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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의처증이라…….”
“집 앞 마트에만 갔다 와도 허구한 날 누구를 만나고 왔냐며 사람을 잡으니 도무지 살 수가 있어야지요. 1년도 못 살고 냅다 도망쳐 버렸지요.”
“그러셨군요. 그런데 그걸로 끝은 아니셨을 텐데…….”
무영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정말 선생님께는 거짓말을 못 하겠네요. 실은 그렇게 도망쳐 나와 미용 기술이나 배울까 하고 혼자 살던 중에 손님으로 오는 남자와 눈이 맞았답니다. 이번엔 혼인 신고도 못 하고 살림부터 차렸지요. 그래도 처음엔 깨 볶듯이 잘 살았어요. 남자 성격이 다정다감했거든요. 덤프트럭을 몰아서 돈벌이도 있었고요.”
“한데 이번엔 또 무슨 문제였습니까?”
무영은 이제 대놓고 여자에게 묻고 있었다.
“그게 3, 4년이 지나고부터인가 다른 여자가 생기는 것 같더라고요. 집에서 큰소리가 나고 주먹이 올라간 것도 그때부터고요. 그래도 한동안은 그냥저냥 살았어요. 저도 제 처지를 생각해야 하니까요. 그사이 친정하고도 간신히 연락이 닿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고요.”
“마음이 많이 아프셨겠습니다.”
“예. 근데 얼마 전에 혼자되신 친정어머니가 아프시다고 해서 한 일주일 친정에 갔다 와 보니 글쎄, 그사이 그 사람이 홀랑 짐을 싸 갖고 어떤 여자랑 같이 서울로 도망갔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부랴부랴 그 사람을 찾아 서울로 따라왔지요. 주변 사람들한테 수소문을 해 보니 이 근방이라 해서……. 3일째 이렇게 동네를 헤매고 다녔답니다.”
“그러셨군요. 그러다 답답한 마음에 여기까지 들어와 보신 게로군요.”
무영은 여자의 사정에 딱하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듣기도 전부터 어느 정도 가늠은 하고 있었으나 막상 본인의 입으로 사연을 듣고 보니 안타까움이 더 강하게 밀려왔다.
“맞아요. 삼 일 밤낮을 낯선 곳에서 헤매고 다니다 보니 내 팔자도 참 기구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여자의 말에 무영의 시선이 흘깃 여자의 간명지로 떨어졌다. 실은 무영이 아까부터 생각해 오던 말이 여자의 입에서 직접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이리도 박복한 팔자가 또 있을까. 무영이 명리학에 발을 들인 지 10년이 훌쩍 넘고 있지만 이처럼 사나운 운세도 처음이다 싶었다.
“그럼 도사님, 말씀해 주셔요. 저는 이제 어찌해야 하나요? 계속 도망간 남자를 찾아야 할까요? 찾으면 찾아질까요? 제 사주엔 뭐라고 나와 있나요? 이제부터 이어질 제 운은요?”
여자의 간절한 얼굴을 보니 무영은 입을 떼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와 운명을 가지고 거짓을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지금부터라도 아주머니는 공덕을 쌓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번 생에 이런 사주를 가지고 태어나신 것은 전생의 업이 그대로 다시 되돌아왔기 때문이니까요. 하니 이번 생에서 그 업을 푸셔야 다음 생에라도 좋은 사주로 태어나시지 않겠습니까?”
“그럼 이번 생은 계속 이 지경이라는 말씀이셔요?”
여자가 울컥하는 소리를 냈다.
“할 수 없습니다. 아주머니 사주에 그렇게 나와 있어요. 평생 남자들이 아주머니 운명을 뒤치는 사주입니다. 하니 차라리 지금부터라도 남자를 멀리하고…….”
여자의 간명지에 다시 시선을 주던 무영이 문득 말을 멈추었다.
“혹시 아주머니에게 자식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뜬금없는 무영의 물음에 여자가 눈을 들었다. 놀라기보다는 체념한 눈빛이었다.
“두 살 난 딸이 하나 있습니다. 아픈 친정어머니에게 애를 맡기고 왔지요. 도망간 남자를 찾으려는 것도 다 딸 때문이에요. 그래도 애한테는 아버지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여자는 참았던 눈물을 뒤늦게 쏟기 시작했다. 고개를 묻고 우느라 들썩이는 여자의 어깨를 보니 무영의 마음도 좋지 않았다.
운명을 안다 한들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운명을 읽는다 한들 무엇을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만 우시지요. 이제부터라도 혼자 딸을 잘 키우시면 되지 않습니까. 딸을 고이 키워 내는 것도 다 아주머니 공덕이 되니까요. 다행히 따님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의지를 타고난 것 같습니다. 이런 기운의 아이는 같이 있는 사람의 운명도 바꾸는 법이지요. 어쩌면 아주머니 운명도 이 아이로 인해 바뀔 수 있어요.”
“제 운명……도요?”
여자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예, 그럼요.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아주머니 의지겠지만요. 하니 아주머니도 남자에 기대기보단 혼자 힘으로 서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따님을 생각하셔서라도…….”
“그럼 도망간 남자를 찾는 것도 다 그만둬야겠군요.”
순간 여자의 멍한 시선이 허공 어딘가를 향해 갔다.
“그렇지요.”
무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알겠습니다. 도사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이제 다 그만둬야겠어요.”
체념하듯 말한 여자가 힘겹게 양쪽 눈가를 소매로 훔쳤다.
자신의 박복한 운명에 눈물짓는 젊은 여인을 보니 무영의 마음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랴. 타고난 운명인 것을……. 무영은 측은한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이건 미흡하나마 제 복채로 받아 두시어요.”
여자는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보따리에서 작은 통을 하나 꺼내 들었다. 겉포장에 금산 특산물이라고 적힌 걸 보니 인삼 가루인 것 같았다.
“고향에서 가지고 온 것이에요. 지금 제 수중에 드릴 만한 것은 이것밖엔 없네요.”
“괜찮습니다만.”
무영이 사양하는 손짓을 해 보였다.
“아니어요. 받아 주시어요. 그럼 전 이만…….”
여자는 거절하는 무영의 손에 억지로 통을 쥐여 주고는 깊이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돌아 그대로 걸어 나갔다. 그 터벅터벅 걷는 뒷모습이 안타깝기 하염없었으나 여자에게 무영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모든 게 그저 타고난 운명인 것을…….
하루 종일 비가 오던 늦가을 하루는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
다음 날, 무영이 철학원으로 출근하고 있을 때였다.
동네 놀이터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무영은 저절로 시끄러운 곳으로 다가갔다.
“헉.”
사람들이 둘러싼 광경을 본 무영은 소리를 내지르며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놀이터 한가운데 놓인 그네에 한 여인이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낯익은 치마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제 철학원을 찾았던 그 여인이 목을 매고 죽어 있었다.
“하필 애들 다 보는 이런 곳에서 목을 맸대.”
“에구, 끔찍해. 꿈에 나올까 무섭다.”
“어서 떼어 내지 않고 뭘 해.”
“경찰이라도 와야 떼어 내겠지…….”
“에구, 끔찍해. 에구.”
모여든 사람들이 제멋대로 떠드는 속에 무영은 주저앉은 그대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그 모습이 이상했는지 옆 사람이 물었다.
“이보쇼, 아는 여자요?”
무영은 대답 없이 초점 없는 눈을 들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무영이 넋을 잃고 얼빠진 표정만 하고 있자 물었던 사람은 저만치 가 버렸다.
‘내가 저 가엾은 여자를 죽였구나. 내가 죽였어. 내가 저 여자의 운명을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죽을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을. 내가 거짓말을 해 주었더라면.’
무영은 등짝으로 식은땀이 솟았다. 마음이 허하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내가 죄업을 쌓았구나. 잘난 척 재미로 인간의 운명을 아는 척했다가 엄한 목숨 하나를 버리고 말았어. 그게 내 업이 될 것도 모르고……. 씻을 수 없는 내 업이 될 것을…….’
무영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2. 도사님, 도사님
“아무도 안 계십니까?”
밖에서 들리는 힘찬 남자 목소리에 연지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인적이 드문 이 산골까지 불쑥 찾아올 손님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더더구나 젊은 남자 손님은.
“누구……세요?”
다듬던 취나물을 손에서 털어 내고 미닫이문 사이로 빼꼼 고개만 내다보니 삽짝 밖에 키 큰 두 남자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검은 양복에 검은 구두를 똑같이 신고 선 모델같이 훤칠한 두 남자였다.
가파른 산비탈을 올라와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이 미래에서 과거로 잘못 불시착한 사람들처럼 어색하게만 보였다.
한 마디로 가녀린 버선 발목을 드러낸 새뜻한 한복 치마에 고운 댕기 머리, 다소곳한 몸가짐, 사슴 같은 눈망울이 하늘에서 실수로 쫓겨난 선녀가 아닐까 싶은 연지가 살고 있는 이곳 지리산 억새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생뚱맞은 손님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본 그들은 낯빛이 환한 것이, 반가운 모양이었다.
“혹시 여기에 무영도사님이 계십니까? 저희는 무영도사님을 찾고 있는데요.”
두 남자 중 더 훤칠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어찌하여 도사님을 찾으시는지요?”
쪽마루로 얌전히 걸어 나온 연지는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공손하게 물었다.
남자의 입에서 ‘도사’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영업은 시작된 것이니까.
“찾아가 뵙고 오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여기가 무영도사님 댁이 맞습니까?”
남자는 연지가 사는 억새 집을 눈으로 한번 훑으며 물었다. 그 눈빛에서 이런 곳에 사람이 사는구나, 싶은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맞습니다만…… 현재 도사님은 부지거처(不知去處) 중이십니다.”
또랑또랑한 연지의 말은 스스로가 듣기에도 뭔가 좀 있어 보였다. 후훗.
“부지거처시라면…… 지금 안 계신단 말씀입니까?”
“예. 그런 말이지요.”
‘젊은 양반이 똑똑하시네. 쉽게 말해서 모른다, 전문 용어로 ‘아몰랑’이에요.’
속마음과 다르게 입가에 부처님 미소를 띤 연지는 새초롬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한데 어찌하여 저희 도사님을 찾으시는지요?”
물론 그녀는 묻지 않아도 답을 알고 있었다.
멀쩡한 사람들이 이 험한 매골까지 찾아오는 이유란 오직 하나뿐일 터. 물론 이 사람들만큼 번드르르한 경우는 드물었지만 말이다.
“도사님과 약속을 했습니다. 그럼 혹 도사님과 연락이 닿을 방법이 없을까요? 저희는 오늘 중으로 꼭 도사님을 뵙고 가야 하는데요.”
“글쎄요. 행처를 밝히지 않고 나가신 지 사나흘째라…….”
‘이놈의 영감탱이, 예약받은 걸 잊어버렸구먼. 으이구, 밥줄 끊기는 소리가 들린다, 들려.’
연지는 혀를 끌끌 차 보일까 잠시 고민했지만, 어쩐지 오버일 것 같다는 생각에 이번에도 안됐다는 미소만 살포시 지어 보이기로 했다.
“사나흘씩이나요? 그럼 언제 오시는지도 모르십니까?”
“예. 워낙 기약 없이 떠도는 분이시라…….”
‘내가 대신 봐 준다고 할 수도 없고……. 어쩌지?’
복채가 두둑할 것 같은 손님을 눈앞에서 놓치려니 속이 쓰렸다.
“하지만 저희 회장님께서는 분명히 도사님이 기다리고 계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오면 답을 주시기로 하셨다고…….”
‘회장님이라니 무슨……? 청년회장? 주민회장?’
회장님이라는 소리에 연지는 어리둥절해졌다.
“저희 도사님이 오늘 답을 주신다고 하셨다고요?”
“예. 도사님께서 직접 저희 회장님께 정확히 일주일 뒤에 이곳에서 답을 주시겠다고 하셨답니다. 복채도 미리 받아 가셨다고…….”
남자는 복채라는 말을 입에 담으며 살짝 말을 흐렸다.
“복채요? 그럼 복채를 미리 주셨다는 말씀이셔요?”
하지만 그 말은 듣는 사람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것이었으니, 놀란 눈은 벌써 뒤집어질 지경이 되어 있었다.
‘이놈의 영감탱이, 대체 무슨 구라를 치고 다니길래……. 으이구, 내 팔자야.’
“예.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자 곧 남자는 당황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지금 연지의 눈에는 그조차 보이지 않았으니,
“도사님이 복채까지 미리 챙겼다는 건…….”
‘먹튀를 작정했다는 얘긴데……. 이를 어쩐다?’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하는 말 대신 바삐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래도 저희 도사님이 깜빡하신 것 같은데……. 그게 요즘 기억이 워낙 오락가락하셔서 나이는 못 속인다 싶은 게, 에, 물론 저희 도사님 도력이야 워낙 출중하셔서 끄떡없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 도력이라는 것도 나이가 들면 감퇴하는가 싶기도 하고, 또 그게 아니면 뭐냐, 가끔 노망인가 싶은 게…….”
여기까지 운을 떼고 슬쩍 남자의 눈치를 보니 아직은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뭐냐 그러니까 제 말씀은, 이왕 점을 보시려거든 요즘 신빨 좋은 젊은 도사들도 많은데, 신기 떨어지는 저희 도사님 말고요. 제가 다른 분으로 소개시켜 드릴까요? 강남에 유명한 월드컵 차 도령이라고…….”
“예에?”
하지만 펄쩍 뛰는 남자의 반응을 보니 넌지시 눙치며 물타기는 씨알도 안 먹힐 듯했다.
“아, 아니, 그러니까 회장님께서 도사님을 찾으시는 이유가 뭔지…….”
“의처증이라…….”
“집 앞 마트에만 갔다 와도 허구한 날 누구를 만나고 왔냐며 사람을 잡으니 도무지 살 수가 있어야지요. 1년도 못 살고 냅다 도망쳐 버렸지요.”
“그러셨군요. 그런데 그걸로 끝은 아니셨을 텐데…….”
무영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정말 선생님께는 거짓말을 못 하겠네요. 실은 그렇게 도망쳐 나와 미용 기술이나 배울까 하고 혼자 살던 중에 손님으로 오는 남자와 눈이 맞았답니다. 이번엔 혼인 신고도 못 하고 살림부터 차렸지요. 그래도 처음엔 깨 볶듯이 잘 살았어요. 남자 성격이 다정다감했거든요. 덤프트럭을 몰아서 돈벌이도 있었고요.”
“한데 이번엔 또 무슨 문제였습니까?”
무영은 이제 대놓고 여자에게 묻고 있었다.
“그게 3, 4년이 지나고부터인가 다른 여자가 생기는 것 같더라고요. 집에서 큰소리가 나고 주먹이 올라간 것도 그때부터고요. 그래도 한동안은 그냥저냥 살았어요. 저도 제 처지를 생각해야 하니까요. 그사이 친정하고도 간신히 연락이 닿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고요.”
“마음이 많이 아프셨겠습니다.”
“예. 근데 얼마 전에 혼자되신 친정어머니가 아프시다고 해서 한 일주일 친정에 갔다 와 보니 글쎄, 그사이 그 사람이 홀랑 짐을 싸 갖고 어떤 여자랑 같이 서울로 도망갔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부랴부랴 그 사람을 찾아 서울로 따라왔지요. 주변 사람들한테 수소문을 해 보니 이 근방이라 해서……. 3일째 이렇게 동네를 헤매고 다녔답니다.”
“그러셨군요. 그러다 답답한 마음에 여기까지 들어와 보신 게로군요.”
무영은 여자의 사정에 딱하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듣기도 전부터 어느 정도 가늠은 하고 있었으나 막상 본인의 입으로 사연을 듣고 보니 안타까움이 더 강하게 밀려왔다.
“맞아요. 삼 일 밤낮을 낯선 곳에서 헤매고 다니다 보니 내 팔자도 참 기구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여자의 말에 무영의 시선이 흘깃 여자의 간명지로 떨어졌다. 실은 무영이 아까부터 생각해 오던 말이 여자의 입에서 직접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이리도 박복한 팔자가 또 있을까. 무영이 명리학에 발을 들인 지 10년이 훌쩍 넘고 있지만 이처럼 사나운 운세도 처음이다 싶었다.
“그럼 도사님, 말씀해 주셔요. 저는 이제 어찌해야 하나요? 계속 도망간 남자를 찾아야 할까요? 찾으면 찾아질까요? 제 사주엔 뭐라고 나와 있나요? 이제부터 이어질 제 운은요?”
여자의 간절한 얼굴을 보니 무영은 입을 떼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와 운명을 가지고 거짓을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지금부터라도 아주머니는 공덕을 쌓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번 생에 이런 사주를 가지고 태어나신 것은 전생의 업이 그대로 다시 되돌아왔기 때문이니까요. 하니 이번 생에서 그 업을 푸셔야 다음 생에라도 좋은 사주로 태어나시지 않겠습니까?”
“그럼 이번 생은 계속 이 지경이라는 말씀이셔요?”
여자가 울컥하는 소리를 냈다.
“할 수 없습니다. 아주머니 사주에 그렇게 나와 있어요. 평생 남자들이 아주머니 운명을 뒤치는 사주입니다. 하니 차라리 지금부터라도 남자를 멀리하고…….”
여자의 간명지에 다시 시선을 주던 무영이 문득 말을 멈추었다.
“혹시 아주머니에게 자식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뜬금없는 무영의 물음에 여자가 눈을 들었다. 놀라기보다는 체념한 눈빛이었다.
“두 살 난 딸이 하나 있습니다. 아픈 친정어머니에게 애를 맡기고 왔지요. 도망간 남자를 찾으려는 것도 다 딸 때문이에요. 그래도 애한테는 아버지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여자는 참았던 눈물을 뒤늦게 쏟기 시작했다. 고개를 묻고 우느라 들썩이는 여자의 어깨를 보니 무영의 마음도 좋지 않았다.
운명을 안다 한들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운명을 읽는다 한들 무엇을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만 우시지요. 이제부터라도 혼자 딸을 잘 키우시면 되지 않습니까. 딸을 고이 키워 내는 것도 다 아주머니 공덕이 되니까요. 다행히 따님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의지를 타고난 것 같습니다. 이런 기운의 아이는 같이 있는 사람의 운명도 바꾸는 법이지요. 어쩌면 아주머니 운명도 이 아이로 인해 바뀔 수 있어요.”
“제 운명……도요?”
여자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예, 그럼요.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아주머니 의지겠지만요. 하니 아주머니도 남자에 기대기보단 혼자 힘으로 서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따님을 생각하셔서라도…….”
“그럼 도망간 남자를 찾는 것도 다 그만둬야겠군요.”
순간 여자의 멍한 시선이 허공 어딘가를 향해 갔다.
“그렇지요.”
무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알겠습니다. 도사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이제 다 그만둬야겠어요.”
체념하듯 말한 여자가 힘겹게 양쪽 눈가를 소매로 훔쳤다.
자신의 박복한 운명에 눈물짓는 젊은 여인을 보니 무영의 마음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랴. 타고난 운명인 것을……. 무영은 측은한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이건 미흡하나마 제 복채로 받아 두시어요.”
여자는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보따리에서 작은 통을 하나 꺼내 들었다. 겉포장에 금산 특산물이라고 적힌 걸 보니 인삼 가루인 것 같았다.
“고향에서 가지고 온 것이에요. 지금 제 수중에 드릴 만한 것은 이것밖엔 없네요.”
“괜찮습니다만.”
무영이 사양하는 손짓을 해 보였다.
“아니어요. 받아 주시어요. 그럼 전 이만…….”
여자는 거절하는 무영의 손에 억지로 통을 쥐여 주고는 깊이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돌아 그대로 걸어 나갔다. 그 터벅터벅 걷는 뒷모습이 안타깝기 하염없었으나 여자에게 무영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모든 게 그저 타고난 운명인 것을…….
하루 종일 비가 오던 늦가을 하루는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
다음 날, 무영이 철학원으로 출근하고 있을 때였다.
동네 놀이터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무영은 저절로 시끄러운 곳으로 다가갔다.
“헉.”
사람들이 둘러싼 광경을 본 무영은 소리를 내지르며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놀이터 한가운데 놓인 그네에 한 여인이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낯익은 치마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제 철학원을 찾았던 그 여인이 목을 매고 죽어 있었다.
“하필 애들 다 보는 이런 곳에서 목을 맸대.”
“에구, 끔찍해. 꿈에 나올까 무섭다.”
“어서 떼어 내지 않고 뭘 해.”
“경찰이라도 와야 떼어 내겠지…….”
“에구, 끔찍해. 에구.”
모여든 사람들이 제멋대로 떠드는 속에 무영은 주저앉은 그대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그 모습이 이상했는지 옆 사람이 물었다.
“이보쇼, 아는 여자요?”
무영은 대답 없이 초점 없는 눈을 들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무영이 넋을 잃고 얼빠진 표정만 하고 있자 물었던 사람은 저만치 가 버렸다.
‘내가 저 가엾은 여자를 죽였구나. 내가 죽였어. 내가 저 여자의 운명을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죽을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을. 내가 거짓말을 해 주었더라면.’
무영은 등짝으로 식은땀이 솟았다. 마음이 허하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내가 죄업을 쌓았구나. 잘난 척 재미로 인간의 운명을 아는 척했다가 엄한 목숨 하나를 버리고 말았어. 그게 내 업이 될 것도 모르고……. 씻을 수 없는 내 업이 될 것을…….’
무영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2. 도사님, 도사님
“아무도 안 계십니까?”
밖에서 들리는 힘찬 남자 목소리에 연지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인적이 드문 이 산골까지 불쑥 찾아올 손님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더더구나 젊은 남자 손님은.
“누구……세요?”
다듬던 취나물을 손에서 털어 내고 미닫이문 사이로 빼꼼 고개만 내다보니 삽짝 밖에 키 큰 두 남자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검은 양복에 검은 구두를 똑같이 신고 선 모델같이 훤칠한 두 남자였다.
가파른 산비탈을 올라와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이 미래에서 과거로 잘못 불시착한 사람들처럼 어색하게만 보였다.
한 마디로 가녀린 버선 발목을 드러낸 새뜻한 한복 치마에 고운 댕기 머리, 다소곳한 몸가짐, 사슴 같은 눈망울이 하늘에서 실수로 쫓겨난 선녀가 아닐까 싶은 연지가 살고 있는 이곳 지리산 억새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생뚱맞은 손님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본 그들은 낯빛이 환한 것이, 반가운 모양이었다.
“혹시 여기에 무영도사님이 계십니까? 저희는 무영도사님을 찾고 있는데요.”
두 남자 중 더 훤칠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어찌하여 도사님을 찾으시는지요?”
쪽마루로 얌전히 걸어 나온 연지는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공손하게 물었다.
남자의 입에서 ‘도사’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영업은 시작된 것이니까.
“찾아가 뵙고 오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여기가 무영도사님 댁이 맞습니까?”
남자는 연지가 사는 억새 집을 눈으로 한번 훑으며 물었다. 그 눈빛에서 이런 곳에 사람이 사는구나, 싶은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맞습니다만…… 현재 도사님은 부지거처(不知去處) 중이십니다.”
또랑또랑한 연지의 말은 스스로가 듣기에도 뭔가 좀 있어 보였다. 후훗.
“부지거처시라면…… 지금 안 계신단 말씀입니까?”
“예. 그런 말이지요.”
‘젊은 양반이 똑똑하시네. 쉽게 말해서 모른다, 전문 용어로 ‘아몰랑’이에요.’
속마음과 다르게 입가에 부처님 미소를 띤 연지는 새초롬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한데 어찌하여 저희 도사님을 찾으시는지요?”
물론 그녀는 묻지 않아도 답을 알고 있었다.
멀쩡한 사람들이 이 험한 매골까지 찾아오는 이유란 오직 하나뿐일 터. 물론 이 사람들만큼 번드르르한 경우는 드물었지만 말이다.
“도사님과 약속을 했습니다. 그럼 혹 도사님과 연락이 닿을 방법이 없을까요? 저희는 오늘 중으로 꼭 도사님을 뵙고 가야 하는데요.”
“글쎄요. 행처를 밝히지 않고 나가신 지 사나흘째라…….”
‘이놈의 영감탱이, 예약받은 걸 잊어버렸구먼. 으이구, 밥줄 끊기는 소리가 들린다, 들려.’
연지는 혀를 끌끌 차 보일까 잠시 고민했지만, 어쩐지 오버일 것 같다는 생각에 이번에도 안됐다는 미소만 살포시 지어 보이기로 했다.
“사나흘씩이나요? 그럼 언제 오시는지도 모르십니까?”
“예. 워낙 기약 없이 떠도는 분이시라…….”
‘내가 대신 봐 준다고 할 수도 없고……. 어쩌지?’
복채가 두둑할 것 같은 손님을 눈앞에서 놓치려니 속이 쓰렸다.
“하지만 저희 회장님께서는 분명히 도사님이 기다리고 계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오면 답을 주시기로 하셨다고…….”
‘회장님이라니 무슨……? 청년회장? 주민회장?’
회장님이라는 소리에 연지는 어리둥절해졌다.
“저희 도사님이 오늘 답을 주신다고 하셨다고요?”
“예. 도사님께서 직접 저희 회장님께 정확히 일주일 뒤에 이곳에서 답을 주시겠다고 하셨답니다. 복채도 미리 받아 가셨다고…….”
남자는 복채라는 말을 입에 담으며 살짝 말을 흐렸다.
“복채요? 그럼 복채를 미리 주셨다는 말씀이셔요?”
하지만 그 말은 듣는 사람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것이었으니, 놀란 눈은 벌써 뒤집어질 지경이 되어 있었다.
‘이놈의 영감탱이, 대체 무슨 구라를 치고 다니길래……. 으이구, 내 팔자야.’
“예.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자 곧 남자는 당황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지금 연지의 눈에는 그조차 보이지 않았으니,
“도사님이 복채까지 미리 챙겼다는 건…….”
‘먹튀를 작정했다는 얘긴데……. 이를 어쩐다?’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하는 말 대신 바삐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래도 저희 도사님이 깜빡하신 것 같은데……. 그게 요즘 기억이 워낙 오락가락하셔서 나이는 못 속인다 싶은 게, 에, 물론 저희 도사님 도력이야 워낙 출중하셔서 끄떡없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 도력이라는 것도 나이가 들면 감퇴하는가 싶기도 하고, 또 그게 아니면 뭐냐, 가끔 노망인가 싶은 게…….”
여기까지 운을 떼고 슬쩍 남자의 눈치를 보니 아직은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뭐냐 그러니까 제 말씀은, 이왕 점을 보시려거든 요즘 신빨 좋은 젊은 도사들도 많은데, 신기 떨어지는 저희 도사님 말고요. 제가 다른 분으로 소개시켜 드릴까요? 강남에 유명한 월드컵 차 도령이라고…….”
“예에?”
하지만 펄쩍 뛰는 남자의 반응을 보니 넌지시 눙치며 물타기는 씨알도 안 먹힐 듯했다.
“아, 아니, 그러니까 회장님께서 도사님을 찾으시는 이유가 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