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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내리는 산

1화







“경합을 치르기 전, 종친들의 의견을 묻고자 한다.”

엄숙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겨울이 시작되고부터 줄곧 흐렸던 하늘 탓에 한낮인데도 온 사방에 그늘이 짙었다. 진씨 가문 사유지 중앙에 위치한 진협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인, 한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가문의 일을 논하기 위해 지어진 정당(正堂) 내부에는 수십 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 끝에 홀로 앉아 말하라는 듯 손짓하는 자는 진씨 가문의 가주 진사호였다.

가문 내에서 가주의 힘은 오래전 존재했던 왕과 같다 할 수 있으니, 머리가 희끗한 종친들도 그에게는 고개를 숙였다.

“자격이 부족한 자가 최종 경합을 치룰 수 있겠사옵니까?”

가주의 손짓에 입을 연 이는 곧 주름진 입매를 고집스럽게 다물며 한 방향을 응시했다. 주변에 앉아 있던 종친들 역시 일제히 한곳을 응시하니 가주의 시선도 저절로 그들을 따랐다. 그 끝에는 무표정한 얼굴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여희를 말함인가.”

가주의 물음에 그들은 한뜻으로 고개를 숙였다. 진사호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여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제 얘기가 나와도 흔들리지 않는 시선과 꼿꼿한 자세는 저 아이를 처음 본 어릴 적부터 변치 않는 모습이었다.

‘하여 늘 눈엣가시 같았던 것.’

진사호가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며 짧은 미소를 보였다. 여희의 맞은편에 자리한 제 아들에게 그는 만족스런 눈을 빛냈다. 저와 닮은 얼굴과 성정이었다. 하여 제 뒤를 이어 반드시 가주가 되어 줬으면 하는 아이. 그 아이가 이렇게 판을 짜 놨으니, 아비로서 응해 줘야지.

진사호가 입을 열었다.

“여희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그 말에 무감정하던 그녀의 얼굴에 흐릿한 조소가 떠올랐다. 여희는 곧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내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그의 눈빛에서 서늘한 냉기가 흘렀다.

“허면 어찌해야 자격이 주어지겠습니까. 저는 진씨 가문의 손이며 진협부 내에 거하고 있습니다. 이 이상의 자격이 필요한 경합이었습니까.”

“그 역시 맞는 말이지만 가문의 가주를 뽑는 자리이니만큼 가문을 위할 사람이 올라야 하는데, 다른 가문과도 인연이 깊은 자가 후보에 있으니 종친들의 불안도 옳은 게 아니겠습니까.”

드디어 입을 연 사내와 여희의 눈이 마주쳤다. 날 선 공기가 스쳤다. 침묵이 내려앉은 정당 내부에 곧 소란스런 말다툼이 찾아들었다.

여희의 주변에 앉아 있는 자들이 목소리를 높이면 반대편에서도 핏대를 세워 가며 되받아쳤다. 그 와중에도 두 사람만은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사내, 진석도는 진사호의 장자로 여희와 동년배였다. 아비를 닮아 눈매가 매섭고 낯빛이 어두웠으며 차가운 얼굴에 감정이 떠오른 적은 극히 드물었다.

제 손 더럽히길 싫어해 아랫것들을 능히 부릴 줄 아는 것 역시 아비 진사호를 닮은 모습 중 하나였다. 무능하지만 가주의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지를 받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같이 폐쇄적이었다면 가문의 번영도 한순간이었을 겁니다! 전대 가주께서도 순가와 인연을 맺어 혼례를 올리셨습니다. 한데 갑자기 이런 말이 나오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허나 그분을 포함해 선대 가주들은 전부 이곳에서 나고 자란 분들이 아닙니까! 어찌 진협부 내에서 나지도, 자라지도 않은 자가 최종 경합에 오를 자격이 있겠습니까!”

“지난 10여 년의 세월은 세월도 아닌가! 어찌 자라지 않았다 말할 수 있어……!”

“이곳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10여 년의 세월 이전에는 진협부 내에서 자라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이지요.”

“그게 무에 그리 중요하다고……!”

빌어먹을 관례와 관습. 누군가 비웃으며 그들을 바라봤지만 결국 속으로만 삼켜야 하는 말이었다. 이제껏 그 관례와 관습으로 이어진 가문에서 풍요를 누려 온 게 종친인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허면 어찌해야 자격이 주어지겠습니까.”

소강상태에 접어든 정당에서 여희가 처음으로 종친들을 훑어보며 물었다. 그들의 면면에 피어오른 만족감을 눈에 새겨 넣을 듯 형형한 눈빛이었다.

가주가 되기 위한 최종 경합이 치러지기 불과 넉 달 전이었다.



***



혜호국의 수도인 화도, 그 북쪽을 지키는 진 가문의 진협부보다도 더 북쪽에 위치한 담룡산(倓龍山)은 혜호국 내에서도 가장 높고 험준한 산이며 혜호국의 상징이었다. 정상은 사시사철 눈이 녹지 않았고 그 밑으로는 수풀이 우거져 어떤 자의 출입도 허락지 않을 듯 보였다.

실제로 담룡산은 신성한 산으로 지정돼 함부로 출입할 수 없었으며 근 백여 년간 산을 들어간 자들 중에 살아 돌아온 이가 없었다.

‘담룡산으로 가십시오.’

그 입구에 여희가 서 있었다. 그녀의 눈이 보이지도 않는 담룡산의 끝을 향했다. 그러다 다가오는 기척에 곧 뒤돌아 진석도를 응시하는 눈은 위험으로 가는 사람 같지 않게 담담했다.

그의 뒤에는 저를 염려하는 이들과 비웃는 이들 몇이 횃불을 든 채 멀리 떨어져 자리했다. 달이 뜬 늦은 밤이었다.

여희는 저를 걱정스런 눈으로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눈짓한 뒤 진석도를 보며 입을 열었다.

“또다시 짧은 천하가 되지 않게 잘 버티고 있어.”

“…….”

“그땐 얼마였지. 3년, 이었나.”

여희의 말에 진석도가 처음으로 차갑던 표정을 지우고 얇은 입매를 끌어 올려 웃었다. 그의 비열한 눈매가 호를 그렸다.

“그래. 너만 없었다면 내 천하였지.”

“그랬을까.”

“내 자리였고, 이딴 경합 따위 놀음 한판 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한데 겨우 너 같은 것 하나 때문에…… 끝끝내 여기까지 왔다.”

“그리 말하기엔 만년 내게 지기만 하지 않았나? 가주가 되려면 능력이 무엇보다 우선이라기에 경합에서 장원을 놓친 적이 없다. 한데 이런 자격까지 검증하려 하니 진정 졸렬하고 볼품없구나.”

진석도가 여희의 앞으로 한 발짝 다가가 그녀와 마주섰다. 부친을 닮아 키가 큰 편인 여희와 진사호를 닮아 키가 작은 편인 진석도의 눈높이는 비슷했다.

“너는 가주가 되지 못해.”

그의 말에 여희가 눈을 빛냈다.

“내가 밟아야 할 말을 또 한 번 늘려 줘서 고맙다 해야겠네.”

진석도가 여희에게 검을 넘겼다. 날이 무뎌도 한참 무뎌 풀잎 하나 베지 못할 검이었다. 성산(聖山)인 담룡산에서는 살생이 금지되어 날카로운 창칼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진석도가 만면에 비웃음을 보였다.

“겨우 그 칼로 뭘 할 수 있겠느냐.”

그 무딘 칼 하나 이기지 못해 내 앞에 무릎 꿇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여희는 그리 생각하며 담담히 담룡산을 향해 돌아섰다.

담룡산에서 남은 넉 달을 버티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을 때 기꺼이 그러겠다 답한 이유 중에는 밤이면 매번 저를 찾아오는 꿈이 있었다. 늘 제 몽중에 나왔던 곳이다. 하여 익숙하고도 낯선 땅이었다.

여희에게 가주 경합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길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제게 중요한 것은 가주 경합이 아니라 담룡산, 저곳이었다. 밤이면 항상 꿈으로 저를 이끌던 곳. 손짓하듯 저를 부르던 땅. 가서 그 꿈을 확인하고 싶었다.

여희는 이내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 초겨울에도 눈보라가 몰아치는 담룡산으로.



***



새하얀 눈밭이 펼쳐진 산채 마당엔 포근한 공기가 가득했다. 그런데도 눈은 녹지 않고 달 아래 빛을 발하는 신묘한 곳이었다. 드넓은 산채를 종종거리며 뛰어가던 토끼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산채 중앙에 위치한 방문이 벌컥 열리자 토끼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자호…….”

밖으로 나온 사내가 놀란 표정으로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달빛을 받아 더 시리게 보이는 금색 눈동자가 마치 천 리 길을 꿰뚫듯 깊어지며 사방을 살폈다. 그의 시선이 곧 한 곳에 멈춰 섰다.

토끼는 어느새 놀라 도망가 버렸고 동면에 든 동물들은 깨지 않고 고요히 산채 한 구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사내는 그것을 신경 쓸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곧 뇌성이 천지를 울리듯 사내의 목소리가 담룡산 전체로 퍼졌다.

“자호……!”

거대한 신력이 산 전체를 감싸 안았다. 그 덕에 산짐승들의 귀에는 어떤 소리도 들어가지 않았으나 한 짐승에게만큼은 무엇보다 뚜렷한 음성으로 박혀 들었다.

“멈춰라.”

애써 떨림을 숨긴 낮은 목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일순 흐트러진 신력으로 산채에도 차가운 겨울바람이 들이닥쳤다. 뒤이어 그에 대답하듯 멀리서 거대한 호랑이의 포효 소리가 들렸다. 사내는 그제야 거칠게 호흡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너른 어깨가 크게 오르내리고 하얀 입김이 입술을 타고 흘렀다. 사내는 담룡산을 닮아 깎아 지르는 듯 날카롭게 떨어지는 얼굴선과 육 척을 훨씬 웃도는 모습이었다. 하여 다가가기조차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러나 다시 눈을 뜬 그의 얼굴엔 누구에게 향한지 모를 애절함이 담겨 있었다.

“여희…….”

힘이 흐트러지며 포근하던 온기가 잠시 자취를 감췄으나 신력이 제자리를 찾자 산채에도 다시 미약한 온기가 찾아들었다. 늘 북풍이 몰아치던 눈에 그리움이 흐르기 시작한 것처럼.



***



‘여희야.’

언제나 곁엔 누군가 있었다. 저를 위로해 주는 사람, 제게 힘을 보태는 사람, 제 뒤를 따르며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 그런데도 종종 혼자 남겨진 것만 같은 때가 있었다.

어깨가 무거워 멈춰 버리고 싶었던 적이 있고, 두렵고 무서운 때도 있었다. 그렇게 살아온 생이었다. 그러나 그런 여희에게도 이 순간만큼은 단 한 번도 겪지 못한,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아직 검집에서 뽑아 들지도 못한 검을 고쳐 쥐며 호흡을 가다듬으려 해 봤지만 긴장이 등허리를 내달렸다. 떨리는 입술 사이로 입김이 흩어졌다.

눈앞에서 날카롭게 빛나고 있는 안광의 주인은 담룡산의 산군, 대호였다. 눈이 마주친 순간 사지를 옭아맬 것처럼 형형하게 뿜어지는 기세에 여희는 정신을 차리려 턱을 악물었다.

‘너는 가주가 되지 못해.’

바람결에 흩어지는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며 포기하길 종용했다. 그러나 여희는 생전 본 적 없는 크기의 호랑이와 맞서다 죽는 한이 있어도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껏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겨 왔고 수십 명의 살수가 휘두르는 검에 사지가 찢기고 피를 흘려도 끝끝내 살아남아 살기등등한 진협부에서 버텼다.

‘진여희,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

가주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될 수 없다는 저들의 말을 짓밟고 이기기 위해서. 내가 가는 길을 보고 배우겠다던 누군가를 위해. 또한, 스스로를 위해.

“제발…….”

한순간의 빈틈에도 정신을 놓을 것처럼 두려움이 몰아쳤다. 그런 여희에게로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희는 피가 날 듯 검을 움켜잡았다. 겨우 무딘 검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냐던 진석도의 말이 이 순간만큼은 더없이 공감되었으나 지금 믿을 것이라곤 이 검 한 자루뿐이었다. 식은땀이 흐르는 목덜미로 차가운 바람이 스쳤다.

‘반드시, 살아 돌아갈 것이다.’

여희가 검을 뽑아 든 순간, 거대한 호랑이가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내달렸다. 순식간에 여희의 위로 올라탄 기세는 가히 위협적이었다. 뚜렷한 안광과 여희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치고, 가까스로 막아선 검이 힘에 못 이겨 점차 그녀에게로 내려앉았다.

날카로운 발톱이 박힌 다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당장이라도 찢어발길 듯 짐승의 이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든 걸 받아 내는 여희의 잇새로 억눌린 신음소리가 흘렀다. 목덜미로 가까워지는 검은 더없이 위협적이었다.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

전력을 다해 검을 밀어 내던 여희가 한 맺힌 소리를 질렀다. 순간 담룡산 전체로 기이한 울림이 퍼져 나갔다. 뒤이어 여희를 덮쳐누른 대호의 우레와 같은 포효가 주변을 울렸다. 그 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지던 여희의 어깨로 두꺼운 이빨이 깊숙이 박혔다.

고통에 찬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끝으로 어두운 담룡산에 정적이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