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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KH 전자 CE(Consumer Electronics) R&D 센터 제3연구실의 아침은 늘 시끌벅적했다. KH 전자 내에서도 비밀 유지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한 곳이라 사원증 스캔, 홍채 인식, 지문 인식까지 해야 출근할 수 있는 철벽같은 보안 시스템이 ‘삐비빅’ 하는 기계음을 수시로 만들어 냈다.
그걸로도 부족해 순차적으로 켜지는 실험 기기들의 크고 작은 진동 소리가 밤새 고요해진 연구실의 공기를 메웠다. 책상 위 컴퓨터를 켜고, 실험복으로 갈아입는 직원들의 부산스러운 움직임 또한 사부작사부작 소리를 내며 연구실의 활기를 더했다.
흔한 아침의 일상적인 소란스러움 속에서 도희는 미지근한 물 한 모금을 머금으며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했다. 한 시간 뒤 대전으로 출발하기 전에 체크해야만 하는 일들이 몇 가지 있었다. 급한 일은 아니었지만, 미룬다면 누군가의 업무에는 차질이 생길 것이다.
‘한 시간이면 충분하겠지?’
회사 계정으로 들어가 이메일을 확인하는 도희의 눈과 손이 바빠질 때였다.
[도 이사, 출근 잘 했어요? 아직 아침은 쌀랑하네요. 벚꽃 핀 건 봤어요? 이번 주가 절정이라더니 진짜 그렇더라고요.]
모니터 하단에서 반짝이는 사내 채팅 창을 클릭하자 익숙한 이름 하나가 도희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도희가 답을 하기 전 다시 메시지 창이 반짝였다.
[오늘 카이스트 이준우 교수와 미팅 건으로 대전 간다고 들었는데, 적당히 잘 봐 주고 와요. 그 사람은 학자라기보다는 장사꾼에 가까우니까 휘둘리지 말고요. 물론 도 이사가 알아서 잘하겠지만.]
평소보다 조금 긴 내용을 읽으며 도희는 다시 물 한 모금을 삼켰다.
유일하게 자신을 ‘도 이사’라 부르는 남자.
모두가 도희를 ‘주 이사’라 칭했지만 유독 이 남자만은 ‘도 이사’라는 호칭을 고수했다. ‘단둘이 있을 때만’이라는 한정된 조건이 붙었지만, 그래서 자신의 특별한 신뢰가 드러나는 것 같지 않냐는 남자의 질문에 도희는 침묵으로 답해 왔다.
도희가 KH 전자로 이직한 이후, 남자는 해외 출장과 같은 별다른 일이 없다면 항상 도희의 아침 시간 중 몇 초를 규칙적으로 가지고 갔다.
[도 이사, 잘 잤나요?]
[오늘은 날씨가 참 좋네요.]
[어제 야근했을 텐데, 피곤하지 않나요?]
내용은 특별할 게 없었지만, 업무적인 것들을 핑계로 접근하는 남자의 숨은 의도를 도희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부담스러웠다.
그런데도 도희는 대답을 미룬 적이 없었다. 남자는 단 한 번도 자신의 마음을 단도직입적으로 보여 준 적이 없는 지능적인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에게 혹시 나를 좋아하냐며 설레발을 칠 수 없었다. 그렇게 남자와 대화를 이어 온 게 벌써 몇 달째였다.
“야들아, 야들아, 이짝으로 좀 모이 봐라.”
답문을 적으려던 도희의 손을 멈추게 한 건 안성미 과장의 쨍쨍한 목소리였다. 도희는 모니터 오른쪽 아래에 떠 있는 현재 시간을 확인했다. 8시 30분. 본격적으로 업무가 시작되는 9시까지는 아직 30분이 남아 있었다. 남자 직원들이 죄다 담배를 피우러 간 틈을 이용해 연구실의 ‘주디클럽’ 멤버들이 한바탕 입을 풀고 하루를 시작할 모양이었다.
‘그렇지. 하루라도 아침 수다를 거르면 누룽지사탕을 문 것 같은 텁텁한 단내가 종일 입 안에서 진동한다는데 어쩌겠어.’
이젠 시끄럽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걸 보니 이 생활에도 익숙해져 가나 보다 싶어 가벼운 웃음이 나왔다.
[업무 대충 마무리해 놓고 대전에 다녀오겠습니다. 결과는 나중에 보고드리겠습니다.]
도희는 남자에게 답문을 적은 뒤 엔터 키를 눌렀다. 그사이 연구실 여직원 세 명이 안성미 과장을 주축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주디클럽. 부산 출신 40세 유부녀 안성미 과장이 자발적으로 만든 연구실 내 모임 이름이었다. 여자들이 모여 ‘주디(입)’로 떠드는 모임이라는 뜻도 있고, 회식 자리에서는 술(酒)을 거침없이 마신다는 의미도 가진 그럴싸한 센스가 담긴 작명이었다.
‘여자 셋이 모이면 바가지가 깨진다’는 속담을 들먹이며, 예로부터 바가지가 깨지는 건 액운이 달아나는 걸 상징한다는 안성미 과장의 합리화에 도희가 덧붙일 말은 없었다.
소란스럽기는 하지만 업무 시간은 칼같이 지키는 데다, 명문대 공대 출신이라는 타이틀이 아깝지 않게 일에 있어서만큼은 엄청난 단합력을 보여 주는 그녀들이니 찰나의 왁자지껄함은 충분히 감내할 만했다.
어깨를 들썩이며 신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안성미 과장을 향해 여직원 세 명이 몸을 기울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수다가 길어질 모양이다.
“야들아, 내가 오늘 또 로비에서 현존하는 모세의 기적을 봤다 아이가.”
안 과장이 운을 떼자 여직원들이 득달같이 말꼬리를 물었다.
“유민환 사장님 오늘 R&D 센터로 출근하신 거 우리도 알거든요? 회사 로비를 런웨이 걷듯이 가로질러 갔다는 건 소문 다 났어요.”
“사장님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쫙 갈라서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요?”
여직원들은 별로 새로울 것도 없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 난 또 뭐 대단한 일이라고. 무슨 큰일이라도 났나 싶어 티 나지 않게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도희는 그들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다시 업무에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R&D 센터로 출근한 유민환 사장의 행보는 조금 더 많은 가십을 자아냈나 보다.
“유민환은 종교 집단 같은 거 안 맨드나? 모세의 기적을 일상적으로 만드는 사람이면 신흥 종교 한 개 맨들어서 은혜 좀 베풀고 살아도 될 낀데. 그런 교주 있으면 나는 바로 전 재산 싸 들고 그 세계로 간다.”
종교? 은혜를 베풀어? 여덟 살에 엄마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KH 전자에 입사하기 전까지 내내 미국에서 살았던 도희는, 한국에 돌아온 뒤로 안 과장의 말에 꽤나 자주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도 그랬다. 무엇을 모세의 기적에 비유했는지까지는 알겠는데 그다음은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시어머니가 내보고 그래 교회 댕기라 캐도 미꾸라지맨치로 피해 댕깄는데, 사장님이 종교를 만든다 카믄 내가 매주 일요일 종교 행사 참석은 물론이고 구역 예배까지 주관할 거라 카이.”
“아유, 우리 안 과장님 또 오바하신다.”
“오바는 무슨. 사실이지. 손도 좀 잡아 달라 하고, 쓰담쓰담해 달라고 머리도 디밀어 보고. 아이다, 내 감금시켜도 고마 그래 살란다. 우리 영감탱이랑 사는 것보다는 훨씬 행복할 끼야.”
“과장님, 사장님은 과장님보다 네 살이나 어려요. 아들 도현이를 생각해서라도 진정하셔요.”
한 여직원이 안 과장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자 나머지 여직원들도 동조하듯 깔깔거렸다. 덩달아 걸쭉한 웃음소리를 내던 안 과장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는 손짓을 하자 여직원들이 입을 다물고 안 과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또 19금 토크를 시작하려나?’
남자 직원들이 없다는 사실을 주의 깊게 재차 확인하는 안 과장을 보며 도희도 머릿속에 가득 찬 호기심에 이끌려 귀를 기울였다. 무관심하고 싶은데 항상 그게 잘 안 됐다.
“오늘 아침에 내가 제5실험실에서 점도계를 갖고 오던 길이었어. 문디 므시마들이 내가 그렇게 점도계 좀 갖다 달라 해도 무시해서, 성질 급한 내가 나섰잖아.”
“그런데요?”
“하, 근데 그게 좀 무겁나? 여기까지 오는데 팔이 떨어져 나갈 거 같아서 점도계를 바닥에 잠깐 내려놨지. 그런데 그 타이밍에 유민환이 내 앞에 딱 섰다는 거 아이가.”
“오? 진짜? 어머, 어머 어떻게 해!”
흔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판단이 섰는지 여직원들이 다시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모든 여직원들의 이상형인 KH 전자 사장 유민환.
KH 전자 집안의 장남이라는 신이 내린 배경이 없었다 해도 그는 어디서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 만한 사람이었다. 시원하게 쭉쭉 뻗은 팔다리와 흠잡을 데 없는 외모. 게다가 서른여섯 살인 현재까지 싱글의 삶을 고수하는 그의 라이프 스타일은 모든 여직원들의 신데렐라 스토리 로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내가 조신하게 인사를 하니까 사장님이 무겁겠다 하대? 근데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장님 옆에 서 있던 남자 하나가 그거를 번쩍 들어다가 즈짝까지 갖다줬다는 거 아이겠나.”
“네에? 사장님이 아니고?”
실망하는 기색을 드러내는 여직원들에게 안 과장이 반색했다.
“야, 그 남자가 평범했으면 내가 왜 아침부터 입을 털겠노. 느그들 화장하느라 20분 늦게 출근할 때, 세상에서 제일 훈훈한 남자가 이 방에 다녀갔다니까.”
“엥? 사장님 말고 또 다른 훈남? 그 사람이 누군데요? 머리 벗겨진 사장님 비서는 아닐 거고.”
“그걸 말이라고! 으디 그 훈남을 대머리 차 비서랑 비교하노!”
장난스럽게 윽박지르던 안 과장이 뭔가를 떠올리듯 몽롱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 남자가 점도계를 딱 드는데 손목에 힘줄이, 힘줄이. 아, 어지르브라. 나는 말로 다 못하긋다. 내가 살면서 본 남자 힘줄 중에 가장 까리했다는 데 내 남편을 건다.”
“에이, 남편을 거니까 신뢰가 팍 떨어지는데요?”
감상에 젖어 자신의 손목을 쓰다듬고 있는 안 과장을 두고 여직원들이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새로 스카우트되어 온 직원일 것이다, 아니면 다른 회사의 주요 파트너일 것이다, 등등 제법 신빙성 있는 가정들이 나왔다.
도희 또한 궁금증이 생겼다. 사장과 나란히 걸을 정도의 남자라. 특별하게 높은 사람이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바 없었다. 신경 써서 인사해야 할 사람이 R&D 센터에 방문했다면 진작 나에게 전갈이 왔을 텐데.
벚꽃, 대전 일정에 대한 이야기만 있었을 뿐, 어떤 언질도 없었던 남자의 메시지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안 과장을 도와준 사람은 사장과 비공식적으로 얽힌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선뜻 안 과장의 점도계를 들어 준 걸 보면 아주 털털한 성격인가 보네. 사장의 친구쯤 되려나?’
실룩 눈썹을 들었다 내린 도희는 무심하게 모니터 쪽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귀는 자꾸 안 과장 쪽을 향했다.
“오늘 나의 해피 바이러스는 그 힘줄이 될 것이야. 아이고, 상상만으로도 침이 흘러 미치겠다.”
“와, 우리 안 과장님 진짜 침 흘리시겠다.”
안 과장은 자신의 입 언저리에 손을 가져가며 침 닦는 시늉을 하고는 음탕한 미소를 지으며 슬슬 음란한 토크에 시동을 걸었다.
“느그들 그거 아나? 일반적으로 손목의 힘줄이 발달한 남자는 다른 곳에도 힘줄이 불끈 서 있을 가능성이 높은데…….”
침을 꿀꺽 삼킨 안 과장이 야릇하게 눈을 반짝이자 여직원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자지러졌다. 연구실이 들썩거릴 정도의 요란함이었다.
“어머, 안 과장님 또 시작하신다. 아침부터 맨정신에 왜 그래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직원들은 안 과장의 말을 즐기는 듯했다.
도희만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얼굴로 안 과장의 의중을 파악하려 애썼다. 다른 곳? 다른 곳이 어디기에 다들 저토록 격한 반응을 보이는 거지?
“이마! 이마라고! 느그들 이마에 힘줄 빡 나온 남자 안 봤나? 어디 아침부터 사람을 음탕한 여편네로 만드노. 어서 일이나 해라!”
“캬캬캬! 안 과장님은.”
“내 이 회사 정년퇴직할 때까지 다닐 거거든? 사람 성희롱범으로 몰지 마라. 나는 정말 이마에 나온 힘줄을 이야기한 거데이.”
깔깔깔 한바탕 웃은 여직원들이 자리로 돌아갔다. 아침 수다가 즐거웠는지 연구실 곳곳에 생동감이 퍼졌다.
흩어지는 직원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도희는 방금 안 과장에게 배운 사실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아, 손목의 힘줄이 발달한 남자는 이마에도 힘줄이 튀어나오는구나.’
사람마다 뼈의 굵기가 다르듯, 힘줄의 굵기도 다른 거겠지. 괜스레 자신의 이마를 한 번 문질러 본 도희는 업무에 박차를 가했다. 유민환 사장과 함께 이곳에 온 남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생각하느라 허비한 시간을 보상해 보기라도 하려는 듯.
KH 전자 CE(Consumer Electronics) R&D 센터 제3연구실의 아침은 늘 시끌벅적했다. KH 전자 내에서도 비밀 유지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한 곳이라 사원증 스캔, 홍채 인식, 지문 인식까지 해야 출근할 수 있는 철벽같은 보안 시스템이 ‘삐비빅’ 하는 기계음을 수시로 만들어 냈다.
그걸로도 부족해 순차적으로 켜지는 실험 기기들의 크고 작은 진동 소리가 밤새 고요해진 연구실의 공기를 메웠다. 책상 위 컴퓨터를 켜고, 실험복으로 갈아입는 직원들의 부산스러운 움직임 또한 사부작사부작 소리를 내며 연구실의 활기를 더했다.
흔한 아침의 일상적인 소란스러움 속에서 도희는 미지근한 물 한 모금을 머금으며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했다. 한 시간 뒤 대전으로 출발하기 전에 체크해야만 하는 일들이 몇 가지 있었다. 급한 일은 아니었지만, 미룬다면 누군가의 업무에는 차질이 생길 것이다.
‘한 시간이면 충분하겠지?’
회사 계정으로 들어가 이메일을 확인하는 도희의 눈과 손이 바빠질 때였다.
[도 이사, 출근 잘 했어요? 아직 아침은 쌀랑하네요. 벚꽃 핀 건 봤어요? 이번 주가 절정이라더니 진짜 그렇더라고요.]
모니터 하단에서 반짝이는 사내 채팅 창을 클릭하자 익숙한 이름 하나가 도희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도희가 답을 하기 전 다시 메시지 창이 반짝였다.
[오늘 카이스트 이준우 교수와 미팅 건으로 대전 간다고 들었는데, 적당히 잘 봐 주고 와요. 그 사람은 학자라기보다는 장사꾼에 가까우니까 휘둘리지 말고요. 물론 도 이사가 알아서 잘하겠지만.]
평소보다 조금 긴 내용을 읽으며 도희는 다시 물 한 모금을 삼켰다.
유일하게 자신을 ‘도 이사’라 부르는 남자.
모두가 도희를 ‘주 이사’라 칭했지만 유독 이 남자만은 ‘도 이사’라는 호칭을 고수했다. ‘단둘이 있을 때만’이라는 한정된 조건이 붙었지만, 그래서 자신의 특별한 신뢰가 드러나는 것 같지 않냐는 남자의 질문에 도희는 침묵으로 답해 왔다.
도희가 KH 전자로 이직한 이후, 남자는 해외 출장과 같은 별다른 일이 없다면 항상 도희의 아침 시간 중 몇 초를 규칙적으로 가지고 갔다.
[도 이사, 잘 잤나요?]
[오늘은 날씨가 참 좋네요.]
[어제 야근했을 텐데, 피곤하지 않나요?]
내용은 특별할 게 없었지만, 업무적인 것들을 핑계로 접근하는 남자의 숨은 의도를 도희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부담스러웠다.
그런데도 도희는 대답을 미룬 적이 없었다. 남자는 단 한 번도 자신의 마음을 단도직입적으로 보여 준 적이 없는 지능적인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에게 혹시 나를 좋아하냐며 설레발을 칠 수 없었다. 그렇게 남자와 대화를 이어 온 게 벌써 몇 달째였다.
“야들아, 야들아, 이짝으로 좀 모이 봐라.”
답문을 적으려던 도희의 손을 멈추게 한 건 안성미 과장의 쨍쨍한 목소리였다. 도희는 모니터 오른쪽 아래에 떠 있는 현재 시간을 확인했다. 8시 30분. 본격적으로 업무가 시작되는 9시까지는 아직 30분이 남아 있었다. 남자 직원들이 죄다 담배를 피우러 간 틈을 이용해 연구실의 ‘주디클럽’ 멤버들이 한바탕 입을 풀고 하루를 시작할 모양이었다.
‘그렇지. 하루라도 아침 수다를 거르면 누룽지사탕을 문 것 같은 텁텁한 단내가 종일 입 안에서 진동한다는데 어쩌겠어.’
이젠 시끄럽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걸 보니 이 생활에도 익숙해져 가나 보다 싶어 가벼운 웃음이 나왔다.
[업무 대충 마무리해 놓고 대전에 다녀오겠습니다. 결과는 나중에 보고드리겠습니다.]
도희는 남자에게 답문을 적은 뒤 엔터 키를 눌렀다. 그사이 연구실 여직원 세 명이 안성미 과장을 주축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주디클럽. 부산 출신 40세 유부녀 안성미 과장이 자발적으로 만든 연구실 내 모임 이름이었다. 여자들이 모여 ‘주디(입)’로 떠드는 모임이라는 뜻도 있고, 회식 자리에서는 술(酒)을 거침없이 마신다는 의미도 가진 그럴싸한 센스가 담긴 작명이었다.
‘여자 셋이 모이면 바가지가 깨진다’는 속담을 들먹이며, 예로부터 바가지가 깨지는 건 액운이 달아나는 걸 상징한다는 안성미 과장의 합리화에 도희가 덧붙일 말은 없었다.
소란스럽기는 하지만 업무 시간은 칼같이 지키는 데다, 명문대 공대 출신이라는 타이틀이 아깝지 않게 일에 있어서만큼은 엄청난 단합력을 보여 주는 그녀들이니 찰나의 왁자지껄함은 충분히 감내할 만했다.
어깨를 들썩이며 신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안성미 과장을 향해 여직원 세 명이 몸을 기울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수다가 길어질 모양이다.
“야들아, 내가 오늘 또 로비에서 현존하는 모세의 기적을 봤다 아이가.”
안 과장이 운을 떼자 여직원들이 득달같이 말꼬리를 물었다.
“유민환 사장님 오늘 R&D 센터로 출근하신 거 우리도 알거든요? 회사 로비를 런웨이 걷듯이 가로질러 갔다는 건 소문 다 났어요.”
“사장님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쫙 갈라서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요?”
여직원들은 별로 새로울 것도 없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 난 또 뭐 대단한 일이라고. 무슨 큰일이라도 났나 싶어 티 나지 않게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도희는 그들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다시 업무에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R&D 센터로 출근한 유민환 사장의 행보는 조금 더 많은 가십을 자아냈나 보다.
“유민환은 종교 집단 같은 거 안 맨드나? 모세의 기적을 일상적으로 만드는 사람이면 신흥 종교 한 개 맨들어서 은혜 좀 베풀고 살아도 될 낀데. 그런 교주 있으면 나는 바로 전 재산 싸 들고 그 세계로 간다.”
종교? 은혜를 베풀어? 여덟 살에 엄마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KH 전자에 입사하기 전까지 내내 미국에서 살았던 도희는, 한국에 돌아온 뒤로 안 과장의 말에 꽤나 자주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도 그랬다. 무엇을 모세의 기적에 비유했는지까지는 알겠는데 그다음은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시어머니가 내보고 그래 교회 댕기라 캐도 미꾸라지맨치로 피해 댕깄는데, 사장님이 종교를 만든다 카믄 내가 매주 일요일 종교 행사 참석은 물론이고 구역 예배까지 주관할 거라 카이.”
“아유, 우리 안 과장님 또 오바하신다.”
“오바는 무슨. 사실이지. 손도 좀 잡아 달라 하고, 쓰담쓰담해 달라고 머리도 디밀어 보고. 아이다, 내 감금시켜도 고마 그래 살란다. 우리 영감탱이랑 사는 것보다는 훨씬 행복할 끼야.”
“과장님, 사장님은 과장님보다 네 살이나 어려요. 아들 도현이를 생각해서라도 진정하셔요.”
한 여직원이 안 과장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자 나머지 여직원들도 동조하듯 깔깔거렸다. 덩달아 걸쭉한 웃음소리를 내던 안 과장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는 손짓을 하자 여직원들이 입을 다물고 안 과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또 19금 토크를 시작하려나?’
남자 직원들이 없다는 사실을 주의 깊게 재차 확인하는 안 과장을 보며 도희도 머릿속에 가득 찬 호기심에 이끌려 귀를 기울였다. 무관심하고 싶은데 항상 그게 잘 안 됐다.
“오늘 아침에 내가 제5실험실에서 점도계를 갖고 오던 길이었어. 문디 므시마들이 내가 그렇게 점도계 좀 갖다 달라 해도 무시해서, 성질 급한 내가 나섰잖아.”
“그런데요?”
“하, 근데 그게 좀 무겁나? 여기까지 오는데 팔이 떨어져 나갈 거 같아서 점도계를 바닥에 잠깐 내려놨지. 그런데 그 타이밍에 유민환이 내 앞에 딱 섰다는 거 아이가.”
“오? 진짜? 어머, 어머 어떻게 해!”
흔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판단이 섰는지 여직원들이 다시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모든 여직원들의 이상형인 KH 전자 사장 유민환.
KH 전자 집안의 장남이라는 신이 내린 배경이 없었다 해도 그는 어디서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 만한 사람이었다. 시원하게 쭉쭉 뻗은 팔다리와 흠잡을 데 없는 외모. 게다가 서른여섯 살인 현재까지 싱글의 삶을 고수하는 그의 라이프 스타일은 모든 여직원들의 신데렐라 스토리 로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내가 조신하게 인사를 하니까 사장님이 무겁겠다 하대? 근데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장님 옆에 서 있던 남자 하나가 그거를 번쩍 들어다가 즈짝까지 갖다줬다는 거 아이겠나.”
“네에? 사장님이 아니고?”
실망하는 기색을 드러내는 여직원들에게 안 과장이 반색했다.
“야, 그 남자가 평범했으면 내가 왜 아침부터 입을 털겠노. 느그들 화장하느라 20분 늦게 출근할 때, 세상에서 제일 훈훈한 남자가 이 방에 다녀갔다니까.”
“엥? 사장님 말고 또 다른 훈남? 그 사람이 누군데요? 머리 벗겨진 사장님 비서는 아닐 거고.”
“그걸 말이라고! 으디 그 훈남을 대머리 차 비서랑 비교하노!”
장난스럽게 윽박지르던 안 과장이 뭔가를 떠올리듯 몽롱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 남자가 점도계를 딱 드는데 손목에 힘줄이, 힘줄이. 아, 어지르브라. 나는 말로 다 못하긋다. 내가 살면서 본 남자 힘줄 중에 가장 까리했다는 데 내 남편을 건다.”
“에이, 남편을 거니까 신뢰가 팍 떨어지는데요?”
감상에 젖어 자신의 손목을 쓰다듬고 있는 안 과장을 두고 여직원들이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새로 스카우트되어 온 직원일 것이다, 아니면 다른 회사의 주요 파트너일 것이다, 등등 제법 신빙성 있는 가정들이 나왔다.
도희 또한 궁금증이 생겼다. 사장과 나란히 걸을 정도의 남자라. 특별하게 높은 사람이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바 없었다. 신경 써서 인사해야 할 사람이 R&D 센터에 방문했다면 진작 나에게 전갈이 왔을 텐데.
벚꽃, 대전 일정에 대한 이야기만 있었을 뿐, 어떤 언질도 없었던 남자의 메시지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안 과장을 도와준 사람은 사장과 비공식적으로 얽힌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선뜻 안 과장의 점도계를 들어 준 걸 보면 아주 털털한 성격인가 보네. 사장의 친구쯤 되려나?’
실룩 눈썹을 들었다 내린 도희는 무심하게 모니터 쪽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귀는 자꾸 안 과장 쪽을 향했다.
“오늘 나의 해피 바이러스는 그 힘줄이 될 것이야. 아이고, 상상만으로도 침이 흘러 미치겠다.”
“와, 우리 안 과장님 진짜 침 흘리시겠다.”
안 과장은 자신의 입 언저리에 손을 가져가며 침 닦는 시늉을 하고는 음탕한 미소를 지으며 슬슬 음란한 토크에 시동을 걸었다.
“느그들 그거 아나? 일반적으로 손목의 힘줄이 발달한 남자는 다른 곳에도 힘줄이 불끈 서 있을 가능성이 높은데…….”
침을 꿀꺽 삼킨 안 과장이 야릇하게 눈을 반짝이자 여직원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자지러졌다. 연구실이 들썩거릴 정도의 요란함이었다.
“어머, 안 과장님 또 시작하신다. 아침부터 맨정신에 왜 그래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직원들은 안 과장의 말을 즐기는 듯했다.
도희만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얼굴로 안 과장의 의중을 파악하려 애썼다. 다른 곳? 다른 곳이 어디기에 다들 저토록 격한 반응을 보이는 거지?
“이마! 이마라고! 느그들 이마에 힘줄 빡 나온 남자 안 봤나? 어디 아침부터 사람을 음탕한 여편네로 만드노. 어서 일이나 해라!”
“캬캬캬! 안 과장님은.”
“내 이 회사 정년퇴직할 때까지 다닐 거거든? 사람 성희롱범으로 몰지 마라. 나는 정말 이마에 나온 힘줄을 이야기한 거데이.”
깔깔깔 한바탕 웃은 여직원들이 자리로 돌아갔다. 아침 수다가 즐거웠는지 연구실 곳곳에 생동감이 퍼졌다.
흩어지는 직원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도희는 방금 안 과장에게 배운 사실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아, 손목의 힘줄이 발달한 남자는 이마에도 힘줄이 튀어나오는구나.’
사람마다 뼈의 굵기가 다르듯, 힘줄의 굵기도 다른 거겠지. 괜스레 자신의 이마를 한 번 문질러 본 도희는 업무에 박차를 가했다. 유민환 사장과 함께 이곳에 온 남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생각하느라 허비한 시간을 보상해 보기라도 하려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