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화
그렇다면 상황 파악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그건 저희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저흰 그저 도사님께 답을 듣고 오라는 분부를 받았을 뿐입니다. 그보다 말씀하시는 분은 도사님 따님 되십니까?”
“아니요. 소녀는 도사님을 공양하며 수양하는 제자이옵니다. 공 가 연지라고 합니다.”
점을 치러 오는 사람들에게 연지가 흔히 하는 거짓말이었다.
그래야 할아버지의 도력이 높아 보일 거 아닌가. 어차피 친딸이 아닌 것도 사실이고.
“그렇군요. 허면 도사님이 계실 만하다 짐작되는 곳은 전혀 없을까요?”
‘이를 어쩐다. 우리 영감이 미리 내뺀 거 같다고 말할 수도 없고…….’
연지는 속이 끓었다.
“도사님은 바람처럼 떠도는 분이시라…….”
‘에라, 모르겠다. 일단은 발뺌이나 하고 보자.’
“그럼 혹시 나가실 때 남기신 말씀은요? 며칠 뒤에 오신다든가, 혹은 저희 회장님께 전하라는 전언이라든가…….”
그러고 보니 영감탱이가 집을 나설 때 한마디 하기는 했다.
연지는 그 장면을 떠올려 보았다.
“말씀은 하시긴 하셨지만, 그게 도움이 될지…….”
“뭐라 하셨습니까?”
남자는 반가운 마음에 덥석 연지 앞으로 다가들었다.
“그게…….”
“예. 말씀해 주십시오.”
“연이 다했다고…….”
“예?”
“연은 여기까지라고…….”
“연이요? 무슨 연이요?”
“그게…….”
‘연지, 네년과의 연은 여기까지라고 한 걸 어찌 제 입으로 말하겠어요. 돈 좀 왕창 벌게 산에서 내려가자고 한마디 했기로서니 연을 끊네 마네 하며 가출했다고는……. 흐이유, 그럼 사람들이 무영도사로 알고 있는 그 할압시가 순 사기꾼에 밴댕이 소갈딱지라는 게 다 들통날 텐데…….’
“당분간 속세와의 연을 끊고 산에 머물 테니 찾지 말라 하시고는 홀연히 나가셨답니다.”
그때 연지는 할아버지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었다. 한 사나흘 삐쳐서 돌아다니다가 돈 떨어지면 슬금슬금 기어들어 올 거라고만 생각했지. 속 좁은 영감탱이가 가면 어딜 가겠느냐, 콧방귀를 뀌고 있었던 것이다.
“산에 가셨다고요? 여기가 산인데 어디 또 산을…….”
그러한 까닭에 혼잣말하듯 황당해하는 젊은 남자에게 연지가 해 줄 수 있는 건 고개를 푹 숙여 보이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제가 미리 말씀드렸잖아요. 별 도움이 안 될 거라고……. 힝.’
“그럼 도사님과 연락이 닿을 만한 방법은 전혀 없나요? 저희 회장님께는 아주 중요한 일이라…….”
“죄송합니다. 한 번 나가시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정처 없이 떠도시는 분이라……. 도무지 방법이…….”
연지는 순진하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큰일이군요. 회장님은 철석같이 약속을 믿고 계신데, 이를 어쩐다.”
‘그냥 액땜했다 생각하시면 안 될까요. 우리 할아버지 같은 사기꾼을 믿은 회장님 안목도 잘못이잖아요.’
물론 연지는 속엣말을 겉으로 드러내는 대신 한숨과 함께 동정을 표하기로 했다.
이럴 땐 그녀가 단골처럼 쓰는 레퍼토리가 특효일 것이다.
“먼 길 오시느라 번다하셨을 텐데 소득이 공망이니 이를 어찌합니까. 우선 이 물로 목부터 축이시고 천천히 쉬다 내려가셔요.”
얼른 물 주전자에서 따라 온 물컵을 남자에게 건네며 연지는 안타까이 말했다.
‘이제 그만 가 보시라는 말씀이에요. 알아들으셨죠?’
“고맙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도사님이 안 계시다니, 난감하네요. 근데 제자분께서는 나이도 어리신 듯한데 이런 곳에서 생활하시려면 고충이 많겠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답답해서 반나절도 머물지 못할 것 같은데…….”
그녀가 건네주는 물을 달게 마시며 남자는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다 적응하기 나름이지요. 사람은 다 자기 자리에서 주어진 본분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호호.”
‘본분은 개뿔, 저도 내려갈 수만 있다면 진즉에 내려갔지요. 우우. 그노무 고집불통 할압시만 아니면.’
그러면서 연지는 겸손하게 고개를 한쪽으로 돌려 보이는 걸 잊지 않았다.
이쯤 되면 슬슬 내려가겠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한데 말이다.
“그렇군요. 그럼 연지 양, 시원한 물 감사했습니다. 도사님이 안 계시다니, 오늘은 할 수 없군요. 일단 돌아가는 수밖에. 혹여 저희가 가고 난 뒤라도 도사님이 오시면 이곳으로 연락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그렇지, 예상대로 이만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는 남자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고 있었다.
명함이었다.
삼명제약 비서실 윤시경
연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회장님이라더니…… 진짜 큰 회사 회장님이라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직원도 거느리고, 번쩍번쩍한 건물도 있고, 돈도 많은 그런 회장? 노인회 회장도, 도민회 회장도, 등산회 회장도 아닌 진짜 회장? 진짜?’
명함을 든 연지의 입이 헤벌어지는 것도 모른 채 시경은 인사를 했다.
“그럼 다시 뵙지요.”
“네? 다시요?”
연지는 멍한 얼굴로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예. 조만간. 그리고 이것, 약소하지만 놓고 가겠습니다. 도사님께서 오시면 꼭 연락 주십시오. 꼭.”
“아, 네…….”
다시 한번 간곡히 다짐하는 시경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연지의 시선은 뒤에 선 남자가 마당에 내려놓는 묵직한 상자 쪽으로 벌써 향하고 있었다.
황금색 보자기로 싸인 자태로 보건대, 제법 값이 나갈 것이 분명한 커다란 선물 세트가 틀림없었다.
다행히 반짝반짝 레이저가 쏘아지는 그녀의 눈빛은 뒤돌아 걸어가는 두 남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왔던 그대로 억새 집이 자리 잡은 산비탈을 내려갈 모양인 듯했다.
흡족해서는 냉큼 마당에 놓인 상자를 집어 드는 연지의 눈에 그들의 뒷모습이 얼핏 띄었다.
‘어, 저 구두로?’
“잠깐만요.”
문득 연지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이렇게 귀한 선물까지 챙겨 온 사람들에게 최소한 횡액은 면하게 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예. 왜 그러십니까?”
“혹시 그대로 산을 내려가시려고요?”
연지의 위치에서 남자들의 뒤로 보이는 해는 벌써 뉘엿뉘엿 산 아래로 넘어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건장한 두 남자는 그조차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아 보였지만.
“예. 근데, 왜……?”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시경은 어째서 그런 걸 묻느냐고 연지에게 되묻고 있었다.
하지만 한두 번 해 본 일이 아닌 연지는 복잡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했다.
어차피 구구절절 설명해 봤자 이해도 못 할 테고.
“그냥 제가 말씀드리는 이 번호를 기억하고 가세요. 카. 라. 팔칠이삼 구공육팔. 저쪽에서 먼저 물어볼 거예요.”
“네? 그게 무슨……?”
“그냥 외우시라고요. 필요할 때가 있을 테니까요. 어서요. 카. 라. 팔칠이삼 구공육팔.”
“카. 라…… 팔칠이삼 구공육팔.”
시경은 막무가내인 연지가 하라는 대로 번호를 외우면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됐어요. 이제 가 보셔도 돼요. 그럼 조심히.”
“아, 네. 그럼…….”
연지의 어서 가라는 손짓에 시경은 건성으로 인사를 하는 듯하더니, 그대로 등을 돌려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연지는 휘청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순간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탓이었다.
*
으아아아아…….
‘여긴 어디지? 어젯밤 난 분명히…….’
연지는 깨질 것처럼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슬며시 눈을 떴다.
낯선 공간이었다.
하늘만큼 높은 천장, 넓은 창으로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 푹신한 느낌의 새하얀 침구. 텔레비전에서나 나올 것 같은 산뜻한 집.
‘아니, 그럴 리가……. 꿈을 꾸는 건가?’
연지는 부스럭거리는 이불을 파헤쳐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어 보았다.
‘아니. 꿈은 아닌 것 같다. 이렇게 아픔이 형이하학적일 리가, 헉!’
연지는 눈을 크게 떴다. 뒤늦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젯밤, 분명히 어젯밤에…….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히 어젯밤 그녀는 밖에서 나는 소리에 여닫이문을 열었는데……. 그다음부터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연지는 벌떡 일어나 자신의 몸을 더듬어 보았다.
아프거나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몸은 멀쩡했다. 옷도 어제 집에서 입고 있던 두툼한 분홍색 내복 그대로였다.
‘그럼 여긴 어디? 난 누구?’
그녀는 휘둥그레 눈을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봐도 생전 처음 보는 낯선 방이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난 어젯밤 분명히 우리 집에서 잔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기억이 나는 건 비서라는 남자와 그 일행이 산비탈을 내려가고 난 뒤, 불길한 조짐을 느낀 그녀가 내일이라도 당장 할아버질 찾아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던 데까지였다.
그리고 이른 새벽, 밖에서 나는 소리에 문을 열었는데…….
당황스러운 마음에 다시 방 안을 둘러보니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낯익은 보따리가 눈에 띄었다. 지난밤 그녀가 싸 놓았던 바로 그 보따리가 틀림없었다.
게다가 그 옆에 고이 개켜져 있는 것은 바로 그녀가 입고 있던 개량 한복이 아닌가.
누군가 그녀의 옷을 벗겨 잘 개어 놓은 것이다!
연지는 누가 옷을 벗겨 놓았는지 고민할 틈도 없이 허겁지겁 개켜진 옷으로 손을 뻗었다. 맨날 입던 허리 치마와 저고리를 몸에 걸치면 그나마 제정신이 돌아올 것 같아서였다.
그랬다. 연지의 평상복이자 작업복, 유니폼은 모두 생활 한복이었다.
고집 센 할아버지는 연지가 전통 의상을 입고 있어야 자신의 도력이 더 신통해 보인다며 억새 집에선 한복만 입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연지는 어릴 적 학교를 다닐 때 빼고는 사극에서 방금 튀어나온 복장을 하고 살았다.
치렁치렁한 댕기 머리까지.
똑똑똑.
마침 연지가 옷을 다 입었을 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셨습니까?”
“네? 네에―”
얼결에 튀어나온 대답과 함께 열리는 문으로 들어오는 얼굴을 보고 연지는 깜짝 놀랐다.
‘엇, 저분은…….’
3. 꿩 대신 닭
“비서님이 어떻게…….”
연지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어제의 그 잘생긴 비서를 쳐다보았다.
“연지 양. 놀라셨죠. 어제 그만 일이 너무 다급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제가 큰 실례를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요? 무슨……?”
영문을 모르는 연지가 물었다.
“어제 일,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어제 일이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약효가 직방이었나 보군요. 기억도 못 하시는 걸 보니. 실은 제가 어제 연지 양을 급히 모시느라.”
“모셔요? 저를요?”
연지는 어리둥절해졌다.
“예.”
“왜요?”
“그게…… 연지 양이 알려 주신 그 번호 때문입니다.”
“번호가 왜요?”
“실은 저희가 밤에 산을 내려가다 비탈길에서 구르는 사고를 당했거든요.”
“네에? 다치진 않으셨어요?”
“네. 다행히 운동 신경은 뛰어난 편이라, 근데 깜깜한 데서 조난 신고를 하려니 저쪽에서 저희 위치를 물어보더라고요. 처음엔 난감했지요. 저희도 모르는 걸 말로 하라니.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나더군요. 연지 양이 가르쳐 준 번호가. 그래서 그걸 말했더니 곧바로 알아듣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저희는 바로 구조가 되었는데, 근데 연지 양. 연지 양은 어떻게 저희가 그 지점에서 조난당할 거라는 걸 아셨지요? 어떻게 미리 아시고…….”
“그거야…….”
그녀가 잠깐 망설이는 사이, 시경은 곧바로 뒷말을 이어 갔다.
“그러고는 이동 중 회장님께 사고 경위를 말씀드렸더니 연지 양을 속히 모셔 오라는 새로운 분부를 내리신 거지요.”
“저를요? 왜요?”
“연지 양은 저희 앞날을 정확히 예견하셨잖아요. 맞지요?”
“그야…….”
‘그야 원래 그 비탈길에서는 사고가 많이 나니까 그런 거지요. 게다가 두 분 다 미끄러운 구두를 신고 계셨잖아요. 어휴.’
연지는 진실을 말해야 할지 살짝 망설여졌다.
일단은 애매한 미소가 상책인 것 같았다.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회장님께서는 도사님의 답을 기다리셨지만, 이렇게 된 이상 연지 양이라도 대신 만나 보고 싶어 하십니다. 앞뒤 사정을 모두 들으시고는 연지 양의 도력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온 저희를 크게 나무라셨지요.”
그렇다면 상황 파악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그건 저희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저흰 그저 도사님께 답을 듣고 오라는 분부를 받았을 뿐입니다. 그보다 말씀하시는 분은 도사님 따님 되십니까?”
“아니요. 소녀는 도사님을 공양하며 수양하는 제자이옵니다. 공 가 연지라고 합니다.”
점을 치러 오는 사람들에게 연지가 흔히 하는 거짓말이었다.
그래야 할아버지의 도력이 높아 보일 거 아닌가. 어차피 친딸이 아닌 것도 사실이고.
“그렇군요. 허면 도사님이 계실 만하다 짐작되는 곳은 전혀 없을까요?”
‘이를 어쩐다. 우리 영감이 미리 내뺀 거 같다고 말할 수도 없고…….’
연지는 속이 끓었다.
“도사님은 바람처럼 떠도는 분이시라…….”
‘에라, 모르겠다. 일단은 발뺌이나 하고 보자.’
“그럼 혹시 나가실 때 남기신 말씀은요? 며칠 뒤에 오신다든가, 혹은 저희 회장님께 전하라는 전언이라든가…….”
그러고 보니 영감탱이가 집을 나설 때 한마디 하기는 했다.
연지는 그 장면을 떠올려 보았다.
“말씀은 하시긴 하셨지만, 그게 도움이 될지…….”
“뭐라 하셨습니까?”
남자는 반가운 마음에 덥석 연지 앞으로 다가들었다.
“그게…….”
“예. 말씀해 주십시오.”
“연이 다했다고…….”
“예?”
“연은 여기까지라고…….”
“연이요? 무슨 연이요?”
“그게…….”
‘연지, 네년과의 연은 여기까지라고 한 걸 어찌 제 입으로 말하겠어요. 돈 좀 왕창 벌게 산에서 내려가자고 한마디 했기로서니 연을 끊네 마네 하며 가출했다고는……. 흐이유, 그럼 사람들이 무영도사로 알고 있는 그 할압시가 순 사기꾼에 밴댕이 소갈딱지라는 게 다 들통날 텐데…….’
“당분간 속세와의 연을 끊고 산에 머물 테니 찾지 말라 하시고는 홀연히 나가셨답니다.”
그때 연지는 할아버지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었다. 한 사나흘 삐쳐서 돌아다니다가 돈 떨어지면 슬금슬금 기어들어 올 거라고만 생각했지. 속 좁은 영감탱이가 가면 어딜 가겠느냐, 콧방귀를 뀌고 있었던 것이다.
“산에 가셨다고요? 여기가 산인데 어디 또 산을…….”
그러한 까닭에 혼잣말하듯 황당해하는 젊은 남자에게 연지가 해 줄 수 있는 건 고개를 푹 숙여 보이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제가 미리 말씀드렸잖아요. 별 도움이 안 될 거라고……. 힝.’
“그럼 도사님과 연락이 닿을 만한 방법은 전혀 없나요? 저희 회장님께는 아주 중요한 일이라…….”
“죄송합니다. 한 번 나가시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정처 없이 떠도시는 분이라……. 도무지 방법이…….”
연지는 순진하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큰일이군요. 회장님은 철석같이 약속을 믿고 계신데, 이를 어쩐다.”
‘그냥 액땜했다 생각하시면 안 될까요. 우리 할아버지 같은 사기꾼을 믿은 회장님 안목도 잘못이잖아요.’
물론 연지는 속엣말을 겉으로 드러내는 대신 한숨과 함께 동정을 표하기로 했다.
이럴 땐 그녀가 단골처럼 쓰는 레퍼토리가 특효일 것이다.
“먼 길 오시느라 번다하셨을 텐데 소득이 공망이니 이를 어찌합니까. 우선 이 물로 목부터 축이시고 천천히 쉬다 내려가셔요.”
얼른 물 주전자에서 따라 온 물컵을 남자에게 건네며 연지는 안타까이 말했다.
‘이제 그만 가 보시라는 말씀이에요. 알아들으셨죠?’
“고맙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도사님이 안 계시다니, 난감하네요. 근데 제자분께서는 나이도 어리신 듯한데 이런 곳에서 생활하시려면 고충이 많겠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답답해서 반나절도 머물지 못할 것 같은데…….”
그녀가 건네주는 물을 달게 마시며 남자는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다 적응하기 나름이지요. 사람은 다 자기 자리에서 주어진 본분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호호.”
‘본분은 개뿔, 저도 내려갈 수만 있다면 진즉에 내려갔지요. 우우. 그노무 고집불통 할압시만 아니면.’
그러면서 연지는 겸손하게 고개를 한쪽으로 돌려 보이는 걸 잊지 않았다.
이쯤 되면 슬슬 내려가겠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한데 말이다.
“그렇군요. 그럼 연지 양, 시원한 물 감사했습니다. 도사님이 안 계시다니, 오늘은 할 수 없군요. 일단 돌아가는 수밖에. 혹여 저희가 가고 난 뒤라도 도사님이 오시면 이곳으로 연락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그렇지, 예상대로 이만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는 남자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고 있었다.
명함이었다.
삼명제약 비서실 윤시경
연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회장님이라더니…… 진짜 큰 회사 회장님이라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직원도 거느리고, 번쩍번쩍한 건물도 있고, 돈도 많은 그런 회장? 노인회 회장도, 도민회 회장도, 등산회 회장도 아닌 진짜 회장? 진짜?’
명함을 든 연지의 입이 헤벌어지는 것도 모른 채 시경은 인사를 했다.
“그럼 다시 뵙지요.”
“네? 다시요?”
연지는 멍한 얼굴로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예. 조만간. 그리고 이것, 약소하지만 놓고 가겠습니다. 도사님께서 오시면 꼭 연락 주십시오. 꼭.”
“아, 네…….”
다시 한번 간곡히 다짐하는 시경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연지의 시선은 뒤에 선 남자가 마당에 내려놓는 묵직한 상자 쪽으로 벌써 향하고 있었다.
황금색 보자기로 싸인 자태로 보건대, 제법 값이 나갈 것이 분명한 커다란 선물 세트가 틀림없었다.
다행히 반짝반짝 레이저가 쏘아지는 그녀의 눈빛은 뒤돌아 걸어가는 두 남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왔던 그대로 억새 집이 자리 잡은 산비탈을 내려갈 모양인 듯했다.
흡족해서는 냉큼 마당에 놓인 상자를 집어 드는 연지의 눈에 그들의 뒷모습이 얼핏 띄었다.
‘어, 저 구두로?’
“잠깐만요.”
문득 연지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이렇게 귀한 선물까지 챙겨 온 사람들에게 최소한 횡액은 면하게 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예. 왜 그러십니까?”
“혹시 그대로 산을 내려가시려고요?”
연지의 위치에서 남자들의 뒤로 보이는 해는 벌써 뉘엿뉘엿 산 아래로 넘어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건장한 두 남자는 그조차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아 보였지만.
“예. 근데, 왜……?”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시경은 어째서 그런 걸 묻느냐고 연지에게 되묻고 있었다.
하지만 한두 번 해 본 일이 아닌 연지는 복잡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했다.
어차피 구구절절 설명해 봤자 이해도 못 할 테고.
“그냥 제가 말씀드리는 이 번호를 기억하고 가세요. 카. 라. 팔칠이삼 구공육팔. 저쪽에서 먼저 물어볼 거예요.”
“네? 그게 무슨……?”
“그냥 외우시라고요. 필요할 때가 있을 테니까요. 어서요. 카. 라. 팔칠이삼 구공육팔.”
“카. 라…… 팔칠이삼 구공육팔.”
시경은 막무가내인 연지가 하라는 대로 번호를 외우면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됐어요. 이제 가 보셔도 돼요. 그럼 조심히.”
“아, 네. 그럼…….”
연지의 어서 가라는 손짓에 시경은 건성으로 인사를 하는 듯하더니, 그대로 등을 돌려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연지는 휘청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순간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탓이었다.
*
으아아아아…….
‘여긴 어디지? 어젯밤 난 분명히…….’
연지는 깨질 것처럼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슬며시 눈을 떴다.
낯선 공간이었다.
하늘만큼 높은 천장, 넓은 창으로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 푹신한 느낌의 새하얀 침구. 텔레비전에서나 나올 것 같은 산뜻한 집.
‘아니, 그럴 리가……. 꿈을 꾸는 건가?’
연지는 부스럭거리는 이불을 파헤쳐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어 보았다.
‘아니. 꿈은 아닌 것 같다. 이렇게 아픔이 형이하학적일 리가, 헉!’
연지는 눈을 크게 떴다. 뒤늦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젯밤, 분명히 어젯밤에…….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히 어젯밤 그녀는 밖에서 나는 소리에 여닫이문을 열었는데……. 그다음부터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연지는 벌떡 일어나 자신의 몸을 더듬어 보았다.
아프거나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몸은 멀쩡했다. 옷도 어제 집에서 입고 있던 두툼한 분홍색 내복 그대로였다.
‘그럼 여긴 어디? 난 누구?’
그녀는 휘둥그레 눈을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봐도 생전 처음 보는 낯선 방이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난 어젯밤 분명히 우리 집에서 잔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기억이 나는 건 비서라는 남자와 그 일행이 산비탈을 내려가고 난 뒤, 불길한 조짐을 느낀 그녀가 내일이라도 당장 할아버질 찾아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던 데까지였다.
그리고 이른 새벽, 밖에서 나는 소리에 문을 열었는데…….
당황스러운 마음에 다시 방 안을 둘러보니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낯익은 보따리가 눈에 띄었다. 지난밤 그녀가 싸 놓았던 바로 그 보따리가 틀림없었다.
게다가 그 옆에 고이 개켜져 있는 것은 바로 그녀가 입고 있던 개량 한복이 아닌가.
누군가 그녀의 옷을 벗겨 잘 개어 놓은 것이다!
연지는 누가 옷을 벗겨 놓았는지 고민할 틈도 없이 허겁지겁 개켜진 옷으로 손을 뻗었다. 맨날 입던 허리 치마와 저고리를 몸에 걸치면 그나마 제정신이 돌아올 것 같아서였다.
그랬다. 연지의 평상복이자 작업복, 유니폼은 모두 생활 한복이었다.
고집 센 할아버지는 연지가 전통 의상을 입고 있어야 자신의 도력이 더 신통해 보인다며 억새 집에선 한복만 입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연지는 어릴 적 학교를 다닐 때 빼고는 사극에서 방금 튀어나온 복장을 하고 살았다.
치렁치렁한 댕기 머리까지.
똑똑똑.
마침 연지가 옷을 다 입었을 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셨습니까?”
“네? 네에―”
얼결에 튀어나온 대답과 함께 열리는 문으로 들어오는 얼굴을 보고 연지는 깜짝 놀랐다.
‘엇, 저분은…….’
3. 꿩 대신 닭
“비서님이 어떻게…….”
연지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어제의 그 잘생긴 비서를 쳐다보았다.
“연지 양. 놀라셨죠. 어제 그만 일이 너무 다급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제가 큰 실례를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요? 무슨……?”
영문을 모르는 연지가 물었다.
“어제 일,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어제 일이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약효가 직방이었나 보군요. 기억도 못 하시는 걸 보니. 실은 제가 어제 연지 양을 급히 모시느라.”
“모셔요? 저를요?”
연지는 어리둥절해졌다.
“예.”
“왜요?”
“그게…… 연지 양이 알려 주신 그 번호 때문입니다.”
“번호가 왜요?”
“실은 저희가 밤에 산을 내려가다 비탈길에서 구르는 사고를 당했거든요.”
“네에? 다치진 않으셨어요?”
“네. 다행히 운동 신경은 뛰어난 편이라, 근데 깜깜한 데서 조난 신고를 하려니 저쪽에서 저희 위치를 물어보더라고요. 처음엔 난감했지요. 저희도 모르는 걸 말로 하라니.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나더군요. 연지 양이 가르쳐 준 번호가. 그래서 그걸 말했더니 곧바로 알아듣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저희는 바로 구조가 되었는데, 근데 연지 양. 연지 양은 어떻게 저희가 그 지점에서 조난당할 거라는 걸 아셨지요? 어떻게 미리 아시고…….”
“그거야…….”
그녀가 잠깐 망설이는 사이, 시경은 곧바로 뒷말을 이어 갔다.
“그러고는 이동 중 회장님께 사고 경위를 말씀드렸더니 연지 양을 속히 모셔 오라는 새로운 분부를 내리신 거지요.”
“저를요? 왜요?”
“연지 양은 저희 앞날을 정확히 예견하셨잖아요. 맞지요?”
“그야…….”
‘그야 원래 그 비탈길에서는 사고가 많이 나니까 그런 거지요. 게다가 두 분 다 미끄러운 구두를 신고 계셨잖아요. 어휴.’
연지는 진실을 말해야 할지 살짝 망설여졌다.
일단은 애매한 미소가 상책인 것 같았다.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회장님께서는 도사님의 답을 기다리셨지만, 이렇게 된 이상 연지 양이라도 대신 만나 보고 싶어 하십니다. 앞뒤 사정을 모두 들으시고는 연지 양의 도력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온 저희를 크게 나무라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