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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머, 사장님!”

연구실이 들썩일 정도의 술렁거림에 도희가 고개를 들었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반갑게 인사하는 직원들에게 눈인사를 하며 유민환 사장이 제3연구실에 들어서고 있었다. R&D 센터로 출근하더라도 연구실에 직접 방문하는 일은 드물던 민환이었다. 게다가 어떤 예고도 없이 연구실을 찾아온 일은 손에 꼽힐 정도였다.

직원들은 자동적으로 기립했고, 도희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상사태라도 생겼나 싶어 몸이 꼿꼿해졌다.

하지만 긴장감이 놀라움으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

도희는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하고 눈을 빠르게 껌뻑거렸다.

“…….”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민환의 뒤를 따르는 한 남자. 그 남자는 도희가 분명히 아는 남자였으니까.

‘민현우?’

무릎 아래가 사라진 것처럼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버티며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도 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 남자는 그녀가 아는 사람이 분명했다.

책상을 손으로 짚으며 넘어질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도희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써야 했다. 이유 모를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사이 두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의 책상 앞에 섰다.

“주 이사. 갑자기 와서 놀랐죠?”

“아, 네.”

“주 이사 바쁠까 봐 우리가 내려왔습니다. 시간 괜찮으면 탕비실로 가죠.”

도희의 멍한 시선이 두 남자를 넘어 연구실 왼쪽 구석에 있는 탕비실로 향했다. 도희의 시선과 탕비실 사이에는 설렘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반짝이는 여직원들이 있었다.

‘설마 아침에 안 과장을 도와준 남자가 민현우 너였어?’

민환의 말에 대꾸하는 것도 잊고, 도희는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서 있는 현우를 노려보았다. 허탈한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아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현우는 도희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알 수 없는 미소를 입가에 달고 있을 뿐이었다.

“주 이사, 어디 불편합니까?”

민환이 걱정스레 건넨 말이 도희의 정신을 일깨웠다. 머리카락을 양쪽 귀 뒤로 넘긴 도희는 공허한 한숨을 한 번 뱉으며 탕비실을 향해 앞서 걸었다. 자신과 두 남자에게 꽂힌 직원들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그보다 더 따끔거리는 자신의 마음을 누르기가 생각보다 힘들었다. 올곧게 걷는 것. 그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그러게, 따로 방을 만들어 준다는데 왜 매번 탕비실에서 도 이사를 보게 합니까?”

도 이사. 도희는 유민환과 민현우가 매우 가까운 사이라는 걸 곧바로 알아챘다. 그러지 않고서야 민환의 입에서 도 이사라는 호칭이 편하게 나올 리 없었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도 이사와 주 이사를 넘나들던 민환이었다.

“어차피 함께 실험하는 곳인데요. 문 닫고 혼자 처리해야 하는 일보다 즉각적으로 피드백 해야만 하는 일이 더 많은 거 아시지 않나요?”

“세계적인 브레인을 데려다가 개인 사무실도 안 준 걸 알면 다들 욕해요.”

그 와중에 도희가 허탈하게 피식 웃었다. 감히 누가 유민환을 욕할 수 있을까 싶어서.

“도 이사가 원한 거라지만 사람들이 그걸 알 리가 있겠어요? 말만 해요. 연구실을 다시 지어서라도 개인 사무실 만들어 줄 테니까.”

유유히 팔짱을 끼는 민환을 보며 도희는 그가 참 한결같다는 생각을 했다.

도희가 아는 유민환의 얼굴은 단 한 가지였다. 자신감에 가득 찬 승자의 얼굴. 지금도 민환은 다르지 않았다. 느긋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지만 그 안에 날카로움을 숨긴 채 도희에 대한 신뢰를 드러냈다.

‘혹시 주도희 씨 아닙니까?’

그건 도희가 민환을 처음 만났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전 직장인 로렌슨과의 계약 기간이 끝나 갈 무렵, 도희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미국 휴스턴까지 날아온 민환은 은근하면서도 잔잔한 미소를 띠며 다가왔었다.

‘반갑습니다.’

민환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지만, 어찌 된 까닭인지 도희는 민환의 타고난 기운이 자신의 것보다 훨씬 더 우위에 있음을 직감했다. 쉽게 말하자면 기 싸움에서 밀린 거였다.

그날을 시작으로 민환은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도희를 대했다. 평소라면 아주 당연하게 느껴져 별다른 감흥조차 없었을 민환의 여유로움. 그런데 어쩐지 오늘은 민환의 담담함이 불편했다. 어서 유민환과 민현우의 연결 고리가 뭔지 알고 싶었다.

“아, 인사해요. 이 녀석, 하하, 아니지. 이 친구 처음 봤죠? 민현우입니다. 언젠가 내 자리에 앉을 녀석이에요.”

도희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물음보다 현우의 손이 더 빨랐다.

“반갑습니다. 주도희 이사님을 직접 볼 수 있게 되어 영광인데요? 민현우입니다.”

뻔뻔한 건지,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는 건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손을 내미는 민현우. 민환이 방금 전 말했던 ‘언젠가 내 자리에 앉을 녀석’이라는 말의 의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도희에게 현우가 손을 내밀었다.

도희는 마지못해 현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강한 힘을 주며 그녀의 손을 쥐고 있는 현우의 손아귀에서 재빨리 벗어났다. 그 순간 현우의 얼굴에서 아쉬움이 보였다면 그건 착각일까? 그래서 기분이 상했다. 아쉬움을 느낄 거였다면, 그럴 일을 만들지 말았어야지 이제 와서 왜.

“아시겠지만 저는 연구 말고는 회사 사정에 거의 무지해서요. 방금 하신 말씀에 대해서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직급이 이사임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임원 회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연구실 업무에만 매달려 왔다. 사내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오로지 연구만 하게 해 달라는 게 도희가 KH 전자로 이직하며 제시한 굵직한 조건 중 하나였고, 민환은 그런 요구 사항을 들어주기 위해 많은 배려를 했다.

‘비서도 기사도 필요 없어요. 도움이 필요할 땐 언제든 요청하죠.’

‘그러세요.’

도희의 부탁도 최대한 수용되었다. 특혜라거나 특이하다거나 하는 뒷말도 분명히 있었겠지만 도희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업무 환경이었다. 하지만 몇 달간의 평온한 삶이 이렇게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줄은 몰랐다.

“하하, 민현우라는 이름을 들으면 바로 알아챌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도 이사는 연구 말고 다른 곳에는 신경 쓸 여유가 없나 봅니다.”

“그건 사장님께서 더 잘 아실 테고요.”

“현우가 미국에 콕 박혀서 얼굴을 전혀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하긴 하죠. 임원들 중에서도 현우 얼굴을 아는 사람이 손에 꼽히니까요.”

민환은 지그시 입매를 올리며 민현우에 대한 설명을 했다.

직급은 전무. 뉴욕에서 KH 전자 미국 지사를 총괄하고 있고, 특히 북미와 남미에서 IT 사업 분야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직접 발로 뛰어 가며 자신의 젊음을 바친 남자.

민환이 부회장 자리에 앉게 되면 차기 KH 전자 CE 파트 사장 자리에 앉게 될 사람으로 모두 민현우를 주목하고 있었다. 도전하는 것마다 두드러진 성과를 냈다는 표면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KH 전자 회장의 외손자인 민현우가 엄청난 회사 지분을 갖고 있다는 것 또한 힘을 발휘했다.

“허.”

기가 차다는 듯 도희의 입에서 쇳소리가 나왔다. 머리를 세게 몇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엄청난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며 도희의 머리를 휘저었다.

그러니까 민현우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부자라는 말조차도 초라하게 느껴질 만큼 소위 말하는 재벌가의 핏줄, 그게 바로 민현우였다.

‘그거 한 입만 줘 봐. 엄청 맛있어 보이는데.’

‘너 머무는 곳에 나 재워 줄 수 있는 남는 방 없어?’

쇼를 해도 적당히 할 것이지. 그래, 그건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 치자. 스스로를 낮추면서까지 자신과 가까워지려 했던 스물일곱 살의 파릇파릇했던 현우의 마음은 귀엽다 치부하고 넘기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뉴욕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부분에서만큼은 도저히 관대해질 수 없었다. 네가 미국에, 그것도 뉴욕에 있었다고?

“죄송합니다만, 민현우 전무님. 뉴욕에서 근무하신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음…… 그게.”

민환이 자신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는 동안 도희의 눈치를 살폈던 현우는 직접적으로 날아온 질문에 쉽게 대답을 꺼내 놓지 못했다.

“꽤 됐죠? 현우가 스물여덟 살 때부터였으니까. 현우는 처음부터 뉴욕에서 시작했어요.”

민환의 호탕한 대답이 탕비실 공중에 허무하게 흩어졌다. 무거운 침묵의 기운이 빛의 속도로 세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고, 민환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도희와 현우의 낯빛을 살폈다.

서른한 살 주도희. 서른네 살 민현우. 두 사람 세 살 차이 나는 게 맞지? 설마 이 두 사람, 아는 사이인가? 연구실로 들어서는 현우를 보고 넋 나간 사람의 얼굴을 하던 도희가 그렇지 않아도 신경이 쓰이던 차였다.

“그러니까 민 전무님은 스물여덟 살 때부터 뉴욕에 계셨던 거네요.”

“네. 그랬습니다.”

“그랬던 거였어요.”

주절거리듯 혼잣말을 하는 도희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하는 현우를 살피던 민환의 눈매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런 민환을 모른 척한 채, 현우는 자신의 감정을 누르기 위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연습했다. 수도 없이 도희를 만날 날을 그려 봤다. 지은 죄가 컸지만 최대한 담담하고 멋있게 웃으며 도희를 마주하고 싶었다. 도희에게 뺨을 한 대 맞는다고 해도, 속 시원하게 숨을 들이켜고 도희를 향해 미소 지어 주려 했다. 그런데 쉽지가 않았다.

“하시는 일이 많은 분이신가 봐요. 물론 바쁘신 게 당연하겠죠.”

도희가 비꼬는 소리를 했다. 그 말의 의도를 파악한 현우는 티 나지 않게 움찔했지만 민환은 일상적인 대답을 했다.

“말해 뭐 합니까? 나보다 더 바쁜 척을 해서 통화 한 번 하는 것도 애원해야 한다니까요.”

두 사람을 지켜보던 현우는 앞에 놓인 물로 입 안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탔다.

도희와 단둘이 나눠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변명할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니라 오로지 도희에게 집중할 수 있는 기회가 간절했다.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었으니까.

파들파들 떨리는 도희의 손끝을 보니 당장 저 손을 꼭 쥐고 싶어졌다. 형식적인 악수를 위해 의미 없이 스쳐 간 손. 오늘 저 손을 다시 잡을 수 있을까? 시원하게 내쉴 수 없는 한숨이 나왔다. 매사에 자신만만한 그였지만 지금은 갑갑하기만 했다. 자신을 잔뜩 경계하는 도희를 지켜만 봐야 하는 지금도, 또 자신과 도희를 살피는 날이 선 민환의 눈빛도.

“그런데 직접 찾아오신 용무가 뭔지 여쭤도 될까요? 저는 곧 대전으로 가 봐야 해서요.”

“바로 그거 때문에 현우와 같이 내려온 겁니다. 도 이사가 불편하겠지만 현우도 이준우 교수를 만나고 싶어 해서요.”

“네?”

한 톤 높아진 도희의 목소리가 이 상황이 얼마나 뜬금없는지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