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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지만 남자의 끝내주는 슈트 핏에도 잘생긴 뒤통수에도 지해는 덤덤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 영화감독이었던 막내 오빠 예준 덕분에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남자 연예인들의 실물은 거의 다 영접해 봤던 지해였다.
그 덕에 이젠 강동원이 아니라 강동원 할아버지가 와도 눈 하나 깜빡 안 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남자가 행사장을 나가고 있었다.
본식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그냥 가 버리다니.
남자의 돌발 행동에 놀란 지해는 서둘러 남자의 뒤를 쫓아 달렸다.
“걸음이 왜 저렇게 빨라? 다리가 길어서 그런가?”
남자는 건물을 나오자마자 횡단보도를 건너 지하철 입구로 내려가고 있었다.
‘웬 지하철? 뭐지?’
지해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남자를 따라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하이힐을 신은 다리를 주무르며 눈으로는 계속 남자의 뒤통수를 주시했다.
“옴마얏!”
그런데 하필 내리는 타이밍을 놓쳐 그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으으…….”
대자로 뻗은 지해가 고통스러워하며 신음을 흘렸다.
앗,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서준우. 서준우를 놓치면 안 돼!
지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무작정 남자가 걸었던 쪽으로 달려가려던 그때.
누군가 뒤에서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가방 버리고 갑니까?”
“아, 맞다. 내 가방.”
지해는 뒤늦게 팔에 가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손목을 잡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려는 순간, 너무 놀라 뒷걸음을 쳤다.
서준우?
파란 넥타이를 한 남자가 지해의 어깨에 가방을 걸어 주고 있었다.
남자의 뽀얀 피부는 여자인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 정도로 투명하고 아름다웠다.
쭉 뻗은 콧날, 부드러운 턱선, 빠져들 것 같은 깊은 눈매, 갈색빛의 댄디한 헤어스타일……. 그 무엇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
‘이 남자 뭐야? 완전 내 이상형……. 아, 안 돼! 차지해, 정신 차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지해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 홀려,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런데 그때,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따라와요?”
“네?”
“왜 따라오느냐고 물었습니다.”
남자의 꽤 차가운 눈빛에 놀라 지해는 말까지 더듬었다.
“따라가긴 누, 누가요? 제가요? 아닌데……. 아니에요. 정말. 진짜로.”
지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니라며 시치미를 뗐다.
그런 그녀를 무표정하게 쳐다보던 남자가 갑자기 넥타이를 풀더니 허리를 숙였다.
그는 그녀의 왼쪽 무릎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멋, 뭐 하세요? 지금 제 다리 보시는 거예요?”
“피 나요.”
“네?”
지해가 고개를 숙여 무릎을 확인했다. 아까 넘어지면서 다친 모양인지 무릎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읏, 따가…….”
남자가 지해의 왼쪽 다리를 덥석 잡더니 넥타이로 흐르는 피를 닦아 주었다.
“지금 뭐 하시는…….”
지해는 말끝을 흐렸다. 남자의 세심한 손길에 그저 넋을 잃은 채 그를 내려다봤다.
가지런한 눈썹, 진중한 눈빛, 베일 듯한 콧날, 은은한 머스크 향.
뭐지? 이 남자는 위에서 봐도 잘생겼어.
남자가 지해의 무릎에 넥타이를 묶어 주곤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그와 두 눈이 딱 마주쳤다.
지해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얼굴이 새빨개진 지해를 의아한 듯 쳐다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집에 가서 상처 소독하고 약 바르세요. 나 따라오지 말고.”
남자가 경고하는 어투로 말하곤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잠깐만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지해가 절뚝이며 남자를 뒤쫓아 갔다. 하필 구두 굽이 부러진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로 남자를 뒤쫓아 가던 지해의 얼굴이 점점 울상이 되었다.
“안 되는데, 이렇게 놓치면 안 되는데. 서준우 씨이이…… 으아아악!”
간신히 붙어 있던 구두 굽이 결국 튕겨 나가며 구두의 주인은 중심을 잃고 말았다.
지해의 비명에 남자가 귀찮은 듯 뒤를 돌았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양팔을 마구 휘젓던 그녀는 남자의 품 안으로 쏘옥 안겼다.
얼떨결에 남자의 품에 정착한 지해는 정신이 아찔했다.
슬며시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어뜩해, 이 남자는 밑에서 봐도 잘생겼어.’
인정하긴 싫지만 연예인 뺨치게 잘생긴 막내 오빠 때문에 어렸을 적부터 눈만 높아서 웬만한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그런데 이 남자 장난 아니다.
만난 지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잘생겼다는 말이 도대체 몇 번이나 나온 건지.
남자의 품에 안긴 채 대놓고 그의 얼굴을 감상하던 지해는 뒤늦게 자신을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하하하.”
민망한 나머지 그녀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얼른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남자가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따라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배시시 웃음으로 상황을 모면하려던 지해의 눈빛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정공법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지해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따라가서 죄송합니다.”
사과하는 지해를 빤히 보던 남자가 그녀를 그대로 지나쳐 갔다.
어라? 이게 아닌데…….
지해가 황급히 달려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냥 가시면 어떡해요. 제가 그쪽을 왜 따라왔는지 안 물어봐요?”
“물어봐야 해요?”
“궁금하지 않으세요? 제가 누군지. 저는…….”
“알아요.”
“네?”
“그쪽이 누군지 안다고.”
핸드백에서 명함을 꺼내려던 지해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저를 안다고요? 근데 왜 도망가요?”
지해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나저나 날 어떻게 알지? 아니지. 날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거지.
혼기가 꽉 찬 재벌가 자제라면 아마 지해의 프로필을 안 받아 본 남자는 없을 것이다.
‘진성그룹 차남’ 하면 서준우의 이름이 자동 반사 되어 튀어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지해가 그에게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어쨌든 절 아신다고 하니 다행이네요. 얘기가 좀 길어질 것 같거든요.”
준경은 지해에게서 받은 명함을 응시하다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알록달록 플라워 프린팅이 된 정신없는 명함.
곧 화려한 명함과 닮은 여자의 발랄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직접 디자인한 거예요. 예쁘죠?”
“명함이 예뻐서 뭐 합니까. 직급이랑 이름, 전화번호만 잘 보이면 되지.”
“네? 농담이었는데 그렇게 진지하게 대답을 하시니 엄청 뻘쭘하네요.”
지해는 당황해 하며 이마를 긁적였다.
“명함 자랑 다 끝났으면 비켜요. 바쁘니까.”
“잠깐, 잠깐만요! 저 그러니까…… 선진기획 이사로서 그쪽한테 할 얘기가 있어요!”
지해의 당돌한 말투에 그냥 가려던 준경이 고개를 돌렸다.
“선진기획 이사로서 할 얘기요? 그게 뭔데요?”
“궁금하시면 따라오세요.”
이번엔 지해가 먼저 그를 지나쳐 갔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당당했지만, 얼굴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 남자 안 따라오면 어떡하지? 오늘 안에 무조건 나한테 넘어오게 만들어야 하는데.’
지해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최대한 천천히. 아주 느린 걸음으로 걷던 지해는 마침내 뒤쫓아 오는 남자의 구둣발 소리를 듣고는 속으로 환호했다.
오예, 걸려들었어!
이제야 미소를 되찾은 지해는 부러진 구두 굽 때문에 삐걱거리면서도, 우아하게 걸으려고 갖은 애를 썼다.
그런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준경은 생각이 많아졌다.
‘되게 순진하게 생겼지? 한번 꼬셔 보라니까. 너 정도면 쉽게 넘어뜨릴 수 있을걸.’
하필 이 순간 유진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 유진의 말대로 그녀는 쉬워 보였다. 웃는 얼굴이 마치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같이 해맑았다. 대놓고 발을 걸어도 넘어지는 척이라도 해 줄 것 같은 순진한 얼굴.
젠장.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말 바닥까지 갔구나, 서준경.
그나저나 저 여자는 왜 하필 지금 이 타이밍에 내 앞에 나타난 거지? 나한테 할 얘기란 건 또 뭐고.
그냥 돌아갈까? 고민하던 준경이 걸음을 멈추자, 아까부터 계속 뒤를 살피며 종종걸음으로 걷던 지해가 놀란 얼굴로 휙 뒤를 돌았다. 준경이 따라오지 않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왜. 뭐. 준경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자 멀찍이 선 그녀가 황급히 손짓과 입 모양으로 말한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거의 다 왔다고, 저기 저 카페라고, 제발 따라와 주라고.
손까지 빌며 간절하게 부탁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준경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 * *
근처에 있는 카페 중 가장 한적해 보이는 곳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뭐 드시겠어요? 제가 오자고 한 거니까 제가 살게요.”
지갑을 들고 일어나려는 지해의 어깨를 누르며 준경이 일어났다.
“됐어요. 뭐 마실 거예요?”
“레모네이드요. 그럼 2차는 제가 쏠게요!”
“나 그쪽이랑 2차도 가야 해요?”
준경이 진지한 얼굴로 묻더니 그녀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주문대로 향했다.
“이상해…….”
지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곤 주문하는 준경의 옆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말투가 묘하게 기분이 나쁘면서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뭐지? 매력 있네. 있어.”
준경이 서준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지해는 그를 넘어뜨리려고 왔다가 본인이 넘어졌다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채 다음 단계에 돌입했다.
“아우, 더워. 올여름 정말 덥지 않아요?”
준경이 레모네이드 두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마자, 지해가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어 놓았다.
원피스의 브이넥이 제법 깊게 파여 가슴골이 보일 듯 말 듯 아찔했다.
지해는 준경의 반응을 시시각각 살피며 상체를 움직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지해를 응시하던 준경이 갑자기 레모네이드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이 타는 걸 보니 제대로 걸려들었어!’
지해는 성공을 예감하며 그를 향해 빙긋 웃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준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저래? 갑자기 어디 가? 예상치 못한 준경의 격한 반응에 지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곤 어디론가 향하는 그를 당황스럽게 쳐다봤다.
준경이 향한 곳은 에어컨 앞이었다. 그는 에어컨 날개를 조절하고 있었다.
“콜록콜록.”
갑자기 한파가 몰아닥친 것처럼 찬바람이 얼굴을 향해 직방으로 날아왔다.
지해가 미친 듯이 기침을 하자, 준경은 다시 날개를 조절해 지해의 머리 위로 바람이 가게 했다.
이번엔 바람 때문에 앞머리가 날려 더듬이처럼 세워졌다. 그 바람에 헤어스타일이 엉망이 된 지해는 애써 태연한 척 비스듬히 다리를 꼬고 앉아 바람을 피했다.
그사이 준경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우이씨, 추워. 이게 뭐야!
지해는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재킷을 입으며 준경을 원망스레 쳐다봤다.
이 남자 뭐지? 설마 내 작전을 눈치채고 일부러 이러는 건가?
“대체 할 얘기가 뭡니까?”
“네? 할 얘기요?”
뭐였더라. 무슨 얘기를 하지?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때문에 머릿속이 꽁꽁 얼었다. 준비해 온 계획들은 하나같이 다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미끼를 던졌다.
“윤승원 아시죠?”
“!!”
“한국병원 이사장 아들 윤승원…….”
순식간이었다.
윤승원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준경의 얼굴이 살벌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남자의 끝내주는 슈트 핏에도 잘생긴 뒤통수에도 지해는 덤덤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 영화감독이었던 막내 오빠 예준 덕분에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남자 연예인들의 실물은 거의 다 영접해 봤던 지해였다.
그 덕에 이젠 강동원이 아니라 강동원 할아버지가 와도 눈 하나 깜빡 안 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남자가 행사장을 나가고 있었다.
본식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그냥 가 버리다니.
남자의 돌발 행동에 놀란 지해는 서둘러 남자의 뒤를 쫓아 달렸다.
“걸음이 왜 저렇게 빨라? 다리가 길어서 그런가?”
남자는 건물을 나오자마자 횡단보도를 건너 지하철 입구로 내려가고 있었다.
‘웬 지하철? 뭐지?’
지해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남자를 따라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하이힐을 신은 다리를 주무르며 눈으로는 계속 남자의 뒤통수를 주시했다.
“옴마얏!”
그런데 하필 내리는 타이밍을 놓쳐 그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으으…….”
대자로 뻗은 지해가 고통스러워하며 신음을 흘렸다.
앗,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서준우. 서준우를 놓치면 안 돼!
지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무작정 남자가 걸었던 쪽으로 달려가려던 그때.
누군가 뒤에서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가방 버리고 갑니까?”
“아, 맞다. 내 가방.”
지해는 뒤늦게 팔에 가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손목을 잡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려는 순간, 너무 놀라 뒷걸음을 쳤다.
서준우?
파란 넥타이를 한 남자가 지해의 어깨에 가방을 걸어 주고 있었다.
남자의 뽀얀 피부는 여자인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 정도로 투명하고 아름다웠다.
쭉 뻗은 콧날, 부드러운 턱선, 빠져들 것 같은 깊은 눈매, 갈색빛의 댄디한 헤어스타일……. 그 무엇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
‘이 남자 뭐야? 완전 내 이상형……. 아, 안 돼! 차지해, 정신 차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지해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 홀려,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런데 그때,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따라와요?”
“네?”
“왜 따라오느냐고 물었습니다.”
남자의 꽤 차가운 눈빛에 놀라 지해는 말까지 더듬었다.
“따라가긴 누, 누가요? 제가요? 아닌데……. 아니에요. 정말. 진짜로.”
지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니라며 시치미를 뗐다.
그런 그녀를 무표정하게 쳐다보던 남자가 갑자기 넥타이를 풀더니 허리를 숙였다.
그는 그녀의 왼쪽 무릎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멋, 뭐 하세요? 지금 제 다리 보시는 거예요?”
“피 나요.”
“네?”
지해가 고개를 숙여 무릎을 확인했다. 아까 넘어지면서 다친 모양인지 무릎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읏, 따가…….”
남자가 지해의 왼쪽 다리를 덥석 잡더니 넥타이로 흐르는 피를 닦아 주었다.
“지금 뭐 하시는…….”
지해는 말끝을 흐렸다. 남자의 세심한 손길에 그저 넋을 잃은 채 그를 내려다봤다.
가지런한 눈썹, 진중한 눈빛, 베일 듯한 콧날, 은은한 머스크 향.
뭐지? 이 남자는 위에서 봐도 잘생겼어.
남자가 지해의 무릎에 넥타이를 묶어 주곤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그와 두 눈이 딱 마주쳤다.
지해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얼굴이 새빨개진 지해를 의아한 듯 쳐다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집에 가서 상처 소독하고 약 바르세요. 나 따라오지 말고.”
남자가 경고하는 어투로 말하곤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잠깐만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지해가 절뚝이며 남자를 뒤쫓아 갔다. 하필 구두 굽이 부러진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로 남자를 뒤쫓아 가던 지해의 얼굴이 점점 울상이 되었다.
“안 되는데, 이렇게 놓치면 안 되는데. 서준우 씨이이…… 으아아악!”
간신히 붙어 있던 구두 굽이 결국 튕겨 나가며 구두의 주인은 중심을 잃고 말았다.
지해의 비명에 남자가 귀찮은 듯 뒤를 돌았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양팔을 마구 휘젓던 그녀는 남자의 품 안으로 쏘옥 안겼다.
얼떨결에 남자의 품에 정착한 지해는 정신이 아찔했다.
슬며시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어뜩해, 이 남자는 밑에서 봐도 잘생겼어.’
인정하긴 싫지만 연예인 뺨치게 잘생긴 막내 오빠 때문에 어렸을 적부터 눈만 높아서 웬만한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그런데 이 남자 장난 아니다.
만난 지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잘생겼다는 말이 도대체 몇 번이나 나온 건지.
남자의 품에 안긴 채 대놓고 그의 얼굴을 감상하던 지해는 뒤늦게 자신을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하하하.”
민망한 나머지 그녀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얼른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남자가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따라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배시시 웃음으로 상황을 모면하려던 지해의 눈빛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정공법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지해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따라가서 죄송합니다.”
사과하는 지해를 빤히 보던 남자가 그녀를 그대로 지나쳐 갔다.
어라? 이게 아닌데…….
지해가 황급히 달려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냥 가시면 어떡해요. 제가 그쪽을 왜 따라왔는지 안 물어봐요?”
“물어봐야 해요?”
“궁금하지 않으세요? 제가 누군지. 저는…….”
“알아요.”
“네?”
“그쪽이 누군지 안다고.”
핸드백에서 명함을 꺼내려던 지해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저를 안다고요? 근데 왜 도망가요?”
지해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나저나 날 어떻게 알지? 아니지. 날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거지.
혼기가 꽉 찬 재벌가 자제라면 아마 지해의 프로필을 안 받아 본 남자는 없을 것이다.
‘진성그룹 차남’ 하면 서준우의 이름이 자동 반사 되어 튀어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지해가 그에게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어쨌든 절 아신다고 하니 다행이네요. 얘기가 좀 길어질 것 같거든요.”
준경은 지해에게서 받은 명함을 응시하다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알록달록 플라워 프린팅이 된 정신없는 명함.
곧 화려한 명함과 닮은 여자의 발랄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직접 디자인한 거예요. 예쁘죠?”
“명함이 예뻐서 뭐 합니까. 직급이랑 이름, 전화번호만 잘 보이면 되지.”
“네? 농담이었는데 그렇게 진지하게 대답을 하시니 엄청 뻘쭘하네요.”
지해는 당황해 하며 이마를 긁적였다.
“명함 자랑 다 끝났으면 비켜요. 바쁘니까.”
“잠깐, 잠깐만요! 저 그러니까…… 선진기획 이사로서 그쪽한테 할 얘기가 있어요!”
지해의 당돌한 말투에 그냥 가려던 준경이 고개를 돌렸다.
“선진기획 이사로서 할 얘기요? 그게 뭔데요?”
“궁금하시면 따라오세요.”
이번엔 지해가 먼저 그를 지나쳐 갔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당당했지만, 얼굴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 남자 안 따라오면 어떡하지? 오늘 안에 무조건 나한테 넘어오게 만들어야 하는데.’
지해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최대한 천천히. 아주 느린 걸음으로 걷던 지해는 마침내 뒤쫓아 오는 남자의 구둣발 소리를 듣고는 속으로 환호했다.
오예, 걸려들었어!
이제야 미소를 되찾은 지해는 부러진 구두 굽 때문에 삐걱거리면서도, 우아하게 걸으려고 갖은 애를 썼다.
그런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준경은 생각이 많아졌다.
‘되게 순진하게 생겼지? 한번 꼬셔 보라니까. 너 정도면 쉽게 넘어뜨릴 수 있을걸.’
하필 이 순간 유진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 유진의 말대로 그녀는 쉬워 보였다. 웃는 얼굴이 마치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같이 해맑았다. 대놓고 발을 걸어도 넘어지는 척이라도 해 줄 것 같은 순진한 얼굴.
젠장.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말 바닥까지 갔구나, 서준경.
그나저나 저 여자는 왜 하필 지금 이 타이밍에 내 앞에 나타난 거지? 나한테 할 얘기란 건 또 뭐고.
그냥 돌아갈까? 고민하던 준경이 걸음을 멈추자, 아까부터 계속 뒤를 살피며 종종걸음으로 걷던 지해가 놀란 얼굴로 휙 뒤를 돌았다. 준경이 따라오지 않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왜. 뭐. 준경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자 멀찍이 선 그녀가 황급히 손짓과 입 모양으로 말한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거의 다 왔다고, 저기 저 카페라고, 제발 따라와 주라고.
손까지 빌며 간절하게 부탁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준경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 * *
근처에 있는 카페 중 가장 한적해 보이는 곳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뭐 드시겠어요? 제가 오자고 한 거니까 제가 살게요.”
지갑을 들고 일어나려는 지해의 어깨를 누르며 준경이 일어났다.
“됐어요. 뭐 마실 거예요?”
“레모네이드요. 그럼 2차는 제가 쏠게요!”
“나 그쪽이랑 2차도 가야 해요?”
준경이 진지한 얼굴로 묻더니 그녀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주문대로 향했다.
“이상해…….”
지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곤 주문하는 준경의 옆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말투가 묘하게 기분이 나쁘면서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뭐지? 매력 있네. 있어.”
준경이 서준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지해는 그를 넘어뜨리려고 왔다가 본인이 넘어졌다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채 다음 단계에 돌입했다.
“아우, 더워. 올여름 정말 덥지 않아요?”
준경이 레모네이드 두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마자, 지해가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어 놓았다.
원피스의 브이넥이 제법 깊게 파여 가슴골이 보일 듯 말 듯 아찔했다.
지해는 준경의 반응을 시시각각 살피며 상체를 움직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지해를 응시하던 준경이 갑자기 레모네이드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이 타는 걸 보니 제대로 걸려들었어!’
지해는 성공을 예감하며 그를 향해 빙긋 웃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준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저래? 갑자기 어디 가? 예상치 못한 준경의 격한 반응에 지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곤 어디론가 향하는 그를 당황스럽게 쳐다봤다.
준경이 향한 곳은 에어컨 앞이었다. 그는 에어컨 날개를 조절하고 있었다.
“콜록콜록.”
갑자기 한파가 몰아닥친 것처럼 찬바람이 얼굴을 향해 직방으로 날아왔다.
지해가 미친 듯이 기침을 하자, 준경은 다시 날개를 조절해 지해의 머리 위로 바람이 가게 했다.
이번엔 바람 때문에 앞머리가 날려 더듬이처럼 세워졌다. 그 바람에 헤어스타일이 엉망이 된 지해는 애써 태연한 척 비스듬히 다리를 꼬고 앉아 바람을 피했다.
그사이 준경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우이씨, 추워. 이게 뭐야!
지해는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재킷을 입으며 준경을 원망스레 쳐다봤다.
이 남자 뭐지? 설마 내 작전을 눈치채고 일부러 이러는 건가?
“대체 할 얘기가 뭡니까?”
“네? 할 얘기요?”
뭐였더라. 무슨 얘기를 하지?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때문에 머릿속이 꽁꽁 얼었다. 준비해 온 계획들은 하나같이 다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미끼를 던졌다.
“윤승원 아시죠?”
“!!”
“한국병원 이사장 아들 윤승원…….”
순식간이었다.
윤승원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준경의 얼굴이 살벌하게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