직히 그날 윤승원 술 처먹는 거 본 사람이 있어도 누가 증언을 해 주겠어. 돈으로 다 매수당할 텐데. 근데 이 여자는 돈으로 매수당했을 리도 없잖아. 그리고 윤승원을 제일 잘 알 거고.”
“…….”
“그럼 차지해가 뭘 알고 있는 건 없는지 확인이라도 해 보는 건 어때? 서준경. 병상에 누워 계신 어머니를 생각해.”
순간 준경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산소 호흡기에 목숨을 의지한 채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어머니가 떠오른 것이다.
‘윤승원 선생 술 먹고 수술실 들어갔대.’
인턴들이 비상구에서 떠들던 말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윤승원…….”
준경이 다시 유진이 내민 핸드폰을 응시했다. 차지해라는 여자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보는 준경의 눈빛이 싸늘히 굳어졌다.
현재로서는 얼굴도 한번 본 적 없는 차지해라는 여자가 준경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 * *
“윤승원 이 새끼는 왜 자꾸 전화하고 지랄이야!”
지해가 핸드폰 전원을 꺼 버리며 씩씩거렸다. 그러곤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으, 졸려 죽겠네.”
마침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표 비서가 못 본 척하며 헛기침을 했다.
뒤늦게 사람이 들어온 것을 알아차린 지해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보자, 표 비서가 잽싸게 태블릿 PC를 켜고 오늘의 일정을 브리핑했다.
“11시 대회의실에서 대한건설 CF 연장 관련 회의 있으시고요, 1시에 임원진들과 점심 식사 있으십니다.”
“취소해 주세요.”
“네? 둘 중 무얼…….”
“당연히 둘 다죠.”
“이사님, 차인형 전무님께서 대한건설 회의랑 점심 식사에 임원분들 꼭 참석하라고 지시하셨는데요.”
“차인형 전무가요?”
“네. 그럼 참석하시는 걸로 알고…….”
“취소해 주세요.”
갑자기 무슨 재밌는 일이라도 있는지 지해가 싱긋 웃었다.
표 비서가 당황한 얼굴로 서 있자, 지해가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잠을 못 잤더니 머리가 너무 아파서요. 오늘은 집에 가서 좀 쉬고 싶은데…….”
이마를 짚으며 아픈 시늉을 해도 표 비서가 꼼짝을 않자 지해가 표정을 풀고 손을 내렸다.
“솔직히 회의도 그렇고, 점심 식사 자리에서도 난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니까…….”
지해가 혼잣말인 것처럼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를 표 비서가 쳐다봤다.
그녀의 눈빛이 꽤 쓸쓸해 보였다.
오늘따라 왜 저러시지?
이번엔 절대 속지 말자며 표 비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손가락은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오전에 있는 일정을 전부 삭제한 표 비서가 체념한 듯 물었다.
“저녁 일정은 어떻게 할까요?”
“물론…… 취소해 주세요.”
“회장님께서 직접 이사님께 지시한 일정인데 정말 취소할까요?”
“무슨 일정인데요?”
지해가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배시시 웃자, 표 비서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저번 주 회의 시간에 꾸벅꾸벅 졸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일류식품에서 주최하는 신제품 출시 행사인데요. 아주 중요한 자리예요. 저희 회사 지금 일류식품이랑 재계약 앞두고 있잖아요.”
일류식품이라…….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몇 번 툭툭 치던 지해가 입을 열었다.
“재계약은 당연한 수순이잖아요. 일류식품이랑 벌써 10년째인데. 그리고 일류식품 쪽에 박 사장님 대학교 동문인가 있다면서요. 완전 죽마고우라던데.”
“학연보단 혈연이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일류식품 조만간 진성그룹이랑 사돈 맺는대요. 그래서 오늘 행사에 진성기획 서준우 상무도 참석한다는 소리가 있어요.”
“네? 방금 누구라고 했어요?”
지해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곤 놀란 얼굴로 물었다.
“서준우요? 서준우라고 했어요?”
“네. 근데 이사님, 오늘 정말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역시 행사 참석은 무리겠죠? 그럼 쉬세요.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오늘따라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는 지해를 피해 표 비서가 도망가려던 그때.
“잠깐만요!”
지해가 우렁찬 목소리로 표 비서를 붙잡았다.
표 비서가 놀라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자 그녀가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일류식품 행사가 몇 시죠?”
“가시려고요?”
“네. 가야죠. 방금 가야 할 이유가 생겼어요.”
지해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순간, 바람피우다 걸린 주제에 그 뻔뻔한 낯짝을 들이밀며 다음 주 주말에 있을 동창회까지만이라도 헤어짐을 유예해 달라고 말하던 윤승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헤어지고도 그 새끼가 나에게 계속 전화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동. 창. 회. 파. 트. 너.
“이 개자식! 절대 용서 못 해.”
온순하던 지해의 얼굴이 전투적으로 변했다.
* * *
‘일류식품 신제품 출시 기념행사’라는 문구가 대문짝만 하게 적힌 입간판 앞에 누군가 초조한 기색으로 서 있었다. 표 비서였다. 그는 행사장 앞을 서성이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왜 안 오시는 거야?”
결국 로비까지 나온 표 비서가 연신 밖을 살폈다.
설마 안 오는 건 아니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행사장에서 따로 만나자는 그녀의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다.
급하게 어딜 들렀다가 온다며 행사 시간에 맞춰서 꼭 도착할 거라던 상사의 말을 믿은 제 잘못이 컸다.
그녀는 처음부터 이 행사에 참석할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닐까?
뒤늦게 그녀에게 속았다는 생각에 표 비서가 원통해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오 마이 갓. 미…….”
미친 거 아니야?
표 비서가 입을 틀어막았다. 하마터면 속마음을 내뱉을 뻔했다.
“표 비서님. 많이 기다렸죠? 옷 좀 갈아입고 오느라고 늦었어요. 어서 들어가요.”
“저, 저기 근데 이사님 의상이…….”
청룡영화제인 줄.
표 비서가 지해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으려다가 먼 산을 쳐다봤다.
그녀는 가슴 라인과 어깨 라인이 강조된 화이트 미니드레스 차림이었다. 시선을 둘 곳이 없었다.
“제 의상이 왜요? 이상해요? 아…….”
지해가 뒤늦게 표 비서의 빨개진 귀를 보더니, 얼른 들고 있던 블랙 재킷을 어깨에 걸쳤다.
“이제 됐죠?”
“되긴 뭐가 돼요. 의상이 너무 과하세요. 들어가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오늘 참석하신 분들 연령층도 엄청 높고, 이러고 들어가면 완전 확 튀는데.”
“그럼 좋은 거 아닌가? 회장님이 꼭 참석하라고 했다면서요. 눈도장 제대로 찍겠네.”
지해가 방실방실 웃으며 행사장으로 향했다. 그런 지해의 뒤를 따르며 표 비서가 죽을상을 했다.
“표 비서님.”
갑자기 행사장 입구에서 지해가 걸음을 멈췄다. 그 바람에 열심히 뒤를 따라가던 표 비서가 화들짝 놀라 제자리에 멈춰 섰다.
“또 왜요? 왜?”
지해가 표 비서를 빤히 쳐다봤다.
“갑자기 무섭게 왜 그렇게 보세요?”
“나 오늘 어때요?”
“뭐, 뭐가 어떠냐는…….”
“예쁘냐구요.”
“네?”
거울을 꺼내 제 얼굴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지해를 표 비서가 이상하게 쳐다봤다.
옷을 저렇게 입더니 머리가 어떻게 됐나? 원래도 이상했지만 오늘은 더 이상하네.
“맞다. 제가 알아보라고 한 건 알아봤어요?”
“아, 그분.”
“네. 그분이요.”
립스틱까지 꺼내 화장을 수정하고 있는 지해를 향해 표 비서가 말했다.
“서준우 상무는 벌써 왔죠. 2번 테이블에 파란 넥타이 하신 분이에요.”
“파란 넥타이…….”
타이트한 원피스가 영 불편했는지, 그녀는 옷매무새를 매만지며 눈으론 행사장 안 파란 넥타이를 찾느라 바빴다.
“찾았다.”
멀리 파란 넥타이를 한 남자를 발견한 지해의 얼굴이 별안간 환해졌다.
“그럼 여기서 이만 표 비서님은 퇴근하세요. 제 차도 좀 가져가시고요.”
“이사님은요?”
“저는 오늘 타고 갈 차가 생길 것 같아서요.”
“혹시 그 차가 우리 경쟁 회사 서준우 상무 차는 아니겠죠?”
“그럼 전 이만!”
속내를 들켜 버린 지해가 멋쩍게 웃더니 얼른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왜 저러시는 거지?”
무슨 일인지 오늘따라 회사 일에 전투력이 넘치는 상사 때문에 표 비서는 어리둥절했다.
* * *
한편 홀 입구에 들어선 지해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어? 파란 넥타이 어디 갔지? 분명 저기 있었는데.”
두리번거리며 바쁘게 움직이던 지해의 레이더망에 한 남자가 걸려들었다.
흰 셔츠에 파란 넥타이.
남자는 키가 크고 얼굴이 작아 비율이 좋았다. 거리가 너무 멀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뒤통수만 봐도 잘생겼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