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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방……?’
시야에 들어온 천장이 낯설었다. 가물가물한 눈을 몇 번 깜빡여 혼몽한 정신을 붙잡아 보려 했지만 가까이서 풍겨 오는 향냄새가 그녀를 다시 잠으로 이끌었다.
두 번째 눈을 뜬 건 누군가 맥을 짚고 있을 때였다. 흐릿한 사람의 형상이 얼핏 보였지만 여희는 곧 눈을 감았다.
세 번째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천장을 똑바로 마주 볼 수 있었다. 여전히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어깨를 타고 오는 통증을 발판 삼아 힘겹게 잠에서 벗어났다.
푹신한 침상에 누워 있다는 걸 자각하자마자 일어나려 했으나 환부에서부터 날 선 고통이 밀려왔다. 여희는 결국 신음을 삼키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여기가 어디지?’
주위를 둘러보는 눈엔 경계심이 가득했다. 고아하고 잘 정돈된, 꽤 넓은 방이었다. 값비싸 보이는 물건이 몇 있었고 사방으로 커다란 창이 즐비해 방 안으로 햇볕이 쏟아져 들어왔다.
지금 누워 있는 침상만 해도 꽤 커다랬으며 침상에서 문까지의 거리도 상당했다. 가주의 방보다 넓었고 필요 없는 것은 두지 않아 조화로움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여희는 경계를 놓지 않고 기척에 주의를 기울였다.
“일어났느냐.”
말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움직임이 여의치 않았다. 발자국 소리는 금세 침상에 가까워졌다. 소리만 들었을 땐 지난 밤 호랑이의 포효처럼 깊고 거칠었다.
“누구, 십니까.”
오래 잠들어 있었던 건지 완전히 갈라진 목이 아파 여희는 인상을 구겼다. 곧 한 여인이 침상에 앉았다.
“담룡의 산군이니라.”
“산군…….”
그 말을 곧장 이해하지 못한 건 호랑이에게 어깨를 물린 탓이려나. 여희는 망연히 그녀의 말을 따라하다 곧 정신을 차린 듯 몸을 일으켰다. 타고 올라오는 통증에 얼굴을 굳혔지만 본능적인 두려움이 먼저였다.
짙은 흙색의 옷을 몇 겹이나 겹쳐 입어 더욱 위압적으로 보이는 이의 눈이 지난 밤 보았던 호랑이의 안광을 닮아 있었다. 선명한 턱선과 뚜렷한 눈매마저도 그때를 떠올리게 만든 탓에 여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셔라.”
그러나 여희가 어떤 상태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산군은 사기그릇을 내밀었다. 그 안에 담긴 게 꼭 사약처럼 보여서 여희는 조금 더 뒤로 물러났다. 그릇을 든 곧은 손이 호랑이의 그것과 겹쳐 보였다. 안온한 방 안과는 전혀 다른 긴장감이 침상 위로 내려앉았다.
“상처는 곧 낫겠으나 한동안 움직임은 불편할 것이다.”
“…….”
마시지 않을 걸 알았는지 그릇은 침상 밑으로 옮겨졌다. 여희의 눈에는 여전히 긴장과 경계가 가득했다. 그것은 자신이 담룡의 산군이라는 말을 증명하듯 그녀의 눈동자가 형형한 색을 보였기 때문이다. 농담으로 들을 수 없을 만큼 뚜렷한 눈빛이었다.
“산군이 허락하지 않은 자가 신성한 땅에 발을 들이면 반드시 관문을 거쳐야 하며 그를 통과하지 못하면 담룡에 들어올 그릇도 되지 않는 것이니 내쳐진다.”
낮고 거친 목소리가 귓가를 두드렸다.
“관문, 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긴장을 삼키며 묻자 산군은 무감정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군과 합을 겨루는 것.”
“……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관문인가. 여희의 미간이 자연스럽게 구겨졌다. 견문과 지혜, 힘, 무예. 경합을 통해 그 모든 걸 겨루고 가장 월등한 자가 앉는 자리가 가주였다. 그런 가주들마저도 산군을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신력은 자연의 정기와 함께 모든 곳에 스며 있었다. 사람에겐 느껴지지 않으나 사람이 아닌 이들에겐 어디서나 느껴졌다. 그를 다뤄서 힘처럼 사용하기도 했고 상처를 치유할 수도 있었다. 허나 다룰 수 있는 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그리고 담룡산은 혜호국에서도 가장 많은 정기와 신력이 응집된 곳이었다. 한데 그냥 호랑이도 아닌 담룡산의 산군이다.
여희는 되도 않는 망발을 들었다는 듯 산군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얼핏 봐도 육 척에 가까운 장신인데다 몇 겹의 옷을 입었는데도 둔해 보이기는커녕 손끝 하나도 닿지 못할 기세였다.
“기개조차 없는 자는 합은 고사하고 그림자만 봐도 도망치기 바쁘지. 산군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는 자 역시 적다.”
허나 여희는 도망치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다리와 어깨를 내주긴 했으나 산군의 인정을 받았으니 다행이라 해야 하나. 여희는 복잡한 눈으로 환부를 한번 바라봤다. 아직도 짙은 통증이 느껴졌다.
여희의 감정에 관심이 없는 산군은 다시 걸음을 옮겨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이 문고리를 잡기 전, 먼저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들어왔다.
“자호. 그분은?”
들어오자마자 묻는 게 저런 것인데도 산군 자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깨셨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나간 그녀의 뒤로 사내는 굳은 듯 움직임을 멈췄다. 여희는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굳어 버린 그에게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에 기억을 더듬었다. 허나 아무리 되돌아봐도 마주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사이 그가 여희에게 다가가 그녀를 다시 침상 위로 조심스레 눕혔다.
“아직…… 환부가 낫지 않았습니다.”
목이 메는 듯 뚝뚝 끊어지는 음성으로 힘겹게 말하며 시선을 피한 그는 자호가 내버려 둔 탕약으로 눈을 돌렸다. 여희는 그런 그의 옆모습을 보며 여전히 기억을 되짚고 있었다.
‘이렇게 생긴 얼굴이라면 스쳐 갔다 해도 머리에 남을 만한 인상인데…….’
본디 외양에 관심 없는 여희라 해도 사람을, 그것도 이만큼 뚜렷한 외양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한데 이상하게 눈앞의 사내는 제 과거에 없는 자였다. 일순간 그가 익숙하게 느껴진 이유를 알 수 없어 여희는 말없이 계속해 기억을 더듬었다.
“탕약을 다시 데워 오겠습니다.”
사내는 끝까지 여희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 참는 듯 표정을 굳힌 채 고개를 돌렸을 뿐이다. 그런 그를 붙잡은 건 여희였다. 어느새 몸을 일으켜 그의 소맷자락을 잡은 손길이 퍽 조심스러웠다.
“송구하지만 이름이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
“혹, 저와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일견 추근거림처럼 들릴 말을 내뱉는 표정은 진지했다. 조금 전 옷을 두텁게 입었던 자호와 달리 사내의 옷은 귀해 보이지만 겨울에 입기엔 얄팍한 감이 있었다. 자호보다도 큰 체격이 고스란히 드러난, 흑색의 얇은 옷감이었다.
다시 침상에 앉은 그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사헌입니다. 만난 적은…… 없습니다.”
이어지는 말이 없어 여희가 다시 물으려는데 사헌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여희를 바라봤다. 그 눈동자에 잠시 노란빛이 스쳐 지나간 듯했으나 눈을 깜빡이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 평범한 갈색 눈동자가 되었다.
여희는 제가 잘못 보았나 싶어 잠시 눈을 감았다 떴지만 여전히 사헌의 눈은 짙은 갈색이었다.
“……천우(天佑)가, 어떤 존재인지 아십니까?”
어릴 적 어머니가 해 주던 이야기에서 한번 들어 본 적 있다. 하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이 땅 모든 만물에 제각각 깃들며 그들이 선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존재라고.
산군과 산령이라는 존재가 있고 신력이 만연하며 하늘께 제를 올리는 혜호국에서는 그리 허무맹랑한 얘기도 아니었다.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 세상이었다.
여희를 바라보는 눈이 아프도록 애달프고 간절해 여희는 저도 모르는 새 그의 소매를 놓았다. 사헌이 그 손을 바라보다 다시 여희에게로 시선을 들었다.
“제가 당신의 천우라 하면…… 믿으실까요.”
여희의 눈이 대번에 날카롭게 변했다. 그러나 사헌은 그저 담담히 여희를 볼 뿐이었다.
“……거짓을 말하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이 아는 천우란 한 사람의 전생과 현생, 그 모든 생애 동안 늘 함께하며 보이지는 않아도 그 사람의 곁에서 걱정하고, 애정하고 위로하며 아파하는 존재였다. 하여 어린 날 들었어도 참으로 다정하고 좋은 분이구나, 하늘님을 닮은 성정이구나,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천우가 제 앞에 나타날 줄 몰랐을 때의 얘기였다. 또한 사헌은 천우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한데 그의 간절한 눈을 보고 있자면 진정으로 저이가 자신의 천우인 것만 같았다. 말로는 못 다할 애끓음이 흘러넘치는 눈이 여희의 시선을 잡아챘다.
“거짓으로 저를 홀리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짓이 아닙니다.”
“이곳은 어디입니까.”
“산군과 산령이 거하는 담룡산의 산채입니다.”
산군보다도 높은 산령까지 거하는 산채라는 걸 알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우선인 게 있었다.
“진정, 누구십니까.”
반듯한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무뚝뚝하고 차갑던 인상이 한순간 부드럽고 다정해졌다. 그의 곧은 손이 차마 참지 못한 듯 여희의 볼 언저리까지 올라왔다 힘겹게 내려갔다. 사헌의 눈은 여희의 얼굴을 새겨 넣기라도 할 듯 오래도록 떠날 줄 몰랐다.
“당신의…… 천우.”
간절한 목소리였다.
“진정 저의 천우라면 그를 증명할 것이 있겠지요.”
“어떤 걸 바라십니까…….”
날 선 시선에 그가 속삭이며 눈길을 거뒀다. 너른 어깨가 처진 것 같아 자연스레 미안한 감정이 찾아왔으나 여희는 이내 생각을 털어 냈다.
무엇으로 증명을 해야 할까. 그러나 한참을 고민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천우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뭘 보여 달라고도, 그렇다고 자신에 대해 질문하기에도 딱히 물을 게 없었다. 진정 천우가 알 만한 걸 물어야 하는데 막상 생각하자니 떠오르지 않았다.
“윽…….”
그러다 별안간 통증이 밀려와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구기자 사헌이 순식간에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리고 신력을 밀어 넣었다. 산군에게 당한 것이라 신력으로도 낫는 데 한계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가까워진 거리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상처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는데, 여희가 먼저 청아한 향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사헌도 그에 맞춰 눈을 들었다. 여희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일렁이는 눈빛을 감추지 못하더니 먼저 고개를 돌렸다.
여희가 이제 괜찮다는 뜻으로 제 어깨에 올라온 그의 손등을 살짝 건드렸지만 사헌은 그를 느낄 여유조차 없는 듯 한동안 손을 떼지 못했다. 여희가 다시 한번 손등을 건들이고 나서야 멀어지는 손끝은 떨고 있었다.
“아직 낫지 않았으니 누워 계시는 게 좋습니다.”
그리 말하며 여희를 조심스럽게 침상에 눕힌 사헌이 탕약을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여희는 아직 그에게 물어볼 것들이 남아 있었다.
“쉬십시오.”
“사헌.”
방을 나서던 걸음이 묶이기라도 한 듯 그 말소리 한 번에 사헌의 발이 멈췄다. 턱을 악물어도 입술의 떨림이 멎지 않아 그는 곧 눈을 감았다. 할 수만 있다면 향까지도 맡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이고 달려가 저이를 끌어안을 것 같았다.
“약을…… 데워 오겠습니다.”
거칠게 갈라진 음성을 끝으로 문이 닫혔다. 방 안에 홀로 남겨진 여희는 그를 잡지도 못한 채 가만히 나간 곳만 바라봤다. 방금 전 보았던 그의 눈에 꼭 눈물이 고여 있는 듯했다.
“천우…….”
나지막이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혼란스런 감정이 넘실거렸다.
***
혜호국은 12개의 가문이 힘을 합쳐 건국한 나라였고 각 가문은 나라의 기둥을 이루어 오랜 세월 권력의 균형을 유지했다. 처음에는 약소국에 불과했던 혜호국이 점차 영토를 넓혀 강대국으로 자라난 데에는 가문들의 힘이 컸다. 또한 그에 맞춰 매년 논공행상이 끊이질 않았다.
‘진가문은 앞으로 나오라.’
하여 각 가문의 사유지는 비대해졌다. 전쟁이 그친 뒤에는 나라 안에 더욱 신경 쓰며 문화를 꽃피웠다. 당시 열두 가문은 각 가문의 사유지 외곽에 성벽을 건설해 자신들의 가문 땅임을 공고히 했다.
나라를 건국한 시초 가문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자도 없으니, 혜호국의 지도에는 다양한 위치에 여러 성벽이 존재했다. 영토가 워낙 드넓은 탓에 성벽이 있어도 별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현재는 공을 세워 새로 성씨를 받은 신생 가문까지 합쳐 총 27개의 가문이 존재했다. 또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왕을 폐하고 혜사라는 새로운 지도자를 뽑기 시작한 것도 오래전의 일이었다.
‘경합을 시작하겠다.’
여희가 참가하는 경합은 각 가문에서 다음 대의 가주를 미리 뽑기 위해 치러지는 것이었다. 넉 달 뒤에 있을 진 가문의 최종 경합은 차기 가주가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었다.
은연중 제 자식에게 자리를 물려주길 바라는 자들은 많았지만 능력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혜호국의 풍습에 맞춰 혜사와 가주 역시 세습이 아니었다. 하여 이런 경합은 각 가문에 주기 마다 돌아오는 일이었다.
‘방……?’
시야에 들어온 천장이 낯설었다. 가물가물한 눈을 몇 번 깜빡여 혼몽한 정신을 붙잡아 보려 했지만 가까이서 풍겨 오는 향냄새가 그녀를 다시 잠으로 이끌었다.
두 번째 눈을 뜬 건 누군가 맥을 짚고 있을 때였다. 흐릿한 사람의 형상이 얼핏 보였지만 여희는 곧 눈을 감았다.
세 번째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천장을 똑바로 마주 볼 수 있었다. 여전히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어깨를 타고 오는 통증을 발판 삼아 힘겹게 잠에서 벗어났다.
푹신한 침상에 누워 있다는 걸 자각하자마자 일어나려 했으나 환부에서부터 날 선 고통이 밀려왔다. 여희는 결국 신음을 삼키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여기가 어디지?’
주위를 둘러보는 눈엔 경계심이 가득했다. 고아하고 잘 정돈된, 꽤 넓은 방이었다. 값비싸 보이는 물건이 몇 있었고 사방으로 커다란 창이 즐비해 방 안으로 햇볕이 쏟아져 들어왔다.
지금 누워 있는 침상만 해도 꽤 커다랬으며 침상에서 문까지의 거리도 상당했다. 가주의 방보다 넓었고 필요 없는 것은 두지 않아 조화로움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여희는 경계를 놓지 않고 기척에 주의를 기울였다.
“일어났느냐.”
말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움직임이 여의치 않았다. 발자국 소리는 금세 침상에 가까워졌다. 소리만 들었을 땐 지난 밤 호랑이의 포효처럼 깊고 거칠었다.
“누구, 십니까.”
오래 잠들어 있었던 건지 완전히 갈라진 목이 아파 여희는 인상을 구겼다. 곧 한 여인이 침상에 앉았다.
“담룡의 산군이니라.”
“산군…….”
그 말을 곧장 이해하지 못한 건 호랑이에게 어깨를 물린 탓이려나. 여희는 망연히 그녀의 말을 따라하다 곧 정신을 차린 듯 몸을 일으켰다. 타고 올라오는 통증에 얼굴을 굳혔지만 본능적인 두려움이 먼저였다.
짙은 흙색의 옷을 몇 겹이나 겹쳐 입어 더욱 위압적으로 보이는 이의 눈이 지난 밤 보았던 호랑이의 안광을 닮아 있었다. 선명한 턱선과 뚜렷한 눈매마저도 그때를 떠올리게 만든 탓에 여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셔라.”
그러나 여희가 어떤 상태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산군은 사기그릇을 내밀었다. 그 안에 담긴 게 꼭 사약처럼 보여서 여희는 조금 더 뒤로 물러났다. 그릇을 든 곧은 손이 호랑이의 그것과 겹쳐 보였다. 안온한 방 안과는 전혀 다른 긴장감이 침상 위로 내려앉았다.
“상처는 곧 낫겠으나 한동안 움직임은 불편할 것이다.”
“…….”
마시지 않을 걸 알았는지 그릇은 침상 밑으로 옮겨졌다. 여희의 눈에는 여전히 긴장과 경계가 가득했다. 그것은 자신이 담룡의 산군이라는 말을 증명하듯 그녀의 눈동자가 형형한 색을 보였기 때문이다. 농담으로 들을 수 없을 만큼 뚜렷한 눈빛이었다.
“산군이 허락하지 않은 자가 신성한 땅에 발을 들이면 반드시 관문을 거쳐야 하며 그를 통과하지 못하면 담룡에 들어올 그릇도 되지 않는 것이니 내쳐진다.”
낮고 거친 목소리가 귓가를 두드렸다.
“관문, 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긴장을 삼키며 묻자 산군은 무감정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군과 합을 겨루는 것.”
“……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관문인가. 여희의 미간이 자연스럽게 구겨졌다. 견문과 지혜, 힘, 무예. 경합을 통해 그 모든 걸 겨루고 가장 월등한 자가 앉는 자리가 가주였다. 그런 가주들마저도 산군을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신력은 자연의 정기와 함께 모든 곳에 스며 있었다. 사람에겐 느껴지지 않으나 사람이 아닌 이들에겐 어디서나 느껴졌다. 그를 다뤄서 힘처럼 사용하기도 했고 상처를 치유할 수도 있었다. 허나 다룰 수 있는 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그리고 담룡산은 혜호국에서도 가장 많은 정기와 신력이 응집된 곳이었다. 한데 그냥 호랑이도 아닌 담룡산의 산군이다.
여희는 되도 않는 망발을 들었다는 듯 산군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얼핏 봐도 육 척에 가까운 장신인데다 몇 겹의 옷을 입었는데도 둔해 보이기는커녕 손끝 하나도 닿지 못할 기세였다.
“기개조차 없는 자는 합은 고사하고 그림자만 봐도 도망치기 바쁘지. 산군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는 자 역시 적다.”
허나 여희는 도망치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다리와 어깨를 내주긴 했으나 산군의 인정을 받았으니 다행이라 해야 하나. 여희는 복잡한 눈으로 환부를 한번 바라봤다. 아직도 짙은 통증이 느껴졌다.
여희의 감정에 관심이 없는 산군은 다시 걸음을 옮겨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이 문고리를 잡기 전, 먼저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들어왔다.
“자호. 그분은?”
들어오자마자 묻는 게 저런 것인데도 산군 자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깨셨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나간 그녀의 뒤로 사내는 굳은 듯 움직임을 멈췄다. 여희는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굳어 버린 그에게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에 기억을 더듬었다. 허나 아무리 되돌아봐도 마주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사이 그가 여희에게 다가가 그녀를 다시 침상 위로 조심스레 눕혔다.
“아직…… 환부가 낫지 않았습니다.”
목이 메는 듯 뚝뚝 끊어지는 음성으로 힘겹게 말하며 시선을 피한 그는 자호가 내버려 둔 탕약으로 눈을 돌렸다. 여희는 그런 그의 옆모습을 보며 여전히 기억을 되짚고 있었다.
‘이렇게 생긴 얼굴이라면 스쳐 갔다 해도 머리에 남을 만한 인상인데…….’
본디 외양에 관심 없는 여희라 해도 사람을, 그것도 이만큼 뚜렷한 외양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한데 이상하게 눈앞의 사내는 제 과거에 없는 자였다. 일순간 그가 익숙하게 느껴진 이유를 알 수 없어 여희는 말없이 계속해 기억을 더듬었다.
“탕약을 다시 데워 오겠습니다.”
사내는 끝까지 여희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 참는 듯 표정을 굳힌 채 고개를 돌렸을 뿐이다. 그런 그를 붙잡은 건 여희였다. 어느새 몸을 일으켜 그의 소맷자락을 잡은 손길이 퍽 조심스러웠다.
“송구하지만 이름이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
“혹, 저와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일견 추근거림처럼 들릴 말을 내뱉는 표정은 진지했다. 조금 전 옷을 두텁게 입었던 자호와 달리 사내의 옷은 귀해 보이지만 겨울에 입기엔 얄팍한 감이 있었다. 자호보다도 큰 체격이 고스란히 드러난, 흑색의 얇은 옷감이었다.
다시 침상에 앉은 그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사헌입니다. 만난 적은…… 없습니다.”
이어지는 말이 없어 여희가 다시 물으려는데 사헌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여희를 바라봤다. 그 눈동자에 잠시 노란빛이 스쳐 지나간 듯했으나 눈을 깜빡이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 평범한 갈색 눈동자가 되었다.
여희는 제가 잘못 보았나 싶어 잠시 눈을 감았다 떴지만 여전히 사헌의 눈은 짙은 갈색이었다.
“……천우(天佑)가, 어떤 존재인지 아십니까?”
어릴 적 어머니가 해 주던 이야기에서 한번 들어 본 적 있다. 하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이 땅 모든 만물에 제각각 깃들며 그들이 선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존재라고.
산군과 산령이라는 존재가 있고 신력이 만연하며 하늘께 제를 올리는 혜호국에서는 그리 허무맹랑한 얘기도 아니었다.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 세상이었다.
여희를 바라보는 눈이 아프도록 애달프고 간절해 여희는 저도 모르는 새 그의 소매를 놓았다. 사헌이 그 손을 바라보다 다시 여희에게로 시선을 들었다.
“제가 당신의 천우라 하면…… 믿으실까요.”
여희의 눈이 대번에 날카롭게 변했다. 그러나 사헌은 그저 담담히 여희를 볼 뿐이었다.
“……거짓을 말하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이 아는 천우란 한 사람의 전생과 현생, 그 모든 생애 동안 늘 함께하며 보이지는 않아도 그 사람의 곁에서 걱정하고, 애정하고 위로하며 아파하는 존재였다. 하여 어린 날 들었어도 참으로 다정하고 좋은 분이구나, 하늘님을 닮은 성정이구나,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천우가 제 앞에 나타날 줄 몰랐을 때의 얘기였다. 또한 사헌은 천우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한데 그의 간절한 눈을 보고 있자면 진정으로 저이가 자신의 천우인 것만 같았다. 말로는 못 다할 애끓음이 흘러넘치는 눈이 여희의 시선을 잡아챘다.
“거짓으로 저를 홀리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짓이 아닙니다.”
“이곳은 어디입니까.”
“산군과 산령이 거하는 담룡산의 산채입니다.”
산군보다도 높은 산령까지 거하는 산채라는 걸 알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우선인 게 있었다.
“진정, 누구십니까.”
반듯한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무뚝뚝하고 차갑던 인상이 한순간 부드럽고 다정해졌다. 그의 곧은 손이 차마 참지 못한 듯 여희의 볼 언저리까지 올라왔다 힘겹게 내려갔다. 사헌의 눈은 여희의 얼굴을 새겨 넣기라도 할 듯 오래도록 떠날 줄 몰랐다.
“당신의…… 천우.”
간절한 목소리였다.
“진정 저의 천우라면 그를 증명할 것이 있겠지요.”
“어떤 걸 바라십니까…….”
날 선 시선에 그가 속삭이며 눈길을 거뒀다. 너른 어깨가 처진 것 같아 자연스레 미안한 감정이 찾아왔으나 여희는 이내 생각을 털어 냈다.
무엇으로 증명을 해야 할까. 그러나 한참을 고민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천우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뭘 보여 달라고도, 그렇다고 자신에 대해 질문하기에도 딱히 물을 게 없었다. 진정 천우가 알 만한 걸 물어야 하는데 막상 생각하자니 떠오르지 않았다.
“윽…….”
그러다 별안간 통증이 밀려와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구기자 사헌이 순식간에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리고 신력을 밀어 넣었다. 산군에게 당한 것이라 신력으로도 낫는 데 한계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가까워진 거리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상처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는데, 여희가 먼저 청아한 향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사헌도 그에 맞춰 눈을 들었다. 여희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일렁이는 눈빛을 감추지 못하더니 먼저 고개를 돌렸다.
여희가 이제 괜찮다는 뜻으로 제 어깨에 올라온 그의 손등을 살짝 건드렸지만 사헌은 그를 느낄 여유조차 없는 듯 한동안 손을 떼지 못했다. 여희가 다시 한번 손등을 건들이고 나서야 멀어지는 손끝은 떨고 있었다.
“아직 낫지 않았으니 누워 계시는 게 좋습니다.”
그리 말하며 여희를 조심스럽게 침상에 눕힌 사헌이 탕약을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여희는 아직 그에게 물어볼 것들이 남아 있었다.
“쉬십시오.”
“사헌.”
방을 나서던 걸음이 묶이기라도 한 듯 그 말소리 한 번에 사헌의 발이 멈췄다. 턱을 악물어도 입술의 떨림이 멎지 않아 그는 곧 눈을 감았다. 할 수만 있다면 향까지도 맡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이고 달려가 저이를 끌어안을 것 같았다.
“약을…… 데워 오겠습니다.”
거칠게 갈라진 음성을 끝으로 문이 닫혔다. 방 안에 홀로 남겨진 여희는 그를 잡지도 못한 채 가만히 나간 곳만 바라봤다. 방금 전 보았던 그의 눈에 꼭 눈물이 고여 있는 듯했다.
“천우…….”
나지막이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혼란스런 감정이 넘실거렸다.
***
혜호국은 12개의 가문이 힘을 합쳐 건국한 나라였고 각 가문은 나라의 기둥을 이루어 오랜 세월 권력의 균형을 유지했다. 처음에는 약소국에 불과했던 혜호국이 점차 영토를 넓혀 강대국으로 자라난 데에는 가문들의 힘이 컸다. 또한 그에 맞춰 매년 논공행상이 끊이질 않았다.
‘진가문은 앞으로 나오라.’
하여 각 가문의 사유지는 비대해졌다. 전쟁이 그친 뒤에는 나라 안에 더욱 신경 쓰며 문화를 꽃피웠다. 당시 열두 가문은 각 가문의 사유지 외곽에 성벽을 건설해 자신들의 가문 땅임을 공고히 했다.
나라를 건국한 시초 가문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자도 없으니, 혜호국의 지도에는 다양한 위치에 여러 성벽이 존재했다. 영토가 워낙 드넓은 탓에 성벽이 있어도 별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현재는 공을 세워 새로 성씨를 받은 신생 가문까지 합쳐 총 27개의 가문이 존재했다. 또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왕을 폐하고 혜사라는 새로운 지도자를 뽑기 시작한 것도 오래전의 일이었다.
‘경합을 시작하겠다.’
여희가 참가하는 경합은 각 가문에서 다음 대의 가주를 미리 뽑기 위해 치러지는 것이었다. 넉 달 뒤에 있을 진 가문의 최종 경합은 차기 가주가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었다.
은연중 제 자식에게 자리를 물려주길 바라는 자들은 많았지만 능력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혜호국의 풍습에 맞춰 혜사와 가주 역시 세습이 아니었다. 하여 이런 경합은 각 가문에 주기 마다 돌아오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