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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쪼옥.
그녀는 방금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몰랐다.
처음 와 본 호텔방에서 떡실신녀가 되기 직전인 것도, 옆에 앉은 남자의 볼에 쪼옥∼ 찰진 입맞춤을 한 것도. 그걸 본 누군가 경악한 표정을 지은 것도, 다음 순간 그 누군가에게 번쩍 안아 올려진 것도, 그대로 성큼성큼 호텔방을 빠져나간 것도.
‘아이 좋아. 기분 조오타. 흐음∼’
그저 구름을 타고 두둥실 어딘가로 떠가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자신이 ‘마군(魔軍)’이라 부르는 한 남자의 품에 안겨서라는 건 꿈에서도 알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아이 좋아라. 내 오천, 회장님 꼭 주셔야 돼요. 오천. 약속하신 오천이요. 제가 어느 아드님이 더 나을지 골라 드릴 터이니 걱정 마시고요. 원래 이런 일은 복채에 비례해서 효험이 나타나는 거거든요. 이 바닥 법칙 아시잖아요. 네?”
그 순간 연지는 바로 그 악마의 품에서 픽 고꾸라져 버렸다.
그리고 블랙아웃.
*
털썩.
그는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여자를 커다란 침대 위에 던져 놓았다.
그러자 여자는 푹신한 매트리스 위로 철퍼덕 고꾸라지더니, 뭐가 답답했는지 제 손으로 블라우스 앞섶을 헤집어 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침대 옆에 우뚝 선 그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한껏 긴 머리채를 흩뜨린 채 만세를 부르고 누운 앳된 모습이 도무지 사기꾼으로는 보이지 않아서였다.
물론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정말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아가씨네. 지금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솜털이 뽀송한 볼을 보니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왔다.
‘청학동 아가씨, 진짜로 시집은 다 가게 생겼네. 나같이 흉측한 놈하고 하룻밤을 보내게 됐으니……. 이렇게 돼서 나도 유감이야. 정말.’
그러나 유감이라는 그의 말과 달리 반쯤 벗겨진 여자의 블라우스를 마저 홱 벗겨 주는 그의 손길엔 한 치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제 윗옷을 훌러덩 벗어 던질 땐 보일락 말락 회심의 미소가 지어지는 것도 같았다.
다음 순간 그는 그녀와 똑같이 반 나신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널 부적으로 산 건지, 전자 발찌로 산 건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넌 내가 접수하마. 수오가 널 찾는다는 걸 안 이상 나도 그냥은 뺏기기 싫거든. 아, 그리고 위로가 될까 해서 말인데, 네 복채는 내가 두 배로 받아 주마. 그게 얼마나 위로가 될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러곤 상체에 브래지어만 걸친 그녀 곁에 똑같이 맨몸으로 벌러덩 누워 버린 것이었다. 살짝만 몸을 틀면 포개질 만큼 가까운 자세로.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출렁이는 진동에도 이 대책 없는 여자는 끄떡 않고 잠만 잘 자고 있었다.
아니, 깨기는커녕 오히려 움푹 경사진 굴곡을 따라 도르르 몸을 돌려 누워 버리더니, 처억 그의 빨래판 복근 위에 새하얗게 벗은 팔 하나를 올려놓는 것 아닌가.
그러곤 거기가 따뜻한지 슬그머니 다가들기까지…….
그게 또 우스워 미치겠는 그는 저도 모르게 킬킬 웃었다.
‘아가씨, 사람을 미치게 하는 재주가 있네? 근데 그거 알아? 그래서 더 맘에 드는 거.’
그는 혼자 씨익 웃으며 쿨쿨 자는 연지 쪽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러자 살짝 벌린 입으로 내쉬는 나른하고 달콤한 한숨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냥 이대로는 못 잘 것 같은데? 도무지 그건, 말이 안 될 것 같은데?’
그는 저도 모르게 살그머니 자고 있는 그녀의 얼굴 가까이 제 얼굴을 가져가 보았다.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자그마한 코와 분홍빛 입술도.
조금만 더 가까이 가져가면 부드럽게 포개질 것도 같은데…….
그는 아쉽다는 듯 꿀꺽 입맛을 다셨다.
막상 무방비 상태의 여자를 가까이 두고 보니 있는지도 몰랐던 양심이 찔린 것이다.
천진하게 벌어진 입술이나,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뽀얀 가슴이나, 흐트러진 긴 머리채나 다 그의 심장을 톡톡 가볍게 두들기는 것만 같아서.
아무것도 모르고 쿨쿨 잠만 자고 있는 여자가 그를 숨죽이게 만들고 있었다.
‘풋.’
그러다 제가 하고 있는 짓이 우스워 스스로를 멈춰 세운 그는 한쪽 팔로 팔베개를 하고는 그녀를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가만히 발그레하고 뽀송한 볼을 지켜보기만 하던 그는 원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스르르 언제 들었는지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다.
세상에 다시없을 꿀맛 같은 잠 속으로.
1. 인연의 시작. 무영도사 이야기
20년 전, 서울.
스산한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다.
“오늘 손님은 다 왔는가?”
촛불로 밝힌 내실에서 고개만 내민 무영이 물었다.
“예. 선생님. 좀 전에 나가신 분이 마지막 예약이었습니다.”
김 군은 낡은 철학원 간판 불을 내리다 말고 공손히 대답했다. 비록 변두리 건물에 자리한 오래된 철학원이지만 정갈하게 꾸며진 실내는 소박하면서도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래. 그럼 김 군 먼저 퇴근해.”
“선생님은 같이 안 나가십니까?”
“난 오늘 본 명식 좀 정리해 놓고 가지.”
“알겠습니다. 그럼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래.”
무영이 책상에 앉자 곧 딸랑 방울 소리가 울렸다. 김 군이 나가면서 닫히는 문소리였다.
다시 조용해진 가운데 혼자 앉은 무영은 오늘 왔던 손님들의 간명지(사주 풀이)를 앞에 놓고 찬찬히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혹시나 자신이 실수한 부분은 없는지, 놓친 부분은 없는지 검토하는 중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계세요?”
짤랑 방울 소리와 함께 새어 들어온 건 여인의 가냘픈 목소리였다. 문득 고개를 든 무영은 드르륵 내실 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비에 흠뻑 젖은 여인이 보따리를 옆에 끼고 현관 문가에 서 있었다.
삼십을 넘길까 말까 한 젊은 여인이었음에도 물기 어린 눈빛엔 처량맞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무영의 물음에도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얼마간 시간이 흘러도 아무 말이 없었다.
무영은 다시 말을 붙이기로 했다.
“사주를 보러 오셨습니까?”
“그것이…….”
몸에서 뚝뚝 빗물이 떨어지고 있는 여자는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서서 대답을 흐렸다.
“사주를 보러 오신 것이 아니요?”
“그게…….”
여자는 안절부절 말을 하지 못했다.
여자의 행색을 보는 무영에게 문득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일단 들어오시지요. 비를 많이 맞으신 것 같은데…….”
“고맙습니다. 그럼, 잠깐만 실례를…….”
“여기 난로 가까이 앉으시지요. 꺼뜨리는 불이긴 하나 아직 온기가 남아 있을 겝니다.”
입술이 파리한 여자는 무영이 시키는 대로 대기실 안쪽에 놓인 난로 가까이 쭈뼛쭈뼛 다가왔다. 발목까지 오는 여자의 월남치마에서는 계속해서 빗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여기 이 수건으로 닦으시지요. 그리고 차 한잔 드시면 몸이 좀 녹으실 겝니다.”
여자에게 수건을 건넨 무영은 난로 위에 놓인 주전자에서 결명자차까지 한 잔 따라 주었다.
“이거 죄송해서 어떻게…….”
여자는 감사하다는 표정으로 두세 번 허리를 굽혀 보였다.
“괜찮습니다.”
무영은 어느 정도 물기를 털어 낸 여자가 의자에 앉아 찻잔을 손에 드는 걸 지켜보았다.
여자는 무영이 따라 준 차를 뜨겁지도 않은지 한 번에 마셔 버리고 있었다. 보아하니 식사도 제대로 못 한 것 같았다.
무영은 말없이 차 한 잔을 더 따라 주었다. 그러자 이번엔 여자도 찻잔을 손에 쥐고 천천히 불어 마셨다.
그사이 여자의 창백했던 얼굴엔 온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핏기가 도는 얼굴을 찬찬히 다시 보니 밉상은 아니었다. 추레한 옷차림만 아니라면 선이 고운 여자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다만 무거운 눈 밑 때문에 전체적으로 슬퍼 보였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시었소.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무영은 여자가 말하기 좋게 먼저 운을 떼 주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이리 비를 피하게 해 주시고 따뜻한 차도 주시니 뭐라 말씀을 드릴 바가 없네요.”
“괜찮습니다. 그저 어찌하여 그리 보따리를 가지고 다니시는지 한번 물어나 봅시다. 요즘은 보기 드문 풍경 아닙니까.”
“이 보따리요, 다 사연이 있지요…….”
여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바닥을 바라보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님, 저는 가진 돈이 없습니다. 이 앞을 지나가다 철학원 간판을 보고 순간적으로 뛰어 들어온 것이에요.”
“돈 걱정은 마시고 하고 싶은 말씀을 해 보세요.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를 말씀해 주시면 간단하게나마 추명(推命)해 드리겠습니다.”
무영은 고개를 푹 숙인 여자를 향해 엷은 미소를 지어 주었다.
일찍이 한학에 몸담은 지 20년, 그걸 밑천 삼아 사주를 보기 시작한 지도 얼추 10년이 넘어가는 무영은 주역과 명리에 정통한 데다 도와 문리에 밝다는 입소문을 타고 이 바닥에선 제법 이름을 날리는 도사가 되어 있었다. 특히나 관상만으로 어떤 사연을 지녔는지 훤히 내다보는 경지에 이른지라 오는 손님들마다 신통방통하다고 혀를 내두르기 일쑤였다.
요즘은 가뜩이나 손님이 몰려 예약제로만 받는 참이니 이건 특별한 예외인 셈인데, 어쩐지 여자에게 호기심이 느껴진 까닭이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늦가을 날 철학원으로 뛰어든 여인에게 어떤 기구한 사연이 있을지.
“고맙습니다, 도사님. 고맙습니다.”
“그럼 태어난 생년일시를 적어 주시지요.”
여자는 무영이 넌지시 내민 종이에 또박또박 글씨를 써 내려갔다.
“예. 여기…….”
“흠…….”
무영은 만세력을 펼쳐 여자가 적어 낸 사주를 풀어 보았다. 그렇게 나온 여자의 간명지를 말없이 들여다보고만 있던 무영이 불쑥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는 그럭저럭 밥을 먹는 집안의 무남독녀로 태어나셨겠습니다.”
“예. 맞아요. 그걸 어찌…….”
여자는 소스라치게 놀라 무영을 쳐다보았다.
“아주머니 사주에 그리 나와 있습니다.”
무영은 조용히 웃어 보였다.
“제 사주……에요?”
“예.”
“그런 것까지 사주에 나와 있다는 말씀이셔요?”
여자는 깜짝 놀라 다시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놀랍네요. 그럼 다른 것도 사주에 나와 있어요?”
“어디, 더 보지요.”
무영은 여자의 말을 듣고 자신이 그녀의 운명을 제대로 풀어 가고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이렇게 처음부터 똑떨어지듯 맞아 들어가면 그도 흥이 났다.
“흠, 약한 신주 옆에 강력한 부군궁이라…… 남편을 일찍 만나셨겠습니다만 또 금방 헤어지셨겠습니다.”
다시 운을 뗀 무영이 조심스럽게 여자를 살폈다.
“어머, 맞아요. 한동네 친구였던 남편하고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바로 결혼했거든요. 오누이처럼 지내다 정이 들어 버린 거지요.”
여자는 어릴 적 친구였다는 남편 얘기에 처음으로 발그레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딱히 대학 갈 형편도 안 되던 마당에 마침 남편이 자기랑 같이 시댁이 하는 방앗간 일이나 돕자고 하여…… 덜컥 그러자 해 버렸어요. 소꿉장난하는 기분으로요. 그러다 남편이―”
신나게 말을 하던 여자는 곧 울상을 짓더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보고만 있던 무영이 조용히 입을 열어 말한 건 그 때였다.
“사고가 났겠군요. 이를테면 교통사고 같은.”
“네. 맞아요. 근데 그걸 어찌……?”
훤히 안다는 듯한 무영의 말에 여자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맞아요. 교통사고. 밤에 술을 마시고 어두운 시골길을 걸어오다 지나는 차에 치였거든요.”
“역시…… 신금이 묘목을 범했네요.”
“그럼 그게 다 제 사주에 나와 있다는 말씀이세요?”
여자는 제가 묻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런 셈이지요. 그리고 곧 다른 분을 만나셨겠습니다만…….”
차분히 고개를 끄덕여 준 무영은 다음으로 넘어가다 말고 또 말을 흐렸다.
두 번째 남자와의 인연도 그다지 좋았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첩첩산중인 형세였다. 신약 사주에 정관과 편관이 혼재되고 있으니…….
그러자 이번엔 여자가 한숨지으며 말했다.
“잘 아시네요. 곧 재혼을 했거든요. 남편이 죽고 친정으로 돌아온 제게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 아주머니로부터 혼처가 들어왔지요. 저는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는 것이 싫어 승낙하였고요. 나이 차이가 많이 나 망설여지긴 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있는 집이라 하여…….”
“그랬군요. 한데 그 남편과도 오래는 가지 못했겠습니다.”
“네. 남편이 의처증이었거든요.”
프롤로그
쪼옥.
그녀는 방금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몰랐다.
처음 와 본 호텔방에서 떡실신녀가 되기 직전인 것도, 옆에 앉은 남자의 볼에 쪼옥∼ 찰진 입맞춤을 한 것도. 그걸 본 누군가 경악한 표정을 지은 것도, 다음 순간 그 누군가에게 번쩍 안아 올려진 것도, 그대로 성큼성큼 호텔방을 빠져나간 것도.
‘아이 좋아. 기분 조오타. 흐음∼’
그저 구름을 타고 두둥실 어딘가로 떠가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자신이 ‘마군(魔軍)’이라 부르는 한 남자의 품에 안겨서라는 건 꿈에서도 알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아이 좋아라. 내 오천, 회장님 꼭 주셔야 돼요. 오천. 약속하신 오천이요. 제가 어느 아드님이 더 나을지 골라 드릴 터이니 걱정 마시고요. 원래 이런 일은 복채에 비례해서 효험이 나타나는 거거든요. 이 바닥 법칙 아시잖아요. 네?”
그 순간 연지는 바로 그 악마의 품에서 픽 고꾸라져 버렸다.
그리고 블랙아웃.
*
털썩.
그는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여자를 커다란 침대 위에 던져 놓았다.
그러자 여자는 푹신한 매트리스 위로 철퍼덕 고꾸라지더니, 뭐가 답답했는지 제 손으로 블라우스 앞섶을 헤집어 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침대 옆에 우뚝 선 그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한껏 긴 머리채를 흩뜨린 채 만세를 부르고 누운 앳된 모습이 도무지 사기꾼으로는 보이지 않아서였다.
물론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정말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아가씨네. 지금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솜털이 뽀송한 볼을 보니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왔다.
‘청학동 아가씨, 진짜로 시집은 다 가게 생겼네. 나같이 흉측한 놈하고 하룻밤을 보내게 됐으니……. 이렇게 돼서 나도 유감이야. 정말.’
그러나 유감이라는 그의 말과 달리 반쯤 벗겨진 여자의 블라우스를 마저 홱 벗겨 주는 그의 손길엔 한 치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제 윗옷을 훌러덩 벗어 던질 땐 보일락 말락 회심의 미소가 지어지는 것도 같았다.
다음 순간 그는 그녀와 똑같이 반 나신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널 부적으로 산 건지, 전자 발찌로 산 건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넌 내가 접수하마. 수오가 널 찾는다는 걸 안 이상 나도 그냥은 뺏기기 싫거든. 아, 그리고 위로가 될까 해서 말인데, 네 복채는 내가 두 배로 받아 주마. 그게 얼마나 위로가 될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러곤 상체에 브래지어만 걸친 그녀 곁에 똑같이 맨몸으로 벌러덩 누워 버린 것이었다. 살짝만 몸을 틀면 포개질 만큼 가까운 자세로.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출렁이는 진동에도 이 대책 없는 여자는 끄떡 않고 잠만 잘 자고 있었다.
아니, 깨기는커녕 오히려 움푹 경사진 굴곡을 따라 도르르 몸을 돌려 누워 버리더니, 처억 그의 빨래판 복근 위에 새하얗게 벗은 팔 하나를 올려놓는 것 아닌가.
그러곤 거기가 따뜻한지 슬그머니 다가들기까지…….
그게 또 우스워 미치겠는 그는 저도 모르게 킬킬 웃었다.
‘아가씨, 사람을 미치게 하는 재주가 있네? 근데 그거 알아? 그래서 더 맘에 드는 거.’
그는 혼자 씨익 웃으며 쿨쿨 자는 연지 쪽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러자 살짝 벌린 입으로 내쉬는 나른하고 달콤한 한숨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냥 이대로는 못 잘 것 같은데? 도무지 그건, 말이 안 될 것 같은데?’
그는 저도 모르게 살그머니 자고 있는 그녀의 얼굴 가까이 제 얼굴을 가져가 보았다.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자그마한 코와 분홍빛 입술도.
조금만 더 가까이 가져가면 부드럽게 포개질 것도 같은데…….
그는 아쉽다는 듯 꿀꺽 입맛을 다셨다.
막상 무방비 상태의 여자를 가까이 두고 보니 있는지도 몰랐던 양심이 찔린 것이다.
천진하게 벌어진 입술이나,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뽀얀 가슴이나, 흐트러진 긴 머리채나 다 그의 심장을 톡톡 가볍게 두들기는 것만 같아서.
아무것도 모르고 쿨쿨 잠만 자고 있는 여자가 그를 숨죽이게 만들고 있었다.
‘풋.’
그러다 제가 하고 있는 짓이 우스워 스스로를 멈춰 세운 그는 한쪽 팔로 팔베개를 하고는 그녀를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가만히 발그레하고 뽀송한 볼을 지켜보기만 하던 그는 원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스르르 언제 들었는지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다.
세상에 다시없을 꿀맛 같은 잠 속으로.
1. 인연의 시작. 무영도사 이야기
20년 전, 서울.
스산한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다.
“오늘 손님은 다 왔는가?”
촛불로 밝힌 내실에서 고개만 내민 무영이 물었다.
“예. 선생님. 좀 전에 나가신 분이 마지막 예약이었습니다.”
김 군은 낡은 철학원 간판 불을 내리다 말고 공손히 대답했다. 비록 변두리 건물에 자리한 오래된 철학원이지만 정갈하게 꾸며진 실내는 소박하면서도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래. 그럼 김 군 먼저 퇴근해.”
“선생님은 같이 안 나가십니까?”
“난 오늘 본 명식 좀 정리해 놓고 가지.”
“알겠습니다. 그럼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래.”
무영이 책상에 앉자 곧 딸랑 방울 소리가 울렸다. 김 군이 나가면서 닫히는 문소리였다.
다시 조용해진 가운데 혼자 앉은 무영은 오늘 왔던 손님들의 간명지(사주 풀이)를 앞에 놓고 찬찬히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혹시나 자신이 실수한 부분은 없는지, 놓친 부분은 없는지 검토하는 중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계세요?”
짤랑 방울 소리와 함께 새어 들어온 건 여인의 가냘픈 목소리였다. 문득 고개를 든 무영은 드르륵 내실 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비에 흠뻑 젖은 여인이 보따리를 옆에 끼고 현관 문가에 서 있었다.
삼십을 넘길까 말까 한 젊은 여인이었음에도 물기 어린 눈빛엔 처량맞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무영의 물음에도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얼마간 시간이 흘러도 아무 말이 없었다.
무영은 다시 말을 붙이기로 했다.
“사주를 보러 오셨습니까?”
“그것이…….”
몸에서 뚝뚝 빗물이 떨어지고 있는 여자는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서서 대답을 흐렸다.
“사주를 보러 오신 것이 아니요?”
“그게…….”
여자는 안절부절 말을 하지 못했다.
여자의 행색을 보는 무영에게 문득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일단 들어오시지요. 비를 많이 맞으신 것 같은데…….”
“고맙습니다. 그럼, 잠깐만 실례를…….”
“여기 난로 가까이 앉으시지요. 꺼뜨리는 불이긴 하나 아직 온기가 남아 있을 겝니다.”
입술이 파리한 여자는 무영이 시키는 대로 대기실 안쪽에 놓인 난로 가까이 쭈뼛쭈뼛 다가왔다. 발목까지 오는 여자의 월남치마에서는 계속해서 빗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여기 이 수건으로 닦으시지요. 그리고 차 한잔 드시면 몸이 좀 녹으실 겝니다.”
여자에게 수건을 건넨 무영은 난로 위에 놓인 주전자에서 결명자차까지 한 잔 따라 주었다.
“이거 죄송해서 어떻게…….”
여자는 감사하다는 표정으로 두세 번 허리를 굽혀 보였다.
“괜찮습니다.”
무영은 어느 정도 물기를 털어 낸 여자가 의자에 앉아 찻잔을 손에 드는 걸 지켜보았다.
여자는 무영이 따라 준 차를 뜨겁지도 않은지 한 번에 마셔 버리고 있었다. 보아하니 식사도 제대로 못 한 것 같았다.
무영은 말없이 차 한 잔을 더 따라 주었다. 그러자 이번엔 여자도 찻잔을 손에 쥐고 천천히 불어 마셨다.
그사이 여자의 창백했던 얼굴엔 온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핏기가 도는 얼굴을 찬찬히 다시 보니 밉상은 아니었다. 추레한 옷차림만 아니라면 선이 고운 여자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다만 무거운 눈 밑 때문에 전체적으로 슬퍼 보였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시었소.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무영은 여자가 말하기 좋게 먼저 운을 떼 주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이리 비를 피하게 해 주시고 따뜻한 차도 주시니 뭐라 말씀을 드릴 바가 없네요.”
“괜찮습니다. 그저 어찌하여 그리 보따리를 가지고 다니시는지 한번 물어나 봅시다. 요즘은 보기 드문 풍경 아닙니까.”
“이 보따리요, 다 사연이 있지요…….”
여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바닥을 바라보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님, 저는 가진 돈이 없습니다. 이 앞을 지나가다 철학원 간판을 보고 순간적으로 뛰어 들어온 것이에요.”
“돈 걱정은 마시고 하고 싶은 말씀을 해 보세요.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를 말씀해 주시면 간단하게나마 추명(推命)해 드리겠습니다.”
무영은 고개를 푹 숙인 여자를 향해 엷은 미소를 지어 주었다.
일찍이 한학에 몸담은 지 20년, 그걸 밑천 삼아 사주를 보기 시작한 지도 얼추 10년이 넘어가는 무영은 주역과 명리에 정통한 데다 도와 문리에 밝다는 입소문을 타고 이 바닥에선 제법 이름을 날리는 도사가 되어 있었다. 특히나 관상만으로 어떤 사연을 지녔는지 훤히 내다보는 경지에 이른지라 오는 손님들마다 신통방통하다고 혀를 내두르기 일쑤였다.
요즘은 가뜩이나 손님이 몰려 예약제로만 받는 참이니 이건 특별한 예외인 셈인데, 어쩐지 여자에게 호기심이 느껴진 까닭이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늦가을 날 철학원으로 뛰어든 여인에게 어떤 기구한 사연이 있을지.
“고맙습니다, 도사님. 고맙습니다.”
“그럼 태어난 생년일시를 적어 주시지요.”
여자는 무영이 넌지시 내민 종이에 또박또박 글씨를 써 내려갔다.
“예. 여기…….”
“흠…….”
무영은 만세력을 펼쳐 여자가 적어 낸 사주를 풀어 보았다. 그렇게 나온 여자의 간명지를 말없이 들여다보고만 있던 무영이 불쑥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는 그럭저럭 밥을 먹는 집안의 무남독녀로 태어나셨겠습니다.”
“예. 맞아요. 그걸 어찌…….”
여자는 소스라치게 놀라 무영을 쳐다보았다.
“아주머니 사주에 그리 나와 있습니다.”
무영은 조용히 웃어 보였다.
“제 사주……에요?”
“예.”
“그런 것까지 사주에 나와 있다는 말씀이셔요?”
여자는 깜짝 놀라 다시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놀랍네요. 그럼 다른 것도 사주에 나와 있어요?”
“어디, 더 보지요.”
무영은 여자의 말을 듣고 자신이 그녀의 운명을 제대로 풀어 가고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이렇게 처음부터 똑떨어지듯 맞아 들어가면 그도 흥이 났다.
“흠, 약한 신주 옆에 강력한 부군궁이라…… 남편을 일찍 만나셨겠습니다만 또 금방 헤어지셨겠습니다.”
다시 운을 뗀 무영이 조심스럽게 여자를 살폈다.
“어머, 맞아요. 한동네 친구였던 남편하고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바로 결혼했거든요. 오누이처럼 지내다 정이 들어 버린 거지요.”
여자는 어릴 적 친구였다는 남편 얘기에 처음으로 발그레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딱히 대학 갈 형편도 안 되던 마당에 마침 남편이 자기랑 같이 시댁이 하는 방앗간 일이나 돕자고 하여…… 덜컥 그러자 해 버렸어요. 소꿉장난하는 기분으로요. 그러다 남편이―”
신나게 말을 하던 여자는 곧 울상을 짓더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보고만 있던 무영이 조용히 입을 열어 말한 건 그 때였다.
“사고가 났겠군요. 이를테면 교통사고 같은.”
“네. 맞아요. 근데 그걸 어찌……?”
훤히 안다는 듯한 무영의 말에 여자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맞아요. 교통사고. 밤에 술을 마시고 어두운 시골길을 걸어오다 지나는 차에 치였거든요.”
“역시…… 신금이 묘목을 범했네요.”
“그럼 그게 다 제 사주에 나와 있다는 말씀이세요?”
여자는 제가 묻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런 셈이지요. 그리고 곧 다른 분을 만나셨겠습니다만…….”
차분히 고개를 끄덕여 준 무영은 다음으로 넘어가다 말고 또 말을 흐렸다.
두 번째 남자와의 인연도 그다지 좋았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첩첩산중인 형세였다. 신약 사주에 정관과 편관이 혼재되고 있으니…….
그러자 이번엔 여자가 한숨지으며 말했다.
“잘 아시네요. 곧 재혼을 했거든요. 남편이 죽고 친정으로 돌아온 제게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 아주머니로부터 혼처가 들어왔지요. 저는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는 것이 싫어 승낙하였고요. 나이 차이가 많이 나 망설여지긴 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있는 집이라 하여…….”
“그랬군요. 한데 그 남편과도 오래는 가지 못했겠습니다.”
“네. 남편이 의처증이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