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화
“으음…….”
드넓은 창으로 스며들어 온 달빛이 침상 끝에 닿았다. 환부에서 여전히 통증이 느껴지는지 여희의 미간이 종종 찌푸려졌다. 원래라면 신력으로 치료한 환부는 금세 낫지만 산군에게 당했으니 이번만큼은 신력으로도 더딜 수밖에 없었다.
“여희…….”
발음해 보는 이름이 익숙했다. 사헌은 잠든 이를 오래도록 바라보며 식은땀을 닦아 주고 여희가 뒤척이다 상처가 벌어지지 않게 신경을 쏟았다. 그의 눈은 내도록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조금 전, 차마 닿지 못하고 멀어졌던 손이 여희의 손등 위를 천천히 덮었다. 힘마저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조심스러웠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달래져 사헌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무표정하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이후 여희가 뒤척이거나 물이 식을 때면 바쁘게 움직이던 그가 어느새 침상 밑에 앉아 닫힌 창가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이내 제자리를 찾듯 여희에게로 옮겨졌다. 사헌의 손끝에 달빛이 일렁였다.
“이제야…… 서로를 볼 수 있게 됐네요.”
여희의 손등에 가만히 이마를 댔다. 그 온기에 왈칵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랐지만 억지로 삼켜 내며 사헌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저를 믿어 주세요…….”
깊은 목소리가 밤을 울렸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
그는 그렇게 오래도록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여희의 온기 한 자락에 매달렸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야 짧게 숨을 고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이 식어 차가울 테니 따뜻한 물을 다시 가져오기 위함이었다. 그런 그의 뒤로 스산한 음성이 울렸다.
“사람의 생에 관여하지 마라.”
걸음은 자연스럽게 멈췄다. 창호지 너머로 달빛이 일렁였다.
“그것은 당신의 권한이 아닙니다.”
사헌은 담담한 눈으로 답했다. 그러자 또 한 번 바람결에 목소리가 실려 왔다.
“인계에 발을 들이는 것 역시 그대의 권한 밖이다.”
언뜻, 여희를 닮은 목소리였다.
“상관없습니다.”
“무(無)로 돌아가고 싶은가.”
“…….”
사헌이 입매를 끌어 올리며 조소했다. 서늘한 그의 인상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미소였다.
“차라리 그게 낫습니다. 제가 사라지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다면 무엇도 상관없습니다.”
멈췄던 걸음이 다시 움직였다.
“그러니 모습을 드러내십시오. 그것만이 저를 막을 수 있는 길일 겁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그의 눈이 확고한 의지를 담고 가라앉았다. 이내 문이 닫히고, 사헌이 떠나간 방에 잠든 여희의 숨소리만 규칙적으로 울렸다.
***
담룡산에는 선하고 기개가 있는 자만이 살아 돌아간다는 전설이 전해졌다. 하지만 담룡산의 겨울은 밖에서 보던 것과 달리 포근했다.
신력이 감싸고 있는 산채 내에 국한된 얘기였지만 담룡산의 산짐승들은 어느새 이 온기에 적응했다. 해서 심한 북풍한설이 몰아칠 때면 약속이라도 한 듯 산채에 모여들었다.
넓은 산채의 각 방에는 동물들이 자리를 잡았고, 저 나름대로 돌과 나뭇가지를 가져다 꾸며놓은 방도 있었다. 방 밖으로 모습을 보이는 동물은 드물었지만 산채는 늘 손님으로 가득했다.
“산군님.”
“말하거라.”
원래부터 사람의 형체인 산령을 제외하고 현재 인간으로 변할 수 있는 동물은 산군인 자호와 몇몇이 전부였다. 담룡의 겨울을 버티기에 두꺼운 가죽과 털,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이 없는 사람의 모습보다 동물이 편하기 때문이다. 먹이를 구하고 찬바람을 피해야 하니까.
해서 담룡산의 막대한 신력을 충분히 머금을 만큼 오래 산 동물도 이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곤 했다. 종종 사람과 대면해야 할 일이 있는 산군은 사람의 형태를 취해야 했지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뭔데.”
산군이라 해도 신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건 아니라 귀찮은 면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어느새 적응해서 자호도 이젠 사람으로 변하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호가 그만큼 오래 살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담룡산에 계속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산채에 나뒹굴던 산삼이 사람에게 좋다는 게 생각나서 가지고 오니 여희는 이미 깨어 있었다. 안색이 전날보다 편안하고 침상에 앉아 있어도 괜찮은 걸 보면 상처는 꽤 아문 듯했다.
어깨를 문 건 담룡산에 들어와도 된다는 허락의 표시였다. 산군의 신력을 몸속에 흘려보내는 데 그만한 것도 없으니까. 물론 다른 방법도 많으나 오래전부터 내려져 오는 표식이라 자호에게도 악의는 없었다. 그래도 자신이 물었으니 챙겨 주긴 해야겠기에 한번 들른 참이었다.
자호가 탁상 위에 산삼을 올려 두고 자리에 앉았다.
“허락해서 이리로 데려온 것이니 얼마나 머물던 상관없다.”
“허면 혹 산에 무예를 수련할 만한 곳이 있습니까?”
“수련할 곳은 왜.”
“상처가 다 나으면 몸이 굳기 전에 움직여야 합니다. 있는 동안 쉬기만 할 수 없으니.”
사헌은 약을 끓인다고 방 안에 없었다. 여희가 잠들어 있던 것까지 합쳐 고작 나흘 정도였지만 자호에겐 지극정성이란 말을 새삼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무뚝뚝하고 서늘하기 그지없는 치가 그토록 절절한 것은 처음 보았다.
“가주 때문이냐.”
예, 여희가 답했다. 넉 달이 지나면 최종 경합이 치러질 테고 그때까지 진석도는 편한 환경에서 제 실력을 쌓고 인맥을 넓혀 놓을 테니 저도 멈춰 있을 수 없었다.
지난 백여 년간 살아 돌아온 이가 없는 산으로 보내며 자신이 죽길 바랐겠으나 여희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고 기회를 얻었다. 그러니 마지막을 준비해야 했다.
“여기까지 보낸 걸 보면 네가 살아 있지 않길 바랐을 터, 돌아가고 싶으냐.”
자호는 상황을 정확히 꿰뚫어 보며 여희의 속내를 물었다. 여희는 그저 담담히 제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13살,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가주 경합에 처음으로 참가했다. 그리고 7살 적부터 장원을 놓치지 않았다던 진석도를 이겼을 때, 여희는 진 가(家)의 모든 눈초리를 감내해야 했다.
좋은 시선만 있었던 건 당연히 아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희는 단 한 번도 장원을 놓치지 않았다. 하여 어린아이의 가벼운 꿈으로만 여겼던 자들도 여희에게 줄을 대거나 그녀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정해진 나이에만 맞다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경합은 중도에 포기하거나 새로 뛰어드는 자도 많았다. 해서 처음 경합이 치러지는 해에는 아이들의 재롱을 보듯 즐기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돌아갈 것입니다.”
20여 년에 가까운 긴 세월 동안 경합에 참가해 학문, 무예 등 다방면에서 제 능력을 여과 없이 펼치고 가문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게 경합의 주된 목적이었다.
그를 바탕으로 가문의 신뢰를 얻어야 하며 마지막 최종 경합의 결과를 중점으로 가주와 종친들의 의견까지 반영해 결정되는 게 차기 가주였다.
복잡한 듯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능력이 우선이고 두 번째는 인망이다. 한데 이곳에 있는 넉 달간은 발이 묶인 것과 다름없으니 여희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한데 왜 왔느냐. 죽을 수도 있고, 만일 살아도 뭘 도모할 수도 없는 산중으로, 왜.”
자호가 여희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그녀는 이미 문밖에 당도한 사헌의 기척을 알아챈 뒤였다. 사람인 여희의 귀로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밤이면 같은 꿈을 꿉니다.”
“…….”
“그곳에 항상 담룡산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제게 이곳으로 가라고 하기 전날 밤에는 다른 날과 달리 무언가 저를 끌어당겼습니다. 밝은 낮이었는데, 손에 잡힐 것처럼 희미한 빛이 보이고, 제 손을 잡아 산으로 이끌었습니다.”
자호는 묵묵히 여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담룡산에 들어오는 자는 많았다. 신성한 산에서 심성과 기개를 확인받기 위함이었고, 이는 자호가 산군이 되기 훨씬 이전부터 행해진 일이었다.
실제로 담룡의 산군들은 그런 자를 선별해 살리기도 했다. 이는 혜호국에 왕이 존재하던 시절, 왕과 담룡산 산군이 맺은 하나의 약속이었다. 왕정이 무너지고 새롭게 혜사라는 직책이 생겨 혜호국의 수장 자리를 담당하게 된 후에도 약조는 꾸준히 이어졌다.
“꿈이라…….”
“한 번도 다른 꿈을 꾼 적이 없습니다. 늘, 이곳이었습니다.”
어깨를 물어 표식을 새기는 건 그 때문이었다. 호랑이의 이빨자국을 거짓으로 낼 수도 없을뿐더러 그런 상처를 가지고도 살아남았다는 건 산군의 신력으로 치유 받았음을 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초대 혜사는 혜사가 되기 전 담룡산에서 살아남아 가주들의 지지를 얻었다. 허나 혜호국의 지력이 다한 것인지 지난 백여 년간 담룡산을 살아 나간 자는 없었다. 하여 자호에게도 여희는 꽤나 신경 쓰이는 존재였다.
“이전에 한 번 들른 적은 있습니다. 열일곱 살 즈음인가, 궁금해서요. 저를 감시하는 눈이 많아 오래 있진 못했고, 경합을 마치면 정식으로 가주께 허락을 받아 와 볼 생각이었습니다. 경합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
“한데 그날 꿈에서 깬 순간 이상하게도 당장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항상 같은 꿈이라 언제부턴가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날은 모든 게 희미해져…… 종국엔 무너질 것처럼. 그런 날이었습니다.”
“무모하구나. 어리석고.”
“그런가요.”
자호의 신랄한 지적에 여희는 산채에 들어와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사헌이 보았다면 어땠을까, 자호가 여전히 문밖에 서 있는 그를 떠올렸다.
허나 자호의 생각만큼 여희는 무모하지 않았다. 그간 중립을 지켜 오던 몇몇 종친이 여희가 산에서 돌아오면 그녀의 편에 서기로 약조했다.
거기다 담룡산 산군의 표식도 얻는다면 시류는 제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산군의 뜻을 어기는 건 화를 자초하는 일이었다. 또한 가주와도 은밀한 거래가 있었다.
‘만일 제가 죽지 않고 경합 전에 돌아온다면, 차기 가주를 뽑는 자리에서 가주의 표를 포기하겠다는 약조문을 적어 주십시오. 허면 가문의 뜻에 따라 담룡산으로 가겠습니다.’
현 가주가 차기 가주를 뽑는 자리에서 어떤 의견도 행사하지 못한다는 건 꽤 중요한 일이었다. 허나 목숨이 걸린 사안에 사소한 것이나 얻을 만큼 여희는 어리숙하지 않았다. 하여 담담히 가주의 포기를 종용했고 진사호는 잠시 고민하다 이내 붓을 들었다.
여희가 결코 살아 돌아올 수 없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또한 진석도를 지지하는 종친들이 있으니 가주 한 사람 없다 해서 많은 변동이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 무모하고 어리석어.”
“제가 느끼기에도 그렇습니다.”
여희는 그때를 되돌아보며 그저 미소를 지었다.
“해서, 수련만 하며 넉 달을 보낼 것이냐.”
여희가 좀 전보다 단단한 눈으로 자호를 마주 봤다.
“산을 출입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자호가 뜻을 파악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순간, 사헌의 기운이 자호에게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자호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하고, 보이지 않는 사헌과 힘을 겨루듯 허공을 노려봤다. 그러다 결국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일어서며 허락을 내렸다.
“좋다. 허나 사람을 끌어들이는 일은 불가하다. 만일 산에 해를 끼친다면, 다음은 어깨가 아니라 목이 될 것이다.”
자호의 시선이 제가 물어 버린 곳을 향했다. 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밤을 틈타 은밀히 움직일 생각이었으니 들킬 염려는 적었다.
“산채에서 조금 밑으로 내려가면 빈 공터가 있어. 그곳을 쓰거라.”
“감사합니다.”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고 사헌이 탕약과 영견을 든 채 안으로 들어왔다.
“약을 가져왔습니다.”
벌써 쓴맛이 느껴지는지 여희의 얼굴은 조금 굳었다. 자호와 사헌은 무심히 서로를 지나쳤다. 문을 닫는 자호의 뒤로 ‘밖을 나가고 싶다, 아직 낫지 않았으니 좀 더 후에 나가는 게 좋다’로 소소히 의견다툼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만하면 움직일 수 있습니다. 누워만 있으니 답답해서 그렇습니다.”
“무리입니다. 답답하시면 창을 열겠습니다.”
사헌이 걱정스런 눈으로 여희를 살폈다. 환부가 거의 아문 것은 사실이었다. 밤낮 신력을 쏟아부은 데다 끊임없이 탕약을 끓이고 치유향을 피우며 지극정성 돌봤으니 아직 낫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허나 다친 직후의 여희가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은 사헌에겐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기절한 채로 피를 흘리며 어깨엔 커다랗게 물린 자국이 남은 채였다. 게다가 옷은 온통 발톱에 찢겨 넝마와 같았다. 사헌은 그날의 절망을 잊을 수 없었다.
“며칠만 더 쉬십시오.”
여희는 단단하고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얼굴에 항상 눈만은 깊은 감정을 전부 드러내고 있는 사헌이 묘하게 다가왔다. 제 곁에는 본모습과 마음을 숨기고 겉으로는 좋은 사람인 양 웃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또한 여희가 가깝게 두는 사람은 표정에서까지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녀를 걱정하니, 사헌과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천우라 했으니 사람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으음…….”
드넓은 창으로 스며들어 온 달빛이 침상 끝에 닿았다. 환부에서 여전히 통증이 느껴지는지 여희의 미간이 종종 찌푸려졌다. 원래라면 신력으로 치료한 환부는 금세 낫지만 산군에게 당했으니 이번만큼은 신력으로도 더딜 수밖에 없었다.
“여희…….”
발음해 보는 이름이 익숙했다. 사헌은 잠든 이를 오래도록 바라보며 식은땀을 닦아 주고 여희가 뒤척이다 상처가 벌어지지 않게 신경을 쏟았다. 그의 눈은 내도록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조금 전, 차마 닿지 못하고 멀어졌던 손이 여희의 손등 위를 천천히 덮었다. 힘마저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조심스러웠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달래져 사헌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무표정하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이후 여희가 뒤척이거나 물이 식을 때면 바쁘게 움직이던 그가 어느새 침상 밑에 앉아 닫힌 창가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이내 제자리를 찾듯 여희에게로 옮겨졌다. 사헌의 손끝에 달빛이 일렁였다.
“이제야…… 서로를 볼 수 있게 됐네요.”
여희의 손등에 가만히 이마를 댔다. 그 온기에 왈칵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랐지만 억지로 삼켜 내며 사헌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저를 믿어 주세요…….”
깊은 목소리가 밤을 울렸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
그는 그렇게 오래도록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여희의 온기 한 자락에 매달렸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야 짧게 숨을 고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이 식어 차가울 테니 따뜻한 물을 다시 가져오기 위함이었다. 그런 그의 뒤로 스산한 음성이 울렸다.
“사람의 생에 관여하지 마라.”
걸음은 자연스럽게 멈췄다. 창호지 너머로 달빛이 일렁였다.
“그것은 당신의 권한이 아닙니다.”
사헌은 담담한 눈으로 답했다. 그러자 또 한 번 바람결에 목소리가 실려 왔다.
“인계에 발을 들이는 것 역시 그대의 권한 밖이다.”
언뜻, 여희를 닮은 목소리였다.
“상관없습니다.”
“무(無)로 돌아가고 싶은가.”
“…….”
사헌이 입매를 끌어 올리며 조소했다. 서늘한 그의 인상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미소였다.
“차라리 그게 낫습니다. 제가 사라지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다면 무엇도 상관없습니다.”
멈췄던 걸음이 다시 움직였다.
“그러니 모습을 드러내십시오. 그것만이 저를 막을 수 있는 길일 겁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그의 눈이 확고한 의지를 담고 가라앉았다. 이내 문이 닫히고, 사헌이 떠나간 방에 잠든 여희의 숨소리만 규칙적으로 울렸다.
***
담룡산에는 선하고 기개가 있는 자만이 살아 돌아간다는 전설이 전해졌다. 하지만 담룡산의 겨울은 밖에서 보던 것과 달리 포근했다.
신력이 감싸고 있는 산채 내에 국한된 얘기였지만 담룡산의 산짐승들은 어느새 이 온기에 적응했다. 해서 심한 북풍한설이 몰아칠 때면 약속이라도 한 듯 산채에 모여들었다.
넓은 산채의 각 방에는 동물들이 자리를 잡았고, 저 나름대로 돌과 나뭇가지를 가져다 꾸며놓은 방도 있었다. 방 밖으로 모습을 보이는 동물은 드물었지만 산채는 늘 손님으로 가득했다.
“산군님.”
“말하거라.”
원래부터 사람의 형체인 산령을 제외하고 현재 인간으로 변할 수 있는 동물은 산군인 자호와 몇몇이 전부였다. 담룡의 겨울을 버티기에 두꺼운 가죽과 털,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이 없는 사람의 모습보다 동물이 편하기 때문이다. 먹이를 구하고 찬바람을 피해야 하니까.
해서 담룡산의 막대한 신력을 충분히 머금을 만큼 오래 산 동물도 이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곤 했다. 종종 사람과 대면해야 할 일이 있는 산군은 사람의 형태를 취해야 했지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뭔데.”
산군이라 해도 신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건 아니라 귀찮은 면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어느새 적응해서 자호도 이젠 사람으로 변하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호가 그만큼 오래 살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담룡산에 계속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산채에 나뒹굴던 산삼이 사람에게 좋다는 게 생각나서 가지고 오니 여희는 이미 깨어 있었다. 안색이 전날보다 편안하고 침상에 앉아 있어도 괜찮은 걸 보면 상처는 꽤 아문 듯했다.
어깨를 문 건 담룡산에 들어와도 된다는 허락의 표시였다. 산군의 신력을 몸속에 흘려보내는 데 그만한 것도 없으니까. 물론 다른 방법도 많으나 오래전부터 내려져 오는 표식이라 자호에게도 악의는 없었다. 그래도 자신이 물었으니 챙겨 주긴 해야겠기에 한번 들른 참이었다.
자호가 탁상 위에 산삼을 올려 두고 자리에 앉았다.
“허락해서 이리로 데려온 것이니 얼마나 머물던 상관없다.”
“허면 혹 산에 무예를 수련할 만한 곳이 있습니까?”
“수련할 곳은 왜.”
“상처가 다 나으면 몸이 굳기 전에 움직여야 합니다. 있는 동안 쉬기만 할 수 없으니.”
사헌은 약을 끓인다고 방 안에 없었다. 여희가 잠들어 있던 것까지 합쳐 고작 나흘 정도였지만 자호에겐 지극정성이란 말을 새삼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무뚝뚝하고 서늘하기 그지없는 치가 그토록 절절한 것은 처음 보았다.
“가주 때문이냐.”
예, 여희가 답했다. 넉 달이 지나면 최종 경합이 치러질 테고 그때까지 진석도는 편한 환경에서 제 실력을 쌓고 인맥을 넓혀 놓을 테니 저도 멈춰 있을 수 없었다.
지난 백여 년간 살아 돌아온 이가 없는 산으로 보내며 자신이 죽길 바랐겠으나 여희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고 기회를 얻었다. 그러니 마지막을 준비해야 했다.
“여기까지 보낸 걸 보면 네가 살아 있지 않길 바랐을 터, 돌아가고 싶으냐.”
자호는 상황을 정확히 꿰뚫어 보며 여희의 속내를 물었다. 여희는 그저 담담히 제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13살,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가주 경합에 처음으로 참가했다. 그리고 7살 적부터 장원을 놓치지 않았다던 진석도를 이겼을 때, 여희는 진 가(家)의 모든 눈초리를 감내해야 했다.
좋은 시선만 있었던 건 당연히 아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희는 단 한 번도 장원을 놓치지 않았다. 하여 어린아이의 가벼운 꿈으로만 여겼던 자들도 여희에게 줄을 대거나 그녀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정해진 나이에만 맞다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경합은 중도에 포기하거나 새로 뛰어드는 자도 많았다. 해서 처음 경합이 치러지는 해에는 아이들의 재롱을 보듯 즐기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돌아갈 것입니다.”
20여 년에 가까운 긴 세월 동안 경합에 참가해 학문, 무예 등 다방면에서 제 능력을 여과 없이 펼치고 가문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게 경합의 주된 목적이었다.
그를 바탕으로 가문의 신뢰를 얻어야 하며 마지막 최종 경합의 결과를 중점으로 가주와 종친들의 의견까지 반영해 결정되는 게 차기 가주였다.
복잡한 듯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능력이 우선이고 두 번째는 인망이다. 한데 이곳에 있는 넉 달간은 발이 묶인 것과 다름없으니 여희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한데 왜 왔느냐. 죽을 수도 있고, 만일 살아도 뭘 도모할 수도 없는 산중으로, 왜.”
자호가 여희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그녀는 이미 문밖에 당도한 사헌의 기척을 알아챈 뒤였다. 사람인 여희의 귀로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밤이면 같은 꿈을 꿉니다.”
“…….”
“그곳에 항상 담룡산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제게 이곳으로 가라고 하기 전날 밤에는 다른 날과 달리 무언가 저를 끌어당겼습니다. 밝은 낮이었는데, 손에 잡힐 것처럼 희미한 빛이 보이고, 제 손을 잡아 산으로 이끌었습니다.”
자호는 묵묵히 여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담룡산에 들어오는 자는 많았다. 신성한 산에서 심성과 기개를 확인받기 위함이었고, 이는 자호가 산군이 되기 훨씬 이전부터 행해진 일이었다.
실제로 담룡의 산군들은 그런 자를 선별해 살리기도 했다. 이는 혜호국에 왕이 존재하던 시절, 왕과 담룡산 산군이 맺은 하나의 약속이었다. 왕정이 무너지고 새롭게 혜사라는 직책이 생겨 혜호국의 수장 자리를 담당하게 된 후에도 약조는 꾸준히 이어졌다.
“꿈이라…….”
“한 번도 다른 꿈을 꾼 적이 없습니다. 늘, 이곳이었습니다.”
어깨를 물어 표식을 새기는 건 그 때문이었다. 호랑이의 이빨자국을 거짓으로 낼 수도 없을뿐더러 그런 상처를 가지고도 살아남았다는 건 산군의 신력으로 치유 받았음을 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초대 혜사는 혜사가 되기 전 담룡산에서 살아남아 가주들의 지지를 얻었다. 허나 혜호국의 지력이 다한 것인지 지난 백여 년간 담룡산을 살아 나간 자는 없었다. 하여 자호에게도 여희는 꽤나 신경 쓰이는 존재였다.
“이전에 한 번 들른 적은 있습니다. 열일곱 살 즈음인가, 궁금해서요. 저를 감시하는 눈이 많아 오래 있진 못했고, 경합을 마치면 정식으로 가주께 허락을 받아 와 볼 생각이었습니다. 경합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
“한데 그날 꿈에서 깬 순간 이상하게도 당장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항상 같은 꿈이라 언제부턴가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날은 모든 게 희미해져…… 종국엔 무너질 것처럼. 그런 날이었습니다.”
“무모하구나. 어리석고.”
“그런가요.”
자호의 신랄한 지적에 여희는 산채에 들어와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사헌이 보았다면 어땠을까, 자호가 여전히 문밖에 서 있는 그를 떠올렸다.
허나 자호의 생각만큼 여희는 무모하지 않았다. 그간 중립을 지켜 오던 몇몇 종친이 여희가 산에서 돌아오면 그녀의 편에 서기로 약조했다.
거기다 담룡산 산군의 표식도 얻는다면 시류는 제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산군의 뜻을 어기는 건 화를 자초하는 일이었다. 또한 가주와도 은밀한 거래가 있었다.
‘만일 제가 죽지 않고 경합 전에 돌아온다면, 차기 가주를 뽑는 자리에서 가주의 표를 포기하겠다는 약조문을 적어 주십시오. 허면 가문의 뜻에 따라 담룡산으로 가겠습니다.’
현 가주가 차기 가주를 뽑는 자리에서 어떤 의견도 행사하지 못한다는 건 꽤 중요한 일이었다. 허나 목숨이 걸린 사안에 사소한 것이나 얻을 만큼 여희는 어리숙하지 않았다. 하여 담담히 가주의 포기를 종용했고 진사호는 잠시 고민하다 이내 붓을 들었다.
여희가 결코 살아 돌아올 수 없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또한 진석도를 지지하는 종친들이 있으니 가주 한 사람 없다 해서 많은 변동이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 무모하고 어리석어.”
“제가 느끼기에도 그렇습니다.”
여희는 그때를 되돌아보며 그저 미소를 지었다.
“해서, 수련만 하며 넉 달을 보낼 것이냐.”
여희가 좀 전보다 단단한 눈으로 자호를 마주 봤다.
“산을 출입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자호가 뜻을 파악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순간, 사헌의 기운이 자호에게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자호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하고, 보이지 않는 사헌과 힘을 겨루듯 허공을 노려봤다. 그러다 결국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일어서며 허락을 내렸다.
“좋다. 허나 사람을 끌어들이는 일은 불가하다. 만일 산에 해를 끼친다면, 다음은 어깨가 아니라 목이 될 것이다.”
자호의 시선이 제가 물어 버린 곳을 향했다. 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밤을 틈타 은밀히 움직일 생각이었으니 들킬 염려는 적었다.
“산채에서 조금 밑으로 내려가면 빈 공터가 있어. 그곳을 쓰거라.”
“감사합니다.”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고 사헌이 탕약과 영견을 든 채 안으로 들어왔다.
“약을 가져왔습니다.”
벌써 쓴맛이 느껴지는지 여희의 얼굴은 조금 굳었다. 자호와 사헌은 무심히 서로를 지나쳤다. 문을 닫는 자호의 뒤로 ‘밖을 나가고 싶다, 아직 낫지 않았으니 좀 더 후에 나가는 게 좋다’로 소소히 의견다툼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만하면 움직일 수 있습니다. 누워만 있으니 답답해서 그렇습니다.”
“무리입니다. 답답하시면 창을 열겠습니다.”
사헌이 걱정스런 눈으로 여희를 살폈다. 환부가 거의 아문 것은 사실이었다. 밤낮 신력을 쏟아부은 데다 끊임없이 탕약을 끓이고 치유향을 피우며 지극정성 돌봤으니 아직 낫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허나 다친 직후의 여희가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은 사헌에겐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기절한 채로 피를 흘리며 어깨엔 커다랗게 물린 자국이 남은 채였다. 게다가 옷은 온통 발톱에 찢겨 넝마와 같았다. 사헌은 그날의 절망을 잊을 수 없었다.
“며칠만 더 쉬십시오.”
여희는 단단하고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얼굴에 항상 눈만은 깊은 감정을 전부 드러내고 있는 사헌이 묘하게 다가왔다. 제 곁에는 본모습과 마음을 숨기고 겉으로는 좋은 사람인 양 웃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또한 여희가 가깝게 두는 사람은 표정에서까지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녀를 걱정하니, 사헌과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천우라 했으니 사람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