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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연지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이 꽃거지 총각도 흙바닥에 비스듬히 쓰러진 자세로 그녀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신기한 걸로 따지면 이쪽도 만만치 않은 모양이었다. 그 또한 연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똑같이 고개를 갸우뚱하니 말이다.

그런데 어쩐지 표정이 멍하다.

“안 다치셨어요?”

다시 한번 연지가 물어도 상대는 그대로였다.

“이봐요, 아저씨. 안 다치셨냐고요.”

뒤늦게 멍했던 표정을 푼 그가 말했다.



4. 천사와 악마


“어, 선녀다. 하늘에서 선녀가 떨어졌어. 근데 나 선녀 팬티 봤어. 하늘에서 떨어질 때.”

“네에?”

연지는 멀쩡하게 생긴 총각의 입에서 튀어나온 엉뚱한 말에 당황스럽기보다는 황당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이 사람, 뭐지? 동네 바보?’

아니면 충격에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었다. 그녀를 보고 선녀라 하는 걸 보면.

물론 사람들이 가끔씩 억새 집에 사는 그녀를 ‘선녀 보살’로 오해해 부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진짜 하늘에서 떨어진 선녀라니…….

연지는 황당함을 감추고 다급히 말했다.

“저 선녀 아니에요. 팬티가 아니라 내복이고요. 그리고 제가 봄에도 내복 입고 다니는 건 무덤까지 비밀, 아셨죠? 그나저나 아저씨, 이게 몇 개로 보여요?”

허겁지겁 뒷수습을 하면서도 할 말을 다 한 연지는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은 총각에게 손가락 세 개를 흔들어 보였다.

“세…… 개……. 헤…….”

다행히 꽃거지 총각은 아주 맛이 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비록 취한 사람처럼 꼬부라진 혀로 반쯤 나사 풀린 웃음을 웃는 게 영 수상쩍긴 했지만.

‘그럼 술에 취한 건가?’

문득 의심이 든 연지는 즉시 총각의 얼굴에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킁킁 냄새를 맡아 보았다.

술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앗.

쪽.

순간 연지는 화들짝 놀라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총각이 연지가 가까이 다가간 틈을 타 볼에 쪽, 기습 뽀뽀를 한 것이었다.

“아저씨이― 뭐 하는 거예욧!”

연지는 즉각 오염된 볼을 손으로 문지르며 빼액 소리를 질렀다.

“헤. 예쁘다.”

“이건 성추행이에요. 명백한 성추행이라고요. 아저씨가 날 언제 봤다고 뽀뽀를 해요. 내 볼은 누구의 입술도 닿지 않은 청정 구역이었는데!”

“청정 구역……. 헤…….”

그러나 꽃거지 총각은 그녀의 노발대발에도 멍청하게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문득 바보에게 소리를 질러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바보는 바보일 뿐인 것이다.

근데 아무리 술에 취했다 한들 이렇게까지 멘탈이 제자리가 아닐 수 있는 것일까.

설마 그녀가 깔고 앉은 충격에 이렇게 된 건 아니겠지?

연지는 직접 확인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잠깐 맥 좀 짚어 볼게요.”

그 즉시 쪼그리고 앉아 다짜고짜 그의 손목을 잡아 본 건 그래서였다.

그러자 꽃거지도 그녀를 향해 헤― 웃었다. 바보 같았지만 음흉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맥은 정상이네요. 다친 데도 없는 것 같고. 전 이제 가도 되겠어요.”

“나도 데려가.”

“네에?”

“나도 데려가라고. 나도 하늘나라 가고 시퍼.”

배시시 웃는 꽃거지 입가로 침이 흘렀다.

그걸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대놓고 웃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하늘나라요?”

“응. 하늘나라. 나도 갈 거야.”

아무래도 이 총각은 선녀가 하늘나라에라도 사는 줄 아는 모양이다.

‘하늘나라 가면 죽어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도 못 들어 보셨나.’

하지만 연지는 정신이 나간 사람의 엉뚱한 말에 붙잡혀 있을 틈이 없었다.

“저도 하늘나라 못 가요. 나무꾼이 날개를 훔쳐 갔거든요. 그래서 나무꾼 잡으러 가야 하니 절 본 건 비밀이에요. 내복도요. 아셨죠? 쉿.”

“응. 쉿.”

빈티지한 차림의 바보는 쉿 소리와 함께 손가락으로 입술을 막는 그녀의 동작을 그대로 따라 했다. 그 아이처럼 해맑은 모습에 연지는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네. 그럼 안녕―”

“안녀엉―”

그녀는 흙바닥에 철퍼덕 앉은 자세로 손을 흔드는 남자를 뒤에 남겨 두고 서둘러 뒤뜰을 가로질렀다.

우선은 밖으로 나가는 문을 찾아야 했다. 윤 비서의 눈에 뜨이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니 말이다.

뒤뜰 여기저기 듬성듬성 서 있는 나무와 커다란 괴석을 엄호물 삼아 뜰을 가로지르니 마침내 나가는 문이 보였다.

그런데 어쩐지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아, 이래서 바보 아저씨가 들어왔구나. 헷, 일이 쉽게 풀리겠는걸?’

다행히 지켜보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아싸.’

신이 난 연지는 치마가 휘날리도록 쏜살같이 문을 향해 돌진했다. 문을 통과해 나온 뒤에도 붙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성공!’

연지는 쾌재를 부르며 대문 옆으로 길게 이어진 돌담을 따라 내처 달렸다.

커다란 저택이라 그런지 담도 길고 담 밖 골목도 조용했다.

그러고 보니 골목을 따라 쭈욱 보이는 풍경도 비슷비슷한 크기의 커다란 저택들뿐이었다.

역시 텔레비전에나 나오는 부자 동네인 모양이다.

‘부자 동네는 부자 동네 같은데,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네. 이대로 가면 버스 정류장이 나올까?’

연지는 길을 물을 만한 사람을 찾아 두리번거렸으나 주변엔 걸어 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잠시 되는대로 걷다 보니 마침 저 앞에서 부우우웅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오토바이?’

가만히 기다리니 과연 오토바이 하나가 골목을 돌아 이쪽으로 오는 게 보였다.

딱 봐도 부한 잠바때기에 추리닝, 헐렁헐렁 구겨 신은 운동화, 검은 헬멧을 쓴 배달의 기수였다.

“잠깐만요, 잠깐―”

마침 이쪽으로 다가오는 오토바이를 향해 손을 크게 들어 보이며 연지는 다급히 외쳤다.

“앗―”

그런데 문제는 그녀를 보고 속도를 줄일 줄 알았던 오토바이가 오히려 더 부아앙 가속 페달을 밟았고, 흠칫 놀란 연지가 뒷걸음질치다가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는 데 있었다.

끼이익― 끽.

날카로운 급정거 소리가 울린 건 그 직후였다. 속도를 내던 오토바이가 뒤늦게 그녀를 보고 멈춰 선 모양이었다.

“아야야…….”

그사이 연지는 엉겁결에 땅바닥에 쓸려 버린 두 손의 상처를 눈으로 확인하며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온몸으로 찌르르한 아픔이 전해지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시야에 저만치 서 있는 오토바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검은 헬멧은 아까부터 미동도 않은 채 그녀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얼른 다가와 일으켜 줘도 모자랄 판에, 뭘 보고 있는 거야, 쳇.’

좀처럼 가시지 않는 아픔 속에 보란 듯이 저쪽을 꼬나봐 준 건 그래서였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이쪽이 피해자라는 걸 충분히 어필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어랏. 그런데 칠흑같이 새까만 헬멧은 여전히 오토바이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만 있지 않은가.

‘저 인간이, 뭘 쳐다만 보고 있어!’

순간 연지는 본래의 아픔도 잊고 발딱 일어나 소리쳤다.

“이봐요. 사람이 이 지경이면 최소한 어딜 다쳤는지 확인은 해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사과는 못 할망정?”

양 허리에 두 손을 얹고 그녀가 발끈 소리치자 배달의 기수는 그제야 한 발로 딸깍 사이드 브레이크를 채우더니 오토바이에서 내려서기 시작했다.

‘흥. 이제야 말귀를 알아들었나 보군.’

늘씬한 두 다리를 자랑하며 묵묵히 내리는 남자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녀에게 스쳐 간 생각은 이랬다.

오토바이에서 내린 우월한 기럭지의 소유자는 그녀보다 헬멧 하나는 너끈히 더 높아 보였는데도.

딸깍.

뒤늦게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건, 성큼성큼 그녀를 향해 걸어오는 남자가 헬멧 가리개를 들어 올려 감춰져 있던 얼굴의 일부를 드러냈을 때였다.

헬멧 사이로 드러난 누가 봐도 심상치 않은 두 눈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 ‘뭐?’냐고…….

알 수 없는 차가운 기운이 등허리를 식히며 내려가고 있을 때 상대는 급기야 획 하니 헬멧을 벗고선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나한테 사과하라고 한 건가?”

쇠가 갈리는 꺼끌꺼끌한 저음.

그 거만한 느낌에 또 한 번 흠칫 놀란 연지는 그대로 멍하니 높직한 상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일자로 확 뻗은 두 눈, 거침없는 시선, 반항적인 이마, 아찔하게 떨어지는 역삼각형의 거만한 턱선에 기막히게 어울리는 육감적인 입술까지.

누가 봐도 참 불량미 터지는 얼굴이었다.

세상 멋진 악역이란 악역은 다 씹어 먹게 생겼다고나 할까.

어째서 저 흔한 헬멧 속에 이토록 불온하게 잘생겨 먹은 얼굴이 들어 있었단 말인가.

심장 쫄깃해지게.

“그러니까 그게요.”

중간에 침을 꼴깍 삼키며 뒤로 한 발 물러선 건 본능적인 방어 기제의 작동이었다.

누구라도 이런 야수적 하드코어를 보면 같은 반응이 나올 것 같았다.

“만약 그렇……다면……요?”

분명히 밝혀 두는 바이지만 이건 불손한 ‘요’가 아니라 공손한 ‘요’다.

“그 말은…… 그쪽이 넘어진 게 나 때문이라는 뜻인가?”

“네. 여기. 피도 나요. 보이시죠?”

연지는 남자에게 손바닥의 쓸린 상처를 보여 주는 것으로 충분할 줄 알았다.

“근데 그게 왜 내 탓이라는 거지? 난 아가씨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하지만 아니었다.

“그건 제가 잘 피했으니까요. 아까 제가 손 흔들었을 때 아저씨가 속도를 내시는 바람에 제가 엎어진 거거든요.”

그렇다면 조목조목 이해시켜 드릴밖에.

“그래? 그 말은…… 나는 아가씨를 지나쳤을 뿐이고 아가씬 멍청하게 서 있다 혼자 엎어졌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나?”

“네에? 그게 어떻게 그렇게 돼요?”

그녀는 황당하다는 눈으로 입이 무례한 남자를 쳐다봤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아랑곳 않고 차갑게 말을 이었다.

“아니라는 뜻이군. 좋아. 그럼 얼마를 원하는데?”

“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얼마를 원하냐니.”

순식간에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은 되묻는 의미와 달리 남자의 말을 그 즉시 이해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건 전쟁이 선포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왜 못 알아들은 척하고 그래? 얼마면 되냐니까? 치료비를 원하는 거 아니야?”

급기야 남자는 짜증스럽다는 제 기분을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뭐라구욧? 아까부터 정말 이 아저씨가 사람을 어떻게 보고……. 누가 돈 달랬어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라는 거지? 아저씨 때문에 엎어졌으니 사과 정도는 하시라는 말이잖아요.”

“돈을 주는데 사과가 왜 필요하지? 돈 주겠다고. 말해. 얼마면 되는지.”

“진짜 이 아저씨가 보자 보자 하니까. 아저씨, 그렇게 부자예요? 돈이면 다 되게? 달라면 달라는 대로 다 주실 수는 있고요? 보아하니 배달 일 하시는 분인가 본데, 그렇게 돈이 많아요?”

“뭐? 배달? 지금 나한테 배달이라고 한 거야?”

“네?”

그러나 다음 순간 전투의 향방은 배달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은 남자로 인해 엉뚱하게 튀고 말았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하, 배달? 배달이라고? 나 이런…… 어이가 없네. 내 살다 살다 이런 어이없는 경우는 처음 당하네. 나, 원, 참…… 정말…… 어이가 없네……. 감히 내 야마하를 딸딸이에 비교해?”

‘어, 이건 베테랑의 유아인 대사 아닌가?’

문득 그녀는 유명한 영화 대사를 표정까지 그대로 재연하고 있는 상대를 난해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빡쳐서 뒷목을 잡고 눈을 감고 있던 그는 다음 순간 정색하고 말하지 않겠는가.

“좋아. 이렇게 된 김에 단도직입적으로 묻도록 하지. 이제부터 내 질문에 정확히 답하도록. 알았지?”

심각한 얼굴로 질문을 하겠다는 것이다. 질문은 원래 그녀가 해야 하는데 말이다.

어리둥절해진 연지는 멍하니 원맨쇼를 하는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다 홀린 듯 묻고 말았다.

“무슨 질문인데요?”

“좋아. 첫 번째. 아가씨, 혹시 ‘개처럼 짖어 봐’라고 들어 본 적 없어?”

“네에?”

‘뭐라고라? 개처럼 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