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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꿩 대신 닭이라. 근데 어쩌죠. 우리 할아버지는 AI에 걸린 꿩이요, 저는 닭이 아닌데……. 가금류 근처에도 못 간다고요.’
아뿔싸 싶은 마음이었다.
괜히 아는 척을 했다가 도력이 있는 걸로 오해를 받게 생겼으니 말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새벽에 연지 양을 다시 모시러 올라가는 길이었는데, 연지 양이 완강하게 오지 않겠다고 버티시니 할 수 없이…….”
“그럼 절 납치하셨다는 거예요?”
이번엔 연지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제 선에서 일을 처리하려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마루에 옷가지를 챙겨 놓으신 걸 보고는 도사님처럼 또 말도 없이 떠나실까 마음이 다급해져서…….”
“그야 할아버지를 찾아 나서려다 보니, 아무리 그래도 납치를…….”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얘기에 횡설수설 할 말을 잃은 그녀였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런데 이 비서라는 사람은 깍듯한 목례와 함께 정중한 사죄를 하고 있으니, 이를 어쩐다.
“그럼 여기는 어디지요? 어제 전 어떻게……?”
“여기는 회장님 자택입니다. 어제 낮에 저희가 연지 양을 이곳으로 모셨지요.”
“그럼 벌써 꼬박 하루가 지났다는……!”
어젯밤은 어젯밤이 아니라 지지난밤이었던 것이다.
상상도 못 한 일에 놀란 연지는 거듭 허리를 굽혀 사죄하는 시경을 보며 대체 이 상황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거, 이렇게 되면 보통 일이 아니라는 얘긴데? 할아버지 대신 내가 인질로 잡혀 왔다는 거잖아.’
어째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날 이렇게 납치까지 해 올 정도면 한두 푼 받아 챙긴 게 아닌가 본데. 그래 놓고 혼자 줄행랑을 친 거야? 으이구, 내 팔자야. 뒷수습은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귀띔도 안 해 주고, 잠깐, 그러고 보니…….’
무영이 나갈 때 따로 남긴 말이 있었던 것도 같다.
하도 헛소리라 곧이듣지도 않았지만.
‘그게 뭐였더라……?’
뒤늦게 할아버지가 나가면서 했던 말을 더듬어 보며 비로소 연지는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어 돌아가고 있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썩어 빠진 배신자 영감탱이가 그녀만 남겨 두고 혼자 토낀 각 아닌가!
크으― 그렇다면 이 일을 어찌할꼬, 할아버지 대신 점이라도 쳐야 한단 말인가. 공양미 삼백 석에 몸빵한 심청이처럼?
‘안 돼. 그러다 사기라는 게 대번에 들통날 텐데. 그럼 어째? 이제 와서 다 뻥이라고 해? 그건 더 안 되지. 나보고 대신 복채를 토해 내라고 하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겠는 연지가 속만 태우고 있는데, 시경이 다시 한번 연지에게 머리를 숙여 사정했다.
“죄송합니다. 한 번만 저희 회장님을 만나 주십시오. 그다음엔 연지 양이 원하시는 곳으로 다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부탁입니다. 저를 보셔서라도…….”
“그냥 회장님을…… 만나 뵙기만 하면…… 된다고요?”
연지는 간곡한 얼굴로 부탁하는 시경을 난감한 마음으로 쳐다보았다.
“물론입니다. 만나만 주시면 됩니다. 그 이상은 연지 양을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도 연지는 내키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회장이라는 사람과 무슨 약속을 했는지는 몰라도 도력 같은 건 있지도 않은 연지가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닐 터였다.
게다가 할아버지나 연지나 사기인 게 들통이라도 나는 날에는…….
“부탁드립니다. 제발.”
“그게 그러니까…….”
일단은 해결 방안을 궁리할 시간을 버는 게 상책일 것 같았다. 괜히 어설프게 안 된다고 했다가 복채를 토해 내라 하면 큰일이니까.
‘그래 일단은 계속 제자인 척하자.’
“제가 지금 당장은 머리가 어지러워서 회장님을 뵙지 못할 것 같고요.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아, 예. 물론입니다. 어차피 회장님은 지금 병원에 계시니까요. 이따 오후에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연지 양은 이곳에서 좀 쉬십시오. 죄송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연지 양.”
“아, 예……. 그럼 오후에 잠깐 뵙고 가는 걸로 하지요. 호호…….”
어색한 웃음과 함께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고맙습니다. 연지 양. 정말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뭘 그렇게까지…….”
거듭 고맙다는 시경의 인사에 저도 모르게 겸연쩍어진 연지는 손사래를 치며 얼른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근데 회장님께서는 왜 병원에……?”
“그게, 음, 가벼운 지병이 있으셔서요.”
“지병……이요……?”
순간 그녀는 얼음이 되고 말았다.
머뭇거리는 시경의 말에서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회장이라는 사람의 병은 ‘가벼운’ 것과는 거리가 먼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오직 하나. 회장님이 무영도사를 찾는 이유. 아마도 그건…….
갑자기 그녀의 어깨에선 힘이 쭉 빠지고 있었다.
그사이 시경은 이따 모시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곤 방을 나가 버렸다.
깊은 한숨이 배어 나오는 그녀만 남겨 두고.
‘그거라면 전 죽어도 못 해요. 그건 도사가 아니라 도사 할아버지도 못 하는 일이라고요.’
혹시나 했던 것이 역시나였다. 아무래도 회장의 다급한 일이라는 게 그녀가 대충 할 수 있는 종류는 아니었던 것이다.
울고 싶은 마음이었다.
‘왜 하필 그거냐고요. 왜 하필…….’
무영도사를 찾아 지리산 매골까지 오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불치병에 걸려서 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로서는 최후의 방법으로 할아버지를 찾아온 셈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사주를 보고 무영이 하는 말은 언제나 똑같았다.
“마늘하고 생강, 부추, 미역 같은 걸 많이 먹어. 그리고 공기 맑은 곳에서 아침저녁으로 운동을 해. 일단 그렇게 한번 해 봐. 아직 죽을 운은 아니야.”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을 할 때마다 그녀는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죽을 날을 받아 놓은 사람들한테까지 거짓말로 복채를 받는 게 부끄러워서였다.
천하의 공연지도 그것만은 영 껄쩍지근했던 것이다. 그래서 한번은 사람들이 돌아가고 난 후 할아버지에게 따져 든 적도 있었다.
“곧 죽을 사람들한테까지 거짓부렁 하시면 어떡해요. 진짜로 믿으면 어쩌시려고요.”
“믿으면 더 좋지. 믿으라고 하는 말인데.”
물론 그녀의 타박에도 할아버지는 코웃음 치며 끄떡도 하지 않았지만.
“할아버지 말대로라면 세상에 죽을 사람은 하나도 없겠네요.”
“이것아, 죽고 사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건 줄 알아? 어차피 사람은 다 하늘이 정한 제명대로 살게 돼 있는 걸.”
“죽고 사는 게 대단치 않으면 뭐가 대단한데요?”
깔보는 듯한 할아버지의 말에 그녀가 발끈하고 대드는 것은 두 사람 사이의 한결같은 레퍼토리였다.
“죽을 때까지 어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여. 공덕을 쌓고 사는지, 죄업을 쌓고 사는지…….”
“그럼 할아버지가 하는 거짓말은 죄업이 안 된단 말이에요? 그걸로 복채까지 챙기시면서요?”
“이것아, 눈은 폼으로 달고 다니는 겨? 그 사람들이 내려갈 때 표정들이 어떻디?”
“그야…….”
연지는 문득 할아버지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실제로 사람들은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허탈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결 편안한 얼굴로 산을 내려가곤 했던 것이다.
할아버지 뺨에 싸대기라도 올려붙이고 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평상시보다 두둑한 복채를 줬으면 줬지.
“이제 알겄냐?”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덧붙여 말하곤 했다.
운명을 모르고 사는 것이 인간이지만 또한 몰라야 사는 것이 인간이라고.
그 말을 할 때면 유난히 그녀를 보는 할아버지의 눈이 깊어지곤 하던 것도 연지가 또렷이 기억하는 바였다.
그런데 회장이라는 사람이 그녀를 붙잡고 살아날 방도를 알려 달라면 어쩌지.
연지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할아버지처럼 마늘과 부추를 먹고 운동을 하라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가짜 도사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연지는 새삼 할아버지가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오묘한 깨달음을 얻고 있었다.
‘역시 할아버지가 도망친 데는 다 이유가 있었어. 이번에도 마늘 부추 어쩌고나 하려다가 뒷덜미를 제대로 잡힌 게지. 이노무 영감탱이. 어휴, 그러게 내가 몇 번을 말했어. 사람 목숨 갖고 장난치는 거 아니라고. 안 되겠다. 괜히 여기 있다간 나까지 도매금으로 넘어가면 큰일이니, 일단은.’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 했던가. 연지는 뒤늦게 정도(正道)를 택하기로 했다.
현 국면에선 삼십육계 줄행랑이 그것일 터.
한편 그녀가 당면한 입장 정리를 마치고 행동에 돌입할 그 시각, 정원에서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방금 전 나간 윤 비서였다.
그의 휴대폰 화면엔 상대방을 가리키는 8자리 번호가 선명했다.
“예. 방금 깨어났습니다.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입니다. 일단은 회장님을 뵙겠다고 하니 지켜봐야죠. 근데 나이가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회장님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실지……. 뭐, 걱정 말라 하시니 일단 믿어 보겠습니다만. 예. 그럼 이따 회장님 뵙고 나온 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통화를 마친 윤 비서가 자리를 뜰 무렵, 2층에 남은 연지는 가만가만 소리 죽여 아까 윤 비서가 나간 방문을 열어 보는 참이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살그머∼니.
그런데 이게 웬걸.
어제 윤 비서와 같이 왔던 양복 입은 어깨가 문 앞에 떡하니 서 있는 것 아닌가.
그와 눈이 마주친 연지의 입이 헤벌어졌다.
“뭐,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아침 들이라고 할까요?”
어깨는 연지를 보고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화장실…….”
“화장실은 방 안에 있을 텐데요.”
“아, 그렇구나.”
황급히 문을 닫은 연지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무래도 날 감시하고 있는 모양이야. 그 윤 비서라는 사람, 보기보단 용의주도한 게 틀림없어. 말이 부탁이지 이건 납치, 감금이잖아. 조짐이 좋지 않아. 이를 어째…….’
순진한 얼굴의 윤 비서에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오기가 났다.
‘흥, 이런다고 내가 도망가지 못할 줄 알고. 나를 우습게 봤어. 아저씨, 나 이래 봬도 지리산 매골 산다람쥐라고. 알아?’
그녀는 쪼르르르 창가로 달려가 커다란 창문을 열었다.
다행히 창문엔 잠금 장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있는 곳은 2층, 두 치 건너엔 커다란 나무까지 서 있다.
이런 형세라면 다람쥐, 밤톨 주워 먹기보다 더 쉽지 않은가.
‘좋아.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하자고.’
연지는 창턱에 올라서 가장 가까운 나뭇가지와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중학교 때의 실력과 몸무게라면 폴짝 뛰어도 되겠지만 이제 스물하고도 둘이 넘는 처녀의 엉덩이는 나뭇가지가 버티기엔 조금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일단 go!’
잊지 않고 보따리를 허리에 동여맨 연지는 팔짝 몸을 날렸다.
나뭇가지를 두 손에 쥐고 두 다리를 나무줄기에 안착시킬 찰나.
‘됐다.’
안심하던 순간도 잠시, 우지끈 소리와 함께 잡고 있던 나뭇가지가 부러져 버렸다.
그녀의 몸도 허공을 갈랐다.
“와악―”
“우앗―”
연지의 비명과 함께 다른 더 굵은 비명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물컹.
‘어, 이상하다. 왜 2층에서 떨어졌는데 하나도 안 아프고, 심지어 푹신하기까지 하지……?’
낯선 느낌에 밑을 내려다보니, 허걱, 그녀의 엉덩이 밑엔 버젓이 다른 사람이 깔려 있는 것 아닌가.
“아앗.”
“어, 윽―”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켜 보니 개구리처럼 납작 엎어진 사람이 있었다.
화창한 봄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낡은 겨울 코트를 덥수룩하게 걸친…….
‘늑대 인간?’
연지가 눈을 크게 뜨고 쓰러진 형체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문제의 대상은 신음 소리와 함께 천천히 몸을 뒤집어 보였다.
제멋대로 헝클어진 긴 머리, 면도를 하지 않아 거뭇거뭇 자란 턱수염, 덕지덕지 겹쳐 입은 헐렁한 웃옷,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입은 거지…… 패션?
“끄응…… 뭐야…….”
얼굴을 잔뜩 찡그린 남자는 이쪽을 보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앗, 죄송합니다. 밑에 계신 줄 모르고……. 다치진 않으셨어요?”
연지는 황급히 사죄의 말을 건넸다.
그러면서도 상대의 얼굴을 살피는 걸 멈추지 않았는데…….
‘오호, 거지치곤 제법 잘생겼는걸? 저 덥수룩한 것들만 빼고 나면……. 꽃……거지?’
‘꿩 대신 닭이라. 근데 어쩌죠. 우리 할아버지는 AI에 걸린 꿩이요, 저는 닭이 아닌데……. 가금류 근처에도 못 간다고요.’
아뿔싸 싶은 마음이었다.
괜히 아는 척을 했다가 도력이 있는 걸로 오해를 받게 생겼으니 말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새벽에 연지 양을 다시 모시러 올라가는 길이었는데, 연지 양이 완강하게 오지 않겠다고 버티시니 할 수 없이…….”
“그럼 절 납치하셨다는 거예요?”
이번엔 연지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제 선에서 일을 처리하려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마루에 옷가지를 챙겨 놓으신 걸 보고는 도사님처럼 또 말도 없이 떠나실까 마음이 다급해져서…….”
“그야 할아버지를 찾아 나서려다 보니, 아무리 그래도 납치를…….”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얘기에 횡설수설 할 말을 잃은 그녀였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런데 이 비서라는 사람은 깍듯한 목례와 함께 정중한 사죄를 하고 있으니, 이를 어쩐다.
“그럼 여기는 어디지요? 어제 전 어떻게……?”
“여기는 회장님 자택입니다. 어제 낮에 저희가 연지 양을 이곳으로 모셨지요.”
“그럼 벌써 꼬박 하루가 지났다는……!”
어젯밤은 어젯밤이 아니라 지지난밤이었던 것이다.
상상도 못 한 일에 놀란 연지는 거듭 허리를 굽혀 사죄하는 시경을 보며 대체 이 상황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거, 이렇게 되면 보통 일이 아니라는 얘긴데? 할아버지 대신 내가 인질로 잡혀 왔다는 거잖아.’
어째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날 이렇게 납치까지 해 올 정도면 한두 푼 받아 챙긴 게 아닌가 본데. 그래 놓고 혼자 줄행랑을 친 거야? 으이구, 내 팔자야. 뒷수습은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귀띔도 안 해 주고, 잠깐, 그러고 보니…….’
무영이 나갈 때 따로 남긴 말이 있었던 것도 같다.
하도 헛소리라 곧이듣지도 않았지만.
‘그게 뭐였더라……?’
뒤늦게 할아버지가 나가면서 했던 말을 더듬어 보며 비로소 연지는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어 돌아가고 있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썩어 빠진 배신자 영감탱이가 그녀만 남겨 두고 혼자 토낀 각 아닌가!
크으― 그렇다면 이 일을 어찌할꼬, 할아버지 대신 점이라도 쳐야 한단 말인가. 공양미 삼백 석에 몸빵한 심청이처럼?
‘안 돼. 그러다 사기라는 게 대번에 들통날 텐데. 그럼 어째? 이제 와서 다 뻥이라고 해? 그건 더 안 되지. 나보고 대신 복채를 토해 내라고 하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겠는 연지가 속만 태우고 있는데, 시경이 다시 한번 연지에게 머리를 숙여 사정했다.
“죄송합니다. 한 번만 저희 회장님을 만나 주십시오. 그다음엔 연지 양이 원하시는 곳으로 다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부탁입니다. 저를 보셔서라도…….”
“그냥 회장님을…… 만나 뵙기만 하면…… 된다고요?”
연지는 간곡한 얼굴로 부탁하는 시경을 난감한 마음으로 쳐다보았다.
“물론입니다. 만나만 주시면 됩니다. 그 이상은 연지 양을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도 연지는 내키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회장이라는 사람과 무슨 약속을 했는지는 몰라도 도력 같은 건 있지도 않은 연지가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닐 터였다.
게다가 할아버지나 연지나 사기인 게 들통이라도 나는 날에는…….
“부탁드립니다. 제발.”
“그게 그러니까…….”
일단은 해결 방안을 궁리할 시간을 버는 게 상책일 것 같았다. 괜히 어설프게 안 된다고 했다가 복채를 토해 내라 하면 큰일이니까.
‘그래 일단은 계속 제자인 척하자.’
“제가 지금 당장은 머리가 어지러워서 회장님을 뵙지 못할 것 같고요.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아, 예. 물론입니다. 어차피 회장님은 지금 병원에 계시니까요. 이따 오후에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연지 양은 이곳에서 좀 쉬십시오. 죄송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연지 양.”
“아, 예……. 그럼 오후에 잠깐 뵙고 가는 걸로 하지요. 호호…….”
어색한 웃음과 함께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고맙습니다. 연지 양. 정말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뭘 그렇게까지…….”
거듭 고맙다는 시경의 인사에 저도 모르게 겸연쩍어진 연지는 손사래를 치며 얼른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근데 회장님께서는 왜 병원에……?”
“그게, 음, 가벼운 지병이 있으셔서요.”
“지병……이요……?”
순간 그녀는 얼음이 되고 말았다.
머뭇거리는 시경의 말에서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회장이라는 사람의 병은 ‘가벼운’ 것과는 거리가 먼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오직 하나. 회장님이 무영도사를 찾는 이유. 아마도 그건…….
갑자기 그녀의 어깨에선 힘이 쭉 빠지고 있었다.
그사이 시경은 이따 모시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곤 방을 나가 버렸다.
깊은 한숨이 배어 나오는 그녀만 남겨 두고.
‘그거라면 전 죽어도 못 해요. 그건 도사가 아니라 도사 할아버지도 못 하는 일이라고요.’
혹시나 했던 것이 역시나였다. 아무래도 회장의 다급한 일이라는 게 그녀가 대충 할 수 있는 종류는 아니었던 것이다.
울고 싶은 마음이었다.
‘왜 하필 그거냐고요. 왜 하필…….’
무영도사를 찾아 지리산 매골까지 오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불치병에 걸려서 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로서는 최후의 방법으로 할아버지를 찾아온 셈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사주를 보고 무영이 하는 말은 언제나 똑같았다.
“마늘하고 생강, 부추, 미역 같은 걸 많이 먹어. 그리고 공기 맑은 곳에서 아침저녁으로 운동을 해. 일단 그렇게 한번 해 봐. 아직 죽을 운은 아니야.”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을 할 때마다 그녀는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죽을 날을 받아 놓은 사람들한테까지 거짓말로 복채를 받는 게 부끄러워서였다.
천하의 공연지도 그것만은 영 껄쩍지근했던 것이다. 그래서 한번은 사람들이 돌아가고 난 후 할아버지에게 따져 든 적도 있었다.
“곧 죽을 사람들한테까지 거짓부렁 하시면 어떡해요. 진짜로 믿으면 어쩌시려고요.”
“믿으면 더 좋지. 믿으라고 하는 말인데.”
물론 그녀의 타박에도 할아버지는 코웃음 치며 끄떡도 하지 않았지만.
“할아버지 말대로라면 세상에 죽을 사람은 하나도 없겠네요.”
“이것아, 죽고 사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건 줄 알아? 어차피 사람은 다 하늘이 정한 제명대로 살게 돼 있는 걸.”
“죽고 사는 게 대단치 않으면 뭐가 대단한데요?”
깔보는 듯한 할아버지의 말에 그녀가 발끈하고 대드는 것은 두 사람 사이의 한결같은 레퍼토리였다.
“죽을 때까지 어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여. 공덕을 쌓고 사는지, 죄업을 쌓고 사는지…….”
“그럼 할아버지가 하는 거짓말은 죄업이 안 된단 말이에요? 그걸로 복채까지 챙기시면서요?”
“이것아, 눈은 폼으로 달고 다니는 겨? 그 사람들이 내려갈 때 표정들이 어떻디?”
“그야…….”
연지는 문득 할아버지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실제로 사람들은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허탈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결 편안한 얼굴로 산을 내려가곤 했던 것이다.
할아버지 뺨에 싸대기라도 올려붙이고 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평상시보다 두둑한 복채를 줬으면 줬지.
“이제 알겄냐?”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덧붙여 말하곤 했다.
운명을 모르고 사는 것이 인간이지만 또한 몰라야 사는 것이 인간이라고.
그 말을 할 때면 유난히 그녀를 보는 할아버지의 눈이 깊어지곤 하던 것도 연지가 또렷이 기억하는 바였다.
그런데 회장이라는 사람이 그녀를 붙잡고 살아날 방도를 알려 달라면 어쩌지.
연지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할아버지처럼 마늘과 부추를 먹고 운동을 하라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가짜 도사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연지는 새삼 할아버지가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오묘한 깨달음을 얻고 있었다.
‘역시 할아버지가 도망친 데는 다 이유가 있었어. 이번에도 마늘 부추 어쩌고나 하려다가 뒷덜미를 제대로 잡힌 게지. 이노무 영감탱이. 어휴, 그러게 내가 몇 번을 말했어. 사람 목숨 갖고 장난치는 거 아니라고. 안 되겠다. 괜히 여기 있다간 나까지 도매금으로 넘어가면 큰일이니, 일단은.’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 했던가. 연지는 뒤늦게 정도(正道)를 택하기로 했다.
현 국면에선 삼십육계 줄행랑이 그것일 터.
한편 그녀가 당면한 입장 정리를 마치고 행동에 돌입할 그 시각, 정원에서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방금 전 나간 윤 비서였다.
그의 휴대폰 화면엔 상대방을 가리키는 8자리 번호가 선명했다.
“예. 방금 깨어났습니다.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입니다. 일단은 회장님을 뵙겠다고 하니 지켜봐야죠. 근데 나이가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회장님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실지……. 뭐, 걱정 말라 하시니 일단 믿어 보겠습니다만. 예. 그럼 이따 회장님 뵙고 나온 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통화를 마친 윤 비서가 자리를 뜰 무렵, 2층에 남은 연지는 가만가만 소리 죽여 아까 윤 비서가 나간 방문을 열어 보는 참이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살그머∼니.
그런데 이게 웬걸.
어제 윤 비서와 같이 왔던 양복 입은 어깨가 문 앞에 떡하니 서 있는 것 아닌가.
그와 눈이 마주친 연지의 입이 헤벌어졌다.
“뭐,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아침 들이라고 할까요?”
어깨는 연지를 보고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화장실…….”
“화장실은 방 안에 있을 텐데요.”
“아, 그렇구나.”
황급히 문을 닫은 연지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무래도 날 감시하고 있는 모양이야. 그 윤 비서라는 사람, 보기보단 용의주도한 게 틀림없어. 말이 부탁이지 이건 납치, 감금이잖아. 조짐이 좋지 않아. 이를 어째…….’
순진한 얼굴의 윤 비서에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오기가 났다.
‘흥, 이런다고 내가 도망가지 못할 줄 알고. 나를 우습게 봤어. 아저씨, 나 이래 봬도 지리산 매골 산다람쥐라고. 알아?’
그녀는 쪼르르르 창가로 달려가 커다란 창문을 열었다.
다행히 창문엔 잠금 장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있는 곳은 2층, 두 치 건너엔 커다란 나무까지 서 있다.
이런 형세라면 다람쥐, 밤톨 주워 먹기보다 더 쉽지 않은가.
‘좋아.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하자고.’
연지는 창턱에 올라서 가장 가까운 나뭇가지와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중학교 때의 실력과 몸무게라면 폴짝 뛰어도 되겠지만 이제 스물하고도 둘이 넘는 처녀의 엉덩이는 나뭇가지가 버티기엔 조금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일단 go!’
잊지 않고 보따리를 허리에 동여맨 연지는 팔짝 몸을 날렸다.
나뭇가지를 두 손에 쥐고 두 다리를 나무줄기에 안착시킬 찰나.
‘됐다.’
안심하던 순간도 잠시, 우지끈 소리와 함께 잡고 있던 나뭇가지가 부러져 버렸다.
그녀의 몸도 허공을 갈랐다.
“와악―”
“우앗―”
연지의 비명과 함께 다른 더 굵은 비명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물컹.
‘어, 이상하다. 왜 2층에서 떨어졌는데 하나도 안 아프고, 심지어 푹신하기까지 하지……?’
낯선 느낌에 밑을 내려다보니, 허걱, 그녀의 엉덩이 밑엔 버젓이 다른 사람이 깔려 있는 것 아닌가.
“아앗.”
“어, 윽―”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켜 보니 개구리처럼 납작 엎어진 사람이 있었다.
화창한 봄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낡은 겨울 코트를 덥수룩하게 걸친…….
‘늑대 인간?’
연지가 눈을 크게 뜨고 쓰러진 형체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문제의 대상은 신음 소리와 함께 천천히 몸을 뒤집어 보였다.
제멋대로 헝클어진 긴 머리, 면도를 하지 않아 거뭇거뭇 자란 턱수염, 덕지덕지 겹쳐 입은 헐렁한 웃옷,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입은 거지…… 패션?
“끄응…… 뭐야…….”
얼굴을 잔뜩 찡그린 남자는 이쪽을 보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앗, 죄송합니다. 밑에 계신 줄 모르고……. 다치진 않으셨어요?”
연지는 황급히 사죄의 말을 건넸다.
그러면서도 상대의 얼굴을 살피는 걸 멈추지 않았는데…….
‘오호, 거지치곤 제법 잘생겼는걸? 저 덥수룩한 것들만 빼고 나면……. 꽃……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